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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 찌는 무더운 여름, 만화영화와 함께 하는 잠깐의 휴식


격적인 휴가철입니다. 물론, 얼마전의 기록적인 폭우와 피해로 슬픔을 겪은 많은 분들에게는 경황이 없는 나날이기도 하겠지만요. 게다가 날씨마저 우중충하니 모처럼의 휴가철에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예전같지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밤은 또 잠못드는 열대야가 계속될 수도 있구요. 그야말로 진퇴양난입니다.

현실을 벗어나 휴양지에서 보내는 일상에서의 탈출, 이것이 휴가의 목적 중 하나라면 궂은 날씨로 인해 야외로의 탈출이 여의치 않은 날에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취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데요. 그렇다면 뭐니뭐니 해도 그 대안은 영화 감상과 독서가 가장 제격이 아닌가 합니다. 앉은 자리에서 다양한 시공간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영화감상은 인간이 만들어낸 유희 중에서도 참으로 매력적인 유희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번 여름을 맞이하여 별바다의 서고에서도 여름철 휴가 중에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만화영화를 몇 편 소개코자 합니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여름이라는 계절에 어울리는 배경이나 여름에 보았으면 좋을 법한 작품들로 제가 몇 개 추려낸 작품들입니다. 될 수 있는데로 현재 DVD나 블루레이 타이틀로 출시된 작품들로 골라 보았는데요, 이는 기왕이면 불법 다운로드보다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보셨으면 하는 바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화영화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보통의 감상자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나름 유명한 작품들이 선정되면서 리스트가 다소 평이해진 것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다만, 이 작품들은 한 번 이상은 다시 봐도 괜찮을 작품들인지라 이번 기회에 다시 찬찬히 감상해보시는 것도 전과 다른 느낌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구요. 실제로 제 경우 이 작품들 대부분이 서너번 씩은 감상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자, 그럼 무더운 여름밤을 함께 할 만화영화들을 만나러 출발하실까요.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십니까(1984) / 마크로스 제로(2002)

ⓒ BIG WEST

84년도 마크로스 극장판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십니까(1984)'는 그해 여름에 일본 극장가에 개봉되어 커다란 호평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거대한 스케일의 SF 우주전쟁과 남녀간의 로맨스를 멋지게 버무려낸 맛깔스러움은 아직까지도 그 신선도가 유지되고 있을 정도로 생생하구요. 여기에 당시 아니메의 수준을 넘어선 초특급의 작화 퀄리티는 CG로 그려진 근래의 아니메와 비교해도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놀라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극중 민메이가 부르는 주옥같은 JPOP들은 여전히 작품과의 뛰어난 매치를 보여주고 있지요.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어렵사리 구한 마크로스 극장판 오리지널 비디오 테입을 한 친구의 집에서 전축과 연결하여 나름 스테레오 스피커 시스템을 구축하고 방안의 불을 끈 뒤 소규모 극장처럼 감상하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아니메를 본격적으로 감상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작품이기도 하구요. 민메이의 애절한 발라드와 인류의 존망을 건 거대한 우주전쟁이 벌어지는 클라이막스를 지나, 평온한 엔딩 뒤 조명이 꺼지는 무대에 서있던 민메이의 힘찬 '원,투'와 함께 경쾌한 엔딩 크레딧으로 연결되는 마지막은 여전히 아니메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DVD로는 절판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극장판 정도의 감동은 아니지만, CG를 통해 놀랍도록 정교한 디테일과 현란한 움직임을 보여준 OVA '마크로스 제로(2002)'도 한 여름밤의 킬링타임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붉은 돼지(1992)

ⓒ 1992 Nibariki · GNN

실, 미야자키 감독이 만든 대부분의 극장 아니메들이 여름 극장가를 통해 개봉되었기에 미야자키의 작품들은 거의 다 여름과 어울린다 하겠습니다. 멋진 모험과 액션을 선사한 '천공의 성 라퓨타(1986)'도 그러하고, 일본의 전원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웃집 토토로(1988)'도 그러하며, 마녀 배달부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마녀배달부 키키(1989)' 역시 여름과 잘 어울리지요. '원령공주(1997)'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그의 최근작인 '벼랑 위의 포뇨(2007)'도 모두 여름과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 하겠구요.

그러나, 굳이 한 작품을 고르라 한다면 저는 주저없이 이 작품 '붉은 돼지(1992)'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여름과 잘 어울리는 동시에 미야자키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한데요. 소년과 소녀를 주인공으로 했던 대부분의 미야자키 작품과는 달리, 붉은 돼지는 이탈리아 공군 파일럿이었던 한 사내가 전쟁과 인간에 혐오를 느끼고 스스로가 돼지가 되어 살아가는 어른 남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이야기는 꿈과 희망보다는 향수와 낭만을 이야기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지요.

지중해의 멋진 배경과 어우러지는 한 돼지의 모험과 사랑, 그리고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는 마치 한편의 유럽 영화를 보듯 여유롭고 부드러우면서도 익살스럽고 신명납니다. 여름밤을 수놓는 낭만적인 돼지의 모험, 몇 번을 맛봐도 질리지 않는 초특급 파스타와 같은 맛을 선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귀를 기울이면(1995)

ⓒ 柊あおい/集英社・二馬力・GNH

양적인 풍취와 유럽적인 내음이 잘 조화를 이룬 청춘물 '귀를 기울이면(1995)'은 큰 고저가 없는 평온한 드라마 속에서 소소한 일상의 재미가 돋보이는 보기드문 수작입니다. 도에이 동화 닛폰 애니메이션을 거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의 작품들에서 애니메이션을 담당해온 지브리의 고참 작화가 콘도 요시후미의 데뷔작(이자 유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오랫동안 미야자키와 타카하타의 작품들 속에서 그 내공을 쌓아온 콘도의 재능이 멋지게 개화한 한 편의 청춘 멜로 드라마라 하겠습니다.

섬세한 십대 소녀의 감성을 지브리 특유의 세심한 묘사와 서정적인 전개로 풀어내면서 잔잔하고 소소한 재미를 안겨준 작품인데요. 미야자키의 후계자로 지목받기도 했던 콘도지만 실상 귀를 기울이면에서 보여준 그의 스타일은 미야자키와 같은 스케일 큰 어드벤쳐보다는 좀 더 소소하고 현실적인 드라마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여줬다 하겠습니다. 물론, 이 한 작품으로 그의 작품 스타일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요. 

작품에는 콘도의 멜로 드라마와 함께 주인공 시즈쿠의 소설 속 등장인물인 고양이 남작 바론의 에피소드도 별도의 이야기로 등장합니다. 이 부분은 본 작품에서 각본과 스토리보드, 그리고 프로듀서를 담당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것이라고 하는군요. 한 여름밤,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모두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퍼펙트 블루(1997)

ⓒ 1997 Madhouse Inc · REX Entertainment Co., LTD.

때 폴 버호벤의 '원초적 본능(1992)'을 시작으로 에로틱 스릴러물이 극장가에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자 주인공, 그리고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 살인사건... 에로티시즘과 미스테리 스릴러를 적절하게 혼합하여 긴장감과 흥분감을 높인 이들 작품은 이후 비슷비슷한 작품들의 난립과 완성도 낮은 졸작들의 범람으로 인해 스스로가 자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지만, 지금도 가끔 한 여름밤의 열기를 식혀줄 킬링 타임용으로도 여전히 괜찮은 장르인 것도 사실이 아닐까 하는데요. 콘 사토시 감독의 '퍼펙트 블루(1995)'는 이러한 에로틱 미스테리 스릴러 물의 공식을 취하고 있으되 왠만한 실사 영화를 능가하는 서스펜스와 긴장감, 그리고 매력적인 비주얼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감히 단정하고 싶습니다.

아이돌 가수에서 연기자로의 변신을 꾀하는 미마와, 그런 미마를 위협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광적인 스토커 팬. 미마는 쉽지 않은 변신의 길목에서 갈등하면서 동시에 정체불명의 스토커로 인한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서서히 벌어지는 살인사건, 스스로도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는지 확신이 안서는 기억의 혼란과, 환영 속에 이야기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듭니다. 현실과 환상을 적절하게 섞어내어 주인공의 혼란을 묘사하는 콘 사토시의 연출력은 독보적이면서도 매력적이지요.

이제는 고인이 되어 그 매력적인 연출을 더는 볼 수 없겠지만, 여름 밤을 식혀줄 스릴러물로 퍼펙트 블루는 분명 괜찮은 선택이지 않나 싶습니다. 콘 사토시의 TV 시리즈 '망상대리인(2004)'도 비슷한 구성을 가진 미스테리라는 점에서 한번 쯤 도전해보아도 좋을 듯 하네요.

☞ 퍼펙트 블루, 故 콘 사토시의 전율의 미스테리 스릴러 (보러가기)


청의 6호(1998)

ⓒ 小澤さとる / バンダイビジュアル ・ EMIミュージックジャパン

계 최초의 Full CG 장편 애니메이션이 '토이 스토리(1995)'라면, 세계 최초의 Full CG 비디오 애니메이션은 바로 마에다 마히로 감독의 '청의 6호(1998)'입니다. 일본 아니메로서는 가장 최초로 Full CG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작품이기도 하지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환경문제와 한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음모에 맞서는 잠수함 승무원들의 모험과 액션을 그린 청의 6호는 오다와 사토루의 1967년작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해양 SF 어드벤처 물입니다. 3D CG를 이용한 잠수함과 잠수정의 묘사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놀라운 퀄리티를 선사했으며, 토이 스토리와는 다른 사실적인 묘사로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CG 아니메에 많은 영향을 준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스토리에서는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여준 작품이지만, 시원한 바다를 배경으로 한 해양 SF 어드벤쳐라는 점에서 여름밤 감상용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합니다.



니모를 찾아서(2003)

ⓒ WALT DISNEY / PIXAR

양 어드벤쳐 애니메이션으로 이 작품을 최고로 선택하지 않을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이 최고의 해양 어드벤쳐 애니메이션 중 하나라는데는 이견을 보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거라 믿습니다. 자식사랑이 지극한 조그만 클라운 피쉬(흰동가리) 말린이 그의 아들 니모가 인간들에게 납치당하자, 위험을 무릅쓰고 머나먼 바다를 건너 호주의 시드니 항으로 찾아가는 모험 이야기는 버라이어티한 모험과 신비한 바다의 경관이 멋진 조화를 이룬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입니다. 픽사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걸작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소심한 말린과 나사빠진 도리의 바다 속 모험도 흥미롭지만, 치과 수족관 속에 갇혀 바다로 탈출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니모와 수족간 물고기들의 이야기도 또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니모가 다른 집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수족관을 탈출해야 하는 긴박감은 만화영화치고는 상당한 긴장감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상어와 고래, 그리고 인간들의 위협을 피해 시드니까지 먼 여행을 떠나는 말린과 도리의 스케일 큰 모험 이야기와 니모가 바다로 탈출하기까지의 아슬아슬한 서스펜스는 여름철의 더위를 날려줄 만큼 재미있고 좋은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굳이 당신이 만화영화를 즐겨보지 않더라도 니모를 찾아서는 여름밤 영화 감상으로는 믿을만한 선택일 겁니다.



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2003)

ⓒ 茄子 アンダルシアの夏 製作委員会

브리의 중견 애니메이터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수많은 작품에서 작화를 맡아온 미완의 대기 코우사카 키타로의 첫 연출작. 본인 스스로가 사이클리스트이기도 한 그는 쿠로다 이오의 단편만화집을 원작으로 한편의 매력적인 싸이클 아니메를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찌는 듯한 스페인의 싸이클 로드레이스 '부에나 아 에스파냐'를 무대로 한 단편 아니메, '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2003)'입니다.

세계명작동화에서부터 이어져온 듯한 유럽적인 배경와 일상의 묘사는 매드 하우스의 작품이면서도 마치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별볼일 없는 싸이클 선수 페페 베넨헤리가, 그의 형과 그의 옛 연인이 결혼식을 벌이는 고향 안달루시아를 지나는 싸이클 경기에 참가하여 보여주는 집념의 레이스는 무척이나 실감나면서도 만화영화적 재치가 넘치는 매력적인 스토리 텔링을 보여줍니다. 어떤 거대한 스케일이나 파격적인 갈등이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정말 소소하고 매력적이면서도 유쾌합니다. 뒷맛도 개운한 것이, 마치 한 여름밤에 시원한 맥주 한잔을 들이키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가슴에 큰 울림을 주지는 않지만, 소소한 재미와 드라마를 선사하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 2006 TOKIKAKE Film Partners

소다 마모루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는 근래의 일본 아니메 중에서도 가장 여름과 잘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재미와 드라마적 완성도를 고루 갖춘 이 작품은 그전까지 디지몬 어드벤쳐와 같은 아동용 극장 아니메를 연출해온 신예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좋은 호흡과 느낌을 주고 있는데요. 미야자키 하야오 외에 근래 극장 아니메에서 모든 이들의 입맛에 맞을 만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이가 그리 없음을 감안할 때 이는 놀라운 발견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연하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얻게 된 소녀가 이를 활용해 자신의 소소한 바램을 이루어가는 유쾌한 능력 남용하기는 적절한 웃음과 적절한 긴장감, 적절한 슬픔과 적절한 감동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보통 소녀의 소박한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드라마틱하면서도 마지막에는 서스펜스마저 느껴지는 능숙함을 보여줍니다.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전개는 마치 시원하고 달콤한 팥빙수를 먹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나 할까요.

특히, 몇 번을 보아도 그리 줄어들지 않는 극적 재미는 이 작품의 완성도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 아닐까 합니다.

☞ 시간을 달리는 소녀,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을 깨달아가는 소녀의 이야기 (바로가기)



피아노의 숲(2007)

ⓒ 一色まこと · ピアノの森 製作委員会

'다메 칸타빌레(2001)'나 '베토벤 바이러스(2008)'와 같이 클래식과 트렌디 드라마의 접목으로 새로운 느낌을 선사한 작품들이 있다면, '피아노의 숲(2007)'은 보다 더 정통 음악 드라마적에 가까운 만화영화라 하겠습니다. 체계적인 음악적 교육을 받지 못한 가난한 천재 음악 소년과, 부유한 가정에서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고 자란 음악 수재의 우정과 성장을 그린 이 작품은 한 마디로 불우한 천재 소년의 성장 드라마인 것입니다.

잇시키 마코토가 1998년부터 연재한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후일 어른으로 성장하는 주인공 카이의 이야기까지는 다루지 못하고, 초등학교 5학년으로 첫 콩쿨에 참가하게 되는 초반부의 에피소드까지만을 다루고 있지만, 발단부의 이야기만으로도 꽤 멋진 드라마를 관객들에게 선사합니다. 특히, 클래식 음악이 주는 깊이와 서정성이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한 소년의 감성과 맞물려 만들어내는 하모니가 자못 따뜻하고 매력적이라 할 수 있지요.

숲 속 깊이 버려진 한 피아노. 보통 사람은 소리를 낼 수 없는 기이한 그 피아노를 통해 사람을 마음을 벅차게 하는 연주를 해내는 천재 소년의 이야기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노력하여 쟁쟁한 수재들을 물리치고 정상의 자리에 등극하는 인간 드라마의 매력을 잘 보여주었다 하겠습니다. 격조 있는 클래식 음악과 아름다운 숲의 배경이 어우러져 시원한 그늘과 서늘한 바람이 부는 여름 숲을 연상시키게 하는데요. 감상하시는 분들에게 청량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샐러드와 같은 맛을 선사하지 않을까 합니다.



레지던트 이블 디제너레이션(2008)

ⓒ CAPCOM Co, Ltd. / Resident Evil CG Film Partners

름철 영화하면 빠지지 않는 장르인 호러장르. 특히 근 몇년 사이에는 좀비물이 호러장르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좀비영화들이 극장가에 등장하기도 했는데요. 레지던트 이블은 96년 출시된 캡콤사의 바이오 하자드 세계관을 기본으로 만들어진 4편의 실사영화를 통해 우리들에게 익숙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사영화 4부작은 나름 인상적이었던 첫 편에 비해 이후의 시리즈가 기대에 못미치는 모습을 보여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원작과는 다른 이야기를 선보였던 실사영화 시리즈와는 달리, 원작의 캐릭터들을 그대로 등장시킨 별도의 CG 애니메이션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카미야 마코토의 장편 데뷔작 '레지던트 이블 디제너레이션(2008)'입니다.

사실,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이 작품은 그다지 높은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전개도 뻔하고 어떤 흐름으로 흘러갈지, 다음 장면이 뭐가 나올지를 상상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렇고 그런 B급 좀비영화 수준과 비교해서 그리 나은 점을 찾아볼 수가 없는 작품인 셈입니다. 다만, 바이오 하자드의 팬들에게는 확실한 팬 서비스가 될 듯 하며, 초특급 퀄리티는 아니지만 제법 준수한 CG 완성도와 함께 펼쳐지는 액션도 킬링 타임용으로는 적당합니다. 호러물이지만 호러물보다는 액션물에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호러물.



썸머워즈(2009)

ⓒ 2009 SUMMER WARS FILM PARTNERS

작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마찬가지로, 여름에 개봉된 호소다 마모루의 '썸머 워즈(2009)'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근래들어 가장 여름과 잘 어울리는 극장 아니메 중 한편이기도 합니다. 시원하면서도 서정적인 배경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이어 이번에도 여전히 친숙하게 우리를 맞이합니다. 그 푸르름은 마치 눈부시게 밝은 여름날 교외로 나들이 온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고나 할까요.

전작과는 달리 어드벤처 요소가 강화된 것도 특징입니다. 가상 모바일 네트워크인 오즈와 시골의 큰집이라는 전원적 요소는 의외로 서로가 잘 조화를 이루면서 극을 이끌어 갑니다. 여기에 시골의 대가족이라는 설정은 비록 우리네와는 조금 그 모양새가 다르지만, 여름을 맞이하여 고향집으로 휴가를 떠나는 우리게 가족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습니다.

비록 전작에 비히 이야기의 밀도나 가 그다지 농밀하지 못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썸머워즈는 준수한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입니다. 여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멋진 모험과 소소한 일상 속의 재미, 썸머워즈는 마치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과도 같은 맛을 보여주리라 생각됩니다.

☞ 썸머워즈, 여름을 습격한 현실과 가상의 흥미로운 이중주 (바로가기)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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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커피, 달콤한 간식과 함께 하는 만화영화 여행


, 내일이면 크리스마스네요. 많은 싱글(독신 혹은 이혼남녀)이나 솔로(애인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날의 의미와는 달리 1년 중 가장 쓸쓸한 하루이기도 합니다. 날씨도 겨울이라 추운데다가 곁에 함께 하는 사람도 없고, 길에는 다정한 연인들이 손에 손을 잡고 레스토랑과 카페에 넘쳐나니 이건 뭐 거의 염장 쓰나미 수준이죠. 게다가 자칫 잘못하면 크리스마스부터 발렌타인 데이에 이르기까지 외로운 겨울을 내리 보내야 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그런 적 있었거든요. (크리스마스 전에 헤어져 발렌타인 데이를 지나 봄이 되서야 새로이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다시 그 해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헤어지고 뭐 그런 라이프싸이클을 가지고 있던 적이 있더랬습니다요. 아하하)

싱글이 아니라 커플이더라도 사실 이날은 참 힘든 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모든 카페와 극장가와 식당가는 발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죠. 차를 갖고 있어도 서울근교의 명소들은 미리 예약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고생하기 쉽상입니다. 괜히 계획없이 차끌고 나갔다가 여기저기 모두 만원이고, 차는 막히고... 남자들은 잘못하다간 로맨틱한 크리스마스는 커녕 여자친구나 와이프한테 눈총받기 쉽상입니다. 아시겠지만, 요즘 남자들 준비성 없으면 점수 제대로 못땁니다. 크리스마스를 위해 소박한 스케줄이라도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는게 좋습니다. (어이쿠 그러고보니 저도 이따가 퇴근하면서 케익이라도 사들고 들어가야...)

자, 이렇게 북적북적한 크리스마스날 이러저러한 이유로 집에서 외롭거나 무료한 시간을 보내실 분들을 위해 만화영화 블로거라는 제 정체성에 입각하여 크리스마스와 어울리는 몇 작품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DVD로 대여하시거나 구매하시면 좋을 작품들도 있구요. 이제는 구하기가 어려워 어둠의 루트(?)를 이용해야하거나 아예 구할 수 없는 작품들도 있겠습니다. 그저 크리스마스와 어울리는 분위기(정확히 말하면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의 작품들로 골라보았으니 이 친구들과 함께 쓸쓸한 크리스마스 마음껏(?) 만끽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으하하. (때리지 마세요.)


환타지아 (1940) / 환타지아 2000 (2000)

ⓒ WALT DISNEY Pictures

클래식과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디즈니 불후의 걸작 애니메이션과 이 걸작의 속편격인 2000년 제작버전. 대사없이 그저 클래식 음악과 영상이 흘러나오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클래식 뮤직비디오는 물론, 속성상 지루함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클래식 음악의 애호가들에게는 음악과 애니메이션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색다른 감동을 선사하고, 일반 관객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근사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클래식의 깊은 사운드와 따뜻한 영상미는 그야말로 추운 겨울밤에 잘 어울리지 않나 싶네요. 마침 얼마전 국내에도 DVD/BD로 출시되었으니 시간나시면 감상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 저도 사놓고 아직 제대로 된 감상을 못하고 있는데 이 참에 한 번 볼까 싶습니다. ^^



플란다스의 개 (1975)

ⓒ NIPPON ANIMATION Co. Ltd.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로 영원히 기억 속에 남을 명작 애니메이션. 가난한 삶 속에도 희망과 꿈을 갖고 살아가는 소년 네로와 그의 곁을 영원히 지키는 충견 파트라슈의 소박한 삶의 이야기. 특히 라스트 씬의 감동과 슬픔은 지금까지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눈보라 치는 쓸쓸한 겨울밤, 외로운 소년 네로와 파트라슈의 슬픈 이야기를 보며 기아에 허덕이는 지구촌 아이들을 생각합시다. (응?)

☞ 플란다스의 개 (1975) by 엘로스, 별바다의 서고 (보러가기)



숲은 살아있다 (1980)

ⓒ TOEI ANIMATION

도에이 동화의 세계명작동화 시리즈 제3탄. 과거 KBS 신정특집으로 방영된 적도 있는 만화영화로, 계모와 계모의 딸에게 구박받고 사는 가여운 소녀가 설눈초를 찾아오라는 어린 여왕의 철없는 어명 때문에 계모에게 등 떠밀려 추운 숲속에 들어갔다가 요정들을 만나 소원을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 예전에는 비디오로 출시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기억 속에 묻혀진 추억의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영상 매체로 접하기가 거의 힘들 듯 하네요. 일본이나 북미 쪽 DVD 마켓을 뒤져보지 않는 이상 구하기는 힘들 듯 하지만 크리스마스와도 잘 어울릴 듯 하여 소개해 봅니다.

☞ 숲은 살아있다(森は生きている) 1980 by 캅셀, CAPSULE 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보러가기)


라스트 유니콘 (1982)

ⓒ PETER.S.BEAGLE / GRANADA International

세상에 홀로 버려진 유니콘이 자신의 동족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를 그린 영·미·일 합작 애니메이션. 동서양의 감성이 어우러져 상당히 독특한 작화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고, 미아 패로우나 제프 브리지스, 크리스토퍼 리와 같이 헐리우드에서 유명한 배우들이 성우로 참여하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과거 지상파 방송을 통해서도 방영되어 당시 많은 아이들에게 큰 인상을 남겨준 작품이기도 하죠. 역시 국내 DVD 시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놈입니다.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동족을 찾아 홀로 세상에 나온 유니콘의 쓸쓸한 여정과, 새하얗고 순결한 유니콘의 모습이 왠지 겨울과 눈을 연상시켜서 꼽아 보았습니다.

☞ 라스트 유니콘 (1982) by 엘로스, 별바다의 서고 (보러가기)


크리스마스의 악몽 (1993)

ⓒ TOUCHSTONE / WALT DISNEY

팀버튼의 독특하고 괴기스러운 동화적 감성이 그대로 살아있는 작품. 요즘은 접하기가 힘든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촬영된 작품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등장하는 갖가지 기묘한 유령들의 모습은 섬뜩하면서도 즐거운 웃음을 팬들에게 선사해줍니다. 팀버튼의 기발하고 상상력이 넘치는 비주얼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할 수 있죠. 조금은 독특한 크리스마스를 느껴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한 번 보셔도 좋을 듯. 최근에는 3D 버전으로 다시 제작되기도 했죠.

스프리건 (1998)

ⓒ HIROSHI TAKASHIGE·RYOJI MINAGAWA / SHOGAKUKAN · BANDAI Visual · TBS · TOHO

미나가와 료지/타카시게 히로시의 동명 코믹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액션 어드벤쳐. 고대문명과 유적을 불손한 세력으로부터 지키는 초국가적 단체인 아캄과 아캄의 특수요원 스프리건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 소년 유우의 모험을 다룬 이 작품은 하드하고 박진감 넘치는 액션에 고대 문명이라는 미스테리에 맞서는 주인공들의 모험 이야기를 다룬 대작 아니메입니다. '아키라(1988)'의 거장 오토모 가츠히로가 제작을 맡아 유명세를 탔던 작품이기도 한데요. 하드한 액션과 무거운 비주얼로 완성도가 높은 영상미를 자랑합니다만, 이야기의 스케일이 너무 커서 전체적으로 구성은 좀 헐거운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대작의 포스를 갖추었으나 실제 느낌은 그 정도는 아닌 셈인데요, 설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고대의 전설적인 유물 노아의 방주와 이를 둘러싼 조직간의 혈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밤을 책임질 충분한 재미를 선사해줄 듯 합니다.


바람의 검심 추억편 (1998)

ⓒ 和月伸宏/集英社・フジテレビ・SPEビジュアルワークス

바람의 검심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코믹스이자 TV 시리즈인데요. '기동전사 건담 U.C (2010)'로 근래 주목받고 있는 후루카시 카즈히로가 연출한 OVA 바람의 검심 추억편은 사무라이 켄신의 유년시절과 그의 뺨에 새겨진 십자가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슬프고 처절한 드라마로 그려낸, 드라마성이 강한 사무라이 시대물이 되겠습니다. 다소 황당무게한 사무라이 액션물을 드라마틱하게 변주해낸 후루카시 감독의 연출력은 그야말로 백미. 사무라이 장르로서 펼치는 피비린내 나는 검투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도 살인으로 인해 피폐해져가는 켄신과 복수를 위해 그에게 다가간 토모에의 눈물나도록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는 오랫동안 잊지못할 장면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후속편으로 제작된 성상편(2001) 역시 기구한 운명을 살다간 사무라이의 마지막이 빛나는 작품이지만, 제국주의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대충 얼버무린 역사적 모호함과, 헐거운 드라마적 구성 때문에 추억편을 더 추천하고 싶네요. 쓸쓸하고 외로운 겨울의 향기가 진하게 베어나는 작품입니다.



인랑 (1999)

ⓒ PRODUCTION I.G / BANDAI Visual

오시이 마모루의 뒤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았던(그러나 현재는 차기작을 전혀 선보이지 않는) 오키우라 히로유키 감독의 데뷔작. 우화인 빨간 두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작품이 보여주는 세계는 과도하게 우울하고 정적이며 무겁고 숨막힙니다. 과격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조직된 무장 경찰 수도경 후세가 눈앞에서 시위대 중 한명이었던 소녀의 자폭을 목격한 이후, 변해가는 삶과 그 속에서 만난 여인 케이와의 사랑과 배신을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요. 작품의 계절배경은 늦가을과 초겨울 쯤으로 보이는데, 느껴지는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와 사이사이에 느껴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감과 비극적인 결말은 그야말로 춥고 추운 겨울밤을 묘사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깊고 깊은 어둠의 수렁에 빠지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제자답게 비주얼은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끝장나게 지루하다는 것에 유의하세요.




러브히나 크리스마스 스페셜 (2000)

ⓒ AKAMATSU KEN·KODANSHA / Project LOVE HINA

아카마츠 켄의 빅히트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아니메로, 2000년대의 하렘계열 멜로물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작품 중 하나. 케타로라는 어리숙한 남자 주인공과 그가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는 히나타 온천장에 하숙하는 다섯명의 소녀들과 벌어지는 알콩달콩하고 왁자지껄한 코믹물인데요. TV 시리즈 종료 후 OVA로 출시된 크리스마스 스페셜은 러브 히나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멜로적 구성이 돋보였던 작품 같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벌어지는 엇갈리는 케타로와 나루의 감정선. 싱글들의 옆구리에 눈덩이를 문질러 줍니다, 그냥.

☞ 러브히나 시리즈 (2000~2002) by 엘로스, 별바다의 서고 (보러가기)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난 확률 (동경대부, 2003)

ⓒ 今敏 · Madhouse/東京ゴッドファーザーズ 製作委員會

얼마전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故 콘 사토시 감독의 유작이자 그의 세번째 극장 아니메. 노숙자 긴,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 하나, 그리고 가출소녀 미유키가 쓰레기더미에서 버려진 아기를 주우면서 벌어지는 휴먼 드라마. 사토시 특유의 연출과 사실적인 비주얼, 그리고 매력적인 스토리가 조화를 이룬 작품입니다. 콘 사토시 감독이 남긴 작품들은 하나같이 다 완성도가 높은 명작들 뿐인데요. 그 중에서도 이 동경대부는 가장 드라마가 강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크리스마스 특선으로 더할 나위 없는 선택 중 하나. 길거리에서 방황하지 마시고 집과 가족의 소중함을 느껴보세요.



폭풍우 치는 밤에 (2006)

ⓒ あらしのよるに 製作委員会

테즈카 오사무의 제1제자인 스기이 기사부로 감독의 2006년작. 늑대와 염소의 기묘한 우정을 동화적 감성과 독특한 비주얼로 풀어낸 가슴 따뜻한 이야기. 온가족이 함께 보아도 좋을 가족영화네요. 디즈니와는 또다른 느낌에 영화 속에 푹 빠져 크리스마스를 즐기실 작품일지도 모릅니다. 겨울만이 배경은 아니지만, 뭐랄까 하얀 염소와 외로운 늑대의 우정이 왠지 이 추운 겨울에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스트레인저 무황인담 (2007)
 

ⓒ BONES / STRANGERS 2007

'지루한 것은 싫다, 화끈한 것이 좋다!'라고 하시는 분들은 겨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무라이 액션물은 어떨까 합니다. 명제작사 본즈가 제작한 스트레인저 무황인담은 스피디하고 역동적인 진검승부로 사무라이 액션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드라마적 깊이보다는 한 소년을 구하기 위해 오랫동안 검을 거두었던 떠돌이 무사가 마침내 검을 빼들고 고수들로 구성된 중국의 무사들을 맞이하여 홀로 싸운다는 단순하고 이해가 쉬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웰메이드 B급 사무라이 액션물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듯.

☞ 스트레인저 무황인담, 박진감 넘치는 웰메이드 B급 사무라이 액션물 by 엘로스, 별바다의 서고 (보러가기)




초속 5cm (2007)

ⓒ SHINKAI MAKOTO / COMIX WAVE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대표작.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을 아름다운 배경과 세심한 디테일적 묘사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풋풋한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이제는 식상할만도 한데, 이렇게 서정적으로 묘사되면 또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맛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학창 시절 애틋했던 추억을 떠올리시는 분들도 있으시겠군요. 1부는 겨울을 묘사로 하고 있어 특히나 크리스마스 밤과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역시나 솔로들의 외로운 마음에 한가닥 날카로운 고드름을 박아넣는 작품입니다, 흐흐.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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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랠리를 평정했던 전쟁의 여신


설의 랠리머신 란치아 스트라토스(Lancia Stratos)를 기억하십니까? 자동차 스타일링 회사인 베르토네(Gruppo Bertone)社의 사장 누치오 베르토네의 아이디어와 베르토네의 헤드 디자이너인 마르셀로 간디니의 디자인에 의해 탄생된 이 머신은 기획 자체가 어떤 특정한 목적이나 사업안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누치오 베르토네의 개인적인 욕구에 의해서였습니다.

고급스러우며 마니악한 모델들을 주로 만들었던 란치아社가 1969년 피아트社에 인수되기 전인 63년에 출시했던 란치아 펄비아(Fulvia)를 베이스로 하여, 새로운 드림카를 만들고 싶던 베르토네의 지시에 의해 란치아 스트라토스 제로가 처음으로 디자인됩니다. 스트라토스 제로는 제작된 70년 당시로는 몹시도 파격적이면서 샤프한 라인을 선보인 컨셉카였는데요. 람보르기니 쿤타치를 연상시키는(그럴만도 한 것이 간디니는 후에 쿤타치를 디자인 합니다) 엣지있고 슬림한 전면부와 파격적인 형태의 앞유리, 과감한 심플함과 각진 라인은 SF 영화에서 나올법한 우주선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한 편의 예술작품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의(High Fidelity)를 뜻하는 HF가 붙여진 스트라토스 HF는 제로의 디자인보다는 덜 파격적이지만, 여전히 미래지향적입니다. 파격적인 앞유리는 곡선형의 얌전한 디자인으로 변모했지만,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듯한 SF스러움이 살아있습니다. 스트라토스의 첫인상 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와닿는 부분이랄까요. 공기역학에 최적화된 듯한 항공기를 연상시키는 차체의 라인을 따라 넋을 잃고 끝까지 다다르면, 매혹적인 디자인을 완성시키는 아름다운 뒷태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특히, 이 스트라토스의 뒷모습은 개인적으로 그 어떤 슈퍼카, 아니 그 어떤 멋진 모델의 뒷모습과 비교해도 스트라토스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고나 할까요.


70년 토리노 모터쇼를 통해 관계자들과 란치아에게 극찬을 받은 스트라토스는 지속적인 디자인 업그레이드와 함께 랠리머신으로의 진화를 시작합니다. 실제로 70년 모터쇼에 등장했던 것은 스트라토스 HF가 아닌, 스트라토스 제로였었는데요. 란치아 내부에서 랠리머신으로의 개발이 결정되면서 스트라토스는 간디니에 의해 다시금 새로이 디자인 되기에 이르릅니다. 다시 말해서 스트라토스 HF의 진정한 매력은 단순히 미래지향적이고 다이나믹한 디자인 뿐만 아니라 전설적인 랠리머신으로서의 막강한 전투력을 그 아름다운 몸안에 갖고 있다는 것일 겁니다. 마치 전쟁의 여신 같이 말이죠.

페라리에 사용된 V6 엔진이 탑재되면서, 란치아의 럭셔리함과 베르토네의 혁신적인 디자인, 페라리의 막강한 전투력이 합쳐진 기이한 랠리 머신이 탄생하게 됩니다. 여기에 람보르기니의 엔지니어링까지 가세했으니 그야말로 드림카로서 적합한 진용이 아닐 수 없군요. 스트라토스 HF는 미드쉽에 후륜구동 방식으로, 순간가속형인데다가 좁은 시계와 엔진의 열이 그대로 운전석에 적용되는 최악의 승차감 등으로 인해, 강력한 전투력과 매혹적인 라인에 비해 너무도 다루기 힘든 까다로운 미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나가노 마모루의 코믹스 대서사시 '파이브 스타 스토리'의 모터헤드에 비유하자면, K.O.G(Knight of Gold) 중에서 강력한 성능과 아름다움, 까다로운 밸런스를 지닌 '나이트 오브 골드 라키시스'에 비유하면 어떨지 모르겠네요. 

펄비아 엔진을 달고 랠리에 참가했던 프로토타입 머신을 거쳐 마침내 V6 엔진을 품은 스트라토스 HF는 1974년 타르카 플로리오 경주의 우승을 시작으로, 75년, 76년, 77년, 79년에 열린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그 밖의 수많은 대회에서 그 가치를 증명해 보입니다. 게다가 세계적인 에너지 위기와 한정생산될 수 밖에 없었던 제약조건 등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말 그대로 전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니메에 등장한 전설의 랠리머신

동차에는 그다지 높은 식견을 지니지 못한 엘로스가 이 차에 반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정확히 언제인지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떤 영상매체를 통해서였지 싶은데,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그나마 스트라토스에 대해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살다가 한 작품을 보면서 다시금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으니, 그 작품이 바로 카미야마 켄지 감독의 TV 시리즈 아니메, '공각기동대 SAC 1기(2002)' 입니다.

© SHIROW MASAMUNE ~ PRODUCTION I.G / KODANSHA


세번째 에피소드인 '내 사랑 안드로이드' 편에서는 공안 9과의 멤버인 바토의 애마로 등장하는 스트라토스의 모습을 잠깐 엿볼 수 있습니다. 작품에 등장한 스트라토스는 미래라는 배경 덕분에 일부 스타일링이 가해져 약간 변형된 모습이었는데요. 스트라토스 HF와 가장 잘 어울리지 않나 싶은 겨자색의 컬러와 여전히 매력적인 콕핏트 스타일의 앞유리, 그리고 매혹적인 뒷태 덕에 보는 순간 무릎을 탁치면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스트라토스의 기억을 엘로스에게 떠올리게 해주었습니다. 비록 자주는 아니었지만 이 커스터마이즈된 스트라토스는 그 후에도 몇 번 정도 에피소드에 등장해주고 있지요.

아쉬운 것은 극장판인 공각기동대 2 이노센스나 다른 TV 시리즈에서는 이 스트라토스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랄까요. 하지만 스트라토스의 모습이 공각기동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OVA로 제작된 레이싱 아니메 'eX Driver'에서도 스트라토스의 멋진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무인 운전되는 자동차가 널리 퍼진 근미래에 자동차를 전혀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들을 위해 프로급의 운전기술과 정비기술을 가지고 자동차에 의해 발생하는 사건을 해결하는 엑스 드라이버가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 일행 중 한명인 천방지축 말괄량이 아가씨 리사가 모는 애마가 바로 이 스트라토스 HF인 것입니다.

© Kosuke Fujishima · ExD · Bandai Visual / D.G.A.


엑스 드라이버에 등장하는 스트라토스는 짙은 청색의 컬러링과 엑스드라이버의 로고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다가 바디 부분이 원 모델과는 약간 다른 스타일로 되어 있어 스트라토스 특유의 느낌이 좀 약한 듯 싶지만, 부드러운 CG와 깔끔한 컬러에 의해 HF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진한 청색계열의 컬러링 덕에 상당히 강인한 인상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공각기동대와는 달리 자동차가 주된 소재인 작품인데다가 주인공이 모는 머신이다보니 스트라토스를 자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트라토스의 팬에게는 특별한 느낌을 줄 것 같군요.

이 외에도 스트라토스는 페노메논社에 의해 2005년 새로운 디자인의 컨셉카로 탄생되기도 했습니다. 그외에도 2011년을 목표로 V8 엔진이 탑재된 또다른 스트라토스가 준비된다고 하니 오랫동안 묻혀져 있던 이 전설의 랠리머신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이 아직도 사그러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네요. 하긴 문외한인 저조차도 그 존재를 알고 있던 녀석이니 말입니다.

스트라토스, 다시금 새로운 전설의 날개를 펼 수 있을까요.


☞ 아참, 그러고보니 어렷을 가장 좋아라했던 슈퍼카는 람보르기니 쿤타치였습니다. (그때는 카운타크로 잘못 알고 있었는데...) 쿤타치와 스트라토스를 공교롭게도 모두 간디니가 디자인했네요.

☞ 2011년을 목표로 제작된 스트라토스는 컨셉카 형태로 뚱뚱해지면서 실망감을 안겨주었던 페노메논 스트라토스와는 달리 과거의 매혹적인 바디라인을 그대로 간직한 모습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스파이샷을 봤는데 정말이지... 아아~ 가슴 설렙니다!  새로운 스트라토스 보러가기 (클릭)


<참고 사이트>

[1] Lancia Stratos HF, Wikipedia
[2] Lancia Stratos HF, WikiCars
[3] Lancia(란치아), 오토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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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던 안노 감독의 이력

안노 히데아키 감독. 생긴 것도 범상치(?) 않다.

마전 '마크로스와 에반게리온의 데자뷰... 반복된 선라이즈의 폭주'라는 포스트를 통해서 기동전사 건담으로 로봇 아니메의 전성기를 가져왔던 선라이즈에게 대항했던 걸출한 두 작품 마크로스와 에반게리온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 두 작품 덕에 선라이즈는 각각 80년대 초중반과 90년대 중후반 두 차례에 걸쳐 엄청난 양의 수작들을 쏟아내는 이른바 대폭주를 시작하기에 이르렀었죠.

특히, 이 두 작품의 경우에는 당시 아니메를 이끌던 거장이 주축이 아닌, 젊은 신예 애니메이터들의 힘으로 일구어 낸 것이기에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는데요. 마치 기성세대의 아성을 뛰어넘은 신세대의 모습과도 같았던 이 두 명의 인물들이 바로, 현재에는 아니메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카와모리 쇼지(마크로스 원안/감독/메카닉 디자인. 연출가 겸 메카닉 디자이너)와 안노 히데아키(에반게리온 감독/각본/메카닉 디자인. 연출가 겸 애니메이터)인 것입니다.

특히, 안노 감독의 경우에는 젊은 애니메이터들의 손으로 만든 이 마크로스 TV 시리즈에 강렬한 공감대를 형성, 대학을 자퇴하고 상경하여 원화맨으로 참여하기까지 하는데요. 이렇게 안노 감독은 애니메이터로서 마크로스를, 그리고 연출가로서 먼 훗날 에반게리온을 만들게 되면서, 로봇 아니메의 철옹성 선라이즈가 깜짝 놀랄 정도의 걸작이었던 두 작품에 모두 참여하는 이력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마크로스 TV 시리즈 참여 당시의 안노 감독은 수많은 원화맨 중의 하나인 일개 애니메이터일 뿐이었습니다. 비슷한 연배의 카와모리 쇼지는 그 재능을 인정받아 마크로스의 원안과 후일 극장 아니메의 공동연출, 그리고 메카닉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천재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지만, 보통 20대의 나이에 그런 식으로 아니메 업계에 입문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었고, 보통은 안노 감독처럼 이름없는 원화맨이나 동화맨으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죠.

그러나, 역시 인재는 인재였던 걸까요. 마크로스가 종영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제작되는 한 작품을 통해 안노 감독의 역량은 아니메 업계에서 인정을 받기에 이르릅니다. 그것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설의 시발점이 된 작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였습니다.

©1984 Nibariki · Tokuma Shoten · Hakuhodo


국내에 발매된 나우시카의 DVD 영상특전을 보게 되면, 당시 거의 무명이다시피했던(81년 DAICON 3라는 아마츄어팀의 프로젝트 영상을 제작한 것과 마크로스 TV 시리즈의 원화맨으로 참여한 것 외에는 이렇다할 이력이 없는) 안노 감독은 당시 자신이 그렸던 그림들을 들고 미야자키 감독에게 찾아가 막무가내로 들이밀었다고 회상하고 있는데요. 미야자키 감독은 그의 범상치 않은 실력을 알아보고 전격적으로 그를 기용하기에 이르릅니다. 그리고, 햇병아리 신예 애니메이터였던 안노 감독은 이 작품에서 아래와 같은 희대의 씬을 그려내게 되는 것이죠.

©1984 Nibariki · Tokuma Shoten · Hakuhodo


도르메키아 군의 공주 크샤나가 폭주상태로 바람계곡으로 질주하는 거대곤충 오무들의 진군을 막기 위해 부활시킨 거신병이 아직 불완전한 상태로 오무의 대군에게 빔병기를 뿜어내던 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거대한 스케일의 클라이막스 씬은 초짜 애니메이터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박력과 퀄리티를 보여주며, 안노 히데아키를 주목받는 신예 애니메이터로 떠오르게 만듭니다.

당시 일본 최고의 액션작화가로, 스페셜 애니메이터로 추앙받고 있던 故 카나다 요시노리가 작품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중요한 라스트 씬을 일개 신참이었던 안노 감독이 그렸다는 사실은 굉장한 의외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아마도 이 씬을 연출할 당시 카나다 요시노리가 모종의 이유로 인해 더이상 나우시카의 작업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안노 감독의 이름을 아니메 업계에 결정적으로 각인시켜 주게 되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는 아니었을까 싶군요.

하여간에,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아니메 업계에 심어준 그가 참여했던 다음 작품이 바로 수개월 뒤 개봉하게 되는 마크로스 시리즈의 극장판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계십니까(1984)'였던 것입니다.

ⓒ Big West ⓒ 1985 Harmony Gold USA Inc / Tatsunoko


이미 TV 시리즈에서 원화맨으로 참여하면서 마크로스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던 안노 감독이었지만, 당시에는 이름도 없는 신참 애니메이터였던 그는 TV 시리즈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20여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인정해줄 수 밖에 없는 절정의 작화 퀄리티를 보여준 이 극장판에서 또 한 번 애니메이터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게 됩니다.

ⓒ Big West ⓒ 1985 Harmony Gold USA Inc / Tatsunoko


후일 '민메이 어택'이라 불리게 되는 히로인 민메이의 노래와 함께 이타노 이치로의 유명한 유도 미사일 씬이 박진감 넘치게 펼쳐지면서 주인공 히카루의 발키리가 적의 심장부로 돌진하는 이 클라이막스 씬은 '이타노 써커스'라고 불리는 미사일 액션의 정수를 보여주었는데요. 그런데, 이 씬을 아주 자세하게(정말, 진짜로 엄청나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위의 스틸 샷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아주 진귀한 컷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미사일 세례 속에 갑자기 등장하는 '타코 파이(문어 파이?)' 자판기, 그리고 라스트를 장식하는 버드와이저 맥주 캔의 등장... 제가 이 극장판을 접했던 85년도 당시는 지금과 같은 디지털 매체가 아닌 VHS 비디오 같은 아날로그 매체가 주를 이루던 시대였는데, 마크로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제 친구가 이 장면에 흠뻑 빠져 슬로우 비디오로 몇 번씩이나 틀어보던 중 바로 이 엄청난 장면을 접하게 된 것이었죠. (여담이지만, 이 장면을 보려고 몇 번씩이나 비디오를 되감고 슬로비디오로 틀고 하는 통에 그 친구가 애지중지하던 마크로스 극장판 비디오는 결국 테이프가 늘어져버려 이 씬이 나오는 필름 부분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이 글을 쓰기 위해 DVD를 틀어놓고 캡쳐를 시도했는데,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통에 Power DVD의 슬로우 모션으로도 캡쳐가 용이하지 않았고, 곰 플레이어로 프레임 단위로 시도한 캡쳐도 정말 어렵게 캡쳐가 가능할 정도였으니, 당시 VHS 비디오로 이 장면을 발견한 그 친구의 열정에는 지금도 경의를 표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으면 말입니...

어쨋든 간에, 이 희대의 숨겨진 씬은 후에 아니메 잡지, 아니 아마 마크로스 설정집에서 완벽하게 캡쳐가 되어 팬들에게 공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타노 써커스라고 알려진 이 희대의 미사일 씬에서 저런 위트를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은 당시의 스탭 중에서는 아마 안노 감독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죠. (어디선가 안노 감독이 이 장면을 그렸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정확한 증거 자료를 찾을 수가 없기에 일단 추측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서 안노 감독이 보여준 인상적인 애니메이터로서의 기량을 보면서 우리는 국내의 모 애니메이션 전문가 분(굳이 언급하자면 송락현님)의 말마따나 그가 만약 감독을 하지 않고 애니메이터로의 길을 계속 갔더라면, 故 카나다 요시노리, 이타노 이치로의 뒤를 있는 스페셜 애니메이터로서 그 이름을 날렸으리라는 꽤 신빙성이 높은 상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노 감독은 그로부터 몇 년 뒤 정말 애니메이터로서의 절정의 기량을 입증하는 한 괴물같은 작품의 작화감독을 맡게 되는 것이죠.

ⓒ 1987 BANDAI VISUAL / GAINAX


그렇지만, 애니메이터로서의 역량 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의 역량에서도 그는 확실히 일본 아니메를 대표하는 인물임에는 분명한 사실인 듯 합니다. 저 이타노 이치로조차도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아직도 저평가 되고 있을 뿐더러 건담의 전설적인 작화감독 야스히코 요시카즈조차 감독을 맡았던 작품들의 연이은 실패로 이제는 만화가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는 현실을 보면, 그가 보여준 수어 편의 작품들은 분명 그가 단순한 애니메이터 이상의 재능을 가진 인물임을 증명하는 것이랄 수 있겠지요. (단, 좀 외도가 많아서 작품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 아쉽다면 아쉽다랄까요.)

40년대 생 거장들이 서서히 저물어 가고 50년대 생 감독들조차 예전과 같은 힘을 보여주지 못하는 현 일본 아니메 업계는 이제 60년대 생 감독들에게 그 바톤이 넘어가고 있지 않나 합니다. 이런 시대에 60년대 생을 대표하는 그의 멋진 작품을 다시 한 번 기대해 보겠습니다. 아, 일단 에반게리온 리메이크는 잘 마무리 하시구요. 부디 토미노 감독처럼 자신의 창조한 작품의 무게에 짓눌려 방황하지는 마시길.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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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에 대한 경쟁심, 또다른 명작의 탄생으로 이어지다.

ⓒ SUNRISE · SOTSU Agency


이들 아시다시피(아, 물론 일본 만화영화 팬들에게만 한정해서입니다만) 79년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과 선라이즈가 만들어낸 '기동전사 건담'은 첫방영시는 비록 저조했었지만, 재방송과 3부작 극장판 개봉 등을 통해 '리얼로봇'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로봇장르를 아니메史에 등장시키면서 일약 하나의 신드롬을 형성하기에 이르릅니다. 기동전사와 뉴타입의 포스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70년대 후반을 강타하며 아니메의 첫번째 르네상스를 가져오게 했던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야마토, 은하철도 999, 캡틴 하록, 천년여왕 등등)들을 완전히 잊혀져 버리게 할 정도의 위력이었던 것이죠.

게다가 당시 로봇 아니메에 있어서 토미노 감독에 버금, 아니 경험적인 면에서는 토미노 감독을 능가하고 있던 낭만로봇 3부작의 대가 나가하마 타다오 감독이 별세하면서 시대는 그야말로 리얼로봇의 시대로 접어들기 직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선라이즈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동시에 반다이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구요.) 하여간에, 선라이즈의 앞길에 회사 이름처럼 마냥 태양이 떠있을 것만 같았던 그즈음, 한 정체불명의 작품이 등장하는 것이었던 겁니다.

그것은 대파란이었습니다. 기동전사 건담을 뛰어넘는 보다 더 현실적이고 드라마틱한 설정, 즉 익히 알고 있는 전투기가 로봇으로 변형하는 현실적이면서도 놀라운 디자인 컨셉, 게다가 인간형, 이족보행형 전투기, 전투기의 3단 형태로 변신하는 완구로서의 매력적인 상업적 가치, 거대한 로봇으로 변신하는 1200m급의 우주 항모와 멋드러진 SF 설정들, 발랄한 소녀가 아이돌 가수로 성장하는 성공 스토리를 담은 당시 아니메에서는 보기 드문 트렌디 드라마적 설정, 남자 주인공과 두 여자 주인공 사이에서 벌어지는 밀고 당기는 삼각 로맨스까지...

선라이즈 외에 이 정도의 드라마틱하고 현실적인 모습의 SF 아니메를 만들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즈음 태어난 이 작품은 바로 도에이 동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관록의 제작사 타츠노코 프로덕션의 지휘 하에, 기동전사 건담의 SF 설정에 일부 참여하면서 이미 아니메 업계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한 창작집단 스튜디오 누에와, 작품의 원안과 주역 메카인 발키리를 디자인해낸 신예 카와모리 쇼지(스토리 원안, 공동감독, 메카닉 디자인), 히라노 토시키(캐릭터 작화감독), 하루히코 미키모토(캐릭터 디자인), 이타노 이치로(액션 작화감독) 등 젊고 실력있는 신예 크리에이터들과 노장 이시구로 노부로 감독이 함께 만들어낸 '초시공요새 마크로스(1982)' 였습니다.

ⓒ Big West


이 작품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기동전사 건담 이후 리얼로봇의 흐름은 '전설거신 이데온(1980)', '태양의 어금니 더그람(1981)'과 같은 작품을 통해 선라이즈에서 계속되고 있긴 했으나, 여전히 로봇 아니메 전체적인 흐름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되지 못한 체 건담에만 머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오히려 리얼로봇으로 인해 시작된 드라마틱하고 심도 있는 설정이 기존의 슈퍼로봇 아니메에 도입되며 전반적으로 로봇 아니메는 변화의 과도기에 서있었던 시기였었죠. 그러나, 이 마크로스로 인해 이제 흐름은 리얼로봇으로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건담에서 시작된(실제로는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이지만) 리얼로봇의 도화선은 선라이즈의 작품이 아닌 이 마크로스로 인해 새로운 전기를 맡게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선라이즈 역시 큰 자극을 받았을 겁니다. 그로부터 마치 마크로스를 향한 반격이라도 하듯이 '전투메카 자붕글(1982)', '성전사 단바인(1983)', '장갑기병 보톰즈(1983)', '은하표류 바이팜(1983)', '중전기 엘가임(1984)', '거신 고그(1984)',  '기갑계 가리안(1984)', '기동전사 Z 건담(1985)', '푸른유성 SPT 레이즈너(1985)', '기동전사 ZZ 건담(1986)', '기갑전기 드라고나(1987)'에 이르는 그야말로 리얼로봇의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이죠. ('전투메카 자붕글&태양의 어금니 더그람 1983' by 캡슐 참조) 거기에 리얼로봇물은 아니지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더티페어(1985)'같은 SF 미소녀 액션물까지 포함하면 엄청날 따름입니다.

ⓒ SUNRISE · SOTSU Agency (일부는 틀릴 수도 있음)

82년부터 87년까지 시작된 선라이즈의 아니메 쓰나미

마크로스 방영 직후인 83년도와 84년도에 이 12개의 작품 중 무려 반 이상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선라이즈의 마크로스 견제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이 작품들은 완성도 면에서도 모두 마크로스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인 작품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선라이즈의 양적 질적 내공을 가늠할 수 있는 한 단면이기도 하구요.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선라이즈의 오버히트가 80년대 후반부 일본경제의 버블 붕괴와 그에 따른 아니메 침체기와 맞물려 리얼로봇 아니메의 생명이 사그러드는 결과를 가져온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만, 하여간 엄청난 대공세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로봇 아니메의 메카 선라이즈를 향한 공세는 마크로스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80년대 후반부부터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만들어낸 초대작 아니메들이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제작여건이 급도로 악화되기 시작하자 아니메 업계 역시 긴 침체의 늪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80년대의 거의 대부분의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SF 장르, 특히 로봇 장르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지요. 리얼로봇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토미노 감독의 차기 건담 시리즈가 모두 흥행에 참패하면서 리얼로봇과 로봇 아니메는 이제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쓸쓸히 퇴장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95년, 또 하나의 괴물같은 작품이 등장하고야 맙니다. 케이블과 각종 장비를 통해 제한된 구역에서 에너지 공급이 가능한 상태에서만 운용 가능한 거대 생체병기라는 적절한 리얼리티, 바이오메카니즘과 특촬물의 절묘한 결합,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비관적인 소년이 조금씩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성장해 가는 드라마적 구도, 종교적 신비주의를 적절히 혼합시킨 거대한 스케일의 미스테리, 그리고 매력적이고 다양한 미소녀들의 등장...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복합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만들어진 이 기괴한 작품은 하나의 신드롬까지 형성시키면서 일본 만화영화계를 평정하고야 맙니다.

일개 오타쿠 집단에서 시작하여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1987)', '건버스터(1989)',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1990)'로 화제를 몰고 왔던 신생 제작사 가이낙스와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만들어낸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 GAINAX / PROJECT EVA / TX


지속적인 건담 시리즈의 실패와 로봇 아니메의 침체기 속에서도 용자물 등으로 로봇 장르에서 여전히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선라이즈는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공식석상에서는 오히려 '좋은 자극이 되었다'라는 신사적인 표현을 썼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아마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10여년전과 마찬가지로 선라이즈의 엄청난 역공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파상공세였습니다. '신기동전기 건담 윙(1995)', '기동신세기 건담 X(1996)', '기동전사 건담 MS 08소대 (1996)', '천공의 에스카플로네(1996)', '용자지령 다그온(1996)', '용자왕 가오가이가(1997)', '초마신영웅전 와타루(1997)', '사이버 포뮬러 사가/신(1996/1998)', '브레인 파워드(1998)', '카우보이 비밥(1998)', '가사라키(1998)', '턴에이 건담(1999)', '무한의 리바이어스(1999)', '빅오(1999)', '아르젠토 소마(2000)', '이누야샤(2000)'에 이르는(물론, 이 작품 외에도 좀 더 있습니다만... 일일이 쓰기에도 힘들 정도로 많네요.) 5년에 걸친 장대한 선라이즈 빅 웨이브가 만화영화계를 강타했던 것입니다.

ⓒ SUNRISE · SOTSU Agency (일부는 틀릴 수도 있음)

95년부터 2000년까지 시작된 선라이즈의 아니메 쓰나미


당시 방영되었던 선라이즈의 상당수 작품들은 10여년전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는데요. 안타까운 것은 이 파상공세와 함께 다양한 장르를 통해 일련의 실험을 거친 선라이즈가 이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했는지 이후에는 상업적 기획의도에 굉장히 충실한 작품들만 속속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선라이즈에서 일단의 크리에이터들이 '본즈'라는 제작사로 독립한 뒤에는 더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선라이즈의 파상공세와 함께 아니메 시장은 21세기 들어 양적으로 급격하게 팽창하게 됨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상업적 양산작품들이 대거 등장하기에 이르르지요.

물론 만화영화, 특히 일본 아니메에 있어서 반드시 로봇 아니메가 주도권을 쥐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만, 로봇으로 인해 시작된 여러가지 가치 있는 상상들이 미래의 실현가능한 기술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SF 혹은 로봇 아니메의 가치는 남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먼옛날의 전설처럼 되어버린 마크로스와 선라이즈의 파상공세, 그리고 에반게리온과 선라이즈의 역습과 같은 현상은 2000년대에 들어서는 아쉽게도 재현되지 못했지요. 물론,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가이낙스의 2007년작 '천원돌파 그렌라간'은 과거 로봇 아니메의 향수를 느끼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마크로스 탄생 25주년 기념작 마크로스 프론티어, 신세대 건담의 힘을 보여준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 시리즈와 건담 30주년을 기념한 기동전사 건담 UC의 시동, 그리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에반게리온 신극장판은 여전히 로봇 아니메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기동전사 건담이나 마크로스, 그리고 에반게리온과 같이 아니메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버릴 마스터피스가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기대감을 넘어 이제는 조금 안타까운 느낌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낼 걸작의 탄생은 아직 이른 이야기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로봇 아니메가 아닌 다른 새로운 장르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2000년대를 지나 2010년대가 열린 지금, 새로운 아니메의 시대가 시작하기를 기대해 보아도 될까요.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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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986년작 '천공의 성 라퓨타(1986)'는 아시다시피 너무도 유명한 미야자키 감독의 대표작으로서, '미래소년 코난(1978)'이나 '루팡 3세-칼리오스토로 성(1979)'과 같은 작품에서 보여진 유쾌한 미야자키식 어드벤쳐와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이 가져다 주는 힘과 권력에 대한 인간들의 삐뚤어진 집착, 그리고 하늘을 향한 미야자키의 동경심을 스팀펑크 스타일의 색체로 풀어낸, 가히 미야자키식 엔터테인먼트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연령가의 작품치고는 후반부에 등장한 무차별 살상장면 등이 약간 씁쓸한 뒷맛을 안겨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진가를 깎아내릴 만큼은 아니기도 하구요.

특히 이 라퓨타에 등장하는 스팀펑크 스타일의 비행정 타이거 모스(Tiger Moth; 한국어로 표현하면 호랑나방 정도?)는 미래소년 코난부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관통하는 미야자키식 메카닉 디자인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타이거 모스에 탑승하여 모험과 약탈(?)을 즐기는 도라 일당의 모습은 또다른 미야자키식 로망의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증기기관과 같은 구식 동력원을 내장한 스팀펑크풍의 기계구조, 과거의 비행선을 모티브로 삼은 고풍스러운 외양... 그러나, 타이거 모스의 진정한 매력은 그 겉모습보다는 고정된 장소에 본거지를 두지 않고 비행선 자체를 거점으로 하여 하늘에서 생활하는 공적(하늘의 도적; 바다의 도적인 해적과 산의 도적인 산적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보시면 되겠네요)들의 삶의 방식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 Nibakiri · Tokuma Shoten


설거지거리와 빨래더미, 거기에 매번 고장 수리까지... 막상 이런 생활과 맞닥뜨린다면 매력적이기 보다는 고단한 나날의 연속이겠지만, 스크린 앞에서는 한없이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여행자의 삶이 시원한 하늘의 정경과 어우러져 지극히 인간적인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것일까요. 모험의 무대가 되는 광활한 하늘과 지친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갑판 위에서 떠다니는 구름과 지는 저녁 노을을 보는 고즈넉함은 분명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과 시청자들에게는 한없는 로망을 안겨줍니다. 

자, 이렇게 타이거 모스의 로망을 오랜만에 보고 있자니 로망이 넘치는 공적들의 삶이 비단 이곳 라퓨타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하늘의 로망, 공적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여행을 한 번 떠나볼까 합니다. 아차, 여름 휴가를 다녀온지가 얼마 안됐는데, 또 여행을 떠나는군요. 그럼 일은 언제 하라고?
 
☞ '하늘의 로망과 디테일한 생활의 묘사가 돋보이는 미야자키 감독의 스타일'과 유사한 작품들을 이야기하는 글인지라 이러한 미야자키 감독만의 작품 세계를 본 포스팅에서는 '미야자키 스타일'로 줄여서 총칭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망의 시작 - 바다를 품고 우주를 꿈꾸며 마침내 하늘을 날다

© TMS

쾌한 하늘에의 모험은 만화영화에서는 하늘이 그 출발점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스티븐슨의 원작 '보물섬'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보물섬(1978)'에서는 히스파니올라호에 올라타 보물섬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소년 짐 홉킨스와, 오랫동안 소년들의 가슴 속에 남을 카리스마 외다리 사나이 실버 선장의 낭만적인 바다의 모험을 보여줍니다. 해적들과 그들의 영원한 로망인 바다, 그리고 그 위에서 펼쳐지는 가슴 떨리는 모험은 바로 공적들의 그것과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바다의 로망과는 별개로 다른 한쪽에서는 색다른 모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마츠모토 레이지가 그려낸 사나이들의 로망, '우주해적 캡틴 하록(1978)'은 정처없이 우주를 떠돌며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전설의 해적 캡틴 하록과 그의 영원한 동반자인 우주선 아르카디아호의 끝없는 모험을 선보이며, 바다가 아닌 우주를 무대로 한 무한한 로망을 선보입니다. 특히 일정한 거처없이 아르카디아호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선원들의 소박한 생활상은 라퓨타에서 보았던 공적들의 삶과도 맞닿아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다와 별바다(우주)의 로망을 자극하는 해적들의 모습은 8년여가 지나서야 진정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그때까지의 로망을 이끌던 레이지버스의 우주해적이 서서히 퇴장하고 우주를 가르는 전쟁의 포화 속에 소년, 소녀들의 우주모함 화이트 베이스의 이야기(기동전사 건담)가 리얼이라는 개념을 아니메에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로망은 만화영화의 한구석으로 조용히 자리를 양보했었는데요. 건담에서 촉발된 리얼 드라마가 정점을 달리던 8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라퓨타를 통해 공적이라는 모습으로 바다가 아닌 하늘의 로망으로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로망은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이야기(설거지, 빨래, 잠자리 등등)와 모험이 공존하는 장소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색적입니다. 몸을 싣고 있는 곳은 판타지이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현실적인 이들의 이야기는 보물섬이나 캡틴 하록과는 다른 느낌을 관객에게 선사했던 것이죠. 거기에 미야자키의 세심한 콘티와 설정은 공적의 이야기를 능숙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합니다.
 
낭만적인 공적들의 이야기는 '붉은 돼지(1992)'에 이르러서는 조금 다른 형태로 전개됩니다. 로망을 잃어버리고 빈곤한 현실에 찌들어 버린, 그러나 아직도 가슴 한켠에는 로망의 불씨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늙은 공적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앞선 라퓨타에서 보여진 공적들의 삶이 소년, 소녀들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라면, 붉은 돼지에서 보여진 공적들의 삶은 어른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여전히 그 낭만의 한자락을 놓고 있지는 않은 체로 말입니다.

© Nibakiri · TNNG


라퓨타의 편린은 또다른 곳에서 새로운 형태로 발현되기도 합니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1990, 이하 나디아)'은 에초에 NHK에 남겨져 있던 라퓨타의 기획안이 시초가 되었던 작품으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해저 2만리'의 노틸러스 호의 컨셉을 이식하여 독특한 모험물로서 재창조시켜 낸 작품입니다. 공적의 로망이 잠수함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는 것이었는데요. 그러나, 노틸러스호의 승무원들의 모습은 미야자키 스타일의 계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안노가 어린 시절 감동 받았던 '우주전함 야마토(1974)'나, 그가 스탭으로 참여했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1982)'에서 묘사된 모습과 더 가까워 보인다는 점에서 미야자키보다는 안노의 취향이 더 많이 반영된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로망의 실종 - 로맨스와 코미디에서 느와르와 판타지까지

ⓒ NHK·Sogo Vision·TOHO

얼도 로망도 쇠퇴해버린 듯한 90년대에 이르자, 공적들의 로망이란 이제 붉은 돼지에서 보았던 그들의 노쇠한 모습처럼 향수와 추억이라는 이름 하에 다락방의 낡은 일기처럼 취급되어 버립니다. 싸우는 변신소녀와 변신합체 용자로봇들이 만화영화를 수놓고, 기괴하고도 독특한 매력의 생체병기가 찢어지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써드 임팩트를 터뜨리자 시대는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라퓨타를 기본으로 시작되었던 나디아에서도 그 로망의 편린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나디아가 라퓨타의 모든 것을 계승할 의무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지만 말입니다.)
 
하늘의 로망을 대신하여 등장한 것은 새로운 스타일의 SF 모험 이야기였습니다.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의 억세게 운좋은 우주전쟁 참전기를 다룬 '무책임함장 테일러(1993, 이하 테일러)'에서의 고물구축함 미풍호, 그리고 에반게리온의 써드 임팩트 속에서도 결코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항해를 해냈던 '기동전함 나데시코(1996, 이하 나데시코)'의 최신예 우주전함 나데시코의 생활상은, 코믹함과 시트콤스러운 모습으로 항상 시끌벅적합니다.

그러나, 테일러나 나데시코의 일반적인 생활상은 개그 쪽에 관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미야자키 스타일과는 거리가 멉니다. 특히 나데시코의 경우는 그들의 일상사가 로망보다는 로맨스에 초점이 더 치우친 전개인데요.

© Hitoshi Yoshioka/Kadokawa Shoten·Tylor Project.

이렇게 이들 작품에서 펼쳐지는 등장인물들의 일상사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모험을 떠나는 이들의 뒷켠에 숨겨진 고충이나 현실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펼치는 휴먼 코미디와 아슬아슬한 사랑의 줄다리기라는 점에서 사실 미야자키의 스타일과의 접점을 찾으려하는 것 자체가 조금은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어찌보면 이 두 작품 모두 어떤 면에서는 나디아와 마찬가지로 미야자키 스타일보다는 레이지버스나 건담, 마크로스 등의 스타일을 계승하여 그 위에 로맨스와 코메디로 새롭게 재해석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곤조의 SF 로봇물이었던 '반드레드(2000)' 역시 오랜 세월 동안 적으로 나누어져 싸워왔던 남녀들이 우주해적선 메제르 호에서 동거하면서 벌어지는 각종 에피소드와 로맨스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두 작품들과 비슷한 출발선상에 놓여져 있다고 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이러한 전개는 곤조의 다음 작품에 이르러서야 조금은 미야자키 스타일로 근접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로맨스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90년대 하늘의 이야기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색다른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소년 반과 함께  이세계 가이아로 넘어온 평범한 여고생 히토미. 반과 함께 영문모를 모험 속에 빨려든 그녀는 천공의 기사 알렌 쉐자르의 비행선에 올라타 본격적인 모험의 로망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1996)'에 등장한 알렌 쉐자르 일당(?)의 비행선은 지금까지의 비행선과는 다른 형태로 운용됩니다. 바로 비행석이라 불리는 거대한 암석 두 개를 달고 프로펠러로 추진력을 내어 바람을 타고 비행을 하는 것이 그것인데요. 에스카플로네의 이 비행선은 현실도, SF도, 스팀펑크도 아닌 판타지의 세상에서 날아다니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줍니다. (기동전사 건담 이래 단바인, 바이팜, 레이즈너 등에서 선보였던) 거대한 배를 타고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는 소년, 소녀들의 리얼한 모험 이야기는, 판타지와 순정 로맨스와 합쳐지면서 색다른 형태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특히 이 비행석의 존재는 왠지 라퓨타에서 등장했던 비행석과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군요.

ⓒ Sunrise · Tokyo TV


리얼로봇의 메카인 선라이즈의 작품들은 사실상 로망이라는 요소를 아니메에서 밀어낸 장본인이기에 그 느낌이 더욱 남다른 감이 있습니다. 물론, 알렌 쉐자르의 비행선에서는 공적들이 선보인 아기자기한 스타일의 생활상은 펼쳐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건담의 화이트 베이스에서 이어져 온 스타일, 즉 모험의 베이스가 되는 움직이는 이동기지로서의 모습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도 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변모의 조짐은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로망은 그로부터 2년 뒤, 조금은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저마다의 빛바랜 과거를 숨기고 시니컬한 현재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어른들의 집합소 비밥호의 현실적인 모습으로 말입니다.
 
'카우보이 비밥(1998)'의 비밥호에는 확실히 타이거 모스의 현실적인 생활상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밥짓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게다가 취미로 분재까지...) 제트의 모습과 밥 축내기에 바쁜 더부살이 식객들인 스파이크, 페이, 에드의 모습은 개그스러움이 넘쳐납니다. 그들의 모습은 일반적인 주인공들과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어른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형태의 현실스러움은 타이거 모스의 도라 일당에 비해서 더 비참하긴 하지만, 디테일함에 있어서는 엇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붉은 돼지에 등장한 옹색한 공적들마냥, 그들은 항상 배고픔에 굶주려 궁색함을 드러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시청자들의 시선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전까지의 선라이즈의 작품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어떤 면에서 사뭇 다른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큰 에피소드의 흐름과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던 이전의 리얼로봇 계열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우주선들의 생활상과는 다른, 아기자기함이 살아 있는 모습인 것이죠. 이런 아기자기한 생활상의 묘사는 그들의 모험을 더욱 더 맛깔스럽게 가꾸어 주는 에피타이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미야자키 스타일과의 데자뷰를 느끼게 해줍니다.

ⓒ Sunrise



로망의 부활 - 레이지와 미야자키를 흠모하는가

우보이들의 궁색한 비행선이 위상차 게이트를 넘어 먼 여행을 떠나고, 뒤이어 등장한 '라스트 엑자일(2003)'의 용병함 '전멸의 실바나'는 스팀펑크적인 세계관으로 인해 확실히 시작부터 미야자키 스타일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풍스러운 비행함선 간의 포화 속에 검은색의 함체를 들어내며 압도적인 파괴력을 과시하는 알렉스 로우 함장의 실바나는 전멸이라는 별명답게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 냅니다. 어떤 면에서는 캡틴 하록과 아르카디아호의 재림이라도 되는 듯 하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고 무자비한 사나이들만이 가득할 것 같은 실바나이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면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스팀펑크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함내 구조는 우주전함보다도 우리에게는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데요. 그와 함께 간간히 보여지는 승무원들의 인간적인 모습은 전멸이라는 별명을 무색하게 하는 순수함과 익살스러움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바나와 그 내부의 모습은 미야자키 스타일을 이전까지의 90년대의 작품들과는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특히 라스트 엑자일의 이야기 전개는 라퓨타의 그것과 상당히 근접한 부분이 있어 그 친밀감이 더욱 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곤조의 이 시도는 1회성에 그쳤다는 점에서,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완성도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름 큰 아쉬움을 느끼게도 합니다.

ⓒ Gonzo · Victor Entertainment


한편, 선라이즈가 잠깐 선보였던 미야자키 스타일의 편린은 몇 년 뒤, 선라이즈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개하기 시작합니다. 비밥의 프로듀서 미나미 마사히코 등이 분사하여 만든 제작사 본즈가 선라이즈 작품들의 한 테마라 할 수 있는 화이트 베이스식 이야기와 비밥에서 보였던 미장센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스타일의 로망들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전함이 아닌, 화성의 드넓은 바다 속을 항해하는 잠수함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현란무답제 더 마즈 데이브레이크(2004)'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본즈식 로망은 '교향시편 에우레카 7(2005)'에 이르러 미야자키 스타일에 가까운 형태로 거듭나게 됩니다.
 

ⓒ Bones · Project Eureka · MBS

에우레카의 하늘은 신세대 젊은이들의 로망을 담고 있습니다. 파도타기와 마찬가지로 서프 보드에 의지한 체 하늘을 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해적이 공적으로 진화하는 것과 같은 유사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여기에 월광호에 몸을 싣고 유랑의 길을 떠나는 홀랜드의 일행과 우연치 않게 월광호에 탑승하게 된 소년 렌톤의 모험 이야기는 확실히 라퓨타에서 보여졌던 전개와도 비슷합니다. 나디아가 안노만의 스타일이 돋보였다면, 에우레카의 경우는 디테일한 그들의 생활묘사에 집중하면서 자연스레 미야자키 스타일과 겹쳐지는 부분이 생깁니다. 그리하여 에우레카는 그들만의 새로운 스타일에 미야자키 스타일이 모두 혼재하는 형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물론, 에우레카에서 보여지는 미야자키 스타일의 편린은 난해한 전개와 힙합스러운 신세대식 스타일에 가리워져 희석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라스트 엑자일에서 번쉽을 타고 하늘을 가르던 스팀펑크적인 하늘의 로망처럼, 보드를 타고 하늘에 몸을 맡기는 신세대적 로망은 오래전 미야자키가 선보였던 하늘을 나는 공적의 로망과 같은 테마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에우레카의 로망은 본즈의 최신작 '망념의 잠드(2008)'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미야자키 스타일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미야자키가 선보였던 하늘의 로망은 마야자키 자신의 작품에서는 붉은 돼지 이후로 오히려 절제되는 양상입니다. 그러나, 하늘로 정처없이 사라져 버린 라퓨타의 한 부분처럼, '하늘에의 로망'이라는 이름의 이 보석은 하늘 높이 올라가 마침내 최고점에서 부서져 지상에 흩어져 아니메의 이곳저곳에 여러 형태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가이낙스와 곤조 등이 선보였던 감각적인 스타일이나 선라이즈와 본즈 등이 만들어낸 디테일한 묘사는 라퓨타의 조각들이 떨어지면서 피어난 또다른 형태의 로망일지도 모릅니다.
 
하늘을 향한 로망이 또다시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난다면, 과연 다음에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까요. 일상의 아기자기함을 담은 잔잔한 로망일까요, 아니면 박력과 모험이 가득한 신나는 로망일까요.

ⓒ Bones · Sony Computer Entertainment Inc. · Ani P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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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en of the East Production Committee

마전, 후지 TV의 애니메이션 전문 방영 시간대인 노이타미나를 통해 방영되며, 좋은 반응을 얻었던 카미야마 켄지 감독의 작품 동쪽의 에덴.

2010년이라는 비슷한 시간대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세계관을 다룬 이 작품은, 미스터 아웃사이드라는 정체불명의 인물로부터 특수한 휴대폰을 통해 100억엔의 전자화폐를 자유롭게 사용하며, 쥬이스라는 정체불명의 여성 비서를 통해 어떤 문제든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12인의 세레손들이 일본을 구하기 위한 구세주가 되어야 한다는 다소 황당무게한 임무를 부여받은 상황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세레손 중의 한명인 타키자와 아키라가 모리미 사키라는 평범한 취업준비 중인 대학생 아가씨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미스테리하면서도 다소 가볍고 코믹한 터치로 다루고 있습니다.

정체불명의 10발의 미사일이 떨어진 일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평온한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요. 그런 평온함 속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체 직업에 대한 의지도 없어져 버린 수많은 NEET 족들이 범람하는 일본의 사회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엄청난 자금과 힘을 얻게 된 세레손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의무)'라는 명제 속에서 어떤 식으로 세상을 구하려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작품 속에서 하나의 사회 문제로 대두된 NEET 족, 그리고 스스로 기억을 지운 체 이 모든 위험을 헤쳐나가는 주인공 타키자와 아키라의 이야기는 오랜만에 온전히 스토리에 포커스를 맞춰 아니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너무 짧아서 조금 스토리가 급진행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특히,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사키 일행들이 개발한 화상 검색엔진인 동쪽의 에덴은 휴대폰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촬영(내지는 보여지고 있는) 영상을 웹 상에 실시간으로 올려 그 검색결과를 휴대폰의 화면에 오버래핑 시킴으로써, 굉장히 진보된 개념의 모바일 검색 엔진을 표현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이 기술이 단지 만화영화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기술이 아닌 실제 구현이 가능한 단계까지 와 있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또다른 흥미를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바로 동쪽의 에덴에서 등장했던 화상 검색엔진의 모티브라고 할 수 있는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 기술을 아니메와 함께 이야기 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물론, 아주 디테일한 기술적 레벨까지 다루는 것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수준 정도로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자료를 본 게 몇 개 안되는지라...)


증강현실, 모바일 아니 모든 IT 기기의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될 것인가.

가상현실이라는 단어는 굳이 해당 기술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상당히 우리에게 널리 퍼진 개념입니다. 가상의 입체공간에 현실감을 불어 넣어 사용자들이 마치 실제 현실 속에서 행동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의미하는 것이죠. 궁극적으로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여진 것과 같이 가상인지 현실인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시각 뿐만 아닌 모든 감각기관에 자극을 주는 것이겠지만, 현재로서는 상당히 현실과 가깝게 묘사된 온라인 게임 속에서 자신의 아바타를 이용하여 역할을 수행하거나, 비행기 조종 시뮬레이터를 통해 실제와 똑같은 환경으로 비행조종 연습을 할 수 있는 등의 범위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상현실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증강현실은 조금 다른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가상현실이 인간을 가상공간에 초대하는 형태라면, 증강현실은 가상의 인터페이스와 가상의 객체를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로 끌고 나온, 어떻게 보면 가상현실과는 정반대의 방향성을 갖고 있는 개념인 것이죠. 자신이 어떤 사물을 눈으로 보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가상의 캐릭터가 등장하여 보고 있는 사물의 명칭, 용도, 가격, 제품라인, 판매처 등에 대한 정보를 음성이나 팝업 메시지로 알려준다면 어떨까요? 바로 이것이 증강현실의 궁극적인 완성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가상의 캐릭터와 가상의 사물이 등장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개발초기부터 이러한 형태로의 개발은 분명 불가능한 이야기였기에 현실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증강현실을 제공하게 됩니다. 가상현실이 오감 자체에 영향을 미치기에는 기술적 수준이 아직 미비했기에 컴퓨터와 같은 IT 기기를 이용한 것처럼, 증강현실은 이러한 가상의 캐릭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바로 이 기기를 사용하게 됩니다. 모바일 기기, 즉 휴대폰인 것이지요.

초기 증강현실 장비인 MARS(좌)와 DWARF(우) (from 모바일 증강시스템에 대한 연구동향, 광주과학기술원)


물론, 애초부터 증강현실이 휴대폰에 적용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증강현실의 개념이 등장하던 당시에는 휴대폰에 카메라가 부착된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이었고, 증강현실을 위해 필수적으로 구비되어야할 이미지 인식, 3D 처리와 같은 고성능의 시스템을 필요로 하는 이미지 처리 작업을 해낼 수 있는 휴대폰이란 것은 상당히 요원한 이야기였지요. 그래서 초창기에는 노트북을 등에 매고, 고성능 카메라를 어깨나 머리에 매단 체, 특수 고글을 쓰고 처리된 영상을 고글에 투사하는 형태의,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증강현실이 구현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하여 카메라 폰, 그것도 몇백만 화소급의 고성능 카메라가 휴대폰에 내장되고, 고화질의 영상을 쉽사리 재생할 수 있는 고성능의 CPU와 고화질의 LCD가 속속 휴대폰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증강현실이 모바일 기기에 적용될 수 있는 여건이 조금씩 조성되기 시작한 것 입니다. PC에서 점차 휴대 IT 기기로 그 흐름이 바뀌면서 증강현실 기술은 좀 더 빠르고 쉬운 형태의 인터페이스로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증강현실의 다양한 사용예 (image from flickr.com)

증강현실의 기술을 적용하면 거리에서 휴대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통해 각 건물에 입점해 있는 상점과 식당들의 정보(메뉴, 가격, 인테리어 및 사람들의 평가 등등), 지나가는 자동차의 성능, 행인들의 옷이나 악세사리에 대한 가격과 판매처, 유서깊은 관광명소에 대한 간단한 정보 등을 휴대폰의 LCD 화면을 통해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전용 모바일 기기가 장착된 고글을 쓰고 의사가 수술에 임하면 고글에서 각종 수술에 관련된 정보와 그래픽 영상이 나타나 수술에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의료분야 뿐만 아니라, 교육분야에서도 이러한 증강현실을 이용한 다양한 시청각 교육이 가능합니다. 특수 고글을 쓰고 빈 공간을 바라보면 천체가 입체적으로 디스플레이 됩니다. 선생님이 그 중에서 은하계를 클릭하면 줌인을 통해 은하계의 구조가 학생들에게 확대되어 보여지게 되겠죠. 화성을 클릭하면, 다시금 줌인을 통해 화성의 확대된 모습과 위성들의 모습이 디스플레이됩니다. 이처럼 단순히 보는 것만이 아닌, 터치 센서 등의 활용을 통해 증강현실은 인터랙티브하게 활용될 수도 있지요.

그 밖에도 자동차나 비행기 등의 전면 유리에 HUD(Head Up Display) 등과 연계하면, 3차원 캐릭터들에 의한 내비게이션 및 각종 상태 정보의 확인이 가능할 겁니다. 또한, 공업 디자인이나 제품 설계시 증강현실을 활용하여 3차원적인 설계가 가능할 수도 있겠구요. 이러한 예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나 '아이언 맨' 등의 3차원 인터페이스의 컴퓨터 등에서 그 모습을 잠깐 엿볼 수가 있습니다.


동쪽의 에덴에 등장한 화상 검색엔진을 구축하기 위해 놓여진 난제들

자, 이러한 증강현실 기술이 접목된 동쪽의 에덴의 화상 검색엔진을 구현할 때 어떤 과제와 문제점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을까요. (아차, 텍스트만 나열된다고 동쪽의 에덴의 화상 검색엔진이 증강현실이 아니지 않냐고 반문하시지는 마시길. 실제 현실의 영상과 가상의 텍스트/이미지 등이 결합된다는 점에서는 증강현실의 한 예라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3D 그래픽 효과만이 빠졌을 뿐.)

일단, 엄청난 성능상의 발전을 이루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폰 카메라의 성능상의 한계가 큰 걸림돌 중 하나일 겁니다. 화소수는 높다하더라도 CMOS 센서의 특성상 어두운 곳에서의 화질 저하가 심하기 때문에 과연 정확한 영상인식과 처리가 가능할지가 관건일 테니까요. 그것은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악천후의 날씨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영상인식이 잘못되어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표시되는 경우에 대한 대비책도 있어야 할 겁니다.

동쪽의 에덴에서 사용된, 모바일 증강현실을 활용한 화상 검색엔진의 예. (ⓒ Eden of the East Production Committee)

 
영상 인식의 처리엔진을 휴대폰에 실을 것인지, 아니면 서버 쪽에 실은 것인지도 화두가 될 수 있습니다. 고성능의 휴대폰이라 하더라도 높은 프로세싱 능력을 필요로 하는 영상 처리는 머신에 부담을 주고 결과적으로 제품의 가격상승을 유발할테니까요. 촬영한 이미지를 서버에 보내면 서버가 이를 영상처리를 통해 분석하여 결과 정보를 보낸다면, 휴대폰의 하드웨어적 부담이 줄어들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시스템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서버에서 이를 처리할 경우에는 서버 측의 부담이 가중될 수 있기에, 서버를 분산하여 운용하는 시스템적 고려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속도를 감안하면 초창기에는 서버에서 영상 처리를 하다가 후에 휴대폰 쪽으로 이를 옮기는 순서로 갈 수도 있구요.

또한, 사용자가 현재 있는 위치를 측정하기 위한 GPS의 도입 역시 필요할 겁니다. 현재 있는 위치정보를 통해 좀 더 정확하고 빠르게 사용자가 보낸 영상 정보를 분석할 수 있을 테니까요. 현재 각광 받기 시작하는 LBS(Location-Based System: 위치기반 시스템)가 모바일에 적용되면 증강현실과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을 찍어 보낸 다음 그에 대한 검색 결과를 받을 수도 있지만, 실시간으로 촬영하고 있는 영상에 대한 검색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더 적합한 구현일 겁니다, 바로 동쪽의 에덴의 시스템처럼 말이죠. 이는 현재 서비스되고 있는 3G 영상통화보다 더 고화질의 영상 데이터를 전송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에 따른 통신속도 및 대역폭의 확보와 일반인들이 부담없이 사용할 수 있는 요금제의 마련 역시 중요한 이슈가 되겠지요. 어쩌면 이것이 가장 관건이 될 문제일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기껏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요금제가 너무 비싸 이용하지 않는 불상사가 발생하면 안될테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영상 인식을 통한 해당 사물에 대한 검색 정보를 제공해야할 서버와 데이터베이스의 구축 역시 해결해야할 문제입니다. 기존의 검색엔진과의 연동만으로는 사용자들이 찍은 사진과의 비교 분석이 원활하지 않을테니까요. 같은 사물을 찍어도 모두 제각각의 각도와 밝기, 전혀 다른 환경에서 촬영할 수 있기에 그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좀 더 확장된 개념의 데이터베이스가 구비되어 있어야 할 겁니다.

물론, 이 모든 정보에 대한 데이터베이스와 시스템을 특정 업체나 특정 컨소시엄의 구성을 통해서 제공한다는 것은 무리이겠지요. 이를 위해 사용자들이 찍은 영상 정보를 네티즌들과 모바일 유저들이 공유할 수 있는 모바일 웹 포탈이 구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유저들이 커멘트를 달면 그것이 영상을 찍은 사용자에게 피드백이 되어야 겠지요. 이것은 동쪽의 에덴의 시스템이 활용하고 있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즉, 누구나 참여가 가능한 오픈 시스템의 형태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오픈 시스템의 도입에 따른 개인정보의 유출과 초상권 침해와 같은 문제들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일 겁니다. 누군가 몰래 자신을 도촬하여 이를 증강현실 시스템을 통해 악용하거나 놀림거리로 삼는다면, 이 역시 또다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수도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증강현실. 그 새로운 가능성의 탐색

증강현실은 아직 상용화 단계라기보다는 여러 기업과 연구소에서 그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그만큼 발전 가능성이 풍부하며, 제대로 실현된다면 인터페이스의 새로운 혁명을 가져올 것으로 보입니다. 양방향성과 오감을 자극하는 인터페이스는 분명 우리의 세상을 지금과는 다른 형태로 꾸며낼 테니까요. 자신의 옆에 자신을 보좌하는 아바타 비서가 같이 걸어다니면서 정보를 제공하는 그런 세상은 상상만 해도 굉장히 특이한 경험이 될 듯 합니다. 물론, 이러한 인터페이스는 자칫 인간끼리의 소통에 점점 어려움을 느껴가는 현대인들의 습성을 더더욱 가속화시킬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기술의 발전을 위한 인간의 행보는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겁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려와 걱정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세상 속에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갈 방법과 대안을 찾아가는 것이겠지요.

© SHIROW MASAMUNE ~ PRODUCTION I.G / KODANSHA

전자두뇌와 사이보그 장기를 통해 가상현실(좌)와 증강현실(우)의 궁극적 진화형태를 보여주었던 공각기동대 S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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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트는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의 '아톰 vs 아틀라스, 순수함을 지키려는 아이와 순수함을 잃어버린 아이의 대결'을 옮긴 것입니다.


철완 아톰은 아시다시피 일본 만화영화의 대부 데즈카 오사무의 필생의 역작 중 하나로, 지금까지도 일본 만화영화를 대표하는 아이콘 중의 하나입니다. 저와 비슷한 세대의 분들(그러니까, 80년대에 초등학생 또는 10대 초중반이었던 분들)은 아마도 63년도 TV 시리즈보다는 국내에도 방영 되었던 82년도 리메이크 TV 시리즈에 대한 기억이 더 생생할 듯 싶군요. (아마도 당시 방영제목이 '돌아온 아톰'인가 '돌아온 우주소년 아톰'인가 했을 텐데, 기억에는 86년도인가 87년도에 방영하지 않았나 싶군요.)

철완 아톰은 소년 만화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70년대의 '개구리 왕눈이'나 '은하철도 999' 등이 그러했듯) 꽤 심오한 주제와 이야기 전개를 작품 속에 내포하고 있었는데, 감정을 가진 로봇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의 이기심과 편견의식을 비판하고, 동시에 그런 인간들을 위해 헌신하는 아톰을 통해 비로소 인간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본연의 선한 마음을 되찾아간다는 주제를 매회 에피소드마다 다른 형태로 풀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그 전개에 있어서는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흥미 넘치는 액션과 모험이 공존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52화라는 긴 흐름 속에서 이런 하나의 주제만을 갖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만이 아닌, 각 에피소드의 등장인물을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성장과 휴먼 드라마를 한 화 내지는 두 화 단위로 풀어가면서 아톰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로 인해 아톰 자신도 하나의 배움을 얻는 스토리 전개를 보여주었다는 점 역시 아톰 시리즈가 가진 재미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머니로 알고 자라온 로봇의 두뇌를 이식한 레이싱 머신 백색혜성호를 타고 사투를 벌이던 한 레이서의 에피소드는 여전히 이 시리즈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의 하나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이런 아톰에서 가장 돋보였던 에피소드이자 주메뉴는 아톰의 라이벌이자 호적수였던 아틀라스와의 흥미진진한 대결구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아톰과 같은 컨셉으로 태어난 아틀라스는, 아톰과는 달리 선한 양심을 가지지 못한 체, 오로지 투쟁의식에 가득찬 전투기계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아톰이 인간과의 생활 속에서 갈등과 화해를 겪으면서 인간들의 삐뚤어진 모습을 부드러운 터치로 비판했다면, 아틀라스는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적극적으로 들어낸 체 그들을 단죄하려는 모습으로 묘사됨으로써, 인간들의 삐뚤어진 모습을 직설적인 형태로 투영했다는 점에서 아톰 시리즈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반대편 격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톰과는 달리 아틀라스에게는 오메가 인자라는 것이 이식되었기 때문입니다만.)

© Tezuka Productions All Rights Reserved.

그림 1. 치켜올려진 강렬한 눈썹과 강렬한 눈장식에서 아틀라스의 성격이 아톰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강력한 군주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엄격하고 피눈물나는 교육을 받아 동심을 잃은 어린 왕자의 모습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러나, 중반부에 이르러 아틀라스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하여 시리즈의 긴장감을 다시 팽팽하게 당겨주는 비중있는 조연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냅니다.

시리즈 초반 아톰과 같은 형태의 모습에 이집트의 파라오를 연상시키는 머리형과 금빛으로 치장한 아틀라스는 아톰의 소년스러운 모습과 극렬한 대비를 이루면서 작품의 흥미를 고조시켰지만, 초반에 반짝 등장 이후 스토리 상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에피소드 등장인물 정도로 끝났던 터라 사실 이후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습니다.(어쩌면, 기억이 가물가물하기에, 복선이 있었음에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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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돌아온 아틀라스는 여전히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눈과 함께 한층 더 위압적이면서도 고결한 모습으로 아톰 앞에 나타났다. 고대 이집트의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파라오에 비유할 수 있을 듯.


다시 돌아온 아틀라스의 모습은 더이상 아톰과 같은 소년의 그것이 아닌, 완벽하게 육체적인 성장을 이룬 성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강렬한 인상과 근육질의 몸, 그리고 온몸을 뒤덮은 황금색과 검은 망토는 금빛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마치 이집트의 어린 왕자가 장성한 파라오로 돌아온 듯한 모습이었는데요. 아마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제게 있어서 일본 만화영화 중 가장 강렬한 카리스마의 악역 캐릭터는 이 아틀라스가 아니었던가 싶기도 합니다. 그의 정신은 소년기의 불우한 환경 속에서 사랑과 우정, 따스한 인정을 겪지 못한체 성장한 한마리의 늑대와 같은 것이었는데, 그런 그의 증오와 적개심은 오롯이 인간으로 향했고, 그렇기에 그와는 형제와도 같은 존재이면서, 그와는 달리 인간을 지키려 하고 인간처럼 살고 싶어하는 아톰을 극렬하게 증오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결구도는 단순 선악의 대결구도 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따스함을 알고 살아간 아이과 그러한 따스함을 느끼지 못한체 살아왔던 아이와의 대립이기도 했으며, 순수함을 잃지 않은 아이와 순수함을 잃어버린체 잔혹한 현실에 내팽겨쳐진 아이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제작진은 거기에다 돌아온 아틀라스를 성장한 어른의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아톰을 위협하는 거대한 적으로서의 위압감과 더불어, 시청하는 아이들로 하여금 주인공과의 교감을 더욱더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게 해주는 플러스 효과를 주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그들의 대결을 통해 사랑과 정의, 우정과 용기 같은 소년 만화의 테마는 훌륭하게 표현되고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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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아틀라스의 주무기인 번개검은 아톰의 가장 큰 개성인 엉덩이의 기관총과 좋은 대비를 보여준다. 생김새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무기들도 아톰과 대비를 이루면서 이집트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십분 살려주었다고 할 수 있을 듯. 날이 갈라지면서 번개를 내뿜는 검은 아틀라스만의 강렬한 퍼스널리티를 상징하는 아이템이었다.


아틀라스는 재등장 이후, 가끔씩 에피소드에 등장하면서 그 강렬한 카리스마와 함께 극의 분위기를 주도했었습니다. 덕분에 아틀라스가 등장하지 않는 에피소드는 오히려 김이 빠진 느낌마저 들 정도였죠. 그의 존재감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아틀라스가 결국 인간에 대한 증오를 허물고 아톰과 화해를 한 후, 지구를 위협하는 외계생명체들을 자신의 모선 수정궁과 함께 블랙홀로 끌고 사라지는 에피소드는 당시 아톰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최종 에피소드인양 깊은 여운을 남겼더랬습니다. 덕분에 이후의 시리즈는 주인공 아톰을 밝게 비추어주던 강렬한 그림자의 퇴장으로 꽤나 오랫동안 싱거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죠. (기억에는 아틀라스의 최후 에피소드 직후 등장했던 에피소드의 작화는 왠지 모르게 이전에 비해 퀄리티가 급격히 떨어져 이러한 싱거운 전개에 더욱 불을 지폈던 듯 싶기도 하군요.)

아틀라스는 소년 만화영화에 있어서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인물구도를 선보였던 기동전사 건담의 붉은 혜성 샤아와도 상통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주인공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주인공의 성장을 유도하는, 그리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라이벌이자 반대편 격의 주인공... 이러한 라이벌 구도는 샤아 이후로 일본 만화영화에 있어서 하나의 테마처럼 자리잡고 있었고, 그러한 테마와 상통하는  강렬한 카리스마의 금빛 아틀라스는 마치 3년 후 '기동전사 Z 건담(1985)'에서 금빛 모빌슈트 백식을 타고 등장하는 샤아의 모습과 어딘지 모르는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틀라스에 대한 저의 애정이 남다른 것도 어쩌면 그러한 연유일런지도 모르겠군요.

그러한 지난 날의 추억 때문인지 사실 2003년도에 리메이크되었던 아톰 시리즈에서는 주인공 아톰보다 아틀라스를 더 기대하기도 했었는데, 이전의 강렬한 카리스마의 아틀라스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해서 악동같은 모습으로 새로 태어난 아틀라스에게는 오히려 감정이입이 쉽게 되지 않더군요. (시간 상의 이유로 한 두화 밖에 감상하지 못했기에 결과적으로 새로운 아틀라스를 이전의 아틀라스와 비교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만.)

©2003 Tezuka Productions / Sony Pictures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그림 4. 그동안 먹고 살기 힘들어서 몸에 발랐던 금 다 띄어다 팔았는데... 이렇게시세 오를 줄 알았으면 좀 더 두었다가 팔 걸!


덧붙여서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지난날 꼬박꼬박 비디오 테잎에 녹화해 두었던 아톰 TV 시리즈인데요. 아틀라스의 최후가 나왔던 에피소드 이후 비록 시들해지긴 했지만, 52화 중 대부분을 다 녹화해두었을 정도로 당시 제게 있어서는 꽤 애지중지하던 자료였는데, 그것이 후에 '전격 Z 작전'(올드팬들은 다 아시는 명작 미·드라는...) 녹화를 위한 비디오 테잎이 부족한 나머지 조금씩 아톰의 녹화 비디오 테잎을 가져다 쓰기 시작한 다음, 미니시리즈 '브이'에 'A 특공대'까지 녹화하는 바람에 결국 모두 남김없이 덮어서 녹화를 해버렸던 것이었죠. (비디오 테잎을 더 샀으면 되지 않았냐고 생각하신다면... 더 살 돈이 없었으니까라고 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아마 52화를 모두 녹화하지 못했던 이유도 지금 생각해보니 저 비디오 테잎의 부족도 한몫을 한 듯 싶군요. 뭐, 저기에다가 에어울프랑 맥가이버까지 있었으니 모두 선녹화 후감상 후 소장가치를 못느낀 시리즈는 다시 덮어서 다른 프로 녹화라는 궁여지책을 썼더라는... )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쓰면서 유튜브에서 발견한 아톰의 영상이 참으로 반갑고 그리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82년작 철완 아톰의 북미판 오프닝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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