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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1990), ふしぎの海のナディア / Nadia, The Secret Blue Water


ⓒ NHK, SOGO VISION, TOHO


<정보>

◈ 원안: 쥴 베른의 "해저 2만리"
◈ 총감독: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
◈ 감독: 히구치 신지(樋口真嗣)
◈ 각본: 오오카와 히사오(大川久男), 유메노 카오루(梅野かおる)
◈ 스토리보드/연출: 마스오 쇼이치(増尾昭一), 마사유키(摩砂雪), 요네타니 요시토모(米たにヨシトモ), 모리 타케시(もりたけし), 쿠부오카 토시유키(窪岡俊之), 마에다 마히로(前田真宏) 외
◈ 설정: 마에다 마히로
◈ 캐릭터 디자인: 사다모토 요시유키(貞本義行)
◈ 작화감독: 스즈키 슌지(鈴木俊二), 쿠기미야 히로시(釘宮洋), 카와나 쿠미코(川名久美子) 외
◈ 메카닉 작화감독: 마스오 쇼이치
◈ 미술감독: 사사키 히로시(佐々木洋), 키쿠치 마사노리(菊地正典), 오구라 히로마사(小倉宏昌)
◈ 음악/노래: 사기쓰 시로(鷺巣詩郎) / 모리카와 미호(森川美穂)
◈ 제작: 쿠보타 히로시(久保田弘), 마루야마 켄이치(丸山健一), 요시다 켄이치로(吉田圭一郎)
◈ 제작: 토호, KORAD / 그룹타크, GAINAX, 세영동화 / NHK
◈ 저작권: ⓒ NHK, SOGO VISION, TOHO
◈ 일자: 1990.04.13 ~ 1991.04.12
◈ 장르: SF,모험,액션
◈ 구분/등급: TVA(39화) / 중학생 이상 관람가(PG-13)


<줄거리>

발명을 좋아하는 소년 쟝은 만국박람회에서 열리는 비행 콘테스트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오게 된다. 파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녀 나디아, 알 수 없는 호기심에 나디아를 뒤따르던 쟝은 그녀와 그녀의 신비스러운 목걸이를 뒤쫓는 괴한들을 발견하게 되고, 엉겁결에 자신이 만든 비행기에 나디아를 태운체 도주를 시작하게 된다. 바다에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표류하던 둘은 미국 군함에 의해 구조되지만, 군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다 괴물의 습격을 받아 침몰하게 되고 쟝과 나디아는 바다 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바다 괴물의 정체는 다름 아닌 네모 선장의 신비한 잠수함 노틸러스 호 였는데... 노틸러스 호에 승선하게 된 나디아와 쟝의 앞에는 앞으로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나디아를 뒤쫓던 정체불명의 일당들의 목적과 그녀가 가진 목걸이의 비밀은 무엇일까.



<소개>

<만화영화 연대기: 천공의 성 라퓨타(1986)>에서 잠시 언급했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소년과 소녀가 수수께끼의 펜던트를 차지하려는 음모에 휘말려 잠수함을 타고 세계를 여행한다'라는 컨셉의 기획안을 TV 시리즈 아니메로 NHK 방송에 제출했던 적이 있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미래소년 코난(1978)'이 NHK의 전파를 타고 방송 된 이후와 '천공의 성 라퓨타(1986)'가 제작이 결정되기 전, 그러니까 코난의 종영된 78년 10월 31일 이후부터 85년(라퓨타가 86년 8월에 극장에서 개봉되었음을 감안하면 라퓨타의 기획이 시작된 시점은 '바람계곡 나우시카(1984)' 이후의 85년 쯤으로 볼 수 있다.) 사이에 이 기획안이 제출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정황상 그 시점은 85년 보다는 78년에 더 가깝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코난이 종영된 시점이 미야자키가 NHK 측에 TV 시리즈 기획안을 내기가 좀 더 수월했던 때가 아닐까 추정되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미야자키의 기획안은 NHK에게 거절되었고, 이것을 미야자키가 수년이 흐른 뒤 라퓨타의 스토리로 재활용하게 됨은 이전에 이야기 했던 바다. 하지만, 원 기획안은 NHK의 어딘가에 방치된체 십수년의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 만화영화 연대기: 천공의 성 라퓨타 (바로가기)

NHK가 잊혀졌던 이 기획안을 어떤 이유로 다시 꺼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추론해볼 수 있는 것은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가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조금씩 그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봐야할 듯 싶다. 그러나, 이미 지브리로 이적해버린 하야오를 다시 불러들이기도 애매했을 터. 결국 NHK는 토호 그룹과 함께 이 기획을 실행에 옮기게 되고 애니메이션 제작은 그룹 타크에게 의뢰하게 된다. 바로 이 작품이 현재까지도 많은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안노 히데아키의 대표작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1990)'인 것이다.

다만, 실제 애니메이션 제작은 아시다시피 그룹 타크가 아닌 가이낙스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충격님이 2009년에 작성한 포스팅을 참고하길 바란다. 핵심 스탭에 그룹 타크의 인원이 전무한 것으로 보아 타크가 토호에게 제작원청을 받은(혹은 따낸) 후 이를 가이낙스에게 하청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공동하청에 의한 제작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타크의 스탭이 나디아의 주요 애니메이션 스탭목록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이런 형태로 프로젝트를 따내고 실제 업무를 전량 외주업체에 용역을 주는 형태는 비단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산업계 전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결국 가장 하위에 위치한 하청업체에게 돌아가는 보수는 그리 많지 않게 되는 것 또한 자명한 일이기도 하다.

☞ 신비한 나디아 특집 - 횡행하는 루머와 실상 (보러가기

또한, 하청업체로는 한국의 세영동화가 참여하게 되는데, 제작 초기만 해도 하청업체로서 주로 동화 파트를 전담하던 세영동화는 이후 벌어진 나디아의 제작파행(?)으로 인해 자신들의 역량 이상의 업무를 떠안으며 후일 나디아의 오점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섬 에피소드'의 최대 원인제공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위에 링크를 건 충격님의 포스팅에도 언급이 되어 있으나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당시 가이낙스는 극장판 아니메와 OVA 시리즈 하나만을 연출한 풋내기 제작회사로 총 40여화에 달하는 장편 TV 시리즈를 연출한 경험이 전무한 제작사였다.

이러한 이유로 초창기 리소스를 낭비하며 높은 퀄리티로 만화영화를 그려가던 가이낙스는 이미 초중반 에피소드 제작 이후 시간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감독인 안노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중간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통칭 무인도 에피소드를 히구치 신지와 세영동화에게 넘기고 스스로는 핵심 스텝을 이끌고 후반부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결국, 무리한 스케줄과 부족한 인원 및 자원을 떠안은 히구치 신지와 세영동화는 섬 에피소드를 기대 이하의 퀄리티로 만들어내게 되고, 이는 나디아의 가장 큰 오점으로 팬들로부터 원성을 듣고 만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일본 위키에는 안노를 총감독, 히구치 신지를 감독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디아와 세영동화에 얽힌 또다른 제작비화도 있다. 니코니코 동화 홈페이지의 오카다 토시오 브로마가 채널(岡田斗司夫ブロマガチャンネル)에 실린 나디아 관련 제작비화와 해당 동영상의 일부를 번역한 코로로 님의 포스트를 링크한다. (2013.10.23 추가)

☞ 岡田斗司夫ゼミ「誰も知らないガイナックス」(보러가기)
☞ 오카다 토시오가 본 나디아 제작비화 (보러가기)

이렇게 제작일정 상 난관에 봉착했던 나디아를 살린 것은 NHK도, 가이낙스도 아닌 이라크였다. 90년 당시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 덕분에 NHK는 한동안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특집방송으로 이라크-쿠웨이트 전을 다루게 된다. 결국 39화, 약 3쿨의 길이를 갖고 있는 나디아가 방영에 1년의 시간이 걸린 것은 이러한 원인 때문이었는데, 그 덕분에 제작시간을 벌게 된 가이낙스는 가까스로 자신들의 첫 시리즈를 비교적 성공리에 마무리 짖게 된다.


공영방송으로서 보수적 색체로 정평이 난 NHK와, (젊은 오타쿠들의 집합체로서) 보수적인 노선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가이낙스의 만남은 애초부터 많은 트러블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보인다. 특히 당시 30대의 젊은 나이로 반골정신이 극에 달했던(결혼하고 나이가 먹은 요즘은 무척 얌전해졌지만) 안노는 주인공 나디아를 검은 피부의 인도계 소녀로 그리도록 지시하는데, 이는 일본인 또는 백인 위주의 캐릭터들이 으례 주인공으로 등장하던 당시 아니메의 관례를 과감하게 비튼 일종의 안노식 도발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가이낙스만의 오타쿠적 감성이 나디아 곳곳에 심어져 은근한 노출씬과 목욕씬으로 NHK 관계자들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가이낙스의 반골정신과 NHK의 보수적 색체의 첨예한 대립, 거기에 어설픈 스케줄 관리로 인한 제작난항과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된 퀄리티의 저하에도 불구하고 나디아가 종영없이 끝까지 방영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나디아의 이야기가 시청자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아시다시피 해저 2만리를 기본적인 원안으로 삼고 있는 나디아는, 천공의 성 라퓨타와 같은 소년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장쾌한 어드벤쳐물이었지만, 여기에 가이낙스 특유의 오타쿠적 감성과 다채로운 패러디가 곳곳에 숨어들어 마니아들에게도 여러가지 이야기거리를 제공하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랑디스 일당이 타임 보칸 시리즈의 도론보 3인조를 패러디 했다는 점, 나디아의 아버지인 네모 선장의 경우는 쥴 베른의 네모 선장을 모티브로 했으나 캐릭터 디자인은 마크로스의 함장 브루노 J 글로벌이 모델이라는 점, 잠수함 연출이나 소품 디자인, 초반의 스토리 흐름에서 오자와 사토루의 코믹스 '서브마린 707(1963)'을 오마쥬했다는 점 등, 여러 포인트에서 아니메 마니아들이 아니면 모를 만한 패러디와 오마쥬가 다수 등장하고 있음이 그 예이기도. (특히, 오자와 사토루는 나디아에서 설정과 연출을 맡았던 마에다 마히로가 감독을 맡았던 풀 3D 해양 아니메 '청의 6호(1998)'의 원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 NHK, SOGO VISION, TOHO


단순한 어드벤쳐에 그치지 않은 압도적인 스케일의 전투씬은 왠만한 SF 아니메를 능가하는 디테일과 박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반부에 펼쳐지는 악당 가고일의 공중전함의 견인광선에 사로잡혀 바다에서 끌어올려진 노틸러스 호의 사투와 최후는 당대 TV 시리즈 아니메에서는 쉽사리 보기 힘든 스케일과 디테일,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연출로 시청자들을 사로 잡는다. 여기에 가고일과의 전투로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노틸러스 호와 노틸러스 승무원들이 신조함 뉴 노틸러스호로 나디아 앞에 극적으로 등장하는 장면 또한 잊을 수 없는 명장면. 이러한 연출력은 누가 뭐래도 안노가 가진 비범함과 남다름이다. 전통적인 어드벤쳐 물과 오타쿠적인 SF 액션물을 이 정도 수준으로 버부려 낼 수 있는 연출가는 현재의 일본 아니메에서 그리 흔치 않다. 가이낙스 스탭들의 저력 또한 곳곳에서 묻어나고 있다. 특히 카나다 요시노리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은 이들의 다이나믹한 연출기법은 나디아에서도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 하겠다.


종영된지 약 두 달 뒤인 91년 6월 29일에는 극장판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다만, 안노 히데아키가 본 극장판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각본이나 스토리보드 등이 모두 가이낙스의 스탭진이 아닌 토호나 그룹 타크의 스탭 혹은 다른 하청제작사에게 맡겨지게 되었고 그 결과물은 TV 시리즈와는 분위기에서조차 너무 많은 차이가 나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TV 시리즈 이후 수년 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퀄리티 적인 측면에서든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든 나디아의 명성(?)에는 크게 어울리지 못하는 졸작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나디아가 종영된 뒤 이듬해인 92년 MBC를 통해서 방영되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다만, 엔하위키의 나디아 관련 글([3] 참조)을 살펴보면 PC 통신을 중심으로 꾸준한 재방영 요청과 같은 일련의 에피소드들로 인해 95년 다시 방영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90년대 당시의 이러한 시청자 재방영 요청, 특히 그것이 만화영화였다는 사실은 굉장히 이례적인 것으로서 당시 한국의 아니메 1세대, 1.5세대들에 해당하는 이들의 힘으로 인해 나디아가 한국에서 재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96년에는 투니버스에서도 방영되었으며, 투니버스 방영판이 한국에서 방영된 나디아 중에서는 가장 양호한 버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낙스의 재정상황은 여전히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하청의 하청으로 제작한 나디아였기에 가이낙스에게 돌아간 것은 오로지 제작비 뿐, 판권을 통한 부가 수입은 가이낙스와는 별개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가이낙스를 부채의 늪에서 구해낸 것은 그들의 주력사업이었던 아니메가 아닌 번외로 시작한 컴퓨터 게임이었다. 아카이 타카미(赤井孝美)의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1991)'로 인해 가이낙스는 오랜 동안의 고난에서 벗어나 비로소 그들만의 이야기를 그려나가기 위한 초석을 세우게 된다.


<참고 사이트>

[1] ふしぎの海のナディア, Wikipedia Japan
[2] ふしぎの海のナディア(1990~1991), allcinema.net
[3]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엔하위키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NHK, SOGO VISION, TOHO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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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을 노려라! 건버스터 (1989), トップをねらえ!Aim for the Top! GunBuster


ⓒ BANDAI VISUAL · JVC Entertainment · GAINAX


<정보>

◈ 원작/기획: 오카다 토시오(岡田斗司夫)
◈ 감독: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
◈ 각본: 안노 히데아키, 오카다 토시오
◈ 콘티·설정: 안노 히데아키, 히구치 신지(樋口真嗣)
◈ 캐릭터 디자인: 하루히코 미키모토(美樹本晴彦)
◈ 메카닉 디자인/로봇 디자인: 미야타케 카즈타카(宮武一貴) / 오하타 코이치(大畑晃一)
◈ 작화감독: 쿠보오카 토시유키(窪岡俊之), 모리야마 유지(森山雄治)
◈ 미술감독: 키쿠치 마사노리(菊地正典), 사사키 히로시(佐々木洋)
◈ 음악/노래: 다나카 고헤이(田中公平) / 사카이 노리코(酒井法子)
◈ 제작총지휘: 무라하마 쇼지(村濱章司)
◈ 제작사: 가이낙스, 반다이, 빅터 엔터테인먼트
◈ 저작권: ⓒ BANDAI VISUAL · JVC Entertainment · GAINAX
◈ 일자: 1989.10.07
◈ 장르: SF, 로봇, 액션
◈ 구분/등급: OVA(6화) / 고교생 이상 관람가(R)


<시놉시스>

2015년, 우주로 진출한 인류는 돌연 우주괴수의 습격을 받는다. 이 습격으로 우주군의 제독이자 전함 룩시온의 함장이었던 타카야 제독 이하 수많은 승무원들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우주군 제독이었던 아빠 타카야 제독을 동경하던 소녀 노리코는 아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우주 파일럿이 되기로 결심하게 된다. 룩시온의 비극으로부터 6년 뒤 우주괴수에 대항하기 위해 지구는 RX 계획을 발동하고, 노리코는 파일럿의 등용문인 오키나와 여자 우주고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우주 파일럿으로의 길은 생각보다 고되고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개>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1987)'를 통한 가이낙스의 야심찬 시도는 커다란 실패로 귀결되었으나, 문제는 단순히 작품의 실패에 그치지 않았다. 반다이를 통해 거둬들인 거액의 투자비가 가이낙스의 부채로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애초에 왕립우주군을 위해 한시적으로 조직된 프로젝트 집단이었던 가이낙스는 이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체를 뒤로 미루고 수익을 벌어들일 방법을 모색해야할 상황에 처한다. 왕립우주군을 통해 보여주려했던 정통 SF 드라마가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했음을 통감한 가이낙스는 아니메의 수요가 여전히 오타쿠를 중심으로 한 특정계층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그로 인해 그들 오타쿠의 근원이기도 했던 '우주전함 야마토(1974)'와 함께, '기동전사 건담(1979)'을 보고 자란 그들 세대가 처음으로 스탭으로 참여했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1982)'의 컨셉을 다시금 활용하기로 마음먹게 되니, 이것이 바로 가이낙스의 본격적인 태동을 알린 동시에 그들의 정체성에 있어서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톱을 노려라! 건버스터(1989, 이하 건버스터)'인 것이다.

☞ 만화영화 연대기: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 (보러가기)

건버스터는 마크로스를 시작으로 80년대 OVA시장을 주름 잡고 있던 미소녀와 메카닉이라는 키워드를 작품의 테마로 삼아, 여기에 우주전함 야마토의 장중한 SF 드라마를 얹은 전형적인 오타쿠용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80년대 당시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시선을 받던 이들 오타쿠들이 모여 오타쿠라는 편견을 벗어나기 위해 야심차게 만든 첫작품이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오타쿠들의 입맛에 맛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아니메를 보는 시청층의 저변이 한정적이라는 문제도 있었지만, 과거 5~60년대를 풍미하던 도에이의 극장용 만화영화들이 70년대를 기점으로 쇠퇴한 후, 지나치게 일본적인 스타일(특히, 로봇물)에 아니메가 한정되면서 보편적인 감성을 잃어버린 결과로도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아니메의 한계를 벗어나려 했던 가이낙스였으나 그들의 첫 시도인 왕립우주군 또한 보편적인 감성보다는 마니악한 측면이 강했고, 이로 인해 커다란 실패의 아픔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감독은 가이낙스의 초대 멤버로 왕립우주군에서 첫 작화감독을 맡았던 신예 안노 히데아키가 맡아 이례적으로 감독으로 데뷔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30세로, 나우시카와 마크로스 등 불과 몇 작품에서의 작화스탭 경력이 전부였는데, 당시 안노와 동년배 중 감독으로 데뷔한 인물은 마크로스 극장판에서 25살의 나이에 공동감독으로 데뷔한 카와모리 쇼지 정도가 유명해졌을 뿐이다.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데뷔한 카와모리에 비해 안노는 다소 주목을 덜 받으며 등장했지만, 건버스터에서 보여준 그의 연출가로서의 재능은 후일 카와모리를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게 됨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소녀와 메카닉, 그리고 SF 드라마라는 키워드를 접목한 건버스터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미 그런 작품은 당대에 넘치고 찰만큼 유행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안노는 이 기본 구도 위에 몇가지 색다른 시도를 첨가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건버스터는 이전까지의 마크로스 아류작을 뛰어넘는 스타일과 매력을 겸비하게 된다. 우선, 특촬물에 근원을 둔 히어로와 괴수라는 대결구도는 리얼로봇으로 인해 경직되어버린 당대 로봇 아니메의 구도를 일신하는 새로운 참신함을 부여하게 된다. 울트라맨이라는 히어로가 아닌 버스터 머신이라는 로봇이 그 자리를 대체했음에도 불구하고, 건버스터의 액션은 틀촬물의 히어로를 연상시키는 특유의 스타일과 멋이 넘쳤다. 재미있는 것은 로봇의 내부 메커니즘은 리얼로봇의 그것에 근거한 하이테크놀로지적인 모습이었지만, 실제 로봇이 움직이고 싸우는 모습은 특촬물과 슈퍼로봇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모양새였던 것이다.

안노만의 감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건버스터의 초반부는 SF 액션물이 아닌 학원물을 연상시키는데 이 부분은 야마모토 스미카 원작의 '에이스를 노려라(1972)'의 구조를 그대로 패러디한 것으로, 주인공인 타카야 노리코는 에이스를 노려라의 주인공인 오카 히로미를, 학교의 히로인 아마노 카즈미는 류자키 레이카를, 코치 오오타 코이치로는 무나가타 진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렇게 소녀들의 경쟁을 다룬 학원물에서 본격적인 우주의 모험으로 넘어가는 전개를 취하면서 건버스터는 기존의 SF 액션물과는 다른 다양한 맛을 지닌 작품으로 탄생한다. 안노의 패러디(내지 오마쥬)는 단순히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의 곳곳에 드러나게 되는데, 오오타 코치의 바둑판에 부착된 전자계기판이나 우주전함 엑셀리온의 기관부 등 많은 부분에서 우주전함 야마토의 오마쥬를 확인할 수 있으며, 등장인물의 방에서 볼 수 있는 미야자키 아니메의 포스터나 만화잡지 등에서는 감독과 스탭들의 오타쿠적 취향마저도 느껴진다.

여기에 한가지 더, 건버스터는 정통 SF 이론을 접목하여 극의 또다른 흥미를 유발하게 되는데, 바로 광속과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게 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시간이 더 느리게 흘러간다는 우라시마 효과의 도입이 그것이다. 아광속의 속도로 날아간 주인공들이 지구로 돌아왔을 때 그녀들이 겪은 시간은 불과 수개월이지만 지상에서는 이미 십수년이 흐른 뒤라는 이 설정은 단순한 극적 재미 이상의 의미를 작품에 부여하게 된다. 이로 인해 초반부만 하더라도 다소 가벼웠던 극의 분위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무거워지는데, 이렇게 몇가지 과학적, 철학적 소재를 극에 적절하게 도입하고 활용하는 안노의 재능은 후일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에 이르러 만개하여 작품에 대한 여러가지 논란과 해석, 추측과 가십을 낳는 매개로 발전하게 된다.

ⓒ BANDAI VISUAL · JVC Entertainment · GAINAX

전형적인 SF 아니메의 특장점과 정통 SF적인 요소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지만 부정적인 요소 또한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불필요한 성적 표현과 노출이다. 버스터 머신에 탑승하는 여성 파일럿들의 복장이 에어로빅 유니폼인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듯. 여기에 이미 과거에 안노가 DAICON III 오프닝 애니메이션에서 선보였던 바스트 모핑(여성의 가슴이 흔들리는 모습을 묘사한 씬을 일컫는 용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든지, 필요 이상으로 목욕씬과 속옷 씬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80년대 OVA의 대표적인 상술임을 감안한다고 해도 불필요하게 많아 극의 흐름을 끊는다. 이는 이 작품이 그럴듯한 테마와 중후한 설정으로 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상업적인 노선을 걷는 작품임을 증명하는 사례로, 이후 에반게리온을 위시한 여러 가이낙스 작품에서도 이러한 노선은 꾸준히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캐릭터 디자인을 하루히코 미키모토가, 메카닉 디자인을 미야타케 카즈타카가 맡고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이 마크로스의 적자임을 증명하는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장귀병 MD 가이스트(1986)', '대마수격투기 강의 귀(1987)' 등에서 특촬물적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메카닉을 선보인 오하타 코이치나, '프로젝트 A코(1986)'를 통해 미소녀와 SF를 그전과는 다른 형태로 접목시켰던 모리야마 유지, 스튜디오 비보 출신으로 당시에는 미완의 대기였던 쿠보오카 토시유키, 후일 특촬물 감독으로 성장하게 되는 가이낙스의 멤버 히구치 신지 등의 진용도 믿음직스럽다.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높은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들어간 제작비 역시 만만치 않았기에(제작비의 압박 때문이었는지 최종화에서는 채색이 되지 않은 콘티가 그대로 작품의 컷으로 사용되는 씬이 등장한다. 이는 에반게리온을 포함한 후대 가이낙스의 작품에 종종 엿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가이낙스의 재무상황은 더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가이낙스는 아니메 제작 외에 제작 하청과 컴퓨터 게임 등 닥치는 대로 수익사업에 매진하게 되니 이 때까지만 해도 가이낙스의 앞길은 어두운 터널 속이었다.



톱을 노려라2, 다이버스터(2004), トップをねらえ2!


ⓒ GAINAX · TOP2 委員会


<정보>

◈ 원안/감독: 츠루마키 카즈야(鶴巻和哉)
◈ 감수: 안노 히데아키
◈ 각본: 에노키도 요지(榎戸洋司)
◈ 콘티: 안노 히데아키, 히구치 신지, 히라마츠 타다시(平松禎史) 外
◈ 캐릭터 디자인: 사다모토 요시유키(貞本義行)
◈ 버스터머신 디자인/퓨처 비주얼: 이즈나요시쯔네(いづなよしつね) / OKAMA
◈ 메카닉 디자인: 이시가키 쥰야(石垣純哉), 코야마시게토(コヤマシゲト) 外
◈ 작화감독: 사다모토 요시유키, 시바타 유카(柴田由香), 스시오(すしお), 니시고리 아츠시(錦織敦史) 外
◈ 3D 감독/CG 모델링: 나스 신지(那須信司) / Viewworks
◈ 미술감독: 가토 히로시(加藤浩)
◈ 음악/노래: 다나카 고헤이 / ROUND TABLE, ACKO
◈ 기획/제작: TOP2 제작위원회
◈ 제작사: 가이낙스, 반다이 비주얼, JVC 엔터테인먼트
◈ 저작권: ⓒ GAINAX · TOP2 委員会
◈ 일자: 2004.11.?? ~ 2006.08.??
◈ 장르: SF, 로봇, 액션
◈ 구분/등급: OVA(6화) / 고교생 이상 관람가(R)


<소개>

가이낙스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제작된 건버스터의 후속편. 건버스터를 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부채에 허덕이며, 어두운 내일 밖에 보이지 않았던 가이낙스가 이제는 일본 아니메를 대표하는 제작 스튜디오가 되어 당당히 20주년 창립작품을 내놓는 모습은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바로 그 기념작이 그들의 최초 히트작인 건버스터라는 사실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20년이 흘러 아니메의 트렌드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로봇 아니메나 미소녀와 SF를 접목하던 트렌드는 모두 과거의 일이 되었으며, 가이낙스 스스로가 아니메의 흐름을 바꾸었던 에반게리온 이후의 아니메 부흥기를 지나 업계가 다시금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할 무렵, 그리고 가이낙스 자신도 에반게리온 이후 로봇 아니메에서 손을 뗀 채 말랑말랑한 연애, 메이드물에 주력하고 있을 당시, 가이낙스의 새로운 도전이 이 20주년 기념작 '톱을 노려라2!, 다이버스터(2004, 이하 다이버스터)'에서 그 전조를 알렸다면 다소 과장된 표현일까.

후속편이라 하지만, 시대배경은 건버스터에서 무려 1만 5천년 후의 이야기이다. 사실 이조차도 작품의 초반부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시대 배경도, 캐릭터도 완전히 상이한 모습과 전개인지라 후속편이라는 표현 자체가 무색할 정도. 캐릭터 디자인은 가이낙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또 한명의 인물 사다모토 요시유키가 맡았는데, 사다모토 특유의 슬림한 소녀적 취향에, 가이낙스의 만화영화적 표현이 접목되어 비주얼은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그것은 레트로풍의 슈퍼로봇스러운 매력을 진하게 풍기는 버스터 머신들도 마찬가지. 슈퍼로봇스러운 모습을 간직했지만 그 내부 메커니즘에서는 리얼로봇과 정교한 변신합체로봇의 컨셉을 간직했던 건버스터와 달리 다이버스터는 과거 비현실적인 변신합체 컨셉을 보여준 겟타로보와 같은 뉘앙스가 느껴진다. 건버스터라는 타이틀을 떼고 보면 오히려 이러한 다이버스터의 모양새는 근 몇년간의 가이낙스적 취향에 근접해 있다 하겠다.

다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다이버스터는 건버스터의 후속이라는 정체성을 공고히 한다. 특히, 라스트에서 건버스터의 히로인인 노리코를 맞이하는 라르크와 지구의 모습은 과거 건버스터에서 인류를 구하고 1만5천년 후의 시간으로 튕겨나가버린 히로인 노리코와 카즈미의 엔딩을 그들의 관점이 아닌 그들을 맞이하는 지구인의 관점으로 바라본 모양새다. 이러한 결말은 상당히 극적인 재미를 작품에 부여하는데, 이로 인해 다이버스터는 종장에 이르러 건버스터의 후속임을 완벽하게 관객에게 각인시키게 된다. (애초에 다이버스터의 각본은 엔딩부터 거꾸로 써졌다는 후문이 있다)

ⓒ GAINAX · TOP2 委員会

레트로풍의 슈퍼로봇적 컨셉과 더불어 본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또하나의 비주얼적 매력은 속칭 '카나다버스'라 불리는 다이나믹한 화면처리 기법에 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일본 아니메업계의 전설적인 작화가 카나다 요시노리가 창안한 이 기법은 같은 액션장면도 보다 더 역동적으로 묘사할 수 있어 이를 통해 다이버스터의 액션을 거대한 스케일과 함께 실로 과장과 함축이라는 만화영화의 특성이 십분발휘된 영상미를 관객에게 선사하게 된다.

다만, 주제의식이나 여러면에서는 원작에 비해 신선도나 깊이는 부족하다. 매력적인 디자인과 역동적인 화면은 과거의 슈퍼로봇을 가이낙스적인 것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모자람이 없었지만, 20주년 기념 스페셜 작품답게 다소 이야기에는 무리함이 따른다고나 할까. 이는 과거와 달리 지나치게 소년, 소녀들 위주로 진행되는 드라마 구조의 한계이며, 동시에 작금의 아니메가 갖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이버스터의 여러가지 시도는 일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카나다버스에 입각한 감각적인 영상미와 뜨거운 열혈과 근성, 그리고 통쾌하면서도 극적인 이야기 구조는 그로부터 3년 뒤 가이낙스의 또다른 작품에 이르러 진정한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참고 사이트>

[1] トップをねらえ!, Wikipedia Japan
[2] トップをねらえ2!, Wikipedia Japan
[3] トップをねらえ! (1988), allcinema.net
[4] トップをねらえ!2 (2004~2005), allcinema.net
[5] 톱을 노려라!, 위키피디아
[6] 톱을 노려라!, 엔하위키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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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 (1987), 王立宇宙軍 オネアミスの翼 / Wings of Honneamise


ⓒ BANDAI Visual · GAINAX


<정보>

◈ 원안/각본/감독: 야마가 히로유키(山賀博之)
◈ 각본협력: 오오노기 히로시(大野木寛)
◈ 조감독: 아카이 타카미(赤井孝美), 히구치 신지(樋口真嗣), 마스오 쇼이치(増尾昭一)
◈ 캐릭터 디자인/작화감독: 사다모토 요시유키(貞本義行)
◈ 작화감독: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 이이다 후미오(飯田史雄), 모리야마 유지(森山雄治)
◈ 미술감독: 오구라 히로마사(小倉宏昌)
◈ 스페셜 이펙트 아티스트: 안노 히데아키
◈ 프로덕션/레이아웃 디자인: 마에다 마히로(前田真宏), 켄이치 소노다(園田健一), 후지와라 카무이(藤原カムイ)
◈ 음악/노래: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
◈ 기획: 오카다 토시오(岡田斗司夫), 와타나베 시게루(渡辺繁)
◈ 제작총지휘: 야마시나 마코토(山科誠) - 반다이 사장(1980~1999)
◈ 제작사: 가이낙스, 반다이 비주얼
◈ 저작권: ⓒ BANDAI Visual · GAINAX
◈ 일자: 1987.03.14
◈ 장르: SF, 드라마, 전쟁
◈ 구분/등급: 극장판 / 고교생 이상 관람가 (R)


<시놉시스>

지구를 연상시키는 어느 행성의 오네아미스 왕국. 왕국의 우주개발을 위해 설립된 속칭 '왕립우주군'은 거창한 명칭과는 달리 열명 밖에 안되는 인원에 매번 실패만 거듭하는 명목 뿐의 군대로, 같은 군대 내에서도 따돌림과 무시를 당하는 집단이었다. 소속되어 있는 군인들 역시 뚜렷한 목표의식 없이 무기력하고 나태한 체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으로, 어렷을 적부터 하늘을 나는 파일럿을 동경했으나 부적격자로 결정되어 낙방한 시로츠구 라닷트도 그들 중 하나.

하루하루를 아무런 목표 없이 살아가던 시로츠구는 동료들과 노닥거리던 어느날 밤 유흥가에서 헌신적인 포교활동을 하는 한 소녀를 우연치 않게 만나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전단지를 받아든 시로츠구, 무료한 일상에 지쳐있던 그는 흥미삼아 전단지에 적힌 그녀, 리이쿠니 논데라이코의 집을 찾아가게 되는데...


<소개>

ⓒ BANDAI Visual · GAINAX

지금은 일본을 대표하는 아니메 스튜디오로 성장하게 된 가이낙스의 첫 시작을 알린 작품. 81년 일본 SF 대회 'DAICON III'의 오프닝 애니메이션의 실행위원으로서, 아마추어 대학생들을 모아 자체 제작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오카다 토시오는 자신이 운영하는 SF 용품 전문점 제너럴 프로덕츠를 통해 이 오프닝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시작된 DAICON FILM의 영상 소프트와 관련 상품을 판매하며, 전문 애니메이터가 아닌 오타쿠 기반 제작 시스템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을 타진하게 된다. 이후 8mm 특촬물을 제작하는 등 오카다 토시오와 다이콘 필름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지도를 넓혀가게 되었으며, 84년에는 16mm 필름으로 찍은 독립영화 '八岐之大蛇の逆襲'을 반다이를 통해 판매하면서 거대 기업 반다이와도 인연을 맺게 된다.

그러던 중, 제너럴 프로덕츠의 멤버로 다이콘 3 오프닝 애니메이션에 참여했던 대학생 야마가 히로유키가 모종의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다. 오카다와 야마가는 이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보기로 결심하고, 역시 다이콘 3 오프닝에 참여했던 안노 히데아키와 사다모토 요시유키 등이 참여하면서 초기 핵심멤버 진용이 구축된다. 그들은 이 스토리를 바탕으로 OVA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다이콘 필름에서 인연을 맺은 반다이와 접촉하는데, 프라모델사업을 넘어 영상 소프트 산업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반다이는 이들의 구상을 OVA가 아닌 장편 극장 만화영화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펼치게 된다. 이로 인해 거대한 자본력을 가진 대기업 반다이와 촌티가 풀풀나는 아마츄어 오타쿠 집단의 극적인 태그 매치가 결성된다.

반다이가 제시한 극장 만화영화의 제작을 위해 오카다 토시오는 제너럴 프로덕츠와 다이콘 필름을 모체로 1984년 12월 24일, 별도의 아니메 제작 스튜디오를 설립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오타쿠 집단 가이낙스의 시작이었다. 오타쿠에 대한 좋지 않은 사회적 인식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그들은 이 작품을 통해 정말 제대로 된 고품격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하는 열정적인 의지를 품게 되는데, 기실 이것이야말로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정신이기도 했다. 만화영화 제작에 노하우가 전무했던 스폰서 반다이 덕에 제작은 가이낙스의 뜻대로 별 무리없이 흘러가게 되었으니 어찌보면 이 역시 상업적으로 커다란 불안요소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었다. 

재대로 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작품의 세계관이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갖고 있지만 지구와는 전혀 다른 환상의 세계이기에 이 세계를 구성하기 위한 여러가지 설정들이 필요했는데, 하드코어 오타쿠 집단답게 그들은 이 세계관을 이루는 설정들을 세심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재창조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하나도 빠짐없이 애니메이션에 적용되었고, 이로 인해 한컷 한컷 느껴지는 정보량은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아니메 중에서 이 정도의 치밀한 장면구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키라(1988)'로 잘 알려진 거장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의 작품 정도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디테일로만 치면 근래의 CG 애니메이션을 능가하기까지 하며, 실제 이 작품에는 일부분에 CG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다만 CG로 기본 프레임을 완성하고 채색은 수작업으로 하는, 현재의 수준에서도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방식이 적용되었다고 전해진다. ([4] 참조)

NASA 견학, 자위대 체험을 통해 비행씬이나 로켓발사씬 등을 재현하기 위한 스탭들의 사전조사는 어떤 면에서는 아마추어의 그것을 뛰어넘는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것이 철저히 상업적인 고려가 배재된 오타쿠적 마인드에서 출발하였다는 것도 문제. 누군가 제동을 걸어줄 사람이 없이 그저 최고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정열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2년이 넘어갈 정도로 장기 프로젝트가 되었고, 그로 인한 제작비 상승도 애초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반다이로부터 받은 제작비가 모두 동나자 오카다가 직접 발로 뛰면서 여기저기서 제작비를 빌려왔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문과 인터넷 상의 각종 자료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제작비는 8억엔에 다다랐다고 한다. 다만, 이 제작비는 홍보비와 마케팅비도 포함되어 있는 금액이다.

ⓒ BANDAI Visual · GAINAX

마침내 집념으로 완성된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가 87년 3월 14일 개봉되었다. 실로 막대한 제작비가 소요된 80년대 최대의 대작 아니메는 영상미에 있어서는 일본 아니메史를 새로 쓴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으나, 이야기에서는 대중적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니아적인 영상미로 똘똘 뭉친 이 작품에게 사실 상업적 성공을 바라는 것이 무리였다고나 할까. 로봇과 미소녀에 빠져사는 오타쿠라는 사회의 선입견을 보란 듯이 이겨보고자 했던 오타쿠들의 정공법적인 시도는 관객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사는 오타쿠의 마인드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캐릭터의 묘사라든지 이야기의 흐름 등 작품의 전반적인 모습은 드라마틱함이 부족하여 지루함을 유발하고 있다. 극한의 영상미가 스토리에 있어서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왕립우주군은 지루하다, 재미없다라는 몇 마디로 평가절하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의의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수작업으로 그려낸 극한의 영상미는 다소간의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 마니아라면 반드시 두 눈에 담아야할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극장 개봉수익은 제작비의 반 수준에 그치며 참패하고 말았지만, 이후의 영상 소프트 판매에서는 지속적인 호조를 보이며 아니메의 스테디 셀러로 자리잡게 되었고, 제5회 일본 아니메 대상 작품상, 미술상, 촬영상을 수상하는 등 평단에서는 그 완성도에 상응하는 평가를 얻어내게 된다.

한편, 왕립우주군의 제작과 동시에 해산할 예정이었던 가이낙스는 작품에서 발생한 막대한 적자를 메우기 위해 오타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오타쿠들의 호주머니를 노린 지극히 오타쿠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하지만, 특유의 오타쿠적 마인드(?) 덕분에 가이낙스의 재무상황은 이후에도 수년동안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참고 사이트>

[1] 王立宇宙軍 オネアミスの翼, Wikipedia Japan
[2] Wings of Honneamise (movie), ANN
[3]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 위키피디아
[4]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 엔하위키 미러
[5] 왕립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王立宇宙軍 オネアミスの翼) 1987 by 캅셀, CAPSULE 블로그: 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BANDAI Visual · GAINAX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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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에 이야기해볼 타이틀은 일본 아니메를 대표하는 초인기작, 에반게리온 파 2.22입니다. 아시다시피 95년 방영을 했던 에반게리온을 재해석한 안노 감독의 신극장판 4부작 중 2부인 작품이죠. 15년 전보다 월등하게 향상된 비주얼 퀄리티는 CG의 도움으로 압도적이기까지 합니다. 특히, 다이나믹한 콘티를 즐겨 보여주는 가이낙스의 스탭진들이 참여했이기에 CG의 정교함과 더불어 로봇 아니메의 역동적인 영상미가 어우러져 멋진 앙상블을 보여주고 있죠.

게다가 단순한 리메이크가 아닌, 완벽한 리빌드라 할 수 있는 작품으로, 극이 전개될 수록 원작과 달라지는 이야기 전개로 인해 팬들에게 또다른 기대와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2.02버전을 건너뛰어 한국에서는 바로 2.22 버전이 발매되었네요.


패키지 리뷰


'반게리온 신극장판 2부 파(이하 에바 파)'는 1부에 이어 아인스엠엔엠(구 태원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 및 발매되었습니다. 1.01 패지키를 구입하거나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거의 동일한 디자인의 패키지로 나왔지요. 물론, 1.11은 레이의 일러스트로 장식된 흰색의 패키지입니다만.

 
심플한 패키지 디자인은 1부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텍스트도 인쇄되지 않은 심플한 디자인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DVD의 관련정보는 보시는 것처럼 띄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구요. 


1.01 패키지와의 비교. 보시는 바와 같이 색상은 오렌지색에 더 가깝습니다. 붉은 색이었던 1편과 차이가 있는데요. 이것이 작품 내에서의 어떤 분위기나 4부작 각 편이 표현하는 어떤 의미를 담아내려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안노 감독이 이제까지 보여준 모습으로 볼 때 뭔가의 의미가 담겨져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메탈 그레이에 가까운 속 커버 역시도 검은색이었던 1부의 속 커버에 비해 옅은 색으로 변했네요. 두께는 1.01버전에 비해서 얇습니다. 디스크 1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에바 서의 경우 1.01일 때는 디스크 두 장으로 나왔다가 1.11에서 디스크 1장으로 출시된 것처럼, 에바 파도 2.22 버전은 디스크 1장으로 나온 듯 합니다. 2.02가 아예 발매가 안된 한국에서는 2.02의 셔플먼트는 영영 볼 기회가 없을 것 같네요. 마리의 짧아진 스커트 길이(마리가 신지의 학교 옥상에 낙하하는 씬에서 힙을 완벽히 거렸던 마리의 스커트는 2.22버전에서는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수준으로 다시 그려집니다.)에 만족하고 셔플먼트 디스크는 포기해야할 듯 싶습니다. 


디지팩 패키지의 내부는 커버의 색과 같은 주홍색입니다. 디스크와 북클릿까지도 영롱한 주홍색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강렬한 느낌을 주는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1.01처럼 북클릿 외에 추가 구성은 없었습니다. 역시 2.02가 나왔다면 포함되었으려나요. 2.02를 건너뛰고 2.22로 발매를 하니 이런 아쉬운 점이 있군요. 레이의 일러스트가 인쇄된 마우스패드로 만족을 해야할 듯. 


북클릿은 16장으로 구성되어 에바 파의 모든 것을 간략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북클릿의 내용 구성은 상당히 충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스크도 1장 뿐이고, 추가 구성도 없는 심심한 타이틀이긴 하지만 바로 이 알찬 북클릿이 모든 것을 상쇄해주는 듯. 캐릭터와 사도, 키워드에 대한 소개와 함께, DVD에 포함되어 있는 스페셜 피쳐(Special Feature)에 대한 간략한 개요, 챕터 리스트와 DVD 스탭롤, 그리고 에바 2.02 제작노트가 섹션별로 설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셔플먼트 디스크에 들어갈 내용을 충실히 북클릿으로 옮겨준 경우라 하겠군요.


DVD 리뷰

상비율은 1.85:1입니다. 요즘의 패키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돌비디지털 6.10EX와 2.0을 모두 지원하여 저사양의 구매자들을 고려하고 있구요. 


DVD 타이틀 메뉴는 햇빛이 내리쬐는 숲의 정경을 보여주다가 흑백 톤으로 화면이 전환되면서 하단에 주홍색의 메인메뉴가 뜨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배경 선택도 제법 독특하지요. 보통은 작품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는 배경이미지가 사용되지만, 이번 에바 파 DVD에서는 나무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에바 서의 DVD 타이틀 배경이미지인 전신탑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요. 특히, 서브 메뉴로 넘어가도 하단의 메인메뉴는 그대로 유지한 체, 메인메뉴 바로 위에 서브 메뉴를 위한 컨트롤 페이지바가 나타난 것도 일반적인 DVD 타이틀과는 차별화되는 구성입니다.


1장으로 구성된 타이틀이지만, 본편과 함께 추가되어 있는 스페셜 피쳐에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위의 그림과 같이 완성된 영상이 아닌, 콘티와 레이아웃, 원화와 CG 골격으로 구성된 편집된 장면인데요. 총 4장면으로 구성되어 어떤 장면이 본편에서 대체되고 삭제되었는지와 함께 완성된 영상과는 또다른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아니메 제작 과정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기도 하구요.


또한, 에바 서에 비해 이례적으로 많은 양의 CG 작업 할당된 이번 에바 파의 특징을 보여주기 위해 위와 같이 스페셜 피쳐를 통해 CG 제작의 단계를 보여줌으로써 CG가 이번 작품에서 어떤 식으로 아니메 영상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D 모델링으로 구축된 에바의 모형은 애플시드 극장판에서 보여줬던 툰쉐이딩과 같은 기법으로 CG이면서도 CG와는 다른 2D의 유려한 질감을 보여줍니다. 이로 인해 과거 원작에 비해 훨씬 더 부드럽고 역동적인 모습을 갖춘 새로운 에바로 재탄생하게 되었지요.


에바 파의 작화 퀄리티는 전체적으로 원작을 압도하는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원작 자체도 당시 아니메의 평균적인 퀄리티를 몇 단계 상회하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었는데요. 에바 신극장판은 결론적으로 그러한 원작의 비주얼을 몇 단계 더 상회하는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전보다 더 다이나믹해진 에바의 움직임은 이번 극장판의 최대 볼거리 중 하나. 압도적인 영상미와 완전히 새로운 재해석으로 인해 팬들에게 십년이 넘은 지금 다시금 에바에 열광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DVD의 퀄리티는 단연 국내 아니메 패키지 중에서는 최상급에 속하고 있습니다. 1장짜리 구성이지만, 어설픈 2장짜리 패키지를 능가하고 있군요. 게다가 워낙에 압도적이면서도 선명한 작화 덕에 화질에 있어서도 플러스 요인이 되고 있는 듯 합니다. BD로 본다면 너무 선명해서 눈이 부실지도.(물론 농담입니다.)


에반게리온: 파(破) 2.22 - 10점
안노 히데아키 외 감독, 사카모토 마야 (Maaya Sakamoto 외 목소리/아인스엠앤엠(구 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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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던 안노 감독의 이력

안노 히데아키 감독. 생긴 것도 범상치(?) 않다.

마전 '마크로스와 에반게리온의 데자뷰... 반복된 선라이즈의 폭주'라는 포스트를 통해서 기동전사 건담으로 로봇 아니메의 전성기를 가져왔던 선라이즈에게 대항했던 걸출한 두 작품 마크로스와 에반게리온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 두 작품 덕에 선라이즈는 각각 80년대 초중반과 90년대 중후반 두 차례에 걸쳐 엄청난 양의 수작들을 쏟아내는 이른바 대폭주를 시작하기에 이르렀었죠.

특히, 이 두 작품의 경우에는 당시 아니메를 이끌던 거장이 주축이 아닌, 젊은 신예 애니메이터들의 힘으로 일구어 낸 것이기에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는데요. 마치 기성세대의 아성을 뛰어넘은 신세대의 모습과도 같았던 이 두 명의 인물들이 바로, 현재에는 아니메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카와모리 쇼지(마크로스 원안/감독/메카닉 디자인. 연출가 겸 메카닉 디자이너)와 안노 히데아키(에반게리온 감독/각본/메카닉 디자인. 연출가 겸 애니메이터)인 것입니다.

특히, 안노 감독의 경우에는 젊은 애니메이터들의 손으로 만든 이 마크로스 TV 시리즈에 강렬한 공감대를 형성, 대학을 자퇴하고 상경하여 원화맨으로 참여하기까지 하는데요. 이렇게 안노 감독은 애니메이터로서 마크로스를, 그리고 연출가로서 먼 훗날 에반게리온을 만들게 되면서, 로봇 아니메의 철옹성 선라이즈가 깜짝 놀랄 정도의 걸작이었던 두 작품에 모두 참여하는 이력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마크로스 TV 시리즈 참여 당시의 안노 감독은 수많은 원화맨 중의 하나인 일개 애니메이터일 뿐이었습니다. 비슷한 연배의 카와모리 쇼지는 그 재능을 인정받아 마크로스의 원안과 후일 극장 아니메의 공동연출, 그리고 메카닉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천재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지만, 보통 20대의 나이에 그런 식으로 아니메 업계에 입문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었고, 보통은 안노 감독처럼 이름없는 원화맨이나 동화맨으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죠.

그러나, 역시 인재는 인재였던 걸까요. 마크로스가 종영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제작되는 한 작품을 통해 안노 감독의 역량은 아니메 업계에서 인정을 받기에 이르릅니다. 그것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설의 시발점이 된 작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였습니다.

©1984 Nibariki · Tokuma Shoten · Hakuhodo


국내에 발매된 나우시카의 DVD 영상특전을 보게 되면, 당시 거의 무명이다시피했던(81년 DAICON 3라는 아마츄어팀의 프로젝트 영상을 제작한 것과 마크로스 TV 시리즈의 원화맨으로 참여한 것 외에는 이렇다할 이력이 없는) 안노 감독은 당시 자신이 그렸던 그림들을 들고 미야자키 감독에게 찾아가 막무가내로 들이밀었다고 회상하고 있는데요. 미야자키 감독은 그의 범상치 않은 실력을 알아보고 전격적으로 그를 기용하기에 이르릅니다. 그리고, 햇병아리 신예 애니메이터였던 안노 감독은 이 작품에서 아래와 같은 희대의 씬을 그려내게 되는 것이죠.

©1984 Nibariki · Tokuma Shoten · Hakuhodo


도르메키아 군의 공주 크샤나가 폭주상태로 바람계곡으로 질주하는 거대곤충 오무들의 진군을 막기 위해 부활시킨 거신병이 아직 불완전한 상태로 오무의 대군에게 빔병기를 뿜어내던 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거대한 스케일의 클라이막스 씬은 초짜 애니메이터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박력과 퀄리티를 보여주며, 안노 히데아키를 주목받는 신예 애니메이터로 떠오르게 만듭니다.

당시 일본 최고의 액션작화가로, 스페셜 애니메이터로 추앙받고 있던 故 카나다 요시노리가 작품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중요한 라스트 씬을 일개 신참이었던 안노 감독이 그렸다는 사실은 굉장한 의외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아마도 이 씬을 연출할 당시 카나다 요시노리가 모종의 이유로 인해 더이상 나우시카의 작업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안노 감독의 이름을 아니메 업계에 결정적으로 각인시켜 주게 되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는 아니었을까 싶군요.

하여간에,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아니메 업계에 심어준 그가 참여했던 다음 작품이 바로 수개월 뒤 개봉하게 되는 마크로스 시리즈의 극장판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계십니까(1984)'였던 것입니다.

ⓒ Big West ⓒ 1985 Harmony Gold USA Inc / Tatsunoko


이미 TV 시리즈에서 원화맨으로 참여하면서 마크로스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던 안노 감독이었지만, 당시에는 이름도 없는 신참 애니메이터였던 그는 TV 시리즈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20여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인정해줄 수 밖에 없는 절정의 작화 퀄리티를 보여준 이 극장판에서 또 한 번 애니메이터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게 됩니다.

ⓒ Big West ⓒ 1985 Harmony Gold USA Inc / Tatsunoko


후일 '민메이 어택'이라 불리게 되는 히로인 민메이의 노래와 함께 이타노 이치로의 유명한 유도 미사일 씬이 박진감 넘치게 펼쳐지면서 주인공 히카루의 발키리가 적의 심장부로 돌진하는 이 클라이막스 씬은 '이타노 써커스'라고 불리는 미사일 액션의 정수를 보여주었는데요. 그런데, 이 씬을 아주 자세하게(정말, 진짜로 엄청나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위의 스틸 샷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아주 진귀한 컷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미사일 세례 속에 갑자기 등장하는 '타코 파이(문어 파이?)' 자판기, 그리고 라스트를 장식하는 버드와이저 맥주 캔의 등장... 제가 이 극장판을 접했던 85년도 당시는 지금과 같은 디지털 매체가 아닌 VHS 비디오 같은 아날로그 매체가 주를 이루던 시대였는데, 마크로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제 친구가 이 장면에 흠뻑 빠져 슬로우 비디오로 몇 번씩이나 틀어보던 중 바로 이 엄청난 장면을 접하게 된 것이었죠. (여담이지만, 이 장면을 보려고 몇 번씩이나 비디오를 되감고 슬로비디오로 틀고 하는 통에 그 친구가 애지중지하던 마크로스 극장판 비디오는 결국 테이프가 늘어져버려 이 씬이 나오는 필름 부분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이 글을 쓰기 위해 DVD를 틀어놓고 캡쳐를 시도했는데,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통에 Power DVD의 슬로우 모션으로도 캡쳐가 용이하지 않았고, 곰 플레이어로 프레임 단위로 시도한 캡쳐도 정말 어렵게 캡쳐가 가능할 정도였으니, 당시 VHS 비디오로 이 장면을 발견한 그 친구의 열정에는 지금도 경의를 표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으면 말입니...

어쨋든 간에, 이 희대의 숨겨진 씬은 후에 아니메 잡지, 아니 아마 마크로스 설정집에서 완벽하게 캡쳐가 되어 팬들에게 공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타노 써커스라고 알려진 이 희대의 미사일 씬에서 저런 위트를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은 당시의 스탭 중에서는 아마 안노 감독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죠. (어디선가 안노 감독이 이 장면을 그렸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정확한 증거 자료를 찾을 수가 없기에 일단 추측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서 안노 감독이 보여준 인상적인 애니메이터로서의 기량을 보면서 우리는 국내의 모 애니메이션 전문가 분(굳이 언급하자면 송락현님)의 말마따나 그가 만약 감독을 하지 않고 애니메이터로의 길을 계속 갔더라면, 故 카나다 요시노리, 이타노 이치로의 뒤를 있는 스페셜 애니메이터로서 그 이름을 날렸으리라는 꽤 신빙성이 높은 상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노 감독은 그로부터 몇 년 뒤 정말 애니메이터로서의 절정의 기량을 입증하는 한 괴물같은 작품의 작화감독을 맡게 되는 것이죠.

ⓒ 1987 BANDAI VISUAL / GAINAX


그렇지만, 애니메이터로서의 역량 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의 역량에서도 그는 확실히 일본 아니메를 대표하는 인물임에는 분명한 사실인 듯 합니다. 저 이타노 이치로조차도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아직도 저평가 되고 있을 뿐더러 건담의 전설적인 작화감독 야스히코 요시카즈조차 감독을 맡았던 작품들의 연이은 실패로 이제는 만화가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는 현실을 보면, 그가 보여준 수어 편의 작품들은 분명 그가 단순한 애니메이터 이상의 재능을 가진 인물임을 증명하는 것이랄 수 있겠지요. (단, 좀 외도가 많아서 작품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 아쉽다면 아쉽다랄까요.)

40년대 생 거장들이 서서히 저물어 가고 50년대 생 감독들조차 예전과 같은 힘을 보여주지 못하는 현 일본 아니메 업계는 이제 60년대 생 감독들에게 그 바톤이 넘어가고 있지 않나 합니다. 이런 시대에 60년대 생을 대표하는 그의 멋진 작품을 다시 한 번 기대해 보겠습니다. 아, 일단 에반게리온 리메이크는 잘 마무리 하시구요. 부디 토미노 감독처럼 자신의 창조한 작품의 무게에 짓눌려 방황하지는 마시길.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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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에 대한 경쟁심, 또다른 명작의 탄생으로 이어지다.

ⓒ SUNRISE · SOTSU Agency


이들 아시다시피(아, 물론 일본 만화영화 팬들에게만 한정해서입니다만) 79년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과 선라이즈가 만들어낸 '기동전사 건담'은 첫방영시는 비록 저조했었지만, 재방송과 3부작 극장판 개봉 등을 통해 '리얼로봇'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로봇장르를 아니메史에 등장시키면서 일약 하나의 신드롬을 형성하기에 이르릅니다. 기동전사와 뉴타입의 포스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70년대 후반을 강타하며 아니메의 첫번째 르네상스를 가져오게 했던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야마토, 은하철도 999, 캡틴 하록, 천년여왕 등등)들을 완전히 잊혀져 버리게 할 정도의 위력이었던 것이죠.

게다가 당시 로봇 아니메에 있어서 토미노 감독에 버금, 아니 경험적인 면에서는 토미노 감독을 능가하고 있던 낭만로봇 3부작의 대가 나가하마 타다오 감독이 별세하면서 시대는 그야말로 리얼로봇의 시대로 접어들기 직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선라이즈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동시에 반다이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구요.) 하여간에, 선라이즈의 앞길에 회사 이름처럼 마냥 태양이 떠있을 것만 같았던 그즈음, 한 정체불명의 작품이 등장하는 것이었던 겁니다.

그것은 대파란이었습니다. 기동전사 건담을 뛰어넘는 보다 더 현실적이고 드라마틱한 설정, 즉 익히 알고 있는 전투기가 로봇으로 변형하는 현실적이면서도 놀라운 디자인 컨셉, 게다가 인간형, 이족보행형 전투기, 전투기의 3단 형태로 변신하는 완구로서의 매력적인 상업적 가치, 거대한 로봇으로 변신하는 1200m급의 우주 항모와 멋드러진 SF 설정들, 발랄한 소녀가 아이돌 가수로 성장하는 성공 스토리를 담은 당시 아니메에서는 보기 드문 트렌디 드라마적 설정, 남자 주인공과 두 여자 주인공 사이에서 벌어지는 밀고 당기는 삼각 로맨스까지...

선라이즈 외에 이 정도의 드라마틱하고 현실적인 모습의 SF 아니메를 만들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즈음 태어난 이 작품은 바로 도에이 동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관록의 제작사 타츠노코 프로덕션의 지휘 하에, 기동전사 건담의 SF 설정에 일부 참여하면서 이미 아니메 업계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한 창작집단 스튜디오 누에와, 작품의 원안과 주역 메카인 발키리를 디자인해낸 신예 카와모리 쇼지(스토리 원안, 공동감독, 메카닉 디자인), 히라노 토시키(캐릭터 작화감독), 하루히코 미키모토(캐릭터 디자인), 이타노 이치로(액션 작화감독) 등 젊고 실력있는 신예 크리에이터들과 노장 이시구로 노부로 감독이 함께 만들어낸 '초시공요새 마크로스(1982)' 였습니다.

ⓒ Big West


이 작품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기동전사 건담 이후 리얼로봇의 흐름은 '전설거신 이데온(1980)', '태양의 어금니 더그람(1981)'과 같은 작품을 통해 선라이즈에서 계속되고 있긴 했으나, 여전히 로봇 아니메 전체적인 흐름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되지 못한 체 건담에만 머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오히려 리얼로봇으로 인해 시작된 드라마틱하고 심도 있는 설정이 기존의 슈퍼로봇 아니메에 도입되며 전반적으로 로봇 아니메는 변화의 과도기에 서있었던 시기였었죠. 그러나, 이 마크로스로 인해 이제 흐름은 리얼로봇으로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건담에서 시작된(실제로는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이지만) 리얼로봇의 도화선은 선라이즈의 작품이 아닌 이 마크로스로 인해 새로운 전기를 맡게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선라이즈 역시 큰 자극을 받았을 겁니다. 그로부터 마치 마크로스를 향한 반격이라도 하듯이 '전투메카 자붕글(1982)', '성전사 단바인(1983)', '장갑기병 보톰즈(1983)', '은하표류 바이팜(1983)', '중전기 엘가임(1984)', '거신 고그(1984)',  '기갑계 가리안(1984)', '기동전사 Z 건담(1985)', '푸른유성 SPT 레이즈너(1985)', '기동전사 ZZ 건담(1986)', '기갑전기 드라고나(1987)'에 이르는 그야말로 리얼로봇의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이죠. ('전투메카 자붕글&태양의 어금니 더그람 1983' by 캡슐 참조) 거기에 리얼로봇물은 아니지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더티페어(1985)'같은 SF 미소녀 액션물까지 포함하면 엄청날 따름입니다.

ⓒ SUNRISE · SOTSU Agency (일부는 틀릴 수도 있음)

82년부터 87년까지 시작된 선라이즈의 아니메 쓰나미

마크로스 방영 직후인 83년도와 84년도에 이 12개의 작품 중 무려 반 이상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선라이즈의 마크로스 견제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이 작품들은 완성도 면에서도 모두 마크로스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인 작품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선라이즈의 양적 질적 내공을 가늠할 수 있는 한 단면이기도 하구요.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선라이즈의 오버히트가 80년대 후반부 일본경제의 버블 붕괴와 그에 따른 아니메 침체기와 맞물려 리얼로봇 아니메의 생명이 사그러드는 결과를 가져온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만, 하여간 엄청난 대공세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로봇 아니메의 메카 선라이즈를 향한 공세는 마크로스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80년대 후반부부터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만들어낸 초대작 아니메들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제작여건이 급도로 악화되기 시작하자 아니메 업계 역시 긴 침체의 늪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80년대의 거의 대부분의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SF 장르, 특히 로봇 장르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지요. 리얼로봇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토미노 감독의 차기 건담 시리즈가 모두 흥행에 참패하면서 리얼로봇과 로봇 아니메는 이제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쓸쓸히 퇴장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95년, 또 하나의 괴물같은 작품이 등장하고야 맙니다. 케이블과 각종 장비를 통해 제한된 구역에서 에너지 공급이 가능한 상태에서만 운용 가능한 거대 생체병기라는 적절한 리얼리티, 바이오메카니즘과 특촬물의 절묘한 결합,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비관적인 소년이 조금씩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성장해 가는 드라마적 구도, 종교적 신비주의를 적절히 혼합시킨 거대한 스케일의 미스테리, 그리고 매력적이고 다양한 미소녀들의 등장...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복합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만들어진 이 기괴한 작품은 하나의 신드롬까지 형성시키면서 일본 만화영화계를 평정하고야 맙니다.

일개 오타쿠 집단에서 시작하여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1987)', '건버스터(1989)',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1990)'로 화제를 몰고 왔던 신생 제작사 가이낙스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만들어낸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 GAINAX / PROJECT EVA / TX


지속적인 건담 시리즈의 실패와 로봇 아니메의 침체기 속에서도 용자물 등으로 로봇 장르에서 여전히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선라이즈는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공식석상에서는 오히려 '좋은 자극이 되었다'라는 신사적인 표현을 썼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아마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10여년전과 마찬가지로 선라이즈의 엄청난 역공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파상공세였습니다. '신기동전기 건담 윙(1995)', '기동신세기 건담 X(1996)', '기동전사 건담 MS 08소대 (1996)', '천공의 에스카플로네(1996)', '용자지령 다그온(1996)', '용자왕 가오가이가(1997)', '초마신영웅전 와타루(1997)', '사이버 포뮬러 사가/신(1996/1998)', '브레인 파워드(1998)', '카우보이 비밥(1998)', '가사라키(1998)', '턴에이 건담(1999)', '무한의 리바이어스(1999)', '빅오(1999)', '아르젠토 소마(2000)', '이누야샤(2000)'에 이르는(물론, 이 작품 외에도 좀 더 있습니다만... 일일이 쓰기에도 힘들 정도로 많네요.) 5년에 걸친 장대한 선라이즈 빅 웨이브가 만화영화계를 강타했던 것입니다.

ⓒ SUNRISE · SOTSU Agency (일부는 틀릴 수도 있음)

95년부터 2000년까지 시작된 선라이즈의 아니메 쓰나미


당시 방영되었던 선라이즈의 상당수 작품들은 10여년전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는데요. 안타까운 것은 이 파상공세와 함께 다양한 장르를 통해 일련의 실험을 거친 선라이즈가 이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했는지 이후에는 상업적 기획의도에 굉장히 충실한 작품들만 속속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선라이즈에서 일단의 크리에이터들이 '본즈'라는 제작사로 독립한 뒤에는 더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선라이즈의 파상공세와 함께 아니메 시장은 21세기 들어 양적으로 급격하게 팽창하게 됨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상업적 양산작품들이 대거 등장하기에 이르르지요.

물론 만화영화, 특히 일본 아니메에 있어서 반드시 로봇 아니메가 주도권을 쥐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만, 로봇으로 인해 시작된 여러가지 가치 있는 상상들이 미래의 실현가능한 기술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SF 혹은 로봇 아니메의 가치는 남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먼옛날의 전설처럼 되어버린 마크로스와 선라이즈의 파상공세, 그리고 에반게리온과 선라이즈의 역습과 같은 현상은 2000년대에 들어서는 아쉽게도 재현되지 못했지요. 물론,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가이낙스의 2007년작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과거 로봇 아니메의 향수를 느끼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마크로스 탄생 25주년 기념작 마크로스 프론티어, 신세대 건담의 힘을 보여준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 시리즈와 건담 30주년을 기념한 기동전사 건담 UC의 시동, 그리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은 여전히 로봇 아니메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기동전사 건담이나 마크로스, 그리고 에반게리온과 같이 아니메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버릴 마스터피스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기대감을 넘어 이제는 조금 안타까운 느낌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낼 걸작의 탄생은 아직 이른 이야기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로봇 아니메가 아닌 다른 새로운 장르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가 열린 지금, 새로운 아니메의 시대가 시작하기를 기대해 보아도 될까요.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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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버전 디지팩 케이스로 출시, 1.11과 동일한 디자인

침내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파, '에반게리온 2.22 You Can(not) Advance'가 국내에서도 블루레이와 DVD로 동시에 발매예정이라고 합니다.

1.01 버전 출시 이후 1.11 버전이 나왔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2.22 버전으로 바로 출시가 되는군요. 저처럼 1.01 버전 산 다음 1.11 출시에 땅을 쳤던 사람들에게는 이번 2.22 출시는 이전처럼 삽질할 수 있는 여지는 지워준 셈이 되겠습니다.

사실, 마니아의 입장에서라면 2.02 버전도 나름의 소장품이 될 수 있을텐데, 왠일인지 이번에는 2.22로 바로 점프하고 계십니다. 극장에서 상영된 버전이 2.02라면 일부 작화가 수정된 버전이 2.22인데요. 두 버전을 모두 구입할 정도의 마니아가 예상 외로 없어서 였는지 궁금하네요.

마니아층이 옅은 한국만의 경우라면 모를까, 일본에서도 2.02 버전은 출시가 안된 것 같더군요. 뭐, 하여간에 저같은 캐주얼 팬에게는 별 문제 없는 일이올습니다만.

이번 2.22의 패키징은 1.01 혹은 1.11과 동일한 스타일의 패키징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블루레이 버전의 경우에는 OST CD 합본팩도 출시된다고 하는군요. 비슷한 구성에 엽서와 스티커가 들어 있던 1.01 DVD SE 버전과 달리 DVD 2.22 버전에는 마우스패드가 포함될 모양인 것 같습니다. 이 구성은 블루레이 버전에서도 동일한 것 같군요.

전작의 스토리를 압축하고 재구성하고 뒤바꿔 버린 새로운 해석, 15년전에 정점에 달했던 작화 퀄리티를 압도하는 절정의 퀄리티와 박진감 넘치고 압도적인 비주얼, 아슬아슬한 각도로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을 담은 덕후적인 카메라 구도 등, 명실상부 새로운 에반게리온의 임팩트를 이번 DVD를 통해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7월말부터 8월초 사이에 출시 예정이라고 합니다. DVD 출시는 아인스앰엔앰(구 태원 엔터테인먼트)에서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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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gai Go/Dynamic Pro·Toei Animation

 

큐티 하니 (1973), キューティーハニー / Cuty Honey


<정보>

◈ 원작: 나가이 고, 다이나믹 프로
◈ 연출: 카츠마타 토모하루, 모리시타 고조, 시타라 히로시 外
◈ 각본: 쯔지 마사키, 타카쿠 스스무, 후지카와 케이스케
◈ 캐릭터 디자인: 아라키 신고
◈ 작화감독: 아라키 신고, 코마츠바라 카즈오, 다카하시 신야 外
◈ 미술디자인: 우라타 마타지
◈ 음악/주제가: 와타나베 타케오 / 마에카와 요코 (歌)
◈ 제작: 도에이 동화
◈ 저작권: ⓒ Nagai Go/Dynamic Pro·Toei Animation
◈ 일자: 1973.10.13
◈ 장르: 변신마법소녀, 액션
◈ 구분/등급: TVA (25화) / 초등학생 이상 관람가 (PG)


<시놉시스>

시스터 질이 이끄는 정체불명의 조직 팬더 크로(원작명칭: 판사 크로), 그들이 노리는 것은 키사라기 박사가 발명한 공중원소 고정장치(‘Re:큐티하니’에서는 I 시스템)로, 엄청난 파워를 갖고 다양한 변신이 가능한 꿈의 장치이다. 키사라기 박사는 팬더 크로에 의해 죽기 전 공중원소 고정장치를 자신이 개발한 안드로이드 소녀 키사라기 하니에게 장착을 시키고 숨을 거둔다. 

키사라기 박사의 원수를 갚고 팬더 크로의 야망을 분쇄하기 위해 키사라기 하니는 사랑의 전사 큐티 하니로 변신하는데...

 
<소개>

나가이 고가 '주간 소년 챔피온'에 1973년 10월부터 74년 1월까지 연재한 단행본 2권 분량의 코믹스를 원작으로 제작된 TV 애니메이션. 나가이 고의 전작 '아바시리 일족의 비밀'에 이은 또 하나의 문제작으로, 변신소녀에 폭력(나가이 고 원작의 코믹스들은 대게 액션보다는 폭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측면이 있다.)과 에로티시즘을 결부한 작품이다. 2권 분량의 코믹스보다는 거의 동시에 전개된 TV 시리즈로 인해 이름이 더 알려진 작품으로, 당시 어느 정도 고정장르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마법소녀물을 남성적인 관점에서 제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코믹스의 폭력과 에로티시즘은 상당히 순화되어 히어로물적인 성격으로 변모했는데, 여자 캐릭터가 단독 주인공으로 액션장르에 등장한 아니메는 큐티 하니가 최초라 할 수 있다.  

그 표현순위가 TV 시리즈를 위해 굉장히 순화되었다고는 하지만 하니가 전라로 몸을 들어내었다가 다시 변신하는 과정(물론, 중요부위는 갖가지 사물과 배경을 동원하여 가렸다)은 당시의 일본 TV에서는 충격적인 연출이었다. 원작의 스타일은 굉장히 하드한 폭력물이었지만, TV 시리즈는 유쾌하고 코믹한 액션 활극으로 변모하면서 인기 역시 기대이상이었다. 평균 시청률 8.8%, 최대시청률 10.5%를 기록. ([1] 참조)

다만, 당시로서는 매우 선정적인, 은근하게 에로티시즘을 표방하는 작품의 성격은 시청자들(특히 부모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게 되고 3쿨 정도의 분량으로 예정되어있던 시리즈는 시청률 부진이 아닌, 시청자 항의로 조기 종영하게 된다. 와타나베 타케오의 주제가 '큐티 하니'는 재치가 넘치는 오프닝 영상과 함께 큰 인기를 끌게 되는데, 이후로도 수없이 리메이크 되면서 시대를 뛰어넘어 꾸준한 인기를 끄는 스테디셀러가 된다. 

ⓒ Nagai Go/Dynamic Pro·秋田書店

나가이 고의 원작 코믹스 표지


신 큐티 하니 (1994) 


ⓒ Nagai Go/Dynamic Pro·Toei Animation

<정보>

◈ 감독: 나가오카 야스치카
◈ 각본: 시즈야 이사오, 清水東, 植村更
◈ 캐릭터 원안: 나가이 고
◈ 캐릭터 디자인/작화감독: 호리우치 오사무
◈ 메카닉 디자인: 아베 쿠니히로, 키시모토 세이지
◈ 미술감독: 사카모토 노부토 外
◈ 오프닝 영상 원화: 와타나베 케이스케, 요시다 토오루, 요시마츠 타카히로, 이치하라 미츠루
◈ 음악/주제가: 토야마 카즈히코 / les 5-4-3-2-1 (歌)
◈ 제작: 다이나믹 프로, 도에이 비디오, 스튜디오 주니오
◈ 저작권: ⓒ Nagai Go/Dynamic Pro·Toei Animation
◈ 일자: 1994.03.21
◈ 장르: 변신마법소녀, 액션
◈ 구분/등급: OVA (8화) /  고교생 이상 관람가 (R)


<소개>

원 TV 시리즈 이후 무려 20여년 만에 리메이크 된 전 8부작의 OVA. OVA라는 매체적 특성에 힘입은 데다가 캐릭터 원안에 나가이 고가 참여하면서 4편의 큐티 하니 아니메 중에서는 가장 원작과 분위기가 가까운 큐티 하니로 태어났다. 특히, 문제의 변신장면에서는 상당한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며, 그 덕분인지 응큼남(?)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기존의 시리즈로부터 30년 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원작의 캐릭터들과 나가이 고 월드의 캐릭터들이 카메오로 다수 등장하는 등, 90년대 초반의 복고 분위기에 편승하여 큰 인기를 끌게 된다. 기대 이상의 인기를 끌자 제작사 측에서는 4부로 예정되어 있던 OVA를 12화로 연장할 것을 결정하게 되는데, 그 결과 4부에서 어느 정도 이야기가 일단락 되고 5화부터는 별개의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하지만, 5화부터 인기가 급락하고 8부까지 제작이 진행된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제작사인 스튜디오 주니오마저 도산해버리면서 신 시리즈는 8화에서 그 시동을 멈추게 된다. 결과적으로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원작과 가까우면서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되어버린 셈이다.

새롭게 만들어진 오프닝 영상은 '천원돌파 그렌라간(2007)', '므네모슈네의 딸들(2008)'에서 작화감독을 맡았던 이시하라 미츠루, '푸른유성 SPT 레이즈너(1985)', '풀메탈패닉(2002)', '기동전사 건담 SEED(2002)' 등에서 메카 작화감독으로 활약한 요시다 토오루, '각오의 스스메(1996)', '성계의 문장' 시리즈에서 캐릭터 디자인으로 활약한 와타나베 케이스케, '초수기신 단쿠가(1985)', '트라이건(1998)'. '사이버 포뮬러' 시리즈에서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던 요시마츠 타카히로 등이 원화를 맡아 원작의 스타일과 신작의 세련된 작화가 어울린 육감적이고 스피디한 영상미를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큐티 하니 시리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오프닝)


큐티 하니 F (1997) 


ⓒ Dynamic Pro·Iisaka Yukako·Toei Animation

<정보>

◈ 감독: 사사키 노리요
◈ 시리즈 구성: 야마구치 료타
◈ 캐릭터 디자인: 시모가사 미호
◈ 작화감독: 스기모토 미치아키, 키타노 요시히로, 타카시 시게루, 호소야마 마사키 外
◈ 미술디자인: 鹿野良行 外
◈ 음악/주제가: 사하시 토시히코 / SALIA (歌)
◈ 제작: 도에이 동화, TV 아사히
◈ 저작권: ⓒ Dynamic Pro·Iisaka Yukako·Toei Animation
◈ 일자: 1997.02.15
◈ 장르: 변신마법소녀, 순정, 액션
◈ 구분/등급: TVA (39화) / 초등생이상 관람가 (PG)


<소개>

OVA와 비슷한 시기에 리메이크 된 TV 시리즈는 4개의 큐티 하니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원작과 스타일이 다른 장르이다. 90년대에 인기를 끌고 있던 '세일러 문' 시리즈 스타일의 변신소녀 컨셉으로 제작되었는데, 원 시리즈나 세일러 문이나 모두 싸우는 변신소녀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전자가 폭력과 에로티시즘에 기반한 남성적 작품이었다면, 세일러 문류의 시리즈는 순정 마법소녀물에 더 가까운, 여성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시리즈는 속된 말로 상당히 말랑말랑한 전개가 되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연재를 시작했으며, TV 시리즈에 모티브가 된 이시키 유카코의 동명 코믹스가 소녀만화잡지에 연재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전개라고 할 수 있다. 하니가 연모하는 꽃미남 캐릭터들부터 다채로운 미형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90년대의 변신소녀물의 컨셉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줄거리 역시 원작과는 전혀 다른 전개로 일종의 스핀오프격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트렌드와 잘맞는 스타일로 원작을 모르는 저연령대의 신규팬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었으며, 특히 여자아이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는데, 하니가 전사 형태의 변신 외에도 다채로운 직업의 여성들로 변신하는 모습은 80년대의 변신소녀물의 명작 '요술공주 밍키(1982)'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무지개요정 하니'이라는 기막한(?) 제목으로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다. TV 시리즈의 인기에 힘입어 97년 3월에는 시리즈 최초로 극장판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74년 큐티 하니도 토에이 만화축제를 맞이하여 극장에서 상영했으나 별도의 극장판이 아닌 TV 시리즈 12화를 재방영한 것이었다.)


Re 큐티 하니 (2004) 


ⓒ Laterna·Toei Video·Gainax·Towani


<정보>

◈ 총감독: 안노 히데아키 
◈ 감독: 이마이시 히로유키 (1화), 이토 나오유키 (2화), 마사유키 (3화)
◈ 각본: 나카시마 카즈키, 타키 코이치, 카사이 타케오
◈ 캐릭터 디자인/작화감독: 히라마츠 타다시
◈ 키 애니메이션: 이마이시 히로유키, 히라마츠 타다시, 하마수 히데키
◈ 음악/주제가: 우에다 스스무 / 코다 쿠미
◈ 제작: 가이낙스, 도에이 동화
◈ 저작권: ⓒ Laterna·Toei Video·Gainax·Towani
◈ 일자: 2004.07.25
◈ 장르: 변신마법소녀, 액션
◈ 구분/등급: OVA (3화) / 고교생 이상 관람가 (R)


<소개>

21세기 들어 새롭게 복귀한 큐티하니는 공교롭게도 결혼 후 오랜만에 아니메 업계로 돌아온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복귀작이 되었다. 안노 감독은 다소 과격하고 선정적인 이 작품을 복귀작으로 고르면서 한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실사영화로 큐티 하니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라비아 아이돌 출신의 사토 에리코를 기용하고, 애니메이션적 촬영기법을 실사영화에 적용한 실험적인 연출을 선보이며 안노 감독다운 센스를 발휘했다. 아니메는 실사영화로부터 2개월 정도 텀을 두고 OVA로 출시되었는데, 안노 감독이 실사영화 쪽에 비중을 두면서 아니메는 총감독으로 전체를 조율하고 실제 연출은 이마이시 히로유키(천원돌파 그렌라간 감독)와 같은 가이낙스의 차세대 연출진에게 바통을 넘겼다. 오프닝은 실사영화와 동일한 오프닝을 사용하였다.

가이낙스의 작품답게 아니메는 시종일관 스피디하고 다이나믹하며 만화적인 연출기법이 볼거리이다. 나가이 고의 자극적인 폭력성과 가학적 에로티시즘은 거세했으되, 다이나믹한 카메라워크와 가이낙스 특유의 오타쿠적 취향이 가미된 큐티(?)한 에로티시즘과 복고주의가 이를 대체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듯. 덕분에 느낌은 완전히 가이낙스의 스타일이었지만 전체적인 광기는 왠지 모르게 원작의 느낌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안타깝게도 실사영화의 흥행실패와 함께 OVA 역시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작품이 되어버렸지만, 그 애니메이션적 완성도는 탁월하다고 할 수 있으며, Re 큐티 하니의 다이나믹한 작화 스타일, 즉 작고한 일본 아니메 불세출의 작화가 카나다 요시노리의 스타일을 이어받은 '카나다 流'(일본은 유파나 어떤 스타일을 총칭할 때 사무라이들의 검술유파를 칭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류'라는 단어를 종종쓰곤 한다)는 '천원돌파 그렌라간(2007)' 등에서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된다.

실사영화와 OVA 아니메에 모두 사용된 코다 쿠미의 주제가 '큐티 하니'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 그녀의 재기를 다지는 발판이 되었으며, 한국의 아유미가 다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한가지 더 특이할만한 일은 실사영화에서 원작자인 나가이 고 선생이 카메오로 출연했다는 것.

ⓒ GAINAX·WoWow

OVA 아니메보다 앞서 제작된 안노 히데아키의 큐티하니 실사판

ⓒ NAGAI GO·ブロ―ドマ―クス·デイ―ブサイド·ハニ―製作委員會

2007년에는 25화 TV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참고 사이트>

[1] キューティーハニー, Wikipedia Japan
[2] Cutie Honey, Wikipedia
[3] 큐티 하니, 위키피디아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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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발매되었던 '에반게리온: 1.01 You are (not) alone'(이하 에바 序)의 초회 한정판 DVD 패키지를 얼마전 구입했습니다. 초회 한정판이라면서 1년 이상 판매되고 있군요.


에반 序 DVD는 일본의 원 패키지를 거의 100% 그대로 옮겨온 제품으로, 일단 기본 이상의 충실한 구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초회 한정판에는 DVD 외에 OST CD가 패키지 형태로 포함되어 있지요. 원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던 대본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CD 패키지의 구성은 무난합니다. 사기스 시로의 묵직한 음악들이 전편을 장식하고 있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우면서도 긴장감을 자아내는 음악 구성이죠. CD 북클릿에는 각 수록 음악의 키와 템포, 그리고 그에 대한 간단한 주석과 함께 작곡가와 세션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너스 트랙까지 포함하여 총 26곡 수록.


본 DVD 패키지의 모습. 심플하고 강렬한 빨간색의 하드 커버 속에서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검은색 디지팩 패키지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1.01이라는 상당히 소프트웨어적인 라벨링으로 패키지를 묘사하고 있는데요. 최상위 1은 이번 4부작 극장판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임을 표현하는 듯 싶고, 0.01은 말 그대로 이 새로운 극장판 시리즈의 버전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실제로 올해 출시된 블루레이 버전의 경우에는 1.11이라는 버전이었죠. 소제목인 'You are (not) alone.'은 주인공인 신지, 혹은 작품을 보는 당신이 혼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라는 상반되는 조합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작품 전체의 주제를 미리 암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디지팩 패키지의 내부는 다시 붉은 색으로 컬러링이 되어 있습니다. 작 중에서 자주 등장하는 붉은 LCL 용액을 표현하는 듯한 느낌인데요. 어찌보면 지나치게 심플한 감도 있습니다. DVD 커버 역시 메탈릭 레드의 바탕에 빛을 받아야지만 식별이 가능하도록 라벨링이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타이틀과 같은 정보를 노출하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듯한 디자인 컨셉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내부 부록의 구성은 북클릿과 스티커, 그리고 수록된 일러스트 코팅 필름을 끼울 수 있는 종이 앨범(?)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차, 패키지 구성시 실수로 북클릿이 접혀진 체 패키징이 되어버렸나 보군요. 이정도는 뽑기운이라고 위로하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총 14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는 북클릿은 비록 짧지만 나름대로 알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품의 제작 의도, 이번 극장판의 제작 키워드인 'Rebuild'의 의미(물론,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등장인물 및 각종 작품 속의 키워드에 대한 짧은 설명. 셔플먼트 디스크의 수록 내용 설명 및 스탭진 리스트. 셔플먼트 디스크에 수록된 'Rebuild of Evangelion: 1.01'에 대한 해설. 만화영화 제작에 사용되는 용어들에 대한 간단 해설 및 DVD 챕터 리스트. 마지막으로 총감독이자 원작작인 안노 히데아키의 인사말 등이 북클릿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아, 물론 위의 사진처럼 신지와 레이의 전신 일러스트도 수록되어 있구요.



위의 사진은 디스크의 메뉴 구성으로, 그 중 위의 세 컷은 본편인 디스크 01의 메뉴 구성이며, 마지막 컷은 셔플먼트 디스크인 디스크 02의 메뉴 구성을 보여줍니다. 이 네 컷의 공통점은 모두 메뉴가 실행된 이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서서히 무지개가 나타난다는 점인데요. 본편에서도 그렇고 몇 번씩 무지개에 대한 묘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 작품에 있어서 꽤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설정 메뉴에는 돌비 디지털 EX 6.1과 2.0, 그리고 돌비 디지털 ES 6.1의 세가지 사운드 방식을 제공하는군요. 하지만, 집에는 달랑 2.1채널 스피커만 있는지라 사운드 리뷰는 아쉽게도 통과.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제품 설명에는 일본어 자막도 지원한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어 자막 밖에 지원되지 않습니다. 지원되는 언어 역시 일본어 뿐.

 

챕터 리스트 역시 다른 작품들과 달리 독특한 구성을 선보이는데요. 얼핏 보면 메뉴 제작을 위해 쓰이는 스크립트 언어를 미처 제대로 된 라벨로 바꾸지 못하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는 음악감독인 사기스 시로가 OST 작곡시 부여한 곡의 이름으로 이를 그대로 챕터에 적용하여 음악이 바뀌는 시점으로 각 챕터를 나누었다고 하는군요. 역시 안노 감독 이하 스탭들만의 독특한 센스를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셔플먼트는 안노 감독이 각 장면마다 텔롭 형태의 주석을 첨부한 에바 序의 본편 영상과, 실제 만화영화가 완성되기 전의 레이아웃과 원화, 동화들을 촬영한 'Rebuild of Evangelion: 1.01' 영상(배경음악만 다른 사기스 시로 버전과 죠셉 버전의 두 가지로 보여짐), 그리고 본편의 영상을 재구성하여 편집한 Promotion Video인 'Angel of Doom PV', 마지막으로 트레일러 영상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품에 안노 감독이 직접 텔롭을 입혀 다시 재구성한 본편은 흥미로운 시도이지만, 동시에 텔롭 연출 이외에는 본편과 완벽히 중복되는지라 DVD 패키지로서의 가치에는 약간 의문이 드는군요. 특히, 왠만한 셔플먼트에는 기본적으로 수록되는 스탭들과의 인터뷰 장면들이 수록되어 있지 않아 아쉬움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바 序 (좌측) / 에바 TV 시리즈 (우측)


원 TV 시리즈와의 비교 영상(좌측이 이번 에바 序, 우측이 원 TV 시리즈). 전체적으로 선명하고 풍부한 색감입니다. 아울러 현대적인 취향에 맞는 좀 더 샤프한 느낌으로 그려졌구요. 원 시리즈에 비하여 훨씬 CG 작업이 많이 추가되어 업그레이드 되어진 원화/동화와 함께 현대적인 감각에 어울리는 영상미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전 시리즈의 퀄리티가 워낙 좋았기에 12년의 시간이 흐른 뒤의 리빌드 작품과 비교해도 굉장히 떨어진다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군요. 어쩌면 1.01이라는 이번 시리즈의 버전 표기는 이런 시각적인 측면에서 꽤 타당한 버전 명기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첫번째 시리즈의 경우는 전체적으로 이전 TV 시리즈의 총집편의 일부라는 수준에 그쳤지만, 올해 개봉된 두번째 시리즈 인 '破'의 전개로 보아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띌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나 시리즈의 마지막 즈음에 등장한 카오루의 대사 '여전히 세번째구나.'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은 이번 리빌드 4부작의 전개를 암시하는 키워드가 아닌가 싶군요. (뭐랄까, 윤회적인 세계관이 그 테마가 될 듯한 느낌인데요. 자세한 얘기는 후일 극장판 리뷰를 쓰게 된다면 다루도록 하구요.)

 

전체적으로 충실한, 그러나 몇 몇 부분, 특히 셔플먼트 디스크의 구성 측면에서는 약간은 아쉬움이 남는 패키지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의 팬들에게는 나름 훌륭한 패키지가 아닐까 싶군요. 무엇보다도 다시금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에바의 DVD라는 점에서, 이번 버전업은 괜찮았다고 생각되는군요. (확실히 제타 건담 3부작보다는 나은 모습이 될 듯 한데요. 제타 건담을 완전히 다시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이번 에바의 리빌드를 볼 때마다 드는 개인적인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에반게리온 : 서(序) 1.01 SE [한정판] + O.S.T - 10점
안노 히데아키 외 감독/아인스엠앤엠(구 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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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2007년 12월 28일, 엘로스의 네이버 블로그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에 작성된 리뷰 "큐티 하니 vs 큐티 하니 vs 큐티 하니"를 본 블로그로 옮긴 글입니다.


ⓒ LATERNA·TOEI Video·GAINAX·TOWANI


<정보>

◈ 원작: 나가이 고
◈ 감독: 사타라 히로시/카츠마타 토모하루 (큐티 하니, 973년 TV 시리즈), 나가오카 야스치카 (신 큐티 하니,1994년 OVA), 사사키 노리요 (큐티 하니 플래쉬, 1997년 TV 시리즈), 안노 히데아키 (Re:큐티 하니, 2004년 OVA)



<시놉시스>

시스터 질이 이끄는 정체불명의 조직 팬더 크로(원작명칭: 판사 크로), 그들이 노리는 것은 키사라기 박사가 발명한 공중원소 고정장치(‘Re:큐티하니’에서는 I 시스템)로, 엄청난 파워를 갖고 다양한 변신이 가능한 꿈의 장치이다. 키사라기 박사는 팬더 크로에 의해 죽기 전 공중원소 고정장치를 자신이 개발한 안드로이드 소녀 키사라기 하니에게 장착을 시키고 숨을 거둔다. 

키사라기 박사의 원수를 갚고 팬더 크로의 야망을 분쇄하기 위해 키사라기 하니는 사랑의 전사 큐티 하니로 변신하는데... (‘신 큐티하니’는 원작의 내용과는 다른 내용으로 진행되며, 다른 리메이크 작들도 원작의 내용에 각색을 가하여 조금씩 내용상의 차이가 있음.)


1. 시대를 앞서간 나가이 고의 섹시 코드, 등장하다.

큐티하니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삼십여 년 전 작품으로, '마징가Z', '그렌다이저', '겟타로보'와 같은 70년대 수퍼로봇물의 아버지인 나가이 고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가이 고, 70년대 유소년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준 만화가는 전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일본 만화영화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지만, 원래 그의 작품은 유소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코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징가 Z와 같은 그의 인기작도 원작 자체는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잔혹하거나 성적인 코드들이 많이 등장하며(사실, 애니에서도 로봇의 입에서 피 같은 기름을 뿜어내거나 팔이 뜯겨지는 장면들은 대상이 인간이 아닐 뿐, 잔혹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데빌맨(1972)’이나 ‘바이올런스 잭(1988)’과 같은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만화영화들은 그야말로 잔인함과 선정적인 묘사의 극을 달리며, 그를 ‘하드고어 장르의 개척자’로 불리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해주고 있지요.

이번에 얘기할 작품 ‘큐티하니’는 3번의 리메이크, 1번의 실사영화화를 거쳐 일본에서 TV 드라마까지 방영되었으며, 주제가도 만화영화가 리메이크 될 때마다 리메이크 되더니 결국은 한국에서까지 가수 아유미 양이 리메이크 하는 등,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섹시 변신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합니다.(원작 만화는 섹시코드가 도를 지나쳤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그의 표현방식만으로 그의 작품을 평가절하할 의도는 없으니 오해 마시길.)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이런 전설적인 큐티 하니의 최초부터 현재까지를 조금씩 살펴보면서, 나가이 고 선생이 창조한 섹시 변신물의 전설이 어떻게 변천이 되어 왔는지를 한 번 살펴보려 합니다.
 
그림 1. 좌측부터 '아바시리 일가', '파렴치 학원', '큐티 하니', '바이올런스 잭'의 코믹스 표지.


2. 성인들을 위한 변신소녀물? 70년대의 문제 소녀 큐티 하니

‘파렴치 학원(1968)’ 같은 작품(코믹스. 애니메이션화 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듯.)으로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마징가 Z (1972)’로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은 나가이 고의 변신소녀물 ‘큐티 하니’. 60~70년대의 변신소녀물이 ‘요술공주 샐리(1966)’ 시작으로 하여 액션성을 배제한 비폭력성과 소녀적 취향 및 감성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큐티 하니’는 최초로 변신소녀물에 액션장르를 결합한 작품입니다.(결국, 세일러 문의 할머니뻘 되는 셈입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큐티 하니는 꽤 기념비적이고 선구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습니다만, 나가이 고의 작품세계는 그것을 한 차원 뛰어넘은 것이었으니, 바로 선정적인 장면이 방영된 최초의 TV 시리즈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성적인 표현수준이 매우 높은 일본이지만,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표현방식은 TV에서는 허용되기 힘든 시절이었고, 이때 등장한 나가이 고의 ‘큐티 하니’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면, 즉 여성의 가슴을 노출하거나, 옷이 벗겨지면서 변신하는 센세이션 한 장면 등을 보여줌으로써, 일대의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덕분에 시청자의 항의로 조기 종영되었다는 군요. 그래도 25화나 방영했답니다, 볼 거 다보고 종영한 셈이군요.)

게다가 그 표현 수준은 TV 방영을 위해 원작인 코믹스(전 4화 발간)에 비해 파격적으로 낮춘 것이라니 원작의 포스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만, 반사회적이거나 세기말적 요소를 담고 있는 기존의 나가이 고의 작품에 비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코믹한 요소가 주를 이루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벼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앞서간 작품 소재는 어지간한 명작 만화영화들도 두어 번 밖에 리메이크가 되지 않았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무려 5번이나 리메이크(영화, 드라마 포함) 되는 진기록을 세우게 됩니다.(역시 선정성은 시대를 넘어서도 통용이 되는 것 일까요.)

ⓒ DYNAMIC Pro·TOEI Animation

그림 2. 73년작 큐티 하니 TV 시리즈의 장면. 70년대 TV 만화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다니... 당시로서는 파격 그 자체.


3. 소녀의 귀환, 글래머러스한 섹시미녀에서 꽃 같은 미소녀까지

수많은 화제를 뿌리고 전설의 작품이 되어버렸던 ‘큐티 하니’는 90년대 복고주의 열풍을 타고 다시 한 번 섹시한 바람을 몰고 옵니다. OVA로 재 제작된 94년작 ‘신 큐티하니’는 원작자 나가이 고가 캐릭터 원안에 참여하고 여전히 멋진(?) 변신장면을 앞세워 한껏 기대치를 올려주긴 했으나, 제작단계에서부터의 잘못된 기획으로 이야기 전개가 무너지면서 용두사미 격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4화로 기획했으나 인기가 높자, 12화로 재기획했다가 판매율이 떨어지니 8화로 급히 마무리. 베스트 아니메 참조.)

스토리 라인은 지금까지 리메이크 된 작품 중에서는 가장 엉성합니다. 원작의 스토리가 아닌 오리지널 스토리로 진행하면서, 앞부분을 급격히 생략하고 갑자기 하니가 등장하여 원작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인물구도를 알지 못한 체 작품을 감상해야 하는 불편함을 주었고, 작화 퀄리티는 높아졌으나, 디자인(메카닉, 의상, 색감 등)은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을 준 아쉬운 작품이었죠.(물론,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 평가하다 보니 지금의 관점이 선입견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 NAGAI GO/DYNAMIC Pro·TOEI Animation

그림 3. 94년작 '신: 큐티하니'의 오프닝 스틸컷. 개인적으로 네편의 큐티 하니 오프닝 중에서는 제일 좋아하는 오프닝.

그래도 희대의 변신씬이나 나가이 고 다운 장면들, 로켓펀치를 발사하는 응큼한 할아버지(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군요.)이나 데빌맨과 닮은 조연급 캐릭터의 등장은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킬 만 했습니다. ‘복고주의의 조류 속에 원작의 포스를 등에 업고 재미 좀 보려 했던 작품’이라면 너무 혹독한 표현일까요. 오히려 전 원작의 흥행 포인트 중 하나인 선정적인 요소를 과감히 제거하고, 기존의 미소녀 변신물의 공식을 그대로 적용한 97년작 TV 시리즈 ‘큐티 하니 플래쉬’를 OVA보다는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물론, 제가 좋아라하며 본 것은 OVA 였습니다만, 쿨럭.)

물론, ‘왕자스러운 꽃미남 캐릭터와 그를 사모하는 여주인공’은 이미 너무 많이들 사용한 설정인데다가 90년대의 빅히트작 '세일러 문' 시리즈의 아류라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모습 등 그 발상은 참신하지 못했지만, 나가이 고 원작의 특징이었던 괴기스러운 캐릭터와 흥행 포인트였던 선정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주인공인 큐티 하니만을 가져와 변신소녀물의 원래 시청층이었던 소녀들의 취향에 맞는 마법소녀 스타일로 각색하여 나름의 완성도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변신소녀물의 새장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지 못하고 결국은 아류작의 스타일로 재기하는 비운의 복귀. ‘큐티 하니’의 리메이크는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 했습니다.

ⓒ DYNAMIC Pro·IISAKA YUKAKO·TOEI Animation

그림 4. 97년작 '큐티 하니 플래쉬'의 오프닝 스틸컷. 소녀물로의 전환을 짐작할 수 있다.


4. 소녀, 패러디의 귀재 안노 히데아키와 조우하다.

‘왕년의 섹시 여가수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복귀를 시도했으나, 복귀앨범은 볼거리만 신경을 쓴 나머지 잠깐 반짝하다가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재차 내놓은 앨범은 흥행을 고려한 나머지 그녀만의 색깔을 잃고 말았죠. 그렇게 첫 번째 복귀에서 쓴 잔을 마셨던 그녀, 이번에는 흥행의 귀재라는 모 프로듀서와 함께 다시 전성기의 그녀를 연상시키는 듯한 섹시함과 함께 나이를 잊은 듯한 발랄함으로 돌아옵니다. (중략)’

큐티 하니와 안노 히데아키 감독과의 만남을 ‘전설적인 섹시가수의 복귀 스토리’라는 소재로 바꿔서 기사를 쓴다면, 이런 전개가 될까요.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감성을 가진 안노 감독은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하니의 매력을 남김없이 모두 발산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에 맞는 발랄하고 정열적인 소녀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가이낙스만의 화려하고 현란한 비주얼은 특히나 ‘Re: 큐티 하니(2004)’에서는 원색적인 색감과 극단적인 만화적 연출력까지 곁들여져, 혹자가 말하듯 키치적인 요소를 화면 가득 페로몬처럼 뿌리고 다닙니다. 게다가, 나가이 고만의 괴기스러운 캐릭터는 이러한 키치적인 요소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찰떡 궁합을 선보였던 것이죠. 70년대의 문제작을 90년대의 문제아 감독이 복귀작으로 골라 21세기에 연출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을까요. 오타쿠의 정점에 올라 오타쿠의 문화를 정면으로 부정했던 안노 감독의 복귀작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오타쿠적인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나 ‘톱을 노려라, 건 버스터’ 등에서 익히 보여준 그의 절묘한 패러디 연출력은 아예 리메이크 임을 대놓고 표명한 이 작품에서는 마치 물을 만난 고기 마냥 생동감 넘치는 꿈틀거림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런 안노 감독의 힘으로 인해 그녀는 30여 년이 지나 다시금 화려한 부활의 서곡을 알리게 됩니다.
 

ⓒ LATERNA·TOEI Video·GAINAX·TOWANI

그림 5. 2004년작 'Re:큐티 하니'의 오프닝 컷. 복고와 미국식 코믹스, 그리고 가이낙스 스타일의 집대성. 과장과 함축이라는 만화적 표현이 잘 살아 있는 스피디하고 경쾌한 오프닝.


5. 실사영화를 거쳐 TV 드라마까지... 그녀는 계속 변신한다.

하니의 변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욕심 많은 안노감독은 그녀를 실사영화에까지 등장시키게 되죠. 그라비아 모델 출신의 사토 에리코를 주연으로 기용한 실사판 ‘큐티 하니’를 애니메이션과 함께 동시 제작하는 괴력을 보여준 안노 감독, 게다가 90년대 작품에서는 그저 그렇게 리메이크 되었던 주제가 ‘큐티 하니’ 역시 일본의 대표 섹시 여가수 ‘코다 쿠미’에 의해 멋지게 재탄생 하게 됩니다.(코다 쿠미의 리메이크 곡은 실사판과 애니메이션에 모두 사용됩니다.)

실사판에 대한 평가는 제가 앞머리 5분만 본 다음 후다닥 꺼버린 관계로 본문에서는 평을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만, 극도의 키치적인 설정이 실사판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유치한 아동용 특촬물을 보는 듯한, 어떤 면에서는 괴작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주인공의 속옷씬이 자주 나오니 아동용은 물론 아니겠지만.) 마찬가지로 키치적인 느낌이 강렬했던 할리우드 영화 ‘오스틴 파워’ 시리즈와 비교해도 좋을 듯 하구요.

☞ 큐티 하니 실사판 리뷰: 괴작열전 No.55 큐티 하니 by 페니웨이, 페니웨이(TM)의 In This Film

그녀의 복귀는 이 정도로만 끝나지 않고 TV 드라마로까지 부활하며, 새로운 ‘큐티 하니’의 전성시대를 예고합니다. 이 기세라면 헐리우드의 러브 콜도 한 번 기대해봄직 하군요.(‘드래곤 볼’까지 실사영화로 리메이크되는 이 마당에 ‘큐티 하니’는 꽤나 구미가 당기는 소재임에는 분명합니다만.)

물론, 그녀의 계속적인 등장이 반드시 좋은 모습만을 보여 준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녀는 분명 좋은 의미보다는 안 좋은 의미에서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캐릭터임은 분명하니까요. 그러나, 그녀가 30여 년 동안 등장한 오프닝에서 항상 읊어대던 그 대사 ‘かわるわよ(카와루와요: 바뀔 거예요)’처럼 앞으로도 계속 변신하는 그녀를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임에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 GAINAX·WoWow (좌) / ⓒ NAGAI GO·ブロ―ドマ―クス·デイ―ブサイド·ハニ―製作委員會 (우)

그림 6. 큐티 하니 실사판(좌) 과 큐티 하니 드라마 DVD 커버(우)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애니메이션 영화 리뷰 모아요~]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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