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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LT Disney


<스탭>

◈ 감독/각본: 크리스 벅(Chris Buck), 제니퍼 리(Jennifer Lee)
◈ 원작: 한스 크리스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
◈ 제작 총지휘: 존 라세터(John Lasseter)
◈ 제작: 월트 디즈니 픽쳐스/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줄거리> 

아렌델 왕국의 첫째 공주 엘사는 태어났을 때부터 눈과 얼음을 다룰 수 있는 신비한 마법을 쓸 수 있다. 마법을 이용하여 동생인 둘째 공주 안나와 함께 눈 사람을 만들고 썰매를 타며 즐겁게 보내던 어느날 밤, 그만 실수로 엘사의 마법이 안나를 다치게 하고 만다.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안나를 구하기 위해 왕과 왕비는 숲속의 요정들인 트롤을 찾아나서게 되고, 안나를 고쳐주며 트롤은 왕에게 주의를 준다, 심장이 얼었다면 안나를 고칠 수 없었다며, 엘사가 마법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 조심하라고.

엘사 공주의 마법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왕은 궁 안의 시종 수를 줄이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뒤 엘사를 칩거시킨다. 심지어 안나마저도 엘사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리자, 트롤들에 의해 언니의 마법에 대한 기억이 지워져 버린 안나는 갑자기 자신을 멀리하고 혼자 지내는 언니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데...

그렇게 세월이 흘러,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나고 엘사가 여왕에 등극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마침내 닫혀있던 아렌델의 성문이 열리고,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들떠 하는 안나와 달리 아직도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엘사는 이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하다. 엘사는 대관식을 무사히 마치고 여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그리고 안나는 그토록 바라던 운명의 사랑을 만나 답답한 아렌델을 떠날 수 있을까.


라푼젤의 뒤를 잇는 디즈니 스타일의 화려한 귀환

'어공주(1989)'를 시작으로 전세계를 강타했던 디즈니의 르네상스는 '라이온 킹(1994)'에서 정점을 찍은 뒤, '포카혼타스(1995)'부터 서서히 사그러들기 시작했습니다. 디즈니 르네상스의 쇠락과 함께 픽사가 선보인 3D 애니메이션은 점점 그 입지를 굳혀가 21세기부터는 픽사와 드림웍스의 투톱으로 디즈니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워버리고 말았죠. 2006년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디즈니=픽사'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화영화 팬들에게는 이제 디즈니 스타일은 과거이고, 픽사가 창조해 낸 스타일이 현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3D 애니메이션이 전세계적인 추세가 되기는 했지만, 사실 3D가 셀 애니메이션이 가진 모든 것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는 디즈니가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는 일본산 셀 애니메이션의 것이 되지요. 물론 이들조차 디즈니가 해외배급을 맡고 있으니 어떤 면에서 승자는 디즈니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디즈니가 보여주었던 그들만의 만화영화는 점점 더 보기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디즈니의 르네상스를 화려하게 열었던 뮤지컬 애니메이션은 과거의 전설로만 사람들에게 회자되어집니다.

'겨울왕국(2013)'은 과거 디즈니 만화영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뮤지컬 애니메이션의 성공적인 부활을 알린 작품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역사에 있어 인어공주와 버금가는 위치에 오를만한 작품인 셈이죠. 오히려 근래의 폭발적인 흥행열풍은 인어공주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실제 겨울왕국의 흥행성적은 라이온 킹에 이어 역대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2위로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리고 있지요. 그렇다면 과연 이 만화영화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명작일까요?

사실, 디즈니가 '타잔(1999)' 이후로 한동안 봉인시켜왔던 디즈니 스타일의 부활을 시도한 것은 겨울왕국이 처음은 아닙니다. 인어공주의 두 감독 론 클레멘츠와 존 머스커를 기용하여 '공주와 개구리(2009)'를 제작한 것이 첫 번째 시도였었죠. 한국에서의 흥행은 신통치 않았지만, 공주와 개구리는 영미권에서 꽤 인상적인 성공을 거둡니다. 흑인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참신함이 돋보이는 이 작품에 하나의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트렌드에서 벗어난 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는 정도일까요. 하지만, 디즈니는 이 작품에서 디즈니 스타일이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듯 합니다. 그리고, '라푼젤(2010)'로 다시 한 번 그 가능성을 타진하게 되지요.

사실, 라푼젤은 가능성을 타진했다기 보다는 디즈니가 승부수를 띄운 작품입니다. 2억6천만 달러의 제작비(디즈니 만화영화는 '노틀담의 꼽추(1996)'에서 처음으로 1억달러가 넘는 제작비를 투입합니다)는 물가상승률을 감안해도 디즈니 역사상 기록적인 제작비였었죠. 주목할 것은 라푼젤이 디즈니의 장점인 뮤지컬 애니메이션과 픽사가 발전시켜온 3D 애니메이션을 조합한 작품이었다는 점입니다. 픽사의 수장 존 라세터가 프로듀싱을 맡으면서 라푼젤은 비로서 디즈니와 픽사의 장점을 제대로 융합해 냅니다. 그것은 존 라세터가 프로듀싱한 이번 겨울왕국도 마찬가지죠.


겨울왕국은 공주와 개구리, 라푼젤을 통해 자신들의 스타일, 그리고 만화영화 팬들이 원하는 스타일의 조합점을 찾아낸 디즈니의 최종(?)결과물인 셈입니다. 3D 애니메이션이라는 트렌드를 가져오되, 디즈니가 선보였던 셀 애니메이션의 서정성을 살릴 수 있는 세심한 터치가 이루어졌으며, 뮤지컬 애니메이션과 코미디의 환상적인 조합이 특징인 과거 디즈니 스타일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죠. 핵심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트렌드에 맞는 세련된 스타일을 가미한 이 방식은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겨울왕국의 흥행돌풍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보다는 오히려 개봉 시기와 음악에 더 공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겨울왕국의 이야기는 공주와 개구리나 라푼젤에 비해서 단선적이라 다소 싱거운 느낌입니다. 무언가 얘기가 진행되는 듯 하더니 그대로 결말에 이르렀다고나 할까요. 눈사람 올라프는 인어공주의 세바스찬이나 알라딘의 지니와 같은 디즈니의 대표적인 감초 캐릭터의 뒤를 이을만큼 인상적이지만, 트롤과 같은 다른 캐릭터들의 활용은 다소 아쉽습니다. 캐릭터들도 엄밀히 말해 이제가지의 디즈니 스타일과 크게 다르지 않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어필하는 것은 캐릭터의 입체감보다는 캐릭터들이 이끌어내는 이야기의 방향성이 이제까지 디즈니의 그것과는 다소 다르기 때문입니다. 언니와의 행복한 시간을 그리워하는 안나는 이제까지 디즈니의 여주인공처럼 밝고 건강하며 사랑스럽지만, 남자에게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나아가려 하지요. 언니인 엘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강대한 마력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까 두려워하는 소심한 여인이면서도 얼음궁전을 만들어낼 때는 누구보다 진취적이고 강렬한 매력을 뿜어내지요. 겨울왕국은 이 두 자매의 매력과 가족애가 멋진 앙상블을 보여줍니다.

압도적인 얼음궁전의 위용과 함께 청아하게 울려퍼지는 엘사의 'Let it Go'로 대표되는 겨울왕국의 OST는 마치 마법과 같이 영화팬들을 스크린으로 빨려들게 합니다. 초반부에 나오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엘사의 이 씬은 겨울왕국 중 가장 인상적이기까지 하지요. 오리지널판의 엘사역을 맡은 이디나 멘젤의 음색도 훌륭하지만, 한국어 더빙판에서 엘사의 노래파트를 맡은 뮤지컬 배우 박혜나의 목소리도 이에 견줄만 합니다. 디즈니 측의 철저한 시스템 덕에 검증된 성우들이 기용되어 겨울왕국의 더빙판은 오리지널판 못지 않게 훌륭합니다.

크리스마스, 연말과 어우러진 개봉 역시 흥행에 큰 일조를 하지 않았나 합니다. 실제로 북미에서 11월에 개봉한 겨울왕국은 크리스마스와 연말 특수를 등에 업고 다시금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오르게 되지요. 한국에서는 늦게 개봉한 것이 오히려 여타 경쟁작들을 피하는 결과를 가져와 흥행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나 하는 예상도 되구요. 결국 이런 안팎의 요소들이 겨울왕국의 기록적인 흥행에 도움이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때를 잘만난 셈이죠.

겨울왕국은 디즈니를 대표하는 뮤지컬 애니메이션의 성공적인 부활을 알렸다는 점만으르도 디즈니 만화영화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야기 구성이 조금만 더 밀도가 있었다면 좋았을테지만, 사랑스러운 엘사와 안나로 대표되는 캐릭터들을 3D로 성공적으로 이식한 점이나 가슴을 울리는 OST 등 겨울왕국이 보여준 여러가지 클리셰들은 과거 디즈니의 전성기를 연상시킬만큼 인상적입니다. 물론, 이 성공으로 디즈니가 두번째 르네상스에 접어들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적어도 뮤지컬 애니메이션이 앞으로도 계속 제작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준 것은 사실입니다. 겨울왕국은 디즈니의 저력을 제대로 보여준 오랜만의 작품입니다.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WALT Disney에게 있습니다.



겨울왕국 (2014)

Frozen 
8.4
감독
크리스 벅, 제니퍼 리
출연
박지윤, 소연, 박혜나, 최원형, 윤승욱
정보
애니메이션, 어드벤처, 가족 | 미국 | 108 분 | 2014-01-16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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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live Studio, EBS, Dream Seach C&C


<스탭>

◈ 감독: 한상호
◈ 각본: 이용규, 한상호
◈ 제작: (주)올리브 스튜디오, (주)드림써치 C&C


<시놉시스> 

타르보사우르스 가족의 막내로 태어난 점박이. 엄마와 형, 그리고 누나 둘을 가족으로 둔 점박이는 든든한 가족들 속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에게서 큰 상처를 입고 쫓겨난 티라노사우르스 애꾸눈이 그들의 뒤를 노리고 있었으니... 점박이가 첫 사냥을 나서던 그날, 애꾸눈의 갑작스런 습격으로 점박이의 가족은 점박이만을 남겨놓은 체 모두 세상을 뜨고 만다. 아직 어린 공룡 점박이는 이제 혼자서 약육강식의 공룡세계를 헤쳐나가야만 하는데...


세계수준의 3D CG 애니메이션이 돋보인 에듀테인먼트

2008년 EBS 다큐멘터리 '한반도의 공룡'을 토대로 극장용 CG 애니메이션으로 각색된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3D(이하 점박이)'를 이번 월요일 시사회를 통하여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이웃 블로거이시자 본 작품의 프로듀서로 참여하신 캅셀(송락현)님께서 잊지 않고 불러주시는 덕에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앞서 캅셀님께 먼저 격려의 박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영화만 보고 냅다 집으로 돌아가서 죄송해요. ^^;)

☞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3D, 한국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도전 by 캅셀 (보러가기)

방송으로 보셨던 분들이면 아시겠지만, 당시 EBS 다큐멘터리 한반도의 공룡은 TV 다큐멘터리로서는 꽤 높은 수준의 CG로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던 작품입니다. 물론, 리소스 투입대비라는 수식어가 선행되어야 겠지만, 헐리우드의 각종 CG 영화로 눈이 높아진 시청자들에게는 성에 안찰지는 몰라도 한반도의 공룡은 비주얼에서 분명 기대 이상의 완성도를 가진 작품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완성도 만큼 중요한 것은 시도인데요. 당장 눈에 차지 않는 완성도라고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면 발전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뛰어난 작품도 한 번에 나오지는 않지요. 여러번의 시도와 도전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분명 한반도의 공룡은 의미있는 시도이자 결과물이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번 점박이는 EBS 다큐멘터리의 완성도보다 한차원 높아진 영상미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어설픈 헐리우드 3D 실사 영화보다 나은 입체감을 보여주더군요. 링크를 건 캅셀님의 포스트에서도 언급이 되어 있지만, 지금의 기술수준에서는 실사 영화보다 애니메이션 쪽이 훨씬 더 완성도 높은 3D 영상미를 보여줄 수 있기에, 그런 점에서 확실히 점박이의 3D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물론 100점 만점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대 이하라든지 평균 이하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뉴질랜드 로케를 통해 촬영한 멋진 배경들도 큰 몫을 한 듯 싶구요. 이 때문에 한반도의 공룡에서는 CG라는 것이 눈에 확 띄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점박이는 배경과 크리쳐가 하나의 장면으로서 잘 융화된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예고편의 영상을 보았을 때는 조금 우려스러웠습니다. 배경과 크리쳐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을 주었거든요. 하지만 실제 극장에서 접한 점박이는 예고편의 느낌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습니다. 공룡의 피부 질감은 꽤나 훌륭하여 공룡 CG만 놓고 볼 때는 거의 월드 클래스 수준이 아닌가 싶네요. 공룡들의 움직임도 매우 자연스러워 실사같은 느낌을 줍니다. CG는 올리브 스튜디오가 맡았는데요. 올리브 스튜디오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냉장고 나라 코코몽'으로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낸 제작 스튜디오이기도 합니다. 

점박이는 애꾸눈 티라노사우르스에게서 가족을 잃은 타르보사우르스 점박이가 역경을 헤치고 성장하여 가족들을 지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흐름은 어떤 면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1994)'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는데요. 다만, 다큐멘터리 연출가 출신인 한상호 감독의 성향 탓인지 영화의 흐름은 전반적으로 다큐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는 공식보도자료에서도 언급된 '에듀테인먼트'라는 작품의 방향성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요. 물론, 다큐와 영화를 혼합한 다른 작품(예를 들면 장 쟈크 아노 감독의 '베어(1988)'와 같은...)들을 연상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지만, 무언가 에피소드 단위로 영화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이야기의 흐름이 그닥 원활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점박이가 홀로 되는 초반부부터 점박이의 성장을 다루는 중반부까지의 흐름은 다소 몰입감이 떨어지지 않나 싶군요.

이는 가족을 잃고 홀로 남겨진 아기공룡이 늠름하게 성장한다는 본작의 시놉시스가 이미 많은 작품에서 다루어졌던 상투적인 소재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바꿔 말하면 이제는 꽤나 흔해진 이 테마를 좀 더 몰입감 있는 이야기로 구성해내지 못한 원인이라고 볼 수도 있겠구요. 또한 이는 다큐적인 속성을 갖는 점박이의 정체성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앞서 언급했던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는 구성 상의 문제가 극의 몰입을 방해하면서 생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이야기가 종반부로 갈수록 집중력을 회복한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흡입력은 다소 약했지만, 기승전결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고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확실히 이야기했다고 생각됩니다.

ⓒ Olive Studio, EBS, Dream Seach C&C

한마디로 점박이는 다소 정직한 작품입니다. 예를 들어 종반부에 펼쳐지는 애꾸눈과 점박이의 사투는 피터 잭슨의 '킹콩(2005)'과는 비슷한 수준의 CG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으나 액션 씨퀀스에서 다소 밋밋함이 느껴지는데요. 물론, 현실적인 공룡들의 싸움이라는 점에서는 점박이 쪽이 훨씬 이를 잘 지켜낸 작품이긴 합니다. 다만 킹콩에서 보여진 킹콩과 티라노사우르스의 허무맹랑한 대결 같은 장면을 극적인 효과를 위해 점박이에서도 시도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비슷한 공룡영화 '쥬라기 공원' 시리즈와 비교하면 확실히 이 영화의 다큐적인 취향이 도드라집니다. 한마디로 긴장감이나 스릴이 부족한 것인데요. 물론, 이를 위해 이야기를 과장스럽게 그려내는 것이 반드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관객들에게 좀 더 어필하기 위한 차원에서 약간의 변주도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정직함은 점박이의 장점이자 단점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박이의 라스트는 제법 스펙터클하고 스릴이 있습니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점박이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집에 있는 4살짜리 아들이 생각나더군요.(아들한테는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아서 시사회에 데리고 오지는 않았습니다만) 시사회 직전 한상호 감독이 가족애를 되새기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분명 이 작품은 가족애를 테마로 한 괜찮은 입체 애니메이션이었다 생각됩니다. 가족단위 영화로 점박이는 제법 괜찮은 선택이 아닌가 싶습니다.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Olive Studio, EBS, Dream Seach C&C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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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필름 · 오돌또기


<스탭>

◈ 감독: 오성윤
◈ 원작: 황선미
◈ 제작: 명필름, 오돌또기


<시놉시스> 

양계장 속에 갇혀 사는 암탉 잎싹. 양계장 밖 마당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스스로 알을 품어 병아리를 낳고 싶었던 잎싹은 양계장을 빠져나오기 위해 며칠동안 굶고 탈진상태가 되어 혼절한다. 잎싹이 죽었다고 생각한 양계장 주인은 그녀를 밖으로 내다 버리고 때마침 먹이를 찾던 족제비에게 발견되어 위기에 처한 찰나, 한 청둥오리의 도움으로 잎싹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마당으로 돌아온 잎싹이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수탉과 오리들의 차가운 냉대뿐. 결국 잎싹은 양계장을 떠나 야생에서의 생활을 결심하게 된다.

낙관적인 잎싹이었지만 숲에서의 생활은 양계장에서 자라온 암탉에게는 막막하기만 했다. 얼마전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청둥오리(잎싹은 그를 나그네라 부른다)의 도움으로 잎싹은 숲의 리빙 컨설턴트 수달(잎싹은 달수라 부른다)을 만나 거처를 얻게 되고, 나그네는 근처에서 자신의 부인과 신방을 차리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평화로운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그네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둥지를 습격한 족제비에 의해 나그네의 부인이 끌려가는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족제비에게 끌려가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나그네는 필사적으로 쫓아가지만, 예전에 한쪽 날개가 부러진 그는 결국 그녀를 구하지 못한 채 오열하고 만다.

족제비가 어지럽힌 나그네의 신방. 잎싹은 그 둥지 속에서 오리알을 발견하고 알을 정성스레 품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의 평생의 소원이기도 했었는데... 과연, 잎싹은 청둥오리의 알을 잘 품어낼 수 있을까.


반세기 한국 만화영화사를 다시 쓸지도 모를 대작 애니메이션

8월 6일 현재 누적관객 78만명을 넘어선 '마당을 나온 암탉(2011)'은 이제 한국 만화영화의 역사를 새로이 쓸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길고 긴 어둠의 터널, 만화영화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고 있지 않았던 크리에이터들의 땀과 눈물이 과연 마당을 나온 암탉을 기점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겠습니다만, 적어도 이 작품을 통해 한국 만화영화의 수준이 더 이상 2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증명해준 것 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확신합니다.

40년 가까이 만화영화를 사랑하고 미국와 일본의 걸작 만화영화를 부러워하면서 보아온 엘로스에게도, 마당을 나온 암탉은 분명 기대 이상의 완성도였고, 외국의 탑 클래스 애니메이션과 비교했을 때도 손색이 없는 경쟁력을 갖춘 작품이었습니다.  단순한 작화적 완성도를 벗어나 6년의 시간이 걸린(어쩌면 여기에는 피치 못할 지연요소도 있었겠지만) 치밀한 프리 프로덕션, 배경이 된 우포 늪에 대한 철저한 사전답사, 선녹음 후작화의 프리스코어링 방식, 이미 검증된 베스트 셀러를 기반으로 한 완성도 높은 각색, 아름다운 음악과 주연 연기자들의 맛깔나는 연기력(물론, 이 부분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도 있지만) 등 본 작품은 단순히 재미있고 그림 좋은 만화영화를 벗어나 제작단계에서부터 한국 만화영화의 일보전진을 향한 의미있는 시도들이 행해졌다 하겠습니다.

비디오 레인져 007(1984)’이라는 희대의 셀 도용작을 극장에서 관람한 뒤 한국 극장 만화영화에 깊은 실망감을 느낀지 어언 27년 만에 처음으로 극장의 스크린을 통해서 만나게 된 이 한국 만화영화는 실로 그간의 아쉬움과 무관심을 모두 만회시킬 만큼의 역작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치 라스트에서 힘차게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 초록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눈부신 조화, 선녹음 후작화의 유려한 움직임

프닝부터 시작되는 유려한 수채화 풍의 배경은 이 작품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단초입니다. 동화가 원작인 이 작품은 실로 동화속의 모습을 그대로 동영상으로 옮긴 듯 서정적이고 포근합니다. CG 애니메이션과 비교하여 다소 두루뭉실한 수채화의 느낌은 CG 처리된 선명한 동물 캐릭터들로 인해 조화를 이룹니다. 부드러운 배경과 선명한 캐릭터의 조합은 확실히 이 작품을 일본의 아니메나 북미의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한국 만화영화만의 독특함으로 승화시킵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비주얼은 대중적이라기보다는 다소 마니악한 축에 속합니다만, 대중성에 대한 고려도 어느 정도 고민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주연급 동물 캐릭터들의 경우 캐릭터 상품화 했을 때도 나름의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은 대중성을 고려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까요.

선작화 후녹음으로 제작된 일본 아니메의 영향을 받아온 그동안의 한국 만화영화와는 달리, 마당을 나온 암탉은 전통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제작방식인 선녹음 후작화 방식, 즉 프리스코어링 제작기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제작비와 제작 일정 등 제작 전반의 리소스 투입 비용은 상승했겠지만 비디오와 오디오의 조화는 매우 뛰어나며, 이것이 작품의 품격을 높였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겁니다. 여기에 잎싹이나 나그네, 초록, 달수 등 주요 캐릭터들은 목소리 연기를 맡은 문소리, 최민식, 유승호, 박철민의 모습을 감안하여 디자인하였기에 더더욱 감정이입이 훌륭합니다. 많은 관객들이 극중 동물 캐릭터와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들과의 유사함을 느끼셨던 것은 이 때문일 겁니다.

전반적으로 북미의 풀 프레임 애니메이션 기법을 기반으로 제작된 작품이지만, 군데군데 일본 리미티드 아니메의 기법 또한 절묘하게 녹아져 있습니다. 공식 블로그에서 언급한 투과광 기법은 테즈카 오사무의 제자로 리미티드 아니메 기법에 있어서 입신의 경지에 오른 린 타로 감독이 즐겨 사용하던 연출 기법이구요. 하모니 기법의 경우도 다소 차이는 있지만, 역시 테즈카 오사무의 제자로 린 타로 감독과 같이 리미티드 아니메의 스타일리스트로 불리웠던 故 데자키 오사무 감독이 즐겨 사용하던 연출기법입니다. 이 기법은 클라이막스에서 펼쳐지는 청둥오리들의 레이스 씬 중 결승점을 향한 두 오리의 긴박감 넘치는 역주에서 거친 펜터치를 그대로 화면에 묘사하여 역동성을 강조하게 되는데요. 이는 일본의 대표 아니메 스튜디오 매드하우스가 제작한 '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2003)'의 라스트에서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외에도 달수의 나그네 회상장면에서는 디지털 컷 아웃 기법이라 불리는 연출기법이 적용되었는데 이는 '쿵푸 팬더(2008)'의 서두에서 포의 꿈 속을 묘사한 연출기법과 동일한 방식이라 하겠습니다. 동서양 애니메이션 기법의 절묘한 조화, 이는 단순한 적용 이상의 의미도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북미와 일본의 하청작업을 통해 얻은 다양한 노하우를 완벽하게 습득하여 우리의 오리지널 작품에 적절하게 활용할 정도로 연출 수준이 향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을 말입니다. 

ⓒ 명필름 · 오돌또기



모성애와 독립을 테마로 한 암탉과 오리의 성장 드라마

로 놀라운 연출기법과 매력적인 영상미를 보여준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한국 만화영화사를 다시 쓸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원동력은 비단 이 연출기법만이 아닌, 매력적이면서도 울림이 있는 이야기 구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과거 김문생 감독의 '원더풀 데이즈(2003)'는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투입되어 놀라울 만큼 멋진 영상미를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낮은 완성도의 이야기와 흡입력이 떨어지는 캐릭터들로 인해 재앙에 가까운 실패를 보여준 사례가 있었는데요. 마당을 나온 암탉은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 치밀한 준비를 통해 선배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황선미 작가의 동명 베스트 셀러를 원작으로 삼은 것도 그러하지만, 이를 만화영화로 옮겨오는 과정에 있어서 보여준 각색 능력은 분명 놀라운 비주얼에 버금가는 완성도라 하겠지요. 시나리오 작업에만 3년의 시간이 걸린 것은 각본의 중요성을 제작진이 이해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전반적으로 이야기는 독립과 성장, 그리고 모성애를 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양계장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마당 밖의 삶을 꿈꾸는 잎싹은 다른 닭들과 달리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온 뒤 주변 야생동물의 편견어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려 하지요.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다소 주책맞은 그녀의 모습으로 인해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는 몰라도 남들의 비웃음에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가 정한 길에 매진하는 우직한 노력가의 자세를 연상시킵니다. 이는 성장통을 겪은 뒤 청둥오리의 파수꾼으로 거듭나는 그녀의 오리 아들 초록의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엄마가 되면서 잎싹도 성장하고, 초록도 성장합니다. 그리고 성장은 다시 독립이라는 테마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구요. 비록 동화가 원작인 작품이지만 이러한 주제의식은 상당히 깊이가 있습니다.

독립과 성장 못지않게 이 작품의 이야기를 떠받치는 또 하나의 축은 바로 모성애 입니다. 너무 신파적이지 않게 적절한 슬픔의 한계선을 지킨 작품 속의 모성애는 너무도 애틋하여 여운이 오래 남습니다. 그것은 엔딩에서 보여진 여운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애틋한 모성애가 작품의 기저에 계속 깔려 있기에 마당을 나온 암탉은 달수의 센스 넘치는 유머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슬픔의 한자락이 계속 꼬리처럼 매달려 있는 느낌을 줍니다. 모성애는 잎싹과 초록의 평생의 적인 족제비에게도 예외는 아니지요. 약육강식이라는 비정한 동물의 세계 속에 그려진 이 모성애는 마치 비정한 현대사회에서 가족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듯 저릿저릿합니다. 그리고 모성애의 종결은 다시금 새로운 생명의 성장과 탄생의 밑거름이 됩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동화라는 한계 속에서도 삶의 진리를 제법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애틋한 모성애와 더불어 이 쉬우면서도 깊은 뜻이 담긴 인생의 진리 덕에 이 작품은 아동용이면서도 달콤함보다는 오랜 세월 묵혀온 깊은 풍미가 느껴집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준 가족애보다 좀 더 애잔한 느낌의 무엇... 그리고 그것이 이 만화영화가 한국 만화영화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크나큰 힘이 되어준 원동력은 아닐까 합니다.


이 눈부신 감동을 이어갈 또다른 한국 만화영화의 탄생을 기원하며...

작품은 서두에서 말했듯이 꼭 한국 만화영화가 아니더라도 무척 인상깊은 작품입니다. 물론 다소의 아쉬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스토리보드의 경우는 아직도 몇몇 부분에서 매끄럽지 못한 장면이 눈에 띄었는데요. 마치 연극의 막이 전환되듯 갑작스레 장면 전환이 일어나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삐걱거림은 다소 이 작품의 마감이 완벽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좀 더 많은 제작경험을 통해 보완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성우 연기에서는 사실 많은 분들이 아쉬움을 지적하셨습니다. 초록이 역을 맡은 유승호 군에 대한 아쉬움이 대부분이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유승호 군의 팬은 아니지만, 제 감상은 거슬린 건 사실이지만 극의 흐름을 깨버릴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반면, 문소리 씨나 박철민 씨의 연기는 무척이나 훌륭했으며, 제가 아는 한 한국 연기자의 더빙 연기 중에서는 발군의 싱크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실 감정 표현에 익숙한 서양의 배우에 비해 한국은 배우들조차 감정의 과잉표현에 익숙치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마치 현대극 연기는 잘하는데 사극 연기는 영 어설픈 배우마냥, 만화영화의 경우는 그 성격상 과장된 연기가 필수인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전문성우에 비해 연기자 더빙의 경우가 대부분 완성도가 좋지 못했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번 두 연기자의 연기는 그 자체로도 어떤 이정표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짦은 등장이었지만 박쥐 역을 맡은 성우 홍범기씨의 연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본 작품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배경이 된 우포 늪을 사전답사를 통해 완벽하게 화면에 재현해낸 점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프리 프로덕션이 한국 만화영화에서 이루어졌다니... 이는 이 작품이 얼마나 치밀한 준비와 계획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인지를 실감케 하는 부분이지 않나 합니다. 또한, 롯데와 같은 대기업의 투자가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부분도 고무적입니다. 이로 인해 한국 만화영화의 투자여건은 분명히 전보다 나아질 테고 보다 더 좋은 작품들이 나오는 밑거름이 되리라 봅니다.

라스트에서 새로운 터전을 향해 앞장서서 날아간 초록의 힘찬 날개짓처럼 이제 한국 만화영화도 새로운 터전을 향해 날아갈 때가 왔나 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작품의 탄생을 위해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만화영화의 꿈을 버리지 않은 많은 이들의 땀과 눈물일겁니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초록을 위해 모든 것을 다바친 잎싹일지도 모르니까요. 이제 한국 만화영화는 다시 떨어진다 해도 날아오를 수 있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마당을 나온 암탉은 태권 브이를 대신하는 한국 만화영화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리라 봅니다.

ⓒ 명필름 · 오돌또기



<참고 사이트>

[1] 마당을 나온 암탉 공식 홈페이지 (바로가기)
[2] 마당을 나온 암탉 공식 블로그 (바로가기)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명필름 · 오돌또기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이 달의 영화 리뷰 2011년 8월차에 선정된 글입니다. (클릭)


[블루레이] 마당을 나온 암탉 - 8점
오성윤 감독, 문소리 외 목소리/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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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PPON ANIMATION Co. Ltd.

<스탭>

◈ 감독: 쿠로다 요시오
◈ 원작: 마리 루이사 드 라라메
◈ 제작: 닛폰 애니메이션, 즈이요 영상


<시놉시스> 

벨기에의 북서부 지역 플란다스에서 우유배달을 하는 할아버지와 가난하게 살아가는 소년 네로.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착한 마음씨를 잃지 않고 있는 네로의 꿈은 화가가 되는 것, 그리고 안트워프 성당에 전시된 루벤스의 그림을 보는 것이다. 어느날 철물점에서 혹사 당하는 개를 본 네로는 주인이 내버린 개를 집으로 데리고 와 정성껏 간호해준다. 네로는 파트라슈라는 이름을 개에게 지어주고, 우유수레를 끌 돈도 없이 할아버지와 힘들게 우유배달을 하는 네로를 본 파트라슈는 마치 자신이 도와주겠다는 듯이 우유수레를 끌려고 한다. 가난하고 고단한 네로와 할아버지의 생활 속에 어느덧 파트라슈는 믿음직한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안트워프 지역의 유지 코제트의 딸인 아로아는 가난하지만 착하고 성실한 소년 네로와 절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다. 하지만, 엄격한 코제트는 네로와 어울리는 딸 아로아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파트라슈의 원래 주인이었던 철물점 상인이 파트라슈가 자신의 소유라며 다시 끌고 가려하고, 코제트가 영국의 기숙학교로 아로아를 보내려 하면서 가난하지만 행복하던 네로의 앞날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데...


기억의 서재 한켠에서 찾아낸 소박한 한 소년의 이야기

번 제5회 YES24 블로그 축제를 맞이하여 '나를 한뼘 키워준 책 영화 음악'이 주제로 선정되었을 때 의외의 고민으로 쉽사리 포스팅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막상 깊은 감명을 가져다 준 영화를 꼽으려 하니 좀처럼 하나를 고르기가 막막했기 때문이었는데요. 글을 쓰기 위한 소재를 쉽사리 고르지 못하는 난감함도 난감함이지만, 스스로에게 가장 감명 깊었던 영화 하나를 자신있게 골라내지 못하다니 왠지 블로거(그것도 자칭 영화/만화영화 블로거)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나에게 과연 감명을 준 영화를 하나 뽑아야 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어린 시절 나를 성장하게 해준 멘토와도 같은 작품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으로 일주일을 보내던 어느날,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건 회사에서 일을 하던 도중에 떠오른 생각이었는데요. 바로 대상을 영화라는 범위에 한정시키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실사영화 뿐만 아니라 만화영화도 엄밀히 말하면 영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나에게 어린 시절 벅찬 감동을 선사한 만화영화를 골라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의외로 문은 쉽게 열렸습니다. 만화영화로서 영화 이상의 감동과 슬픔을 주었던 추억 속의 작품, 한 소년의 고난스럽지만 밝은 삶 속에 빠져 행복한 웃음과 슬픔의 눈물을 흘렸던 그 작품, 바로 '플란다스의 개(1975)'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마법과도 같이 시간은 과거로 거슬러 갔고, 어느새 눈 앞에는 가난하지만 착하고 소박한 꿈을 가진 소년 네로와 네로의 곁을 항상 떠나지 않았던 충견 파트라슈가 언제나 그렇듯 우유배달차를 끌고 플란다스의 아침 길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끊임없는 불행 속에서도 끝까지 고결함을 잃지 않은 네로와 파트라슈

동안 불우한 어린이와 충직한 동물의 아름다운 드라마가 영화의 단골 소재로 꽤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기에 이제 네로와 파트라슈는 옛날처럼 우리를 눈물짓게 하는 단 하나의 소년과 동물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을 쭈욱 나열해도 유독 이 작품만큼은 마치 다른 색깔로 칠해진 듯 눈에 띕니다. 그 많은 작품들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제목이 무엇인지 가물가물해지는 와중에도 유독 이 작품만큼은 수십년이 흘러도 여전히 기억 한켠에 고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마치 첫사랑의 기억과도 같이 아름답고 슬픈 이 소년과 개의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는 뭉클한 낙인과도 같습니다.

가난하고 고된 나날 속에서도 자상하고 인자한 할아버지 밑에서 화가를 꿈꾸며 묵묵히 힘든 나날을 이겨내는 소년, 그런 소년에게 어느날 찾아온 한마리의 개. 소년과 할아버지는 개를 통해 정신적인 위안과 삶의 여유를 찾고, 학대당하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개 역시 소년과 할아버지를 통해 안식처와 가족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따스하고 끈끈한 유대감은 곤궁한 삶과 집주인 한스의 인정머리 없는 처사를 견딜 수 있는 큰 힘이 되지요. 여기에 마을 유지의 딸 아로아와의 우정 역시 네로에게는 커다란 삶의 활력소이기도 합니다. 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그의 꿈을 응원하는 착한 소녀와 거칠지만 듬직한 안트워프 시의 친구들. 네로의 삶을 통해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삶에 행복을 가져다 주는 열쇠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편견의 늪에 빠뜨리는 지도요.

사람은 사람이 만들어낸 돈과 그 돈으로 인해 쌓아올린 사회적 지위로 자신이 속해 있을 곳을 정하고 그 아래의 사람들을 배척하는 우를 종종 저지르게 됩니다. 플란다스의 유지 코제트와 그의 마름인 한스가 그런 인물이라 하겠지요. 물론, 이 문제는 말처럼 쉽게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네 삶을 돌아만 봐도 평범한 중산층의 서민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못한 극빈층의 자녀들이 자신의 자녀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려하는 것을 왕왕 볼 수 있지요.(그리고 종종 우리 자신도요) 어찌보면 사람을 구분짓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인간의 어두운 심성의 하나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편견 속에서 소외받고 있는 이들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다소 납득하지 못할 설정일지는 몰라도, 또 동화적이고 단순한 전개일지는 몰라도 이 작품은 네로의 슬픔을 시청자들과 관객들에게 깊이 전달시켜 줍니다. 어린이용 만화영화로서는 꽤 깊은 감정이입으로 인해 단순명료한 진리는 깊이를 가진 휴먼 스토리로 보는 이들에게 전달됩니다.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순수한 우정에 삐뚤어진 편견을 보내는 어른들. 그 속에서도 꿋꿋이 꿈과 우정을 지키던 소년은 든든한 후원자이자 버팀목이었던 할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마지막까지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던 소년에게는 너무도 가혹할 정도의 시련이지요. 더이상 집세를 내지 못하자 살던 집에서조차 쫓겨날 신세에 처한 소년. 다가오는 추운 겨울 날씨조차 소년의 편은 아닙니다. 이제껏 그를 지탱해주었던 일말의 등불마저 꺼져버린체 네로와 파트라슈는 춥디 추운 시련의 밑바닥으로 미끄러져 가고 맙니다.

그 와중에도 꺼지지 않고 마지막 불꽃을 피우던 그림을 향한 네로의 마지막 희망마저 사그러 드는 순간, 모든 것은 끝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막다른 골목까지 다다른 소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로아의 아버지가 잊어버린 전재산을 찾아서 돌려주지요.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아로아의 집을 빠져 나옵니다. 스프 한숟가락, 빵 한조각이라도 얻어먹고 갈 수 있었을 텐데... 소년의 고귀함은 어떤 면에서는 고지식할 정도로 안타깝고 동시에 마치 마지막을 준비하는 순례자의 그것처럼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떠나버린 소년과 소년의 진심을 이해하게 된 아로아의 아버지, 그리고 마치 이 타이밍을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온, 그의 평생의 꿈이었던 화가로의 길... 소년이 희망을 버린 순간, 그동안 소년 앞에서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희망이 얄밉게도 복권에 당첨된 것 마냥 밀려듭니다. 하지만 그 벅찬 희망의 파도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조용히 루벤스의 그림 앞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평생의 그의 동반자였던 파트라슈와 함께 말이죠.

종교적인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마지막은 소박하지만 장엄하고, 슬프지만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소년은 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고귀함을 잃지 않았고, 마지막까지도 세상과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떠나갔습니다. 그의 마지막이 너무도 조용하기에 관객들은 더 슬퍼하고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타까운 소년의 죽음 뒤로 떠오르는 아련한 작품의 주제가가 더더욱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먼 동이 터오는 아침에
길게 뻗은 가로수를 누비며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이 길을
파트라슈와 함께 걸었네.

하늘과 잇닿은 이 길을.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슬픔과 감동

제가 '새벽녘의 길(よあけのみち)'은 경쾌한 멜로디의 일본판 주제가보다 서정적인 목소리가 매력적인 한국 애니메이션 주제가의 대모 정여진씨의 주제가(물론 주제가를 불렀을 당시는 앳띈 소녀였지요)가 원작의 뉘앙스와 더 잘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소녀의 앳띄고 맑은 목소리와 미들 템포의 상쾌한 느낌으로 아침을 연상시키는 주제가는 왠지 모를 슬픔의 한자락이 느껴지는데, 네로의 마지막과 함께 들으면 왜인지 슬프고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그건 어쩌면 소년의 슬픈 마지막에 너무 많은 감정이입이 되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52화의 TV 시리즈로 방영되었던 플란다스의 개는 1997년에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공개되었습니다. 과거의 향수를 거의 그대로 간직한 이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비록 흥행에서는 실패했지만 여전히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했던 75년작의 분위기를 잘 살려내었던 같습니다. 그 옛날 기억 속의 네로와 파트라슈를 그대로 만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사실 새로운 극장판의 네로는 이전의 네로에 비해 조금 더 성숙한 듯한 느낌이긴 합니다. 아로아도 마찬가지구요.

전원적이고 서정적이면서 가슴 시렸던 한 편의 드라마. 플란다스의 개는 당시 만화영화로서는 실사영화에 버금가는 감정이입을 보여준 작품으로, 어린이들 뿐만 아니라 메마른 어른들의 감성에도 촉촉한 눈물의 비를 내리게 했던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젖은 자국이 오랫동안 마음 한곳에 남아 있는 것은 단지 글쓴이 만의 느낌은 아닐겁니다. 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추억의 이야기는 이제서야 오랜만의 회상을 마치고 다시 기억의 한구석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년과 충직한 소년의 개는 그후로도 꽤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을 겁니다. 세상의 각박함에 스스로가 너무도 익숙해졌음을 발견하게 되었을 어느날, 한번쯤은 소박하고 고귀한 삶을 살다간 소년과 개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完)

ⓒ NIPPON ANIMATION Co. Ltd.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NIPPON ANIMATION Co. Ltd.에게 있습니다.
플란다스의 개 - 10점
쿠로다 요시오 감독/플래닛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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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감상기에는 부득이하게 작품의 내용과 결말의 일부분이 이야기되고 있으니 작품의 결말을 알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 Makoto Shinkai / CoMix Wave Films


<스탭>

◈ 감독: 신카이 마코토
◈ 원작: 신카이 마코토
◈ 제작: 코믹스 웨이브 필름


<시놉시스> 

초등학교 시절 단짝친구로 지내온 타카기와 아카리. 아카리가 갑작스레 동경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의 토치기로 전학가게 되면서 둘은 행복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뒤로 한 체 헤어지게 된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서로 편지로 안부를 주고 받던 둘이었으나, 고교진학을 앞두고 타카기마저 동경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의 카고시마로 전학을 가게 된다. 아카리와의 거리가 더더욱 멀어지는 것을 염려한 타카기는 이사를 떠나기 전 아카리를 만나기 위해 토치기로 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세심히 기차시간과 환승역을 살피고 7시에 아카리와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뒤 역에 타카기는 기차에 오르지만 갑작스레 폭설이 내리면서 시간은 지체되기만 한다. 아카리가 상처받을 것이 걱정되는 타카기. 하지만 하늘은 이런 타카기의 초조함을 모르는지 연신 눈을 퍼붓고, 결국 열차는 선로 위에 멈춰서고 마는데...


우주에서 하늘로, 그리고 지상으로 옮겨져온 신카이식 사랑이야기

카이 마코토 감독의 '별의 목소리(2002)'부터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2004)', 그리고 이번 '초속 5cm(2007)'에 이르기까지 감독이 이야기하는 테마와 소재는 동일합니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떨어지게 된 남녀의 애틋한 감정과 그리움, 그리고 그것을 통한 성장과 깨달음. 우주라는 머나먼 시공으로 인해 이별하게 된 남녀의 이야기에서부터 영문도 모른 체 혼수상태에 빠져 자신에게 연락을 하지못하는 그녀가 자신을 버린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남자 주인공의 이야기를 지나 초속 5cm에서는 전학으로 인해 서로 멀리 떨어져 버린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전작의 이야기들이 외계문명과 우주탐사대(별의 목소리)나 분단된 일본의 사이에 위치한 신비한 탑(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과 같은 판타지스러운 배경과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했던 반면, 이번 작품은 현실적인 배경을 소재로 한 이야기입니다. 판타지나 SF스러운 소재가 사라짐으로써 작품은 이전 작들에 비해 보다 더 이별과 그리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스케일이 작아진만큼 이야기의 디테일은 더욱 농밀해졌으며, 등장인물들의 수가 적어진만큼 주인공들의 감정선은 마음에 더 가까이 와닿습니다. 그로 인해 이제까지의 신카이 감독의 작품 중에서 가장 서정적인 작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관객에게 주는 인상은 깊습니다.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져왔던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과연 만화영화로 얼마나 설득력있게 그려질 수 있을까요. 이미 진부할대로 진부한 소재의 멜로 드라마가 과연 만화영화로 그려진다고 얼마나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을까요. 게다가 신카이 감독 자신 역시 이 비슷한 소재를 이미 세번이나 스크린에 그려왔기에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작품에 대한 선입견은 그다지 기대가 높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깊은 여운의 바다로, 그리움의 저편으로 관객들을 이끌어 가게 됩니다.

ⓒ Makoto Shinkai / CoMix Wave Films


마음을 정화시키는 아름답고 깨끗한 미술

속 5cm의 매력을 몇 배로 끌어올려주는 힘은 바로 서정적이면서도 놀랍도록 세밀하고 선명한 배경미술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상당히 정적인 작품으로 장면과 장면간의 호흡이 긴 롱테이크도 많고 캐릭터들의 움직임도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지루한 작품입니다만, 아름다운 배경으로 인해 그러한 지루함은 오히려 아름다운 배경을 천천히 감상하는 여유로움으로 바뀝니다. 벚꽃이 만발한 도입부의 화사한 봄 배경은 마치 눈부신 봄햇살을 받으며 벚꽃구경을 나온 것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광원효과나 원근감을 부여한 것과 같은 각종 그래픽 효과는 서정적인 배경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처음부터 풀 HD 구현을 목표로 했던 작품인지라 그 선명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훌륭합니다. 극장이나 블루레이로 감상한 관객들이라면 이야기에는 감동하지 못하더라도 아름다운 배경에는 만장일치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울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포토샵의 엄청난 힘을 느끼는 대목이기도 하지요.)

아름답고 세밀한 것은 배경 뿐만 아니라 사물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칠판을 지우는 모습이나 편지지에 글씨를 쓰는 장면, 열차표에 형광펜으로 노선을 따라 선을 긋는 장면 등에서부터 차창거울에 비춰지는 기차의 실내모습, 오래 써서 천이 헤진 기차 시트 등, 세심한 부분에까지 상당한 묘사가 수반되고 있습니다. 신카이 감독 본인은 이번 초속 5cm의 경우 전작인 구름의 저편... 에 비해 묘사의 밀도를 줄이고 단순화 시킬 수 있는 부분은 단순화했다고 언급하긴 했습니다만, 어지간히 주의깊게 보지 않고서야 두 작품 간의 밀도 차이를 느끼는 것은 힘들 듯 싶군요. 이것은 풀 HD로 제작된 선명한 화질도 한 몫을 하는 듯 싶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장소는 실제 일본의 장소를 배경으로 하여 이 장소를 가본 일본 관객들에게는 친밀감을 주기도 합니다. 2화의 배경이 되는 다네가지마의 경우는 작품에서처럼 실제로 우주항공 관련 설비들이 위치하고 있다고 하지요. 초속 5cm는 이렇게 실제 세상과의 거리를 좁혀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살리려는 흔적이 엿보입니다. 다만 감독 본인도 이미 밝혔듯이 그런 구도와 조건 안에서 실제 작품은 상상력에 근거한 비주얼로 채워지게 됩니다. 한 여름에 로케한 이와후네 역이 작품에서는 눈덮인 한겨울로 묘사되는 부분 등이 바로 그러한 것으로, 현실적인 배경이면서도 초속 5cm의 세계는 왠지 모를 판타지의 한자락의 느껴진다 하겠습니다. 마치 추억 속에 기억되는 그 옛날의 어느 장소인 것처럼 말입니다.

ⓒ Makoto Shinkai / CoMix Wave Films



사춘기의 사랑을 테마로 한 소년과 소녀의 성장이야기

학으로 인해 멀리 떨어지게된 초등학교 시절의 소꿉친구. 연인 사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이 둘의 이야기는 사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한 숱한 비련의 연인들에 비해 임팩트도 약하고 신선미도 떨어집니다. 사춘기 시절의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어른이 되어서까지 간직하고 지내는 순정적인 남자 주인공의 인생 이야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이 밋밋한 스토리가 생각 이상의 진한 여운을 가져다 주는 것은 드라마틱하지 않은 평이함으로 인해 전해지는 공감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비슷한 상황 겪었을 듯한 그런 현실적인 상황, 그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평범한 진리로 인해 맺어지지 못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잔잔하고 긴 롱테이크와 세심한 감정 표현으로 고급스럽게 그려집니다. 평범한 사랑이야기는 아름다운 배경으로 인해 눈이 시리도록 절절하게 느껴지고, 서로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나약함은 관객들에게 그들과 같이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것은 절제된 감정을 배경과 상황으로 은유적으로 묘사해낸 연출의 힘이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의 풋풋한 사랑을 간직한 체 아이에서 소년으로,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이 애틋한 감정이 추억으로 변해가는 성장이라는 테마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비록 안타까운 그리움이 가득하지만 그 끝은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일말의 희망과 전진을 엿볼 수 있습니다. 2화에서 끝내 타카기에게 고백하지 못한 체 그와의 거리를 느끼고 절망한 카나에가 타카기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우주로 향해 쏘아올려진 로켓의 장관 역시 현재의 슬픔과 괴로움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과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긍정적인 가치관의 은유적 표현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이토록 답답한 주인공들의 모습은 연애감정의 표현에 소극적인 일본적 감성의 표현이기도 한지라 우리의 관점에서 공감을 못하거나 답답해하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만.)

ⓒ Makoto Shinkai / CoMix Wave Films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카기와 아카리의 풋풋한 헤어짐과 애틋한 재회, 타카기를 짝사랑하는 카나에의 슬픈 순애보, 타카기의 방황과 추억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연작단편 형태로 구성한 것은 꽤 세련되고 멋진 전개가 아닌가 합니다. 각 편 사이에 벌어진 여러 이야기를 새로운 에피소드의 시작으로 잘라낸 것은 마치 연극의 무대 전환과도 같은 여운을 안겨준다고 하겠는데요. 세심하고 아름다운 배경과 세련되면서도 절제된 이러한 연출방식으로 인해 초속 5cm는 평범한 소재를 고급스러운 드라마로 변주해내게 됩니다.  

정적이면서 절제된 이야기는 3화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르면 갑자기 급반전하게 됩니다. 일본인들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야마자키 마사요시의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가 흐르면서 이제까지의 고요한 전개와는 달리 뮤직비디오처럼 수많은 이야기들을 빠른 속도로 화면에 풀어놓습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절제되어왔던 감정을 노래와 함께 쏟아내는 듯, 조용하면서도 격정적이고 드라마틱합니다. 혹자에겐 다소 생뚱맞은 불친절한 전개가 아닌가 하는 불평도 들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이 라스트는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많은 설명 없이도 전해지는 그리움과 회한, 아쉬움과 애틋함이 녹아든 음악의 라스트에 이르러 그려진 극적인 조우와 신기루 같은 이별은 긴 여운을 남기며 마지막 엔딩을 향해 흐릅니다. 어찌보면 초속 5cm는 이 라스트의 드라마틱한 뮤직 비디오를 위한 한 편의 긴 프롤로그였는지도 모릅니다.

초속 5cm는 소심하면서도 평범했던 어느 남녀의 풋풋한 시절을 아름답고 정갈한 터치로 그려낸 미셀러니(경수필)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깊이 있는 메시지나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추억을 생각하게 하는 공감과 평안함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당신이 언젠가 해보았음직한, 그리고 고단한 삶으로 인해 잊고 지내던 풋풋한 사랑의 추억. 그 여운은 초속 5cm의 느린 속도로 다가오지만 그 파문은 마음 속에서 오랜동안 물결치고 있을 겁니다.

ⓒ Makoto Shinkai / CoMix Wave Films



☞ 초속 5cm DVD 리뷰 (바로가기)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Makoto Shinkai / CoMix Wave Films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이 달의 TTB 리뷰 2011년 4월차에 선정된 글입니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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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RNER BROS


<스탭>

◈ 감독: 잭 스나이더
◈ 원작: 케쓰린 래스키
◈ 제작: 워너 브라더스


<시놉시스> 

가면 올빼미(타이토)인 소렌은 호기심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 올빼미이다. 그의 아버지 녹투스가 들려준 가훌의 가디언의 전설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세상 어딘가에 있는 위대한 가훌의 나무에 사는 가디언들은 메탈비크가 이끄는 순수혈통의 올빼미들에 의해 올빼미 왕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나 그들을 물리치고 올빼미 왕국을 구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들은 올빼미 왕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리라는 예언과 함께 전설적인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가디언의 전설에 매혹당한 소렌과 여동생 에글렌틴과 달리, 맏형인 클러드는 상상력이 풍부한 소렌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어느 날 부모들이 집을 비운 사이, 나는 연습을 하던 소렌과 클러드는 익숙치 않은 날개짓으로 인해 그만 땅으로 떨어지게 된다. 높은 나무 위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들짐승들에게 습격당할 위기에 처한 그들. 필사적으로 날개짓을 하던 소렌과 클러드에게 사나운 테즈메이니아데빌이 갑자기 덥쳐든다. 절체 절명의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날아온 두 마리의 칡부엉이에 의해 납치된 소렌과 클러드. 그들은 소렌과 클러드를 위협하며 어디론가 그들을 끌고 간다. 하늘에서 만난 그들의 무리들은 모두 어린 올빼미와 부엉이를 납치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고, 무리 속에서 만난 엘프 올빼미 길피와 함께 소렌과 클러드는 먼 옛날 가디언들에게 패한 메탈 비크의 왕국으로 끌려가게 되는데...


성인용 액션물의 귀재와 가족용 어드벤쳐 애니메이션의 조우

쓰린 래스키의 장편 판타지 소설 '가훌의 가디언'을 모티브로 한 가디언의 전설은 인간이 주인공이 아닌, 올빼미들이 주인공이 되어 그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전쟁과 모험을 판타지적인 터치로 그려낸 대하 판타지 영화입니다. 총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연재분량. 이는 원작소설의 방대한 스케일과 거대한 서사를 짐작케 하는 대목인데요. 이로 인해 이번 가디언의 전설은 전체 15권 중 1권부터 3권에 해당하는 내용을 가져와 축약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향후 영화의 흥행여부에 따라 뒤의 이야기를 속편으로 제작하겠다는 암묵적인 기획도 있었을 듯 싶군요.

그동안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 '해리 포터' 시리즈가 큰 성공을 거둔 이후, 판타지 영화는 트렌드인냥 단편이 아닌 2~3부작으로 많은 작품들이 기획되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1부가 막을 내린 시점에서 이미 실패작으로 판가름이 났고, 이후 후속 시리즈가 만들어지지 못하게 되지요. 판타지 영화 중, 특히 PG급 판타지 영화로서 해리 포터 시리즈 이후 후속 시리즈가 등장한 작품은 '나니아 연대기'시리즈가 유일하며, PG-13 등급 판타지는 반지의 제왕 이후 제대로 된 작품을 꼽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후속작들의 연이은 실패 속에 어느덧 판타지 영화는 2000년대 초반의 화려한 시간을 뒤로 한 체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지요.

자, 이런 즈음에 R 등급 성인 액션물에서 주목할만한 모습을 보여준 한 인물이 PG급 판타지 영화인 이 가디언의 전설의 감독으로 낙점되니 그가 바로 '300(2006)'과 '왓치맨(2009)'를 통해 감각적이고 스타일리쉬하면서도 고어적이고 만화영화적인 영상 씨퀀스로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비주얼리스트 잭 스나이더 입니다. 사실, 잭 스나이더가 판타지 영화의 감독으로 내정된 시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기대를 표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은 아직 검증될 필요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말랑말랑한 오락영화보다는 색깔있는 성인용 오락물을 만든다는 점에서 보다 더 세련된 판타지 영화를 기대해봄직했었기 때문인데요. (물론, 이 초반의 판단미스는 가디언의 전설이 PG 등급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 원인도 되었습니다만)

과연 R등급 성인액션물의 비주얼리스트가 만든 대중적 판타지 영화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을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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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디테일로 다가오는 CG와 특유의 영상미학

선 언급하고 넘어가야할 점은, 이 작품이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입니다.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묘사된 CG와 압도적인 디테일로 인해 이 작품은 접하는 순간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을 잠시 잊어버리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요. 세심하게 표현된 올빼미들의 묘사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스피디한 비행장면, 그리고 실감넘치는 배경묘사는 실제로 애니메이션이라는 생각이 그다지 들지 못하게 만드는 사실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올빼미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아, 만화영화구나 라고 느낄 수 있다라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요. 올빼미의 섬세한 묘사는 현재의 CG 수준이 어디까지 도달해 있는지를 우리에게 인상적으로 각인시켜주고 있으며, 바람에 흩날리는 털의 세심한 변화라든지 새들끼리의 전투장면에서 사방으로 흩날리는 깃털의 묘사 등 자세한 곳에까지 현실적인 묘사를 놓치지 않고 있음을 느끼게 합니다.

적절한 장면에서 슬로우 비디오로 극적인 연출효과를 부여하는 잭 스나이더 특유의 CF적 연출 스타일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인 묘사, CF영화의 한장면을 보는 듯한 세련된 연출 등, 어떤 면에서 가디언의 전설은 PG 등급의 영화에는 그닥 많이 사용되지 않는 다양한 영상 기법들이 대거 투입되고 있습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전작인 300과 왓치맨에서 보여준 영상기법이 거의 그대로 사용되는 셈인데요. 다만 다른 점이라면, 전작에서 보여준 고어적이고 선정정인 표현이 거세된 것이 유일하다 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잭 스나이더식 비주얼이 그 표현수위만 낮춘 셈이죠.

DVD로 감상을 한터라 3D로 제작된 가디언의 전설의 영상미를 직접 느낀대로 표현할 수 없음은 유감입니다. 다만, DVD의 SD급 화질로도 감탄할만한 영상미를 보여준 바, 블루레이나 3D 영상으로는 분명 그 이상의 시각적 유희를 느낄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몇몇 지인분들에 의하면 스피디한 비행씬이 많이 등장하는데다가 디테일이 너무 세밀하여 3D 영화로 감상했을 때 오히려 시각적 피로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도 들리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디언의 전설은 '아바타(2009)' 이후 가장 완성도 높은 3D 영상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다만 실사와 CG가 혼합된 아바타와 달리, 가디언의 전설은 오로지 CG로만 제작된 애니메이션이고, 실사에 가까울 정도로 세밀한 묘사로 인해 그 시각적인 부담감은 다른 작품에 비해 비교적 큰 것 역시 사실이 아닐까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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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서사구조, 스토리와 비주얼의 부조화

점에 가까운 영상미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판타지 애니메이션으로 영화사에 한획을 긋는 데는 실패한 작품입니다. 사실 북미 흥행은 제작비의 절반수준을 약간 넘기면서 사실상 참패를 하게 되었는데요. (물론, 글로벌 수익으로는 1억4천만불을 벌어들이면서 어느 정도 명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영상미를 가진 이 감탄스러운 애니메이션이 기대 이하의 호응을 얻은 것은 영상미에 미치지 못하는 이야기의 완성도가 그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잭 스나이더 감독이 그동안의 필모그라피에서 보여준 스토리텔러로서의 모습은 물음표라 하겠습니다. 전작인 300이나 왓치맨이 모두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거대한 서사를 가진 가훌의 가디언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스토리 구성의 난이도가 낮은 편이었거든요. 게다가 그 스케일도 작았구요.

반면, 가훌의 가디언은 비록 첫 3권까지의 내용을 가져와 이야기로 구성한다고 해도 꽤 방대한 양에 해당합니다. 적어도 2시간에 가까운 분량으로 작업이 되었어야 했을지도 모를 이 장대한 이야기는 영화로 옮겨지면서 단 96분으로 이야기가 축소되게 됩니다. 판타지 영화의 성공작으로 꼽히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평균 180분 정도의 러닝타임(확장판에서는 200분을 넘어가는 쿨럭;)을, 해리 포터 시리즈가 평균 140~150분의 러닝타임을 갖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는 무척 짧은 상영시간이라 할 수 있지요. 심지어 나니아 연대기 역시 2부가 110여분이고 1부와 3부는 140분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원작인 가훌의 가디언의 이야기가 결코 이들 판타지 흥행 3대 시리즈의 원작과 비교하여 떨어지지 않는 스케일과 서사를 갖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는 명백히 스토리 구성 상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스토리텔러로서 아직 검증이 필요한 신예 감독에게 이처럼 거대한 서사를 갖고 있는 작품을 다른 판타지 영화들보다 적은 시간 안에 영화로 재구성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작업이었을 겁니다. (물론, 각본 작업은 스나이더 본인이 아닌 존 오로프와 존 콜리 등이 맡고 있습니다만) 이로 인해 원작의 이야기는 상당부분 축소되고 각색되어 특색없는 뻔한 이야기로 다시 재탄생하게 됩니다. 러닝타임의 제약을 갖게 되면서 원작에서 큰 호평을 받았던 올빼미의 생태구조에 대한 뛰어나고 사실적인 묘사 역시 거의 작품에서 표현되고 있지 않지요. 결국, 영화는 그저 압도적인 영상미를 감상하는 것 외에 뚜렷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가 힘든 작품이 되고 맙니다. '놀라우리만치 먹음직스러운 데코레이션에 감명 받아 한 스푼을 떠서 입에 넣는 순간, 맛은 있으되 눈으로 보고 기대했던 그 만큼은 아니라는 실망감이 드는 요리를 먹고 있는 심정'이 어쩌면 가디언의 전설을 감상하고 난 가장 적절한 표현은 아닐까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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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러로서의 한계를 보여준 잭 스나이더

PG 등급의 영화로서도 평이한 권선징악의 스토리 외에도 평이한 캐릭터 역시 이 작품의 매력을 반감시킵니다. 짧은 러닝타임으로 인해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한 부분도 있는데다가 너무나 사실적으로 올빼미들을 묘사하면서 PG 등급의 영화로서는 캐릭터에 대한 감정이입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고 하겠군요. 즉, 너무 사실적인 올빼미라 귀엽다거나 이쁘다거나 이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습은 R등급에 가까운 비주얼인데, 내용은 PG등급의 이야기이니 사실적인 비주얼을 기대하고 간 성인관객들은 실망하고, 가족 판타지 오락영화로 생각하고 간 가족관객들은 기막히긴 하지만, 너무 사실적이어서 징그러운 비주얼에 쉬이 감정이입이 되지 않습니다. 이는 R등급 비주얼리스트로서 잭 스나이더의 첫번째 도전이 실패로 끝났음을 보여주는 아쉬운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가디언의 전설은 로버트 져메키스 감독의 '베오울프(2007)'과 비교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흥행 감독 로버트 져메키스는 자신이 세운 이미지무버스 디지털 회사의 퍼포먼스 캡쳐 기술을 활용하여 실사에 가까운 CG와 성인등급의 표현묘사를 앞세운 R 등급 판타지 애니메이션 베오울프를 선보였으나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하게 되지요. 만약, 베오울프의 이야기를 잭 스나이더가 연출하고, 가디언의 전설을 로버트 져메키스가 맡았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요? 물론, 그저 추측과 상상에 불과할 뿐입니다만, 가디언의 전설은 확실히 스나이더와는 맞지 않는 궁합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디언의 전설은 올빼미판 반지의 전쟁이라고 불릴만큼 판타지로서는 높은 수준의 비주얼로 인해 어느 정도의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여러분이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판타지 영화의 팬이라면 가디언의 전설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을 듯 싶군요. 다만, 여건이 되신다면 (블로그 이웃이신 영화 파워블로거 페니웨이님 말마따나) 블루레이급의 화질로 감상하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분명 기대 이상의 감동을 얻으실 겁니다. 영화 결말 부분은 원작의 이야기 구조로 인해 속편을 암시하는 듯한 모양새로 결말을 맺게 됩니다만, 속편을 볼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는 미지수가 아닐까 싶군요.

ⓒ WARNER BROS


☞ 개인적으로 PG-13 등급에, 110분 정도만 러닝타임을 줬어도 이 작품은 꽤 괜찮은 애니메이션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 면에서 쉐인 에커의 '나인(2009)'과 함께 그 스토리가 너무나 아쉬운 작품이네요.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WARNER BROS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이 달의 TTB 리뷰 2011년 3월차에 선정된 글입니다. (클릭)


가디언의 전설 - 6점
잭 스나이더 감독, 짐 스터게스 외 목소리/워너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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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小学館 · KITTY FILM


<스탭>

◈ 원작: 하기오 모토
◈ 감독: 데자키 사토시, 토미나가 츠네오
◈ 제작: 키티 필름


<시놉시스> 

워프로 인해 먼 은하계까지 진출하게 된 인류는 수세기 사이에 수많은 혹성국가를 형성하며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사바계나 세글계와 같은 여러 이성인들과 조우하며 전쟁과 화해를 반복하던 은하계는 성간연맹의 형성과 함께 공존의 시대로 넘어갔으며, 우주시대를 짊어질 새로운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성간연맹이 창설한 코스모 아카데미도 어느덧 120년의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코스모 아카데미는 우주학의 모든 것을 가르치는 그야말로 우주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모든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코스모 아카데미의 졸업생은 우주의 엘리트로 그 어떤 은하계에서든 그 지위를 보장받게 된다. 3년마다 거행되는 코스모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는 전우주에서 어마어마한 수의 지원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테라계 시베리스 출신의 타다토스 렌(이하 타다)도 그들 중 하나.

1차 시험과 2차 시험을 통과한 타다는 이제 마지막 3차 시험만을 남겨놓고 있다 3차 시험은 10명씩 조를 이뤄 아카데미에서 지정한 우주선에서 치루어진다. 타다와 나머지 9명은 우주복으로 갈아입고 지정된 우주선으로 이동을 하게 된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체 버려진 듯한 이 우주선의 이름은 에스페란자 호. 에스페란자호에 도착한 아카데미 응시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분명 10명이 이 우주선에 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도착하고보니 11명의 인원이 있는 것이다. 모두 자신들이 정당한 응시자들이라 주장하는 상황. 과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누구란 말인가. 3차 시험은 이 에스페란자호에서 53일간 생활하는 것이며,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선내의 붉은색 박스의 스크램블 버튼을 누르는 것 외에는 외부와의 통신은 일절 불가능하다. 그리고 버튼을 누르는 순간 참여자 전원이 시험에서 탈락하게 된다. 타다 일행들은 53일 동안의 긴 시험을 무사히 끝마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초대받지 못한 손님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인가.


순정만화의 새지평을 연 거장 하기오 모토의 SF 미스테리 스릴러

'구로(1977)'로 순정소녀만화에 SF라는 소재를 접목시켰던 거장 타케미야 케이코와 함께 로맨스에 국한되어 있던 순정만화의 장르를 확대시킨 거장 하기오 모토의 동명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11인이 있다'는 시놉시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순정만화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긴장감 넘치는 서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범은하계로 삶의 영역을 확장한 인류, 그리고 이러한 은하계에서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명문 학교. 천문학적인 경쟁률을 뚫고 이곳에 입학하기 위해 모인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한 오래된 우주선 속에서 53일간의 생존 테스트를 받는 마지막 시험에 참여하고, 놀랍게도 이 폐쇄된 공간에 초대받지 않은 한명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동시에 타이틀이 등장하는 서두는 상당히 깊은 인상을 심어줍니다. 그동안의 순정만화가 이쁘고 화사한 남녀들이 등장하여 청춘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주된 패턴이었다면 이 작품은 순정만화의 전형적인 패턴을 넘어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품이 발간된지 무려 40년이 지나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수많은 순정만화가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1인이 있다는 그 소재의 신선함과 구성에 있어서 결코 최근의 인기 순정만화에 뒤지지 않습니다. 순정만화의 범주로 한정하기에는 작품의 그릇이 커보이기까지 하는데요. 하기오 모토를 가리켜 '소녀만화의 신'이라 가리키는 것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걸작은 스크린으로 옮겨져서도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감독인 데자키 사토시는 아니메 최고의 스타일리스트인 데자키 오사무의 형으로, '거인의 별(1968)'이나 '어택 No.1(1969)', '캡틴(1980)'과 같은 스포츠 계열 작품에서 연출이나 각본을 맡아왔었는데요. 이번 작품에서는 후배인 토미나가 츠네오와 함께 공동으로 11인이 있다를 감독하게 됩니다. 비록 데자키 오사무와 같은 현란하고 실험적인 영상기법은 없습니다만, 11인이 있다는 원작의 매력을 스크린에 잘 옮겨놓은 수작입니다. 구성도 깔끔하며, 흡입력도 좋습니다. 거기에 동생 데자키 오사무의 작화 파트너인 스기노 아키오 작화감독이 참여한 작화라인은 하기오 모토의 스타일을 아니메에 성공적으로 이식하게 됩니다.

특히, 본 작품의 히로인(이랄까요. 왜 단정짓지 않는지는 스포일러임으로 본 리뷰에서는 밝히지 않겠습니다.)으로 등장하는 프롤베리체리 프롤은 보이시한 매력과 풍성한 금발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상큼한 미모로 이 어두운 작품에 한줄기 천사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지요. 스기노의 캐릭터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화사함과 그로테스크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매력이 있는데요. 이러한 독특한 작풍은 이번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좋은 상성을 보여주는 듯 싶습니다.   

순조롭게 우주선으로 항해하던 10명에서 갑자기 11명으로 늘어나는 장면. 하지만 이부분은 신경쓰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게 된다. ⓒ 萩尾望都 · 小学館 · KITTY FILM



수수께끼의 한명, 우주선에 감추어진 미스테리, 각자의 숨겨진 사연들

관력이라는 특출난 능력을 가진 주인공 타다, 그런 그의 직관력으로도 나머지 10명은 전혀 거짓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스스로가 의심을 받게 되는 상황, 여기에 왠지 가면 갈수록 상황은 타다에게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거기에다가 직관력이라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처음 방문한 이 에스페란자 호의 이곳저곳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타다. 다른 수험생들의 의심 속에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고장난 우주선은 궤도를 이탈하여 태양으로 접근합니다. 여기에 이 우주선이 과거 치료가 불가능한 전염병이 발병했던 곳임을 타다의 기억을 통해 알게 되는 멤버들, 선내의 온도가 40도가 넘어가면 전염병의 병균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상황, 과연 이들은 시험을 포기하고 붉은색 박스의 버튼을 눌러 아카데미로부터 구조를 요청해야만 하는걸까요. 어떻게 해서든 이 난관을 극복하고, 불청객을 찾아내서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여러가지 난관이 속속 그들 앞에 등장하는 급박한 상황, 뭔가 머리속을 맴도는 타다의 이상한 기시감, 하나 둘씩 뭔가를 숨기고 있는 멤버들, 그리고 점점 의심의 눈초리는 타다로 향하고... 이 모든 것들은 서스펜스와 미스테리로서 작품의 긴장감과 몰입감을 최고조로 이끌어 줍니다. 별다른 엔터테인먼트적인 장치나 연출이 없이, 화려한 영상 기법이 동원되지 않고서도 11인이 있다는 순전히 이야기의 힘으로 관객들에게 강렬한 흡입력을 보여줍니다. 순정만화에 SF와 미스테리를 접목시켰다는 새로운 시도도 시도지만, 하기오 모토의 이 작품은 실로 스토리에 충실한, 기본기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높은 완성도의 기본기로 인해 별다른 장치 없이도 작품은 흥미롭고 인상적입니다.

러닝타임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야, 좋은데?'라는 말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이것이 흠이면 흠일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이야기 진행 내내 등장인물들과 관객을 조여오는 서스펜스와 미스테리에 대한 해답이 결말부분에 너무도 말끔히 정리됩니다. 여운 없이 작품의 마무리는 정말 깔끔한데요. 엔딩 크레딧과 함께 보여지는 등장인물들의 뒷이야기는 그래서 그 깔끔함 속에 약간의 여운을 남겨준다 하겠습니다.

과연 이 다양한 인물들 중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은 누구일까. ⓒ 萩尾望都 · 小学館 · KITTY FILM



이야기의 힘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작품

록 결말이 앞선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밝고 순정만화스러워서 조금 당혹스러운 측면이 있지만, 그로 인해 엔딩곡인 '나의 오네스티'의 감미로운 멜로디와는 오히려 잘 매칭되는 느낌입니다. 너무 깔끔하긴 하지만 이야기 전체의 흐름이 흐트러지지는 않는다고 할까요. 어두운 서스펜스물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모두 각자의 꿈을 가진 건전한 청년들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 속에는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이들 11명은 불청객의 등장과 각종 돌발상황으로 날카로워진 상황에서도 식당에서 서로에게 음식과 소스를 던지고 뿌려대며 즐거운(?) 난동을 부리기도 하지요.

개인적으로는 작품을 보면서 음울한 결론과 밝은 결론의 두 가지를 예상하고 있었는데요. 결국 이야기는 제가 예상했던 두번째로 흘러가게 되어 예측이 맞은 즐거움도 함께 했던 감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만화영화치고는 꽤 잘짜여진 이야기 구조와 드라마로 인해 근래에 본 작품 중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작품이라 할 수 있겠군요. 이야기의 힘, 11인이 있다는 그 기본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히로인(?)이 될지도 모르는 프롤의 눈부신 미소. ⓒ 萩尾望都 · 小学館 · KITTY FILM



<참고 사이트>

[1] 11人いる!, Wikipedia Japan
[2] 11인이 있다!(11人いる!) 1986 by 캅셀, CAPSULE 블로그: 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萩尾望都 · 小学館 · KITTY FILM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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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徳間書店 / ⓒ 학산문화사 (한국어판)


<스탭>

◈ 글/그림: 미야자키 하야오
◈ 편집/발간: 도쿠마 서점
◈ 한국어판 편집/발간: (주) 학산문화사


<시놉시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발생한 산업문명은 수백년 동안 전세계로 퍼져, 거대 산업사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대지의 비옥함을 앗아가고 공기를 더럽히며 생명체마저 마음대로 바꾸어 버리는 거대 산업문명은 1,000년 후에 절정기에 이르렀다가 이윽고 급격한 쇠퇴를 맞게 되었다. '불의 7일간'이라 불리는 전쟁의 의해 도시는 유독물질을 뿌리며 붕괴했고, 복잡하고 고도화한 기술체계는 소실되었으며 지표의 대부분은 불모의 땅으로 변해버렸다. 그 후 산업문명은 재건되지 않았고, 인류는 영원한 황혼의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다. (코믹스의 프롤로그 인용)


12년 동안의 연재 끝에 완성된 거대한 대하 SF 판타지

레콤 애니메이션에서 퇴사하면서 애니메이터가 아닌 전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82년에 연재를 시작하여 94년까지 무려 12년의 세월이 걸려 완성한 역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코믹스)는 그야말로 미야자키 월드의 시발점과 종착점을 동시에 보여준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과도한 기술문명에 대한 혐오감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극을 이끌어가는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광활한 하늘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유럽적인 생활상과 아날로그적인 맛이 흠뻑 느껴지는 스팀펑크 적인 메카닉까지 실로 이제까지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보아왔던 여러가지 주제와 상징, 그리고 스타일이 살아있는 작품인 것입니다.

애초에 애니메이션에 대한 고려 없이 연재되던 나우시카는, 토쿠마 서점이 발간하는 아니메 잡지 '아니메쥬'의 편집장 오쿠다 히데오의 권유로 인해 애니메이션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때 나우시카의 연재는 체 2권이 완료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부득이 하게 애니메이션은 나우시카의 초반부의 스토리를 갖고 미야자키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맞게 각색을 하는데요. 초반부의 프롤로그만을 가지고 훌륭한 기승전결을 만들어 낸 미야자키의 각색은 나무랄데 없이 훌륭했습니다만, 그로 인해 나우시카의 보다더 깊은 이야기와 메시지는 오히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지 않았나 합니다.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4) (보러가기)

나우시카 이후로 미야자키는 지브리의 창립멤버가 되어 숱한 명작 아니메들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요. 이러한 창작의 강행군 속에서 자연스레 나우시카 코믹스에 할애할 시간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나우시카는 7권이라는 비교적 짧은 이야기를 완결시키는데 있어서 무려 12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되고 맙니다. 그러나, 12년이라는 세월동안 숙성된 나우시카의 이야기는 깊은 풍미를 가진 맛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습니다. 그 깊이와 스케일은 만화영화의 그것을 뛰어넘고 있으며, 지면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마력 또한 미야자키의 아니메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고 있습니다.
 

ⓒ 徳間書店 / ⓒ 학산문화사 (한국어판)



인류를 위협하는 곰팡이 숲 부해와 오무에 얽힌 충격적인 진실

믹스의 이야기는 만화영화와는 좀 다르게 전개됩니다. 사실 코믹스는 동쪽의 대국 토르메키아 왕국과 서쪽의 대국 도르크 제후국과의 거대한 전면전이 작품의 주된 갈등 구조 중 하나인데요. 이 거대한 이야기축이 작품에서 거세되면서 나우시카는 토르메키아 왕국과 변방의 소국 페지테의 갈등 구조로 축소됩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오무의 새끼를 페지테의 군인들이 납치하여 오무들의 분노를 유발, 이를 이용해 토르메키아 군을 모두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는데요, 이것 역시 원작에서는 도르크 제후국이 꾸민 사건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면서 각색된 설정이라 하겠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토르메키아의 군대를 강한 카리스마와 지략으로 이끄는 크샤나의 활약은 이로 인해 상당부분 극에서 축소됩니다. 실제 원작에서 크샤나의 역할은 이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요. 나우시카가 선지자의 현인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이 또한 바람계곡의 점쟁이 노파가 아닌, 도르크 제후국의 고승입니다. 페지테의 아스벨은 부해 제일의 검사 유파와 동행하지만 애니메이션처럼 모든 사건이 일단락 된 후 같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닌, 도르크 제후국으로 떠난 나우시카를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합류하게 되지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곰팡이 숲 부해를 둘러싼 숨겨진 진실은 아니메에서는 그야말로 맛만 보여주었다 하겠습니다. 실제로 부해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 그리고 오무와 곤충들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지에 얽힌 이야기들은 나우시카의 메인 테마이자 거대한 미스테리로서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요. 이러한 것이 상당부분 축소되면서 단순한 스토리텔링에 그쳤던 아니메와는 달리, 코믹스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충격적인 진실과 방대한 역사를 지닌 뒤엉킨 진실의 실타래를 나우시카가 그 여정 속에서 풀어가면서 독자에게 만화영화를 뛰어넘는 긴장과 몰입감을 선사하게 됩니다. 즉, 이야기는 토르메키아와 도르크간의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이 고대의 기술들을 전쟁에 사용하기 시작하고, 부해의 진실과 오무의 예언을 따라 세계를 구원하는 여행을 떠난 나우시카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려, 대하 서사극과 모험극이 어우러진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7권 밖에 안되는 짧은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우시카의 여정은 생각보다 장대합니다. 권당 130여 페이지 밖에 안되지만 정보량은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 같은 느낌이네요. 여기에 투박한 펜터치에 의해 한 씬 한 씬을 파악하는 것은 예상 외로 오래 걸립니다. 사실 작화에 있어서 나우시카는 뛰어나다고 하기에는 좀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모자란 것은 아닙니다만, 감독, 각본, 콘티, 디자인 등 다방면에 걸쳐서 걸출한 재주를 보여주었던 미야자키의 네임밸류에 비하면 기대만큼은 아닌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장면구성이나 컷 전환은 훌륭하며, 작화 역시 엄밀히 말하면 힘을 빼고 편안히 그린 듯한 느낌이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뛰어난 스토리텔링에 의해 기대치보다 떨어지는 작화에도 불구하고 흡입력은 굉장한 작품입니다.

ⓒ 徳間書店 / ⓒ 학산문화사 (한국어판)



미야자키스러우면서도 미야자키스럽지 않은 무거운 스토리 텔링

우시카 코믹스는 미야자키의 모든 세계관과 주제의식, 스타일이 녹아든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의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어두운 편입니다. 으례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지는 평화롭고 한가한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이 작품에서는 초반부 외에는 묘사되지 않고 있죠. 특히, 나우시카가 오무의 메시지를 쫓아 도르크 제후국으로 여행을 떠난 이후에는 피냄새가 진동하는 전장과 도르크의 신성황제가 일으키는 광기의 질주, 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인간들의 절규가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치 묵시록의 이야기처럼 나우시카 월드는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표현 수위에 있어서도 그동안 아니메로 보아왔던 미야자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수준입니다. '원령공주(1997)'에서 미야자키는 잠시 그동안 보여주었던 말랑말랑한 아니메와는 달리 비교적 잔혹하고 파격적인 표현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요. 나우시카 코믹스는 원령공주보다 더 과격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전쟁의 참상과 인류 멸망의 전조를 이야기하는 이 작품이 기존의 작품처럼 말랑말랑 하다면 설득력이 떨어지겠죠. 이런 면에서 나우시카 코믹스는 그동안 애니메이션에서 절제되어왔던 미야자키의 또다른 표현 욕구(?)를 맘껏 펼쳐낸 작품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일찌기 나우시카의 아니메를 향해 미야자키 하야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메의 거장 오시이 마모루는 군국주의적인 냄새가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매우 냉소적인 견해를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엘로스는 과연 아니메 어디에서 이런 흔적이 드러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아래의 링크를 보면 이러한 오시이 마모루의 지적이 일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삐딱하게 보기 by 성은애, 근대 영문학과 분과 게시판 (보러가기)

여기에서 언급한, 핵무기라는 인류 스스로가 만들어낸 최고의 위협을 직접 경험한 일본인들의 트라우마나, 붉게 빛나는 동그란 눈동자로 맹진하는 오무 무리들이 욱일승천기를 앞에 든체 맹진하는 제국주의적 향수를 느끼게 하는 점, 압도적인 오무의 돌진을 온몸으로 막아낸 나우시카의 카미카제에 대한 무의식적인 오마쥬, 그리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토르메키아 왕국(미국)과 이에 대해 바람(카제)을 신(카미)처럼 받아들이는 바람계곡 부족민(일본)과 같은 일부 비유는 미야자키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심결에 표현된 형태라고 할까요. 그리고, 이것을 꼬집은 오시이 감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는지 나우시카의 이야기는 이후 전혀 다른 형태로 흘러갑니다. 코믹스의 토르메키아 군은 미군처럼 바람계곡을 짓밟지 않고, 나우시카 역시 자신을 희생하여 오무의 진군을 막지는 않습니다. 

코믹스의 나우시카는 오히려 쟌다르크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나우시카의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묵시록의 세계에 한줄기 광명을 가져오는 종교적 구원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성과 인간성으로 인해 판단을 내리는 나우시카의 모습에서는 성녀보다는 오히려 영웅적인 면모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 徳間書店 / ⓒ 학산문화사 (한국어판)



나우시카의 뒷 이야기는 만화영화 될 수 있을까.

대하고 드라마틱한 나우시카의 뒷 이야기는 이것이 만화영화로 만들어졌을 때의 감동을 상상하게끔 합니다. 과연 나우시카의 뒷 이야기를 우리는 움직이는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을까요. 과거 나우시카의 속편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번 논의되어 왔고, 실제 나우시카 아니메의 원화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던 에반게리온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는 나우시카에 등장했던 토르메키아의 황녀 크샤나의 이야기를 다룬 나우시카 외전을 연출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모두 미야자키의 거부로 인해 진행되지는 않았는데요. 97년에 연출한 원령공주를 통해 미야자키는 나우시카의 속편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어느 정도 담아내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현재 지브리는 '붉은 돼지(1992)'의 속편을 준비 중이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올해 일흔 하나인 미야자키의 연령을 고려하면 갈수록 나우시카 속편을 미야자키가 연출한 확률은 줄어들고 있다는 소리인데요. 개인적으로는 나우시카 속편이 미야자키 생전에 제작되지 않는다해도 미야자키의 사후 지브리에서 어떤 형태로든 속편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예상해보기도 합니다. 그만큼 나우시카는 미야자키의 모든 것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방대한 나우시카의 이야기를 감안하면, 어설픈 각색과 축약보다는 오히려 원작의 내용에 충실한 몇부작 형태의 이야기는 어떨까 싶습니다. 문제는 미야자키만큼 나우시카를 잘 영상화할 수 있는 감독의 선임이겠죠. 미야자키 월드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는 작품 나우시카, 코믹스에서만 접하기에 그 이야기는 너무 거대하고 매력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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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徳間書店 / ⓒ 학산문화사 (한국어판)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이달의 TTB 리뷰 2011년 2월차에 선정된 글입니다. (클릭)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박스판 - 전7권 - 10점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학산문화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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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DHOUSE


<스탭>

◈ 원작/감독/각본/캐릭터 디자인: 콘 사토시
◈ 제작: 매드 하우스


<시놉시스> 

도박으로 패가망신하고 거리로 나온 중년 아저씨 긴과, 중년 호모 하나, 그리고 가출 소녀 미유키는 집을 나와 하루하루를 밖에서 연명하는 홈리스(Homeless;노숙자)들이다. 여느 때와 같이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는 다가오고, 쓰레기를 뒤지던 셋은 바구니 안에 버려진 한 아기를 발견하게 된다. 평소에 엄마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하나는 아기를 키우겠다고 고집부리며 키요코라 이름을 붙여주지만, 귀찮은 일에 얽매이기 싫은 긴과 미유키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다. 박스로 만든 자신들의 거처에서 그렇게 티격태격 하루를 보낸 그들은 하나의 고집으로 키요코를 키우는 대신, 아기를 버린 부모를 찾아주기로 하지만 그들의 앞에는 뜻밖에도 여러가지 모험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아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조명해보는 드라마

제가 동경대부인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은 막장 인생을 살아가던 3인의 노숙자들이 우연치 않게 쓰레기더미에서 발견한 아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고 서로 간의 애정을 확인하게 된다는 가족 드라마적인 전개를 만화영화적인 방식으로 풀어간 작품입니다. 많은 곳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 작품은 존 포드 감독의 '3인의 대부(1948)'를 모티브로 한 작품인데요. 웨스턴 무비였던 3인의 대부에 비해서는 한국에서도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던 프랑스의 가족 코미디 '세 남자와 아기바구니(1985)'와 오히려 더 가까운 느낌의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듯 세상과 담을 쌓은 3명의 주인공이 우연치 않게 발견한 아기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전개는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진부한 소재인 것이 사실이죠.

하지만 전작인 '퍼펙트 블루(1998)'에서도 그러했듯이 콘 사토시는 이 진부한 가족 코미디스러운 소재를 가지고 실사 영화에 근접한 비주얼로 재현함 동시에, 만화영화적 상상력을 곁들이고 독특한 블랙 코미디와 미스테리적 구성을 더함으로써 진부한 레시피로 놀라울만치 맛깔스러운 식감을 연출해내는 신기를 선보이게 됩니다. 이리하여 콘 사토시의 장기라 할 수 있는 현실과 비현실의 절묘한 오버래핑이 전혀 사용되지 않은 정직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은 콘 사토시의 필모그라피 중에서 단연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사실 다해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게 그의 필모그라피입니다만) 인상적인 작품이 된 것입니다.

현실과 환상의 절묘한 중첩은 사라졌지만, 작품의 배경과 오프닝 스탭 타이틀을 중첩시키는 등, 특유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다. ⓒ MADHOUSE



실사영화를 지향하는 정교한 만화영화적 표현

화영화는 전작에 이어서 여전히 실사영화에 근접하는, 아니 실사영화를 지향하는 세밀하고 디테일한 묘사를 보여줍니다. 도시의 밤거리와 겨울 정경의 실감나는 배경묘사는 퍼펙트 블루나 천년여우에 이어서도 여전한데요. 이는 미술감독으로 아니메 업계에 입문한 사토시 감독의 이력을 알게 되면 납득이 가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과도할 정도로 세밀한 배경의 묘사는 흡사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의 작품들이 선보인 그것과 동질의 느낌을 선사합니다. 이런 면에서 콘 사토시의 작품에서는 극사실주의적인 냄새가 풍기기도 합니다. (오토모 가츠히로는 사토시가 신인시절 이 업계에 발을 들이게 한 인물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치밀할 정도의 세심한 배경과 사실적인 인물묘사를 지향하면서도 콘 사토시의 작품에서는 애니메이션만의 특징인 판타지가 살아있습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법한 일들이 태연스럽게 이 극사실적인 만화영화에서 등장하는 것이죠. 이는 현실과 환상을 오고 가는 그의 특색있는 연출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 작품에서도 수시로 사용되고 있는데요.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극적인 치요코의 구출장면은 이 작품에서 애니메이션만의 장기를 살려낸 대표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외에도 비탈길에서 자동차에 깔려 구조를 바라는 야쿠자 보스의 고군분투라든가, 실로 다양한 표정을 선보이는 여장남자 하나의 그로테스크한 표정들은 극사실주의라는 제한조건 속에서 만화영화의 장기를 십분 살리는 다양하고 코믹한 표현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실사영화를 지향하지만 발 하나는 애니메이션에 담근 체 완전하게 넘어가지 않는 듯한 사토시의 작품세계는 그로 인해 오히려 사실주의라는 껍데기를 쓴 낭만주의적 색체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특히, 이 작품은 우연적인 만남으로 인한 전개의 반전과 스토리의 진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는데요. 폭설로 운행을 멈춘 전철에서 맞은 편 전철에 서있는 아빠를 마주하게 된 가출소녀 미유키나, 목숨을 구해준 야쿠자 보스를 따라간 보스의 딸 결혼식에서 자신을 도박에 빠뜨리게 한 원수(게다가 보스의 사위 될 인물)를 마주한 긴, 보스를 저격한 저격범에 의해 납치된 미유키를 구하기 위해 택시를 탔던 하나가 클라이막스에서 납치된 갓난아기 키요코를 되찾으려고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가 바로 미유키를 구할 때 탔던 택시라든지, 편의점에서 죽치고 있는 노숙자 트리오를 못마땅하게 여긴 취객과 싸움이 붙어 잠시 거리로 나왔는데, 그 사이 눈길에 미끄러진 구급차가 편의점을 들이받는 것과 같은 우연 등은 진부하면서도 작품의 재미를 살려주는 클리셰로써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게 됩니다.

뒷배경으로 등장하는 가게 유리창에 붙여진 메모리즈, 퍼펙트 블루, 천년여우는 모두 사토시 감독의 전작이다. ⓒ MADHOUSE



진부한 가족영화를 재기 넘치는 드라마로 변주해낸 콘 사토시의 걸작

부한 가족 코미디가 될 수도 있었던 이 작품을 아기를 키우는 세 노숙자의 이야기로 풀어가지 않고 아기의 어머니를 찾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나는 노숙자들의 로드 무비로 변주해낸 사토시 감독의 선택은 탁월했다 하겠습니다. 그로 인해 소재의 진부함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이 작품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있지요. 사토시 감독 특유의 블랙 유머 역시 이 작품을 맛깔스럽게 하는 요소입니다. '천년여우(2001)'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환각적이고 어두운 느낌을 선보인 사토시 감독이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그런 유머감각이 십분 살아 있습니다. 그로 인해 사토시 감독의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특유의 미스테리스러운 전개는 이 작품에서도 잠시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클라이막스를 둘러싸고 등장하는 갓난아기 치요코의 출생의 비밀이 잔잔하고 독특한 웃음을 주던 이 작품의 분위기를 갑작스레 다이나믹하게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 그것인데요. 이런 가족 영화에서 라스트에 이르러 급박한 전개로 전환되는 것이 그다지 참신한 전개는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이 작품은 그 부분에 있어서 능숙하고 세련됩니다. 추격씬 역시 적절한 코미디와 액션을 결합하여 사실주의의 한도 내에서 애니메이션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해주고 있지요. 

특히, 앞서도 언급했던 현실과 환상의 절묘한 오버래핑이라는, 사토시만의 장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서 오로지 드라마와 코미디라는 정공법만으로 이 정도의 완성도를 이끌어낸 사토시 감독의 저력은 실로 놀랍다 하겠습니다. 캐릭터나 자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이 평법하고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 완성해낸 이 작품은 다시 한 번 만화영화에서 스토리와 미술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한 작품이라 하겠지요. 이 두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유하고 있던 사토시 감독의 죽음은 그래서 더더욱 아쉽다 하겠습니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반가운(?) 삼계탕집의 모습. 특유의 극사실주의에 의해 만화영화를 넘어서는 표현력을 보여주는 사토시 작품만의 특색이 살아있다. ⓒ MADHOUSE



<참고 사이트>

[1] 東京ゴッドファーザーズ, Wikipedia Japan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MADHOUSE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이달의 영화 리뷰 2011년 2월차에 선정된 글입니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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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TSU · SUNRISE


<스탭>

◈ 감독: 미즈시마 세이지
◈ 각본: 쿠로다 요스케
◈ 제작: 선라이즈


<시놉시스> 

선구자 이오리아 슈헨베르그가 만든 인공지능 베다의 생체단말인 이노베이드 이면서도 그의 의지에 반해 스스로가 인류를 이끌고자 했던 리본즈 알마크가 진정한 이노베이터로 각성한 솔레스탈 비잉의 세츠나 F 세이에이에 의해 격퇴된지 2년 후인 서기 2,314년, 130년 전에 목성으로 떠났던 유인 탐사선 유로파의 잔해가 지구로 접근한다. 거대한 우주선의 지구 추락을 우려한 지구군의 공격에 의해 유로파는 파괴되었지만, 그 파편들은 지구의 곳곳에 흩뿌려지게 된다. 

그러나, 파편이 추락한 주변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자동차와 지하철 등이 무인으로 움직여 사고를 냈던 것. 특히, 이것은 뇌양자파가 일반인들보다 더 높은, 즉 이노베이터로서의 자질을 가진 이들의 주위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솔레스탈 비잉은 이 이상한 현상에 주목, 세츠나와 록온이 지구권으로 돌아가 알렐루야와 소마와 조우하게 된다. 탐사선의 잔해에 붙어 있던 미지의 금속 유기체에 의한 사건임을 파악한 지구 연방정부는 이노베이터의 자질을 가진 이들을 뇌양자파 차단 시설로 급히 옮기고 이 정체불명의 금속체에게 ELS(Extraterrestrial Living metal Shapeshifter)라는 이름을 붙인다. 

한편, 그 시각 목성권에 이변이 발생한다. 목성의 위성 가니메데가 소멸할 정도의 거대한 중력이상이 생기면서 거대한 ELS와 그 군대가 태양계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지구 연방과 솔레스탈 비잉은 미지의 생명체와 인류의 존망을 건 사투를 눈앞에 두게 되었는데...


미지의 우주와의 조우, 이노베이터로 각성한 인류의 첫 시련

담 시리즈의 특징이자 정체성이라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의 갈등과 오해,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전쟁과 드라마라 할 수 있습니다. 매번 시리즈가 리부트되고 새로운 건담과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이 기본적인 구도는 바뀌지 않았었죠. 토미노 요시유키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임했던 턴에이 건담도, 결국은 인간과 인간의 갈등을 테마로 했으며, 새로운 세대의 눈높이에 맞춘 건담 시드 시리즈와 건담 더블오 시리즈 역시 미흡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갈등과 드라마를 작품의 축으로 삼았다 하겠습니다. 

2009년 종영되며, 시드 이후 새로운 건담 시리즈로, 우주세기의 그늘을 나름 성공적으로 탈피한 건담 더블오가 2010년에 이르러 새로운 극장판을 공개하게 됩니다. 그것도 총집편 형태가 아닌, 오리지널 극장판으로 말입니다. 이는 91년 개봉되었던 '기동전사 건담 F91(1991)'이후 실로 19년만의 완벽한 오리지널 극장판으로, 더블오 시리즈가 독립된 세계관으로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왔으며, 동시에 상업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라 하겠습니다. 특히, 제타 건담 이후 매번 이루어져 왔던 건담 시리즈의 주역기 교체는 이번 극장판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져 시즌1과 시즌2에 이어 극장판까지 전 건담 주역기가 교체되면서 프라모델 라인업에 있어서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19년만에 등장한 오리지널 건담 극장판은 놀랍게도 인간과 인간의 갈등을 다룬 것이 아닌, 인간과 외우주에서 온 이상생명체와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물론 전체 로봇 아니메로 볼 때는 그닥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입니다만, 항상 인간과 인간, 집단과 집단의 갈등을 테마로 내세웠던, 건담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이야기라 하겠는데요. (물론, 퍼스트 건담의 최초 기획안은 우주인과의 전쟁을 이야기로 하려 하긴 했지요.) 뉴타입과 시드에 이은 인류의 진화의 테마 이노베이터로 각성을 시작한 인류가 외우주로의 진출을 모색하면서 우연치 않게 미지의 우주생명체와 조우하게 되고, 이를 통해 지구가 아닌 새로운 세상으로 한발을 내딛으려는 인류가 낡은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미래의 존재로 각성하기 위한 첫번째 갈등과 시련을 겪는다라는 주제를, 제작진은 미지의 우주와의 조우라는 소재로 풀어 나가려 했다고 보입니다.


엔터테인먼트와 드라마의 조율에 실패한 19년만의 오리지널 건담 극장판

간형 생명체가 아닌 생체와 비생체에 자유로이 침식이 가능한 금속 유기생명체라는 점에서 더블오에 등장하는 인류의 적 ELS는 위협적이고 대적하기 힘든 존재로 묘사됩니다. 게다가 그 수 역시 지구 연방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지요. 이는 항상 비슷한 세력을 갖추고 국지적으로 반목과 소요를 거듭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했던 기존의 건담 시리즈와는 다른 전개를 보여줍니다. 압도적인 ELS의 힘 앞에 인류 절멸의 위기에 처한 현실에서 모빌슈트라는 개인용 병기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싸움에 나서는 이야기는 거대한 스케일과 위압감으로 관객을 압도하려 했습니다만, 아쉽게도 풀어나가야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나머지 여러 숙제를 안은 체 구멍난 서사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거대한 스케일에, 이제까지 등장한 시리즈의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등장하여 이야기의 한 조각씩을 책임집니다만, 이로 인해 원작을 감상하지 않은 이들은 이야기의 전개를 알 길이 없고, 동시에 2시간이라는 짧은(물론, 극장 아니메로서는 꽤 긴) 러닝타임을 수많은 인물들이 나눠가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필연적인 깊이의 부족은 TV 시리즈에 이어 여전히 서사가 엉성한 더블오의 맹점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TV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무거운 소재를 다룬 방대한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 풀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여러 등장인물들이 각각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려 하니 결국 깊이와 밀도를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 결과 위기에서 절정까지는 그럭저럭 얼개를 유지하지만, 세츠나와 퀀터가 등장하여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절정과 결말에 이르는 부분은 시간에 쫓기듯 부실하고, 결과적으로 직전까지의 전개에 비해 허술하고 허망한 느낌을 줍니다. 뭔가 대단한 여러가지를 잔뜩 풀어넣고 서투르게 중요한 것들만 주섬주섬 해결하게 되는 것이죠.

TV 시리즈에서도 그랬듯이 더블오는 만화영화로서는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려 했으면서도 드라마 보다는 볼거리에 치중하려하면서 생긴 불협화음을 극장판에서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 너무 많은 캐릭터들을 등장시켜 극의 흐름을 자꾸 끊어버리고 있지요. 지구연방 소속의 이노베이터 데카르트 대위 같은 경우, 상당히 강렬한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극 중간에 허무하게 퇴장했으며, 몇 컷만 등장해도 되었을법한 사지 크로스로드와 루이스 할레비는 가뜩이나 이야기거리가 많은 극장판의 많은 부분을 침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지가 극 초반에 관람하는 영화(라 쓰고 용자물이라 읽는다) '솔레스탈 비잉'도 이야기와 그닥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러닝타임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연출 상의 미스라고 부를만 합니다.

거기에 건담 시리즈에서 항상 변하지 않고 등장하는 거대한 레이저 병기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여 식상함을 안겨주고 있으며, 상상 이상의 스피드로 싸우는 모빌슈트의 모습은 과연 모빌슈트가 필요한 전투일까 싶을 정도로 그저 쏘고 피하고 할 뿐입니다. 일부 팬들의 말마따나 모빌슈트로서의 정체성, 즉 인간형 기동병기 다운 모습이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모빌슈트의 매력은 상실되었으며, 그것은 솔레스탈 비잉의 주역 건담 4기도 마찬가지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오히려 그레함 에이커의 브레이브와 그의 브레이브 편대가 전투기 형태와 MS 형태의 적절한 조합과 연계 전술로 인해 이 작품에서 건담 마이스터들보다 더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군요.

ⓒ SOTSU · SUNRISE



거대한 스케일, 익숙한 전개. 상실된 혁신의 의지

지의 우주인과의 조우는 이미 건담 시리즈와 쌍벽을 이루는 마크로스 시리즈를 통해 끊임없이 다루어져 온 것으로, 특히 더블오 극장판은 그 중에서도 마크로스 시리즈의 84년도 극장판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1984)'와 비교할만 합니다. 많은 등장인물들을 늘어놓지 않고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에만 집중하면서 드라마와 로맨스, 볼거리의 균형을 이룬 마크로스 극장판에 비해 더블오 극장판은 너무 많은 등장인물들로 인해 드라마는 빈약하고, 펠트의 로맨스는 애절함이 느껴지지 않으며, MS 전투씬은 자체로서는 현란하고 스피디합니다만, 결말에서는 진부하고 지루하게 전개됩니다. 

형체가 불분명한 압도적인 우주 생명체와의 일전은 곤조의 디지털 TV 로봇물 '반드레드(2000~2001)'을 연상시키는데요. 화끈한 로봇의 액션에서 더블오는 장면장면에서는 10년전의 CG로 완성된 반드레드에 뒤지지는 않습니다만, 서사의 밀도와 짜임새는 오히려 한수 아래의 작품인 반드레드에 비해 부실해 보입니다. 보다 더 높은 관객층을 상정한 듯한 더블오의 이야기가 반드레드의 그것보다 짜임새가 덜한 것은 TV 시리즈로 구성되어 서사의 여유가 생긴 것임을 감안할 때 명백히 더블오의 이야기가 2시간 안에 풀기에는 너무 방대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제작된 로봇물 중 가장 출중한 완성도와 재미를 보여준 '천원돌파 그렌라간(2007)'의 그것에 비하면 더더욱 세련되지 못합니다. 익숙한 전개 속에 차별화된 볼거리는 그저 현란하게 움직이는 MS의 전투씬 밖에 없었으며, 주인공인 세츠나와 주역기인 퀀터가 미지의 우주생명체와 싸우는 것이 아닌 대화와 소통을 위한 키로 사용되면서 주인공의 활약이 거의 없는 이상한 모양새의 로봇 액션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로봇물로서 더블오는 지나치게 성숙한 주제의식을 담으려 했던 것이 폐인이라 봅니다. 오히려 반드레드나 그렌라간처럼 압도적인 적을 맞이하여 이노베이터의 힘을 최대한 각성하여 싸우는 세츠나와 솔레스탈 비잉의 모습을 화끈하게 그리는 엔터테인먼트에 치중했으면 더 좋은 완성도와 짜임새를 보여주지 않았을까 합니다. 엔터테인먼트라는 정체성을 가진 체 심오한 드라마와 주제를 연출하려 했습니다만, 연출가의 역량의 부족, 그리고 각본의 허술함은 이러한 두 상반된 요소의 조율에 있어서 실패한 모습을 보였다 하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작품의 완전한 망작이라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8억4천만엔의 흥행수입을 올리며 2010년 아니메 흥행랭킹 11위에 오르는 준수한 성적을 보여주었죠. 재미 역시 허술한 짜임새가 거슬리긴 했지만, 극장을 뛰쳐나오거나 모니터를 꺼버릴 정도의 수준은 아닌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하게 표현하면, 좀 유치하긴 하지만 볼만합니다.

여러 아쉬움 속에서 더블오 시리즈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 듯 합니다. 극장판의 전개로 보아 사이드 스토리를 다룬 스핀오프나 프리퀄 외에 더블오 시리즈의 시퀄이 계속될 여지는 없어 보이는군요. 이야기의 짜임새는 아쉬웠고,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사실들도 많았습니다만, 어찌되었든 가장 깨끗하게 마무리를 지은 시리즈 중 하나라 하겠습니다.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더블오는 새로운 건담 시리즈로서 많은 것을 시도한 작품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공업 디자인적 컨셉을 도입한 더블오의 MS는 이전까지의 건담 시리즈와는 또다른 매력을 보여주었으며, 미지의 생명체와의 전투를 소재로 하는 등, 새로운 시도들이 인상적이었다 하겠습니다. 이제 건담은 다시 우주세기의 이야기로 바톤이 넘어간 듯 싶지만, 새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건담의 시도는 아직도 멈추지는 않을 듯 싶네요. 그땐 부디 이야기에 있어서도 완성도가 보장된 작품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 SOTSU · SUNRISE


덧붙임 1) 타이틀을 책임지고 있는 건담 더블오는 그 어떤 활약도 하지못한체 타이틀의 의미를 퇴색시키신다는...

덧붙임 2) 엔딩 크레딧이 끝난 뒤에는 무려 이오리아 슈헨베르가가 젋었을 적 모습으로 등장해서 작품의 주제와 테마를 다시 한번 거창한 어조로 설명 해주십니다만, 본편의 서사가 엉망이라 그닥 와닿지는 않습니다.

덧붙임 3) 연극에서 독백을 하듯 자신의 생각을 토해내는 등장인물들은 토미노 요시유키가 처음 만들어낸 씨퀀스로 당시에는 신선하고 극적인 느낌이지만, 30년 가까이 일본 아니메 단골 시퀀스로 자리 잡으면서 이제는 뭔가 극의 리얼리티를 떨어뜨리는 느낌입니다. 뭔가 어설픈 개똥철학을 서로서로 읊조리고 있으니 이야기가 더 유치해지는 듯.  

덧붙임 4) 최초에 ELS와 결전을 벌이는 지구연방합대의 사령관은 김 중장님이랍니다. 멋진 대사를 일어로 날려주시는 걸 보니 제일교포시겠군요. -0-;

덧붙임 5) 퀀터의 진정한 매력은 극장판이 아니라 프라모델로 감상할 수 있을 듯.


<참고 사이트>

[1] 劇場版 機動戦士ガンダム00 -A wakening of the Trailblazer-, Wikipedia Japan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SOTSU · SUNRISE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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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ITO Production · TMS · FILMLINK


<스탭>

◈ 감독: 데자키 오사무
◈ 원작: 사이토 타카오
◈ 제작: 도쿄무비신사


<시놉시스> 

세계적인 부호 레오나르드 도슨의 아들인 로버트 도슨의 암살 의뢰를 받은 전설적인 스나이퍼 듀크 토코. 의뢰받은 일은 한치의 오차나 실수도 없이 반드시 수행해 내고야 마는 지상 최고의 킬러인 그의 암호명은 고르고 13이다. 도슨 그룹의 경영권 승계가 이루어지는 역사적인 순간, 도슨 회장의 앞에서 로버트는 고르고 13의 저격에 의해 그만 즉사하고 만다.

로버트 도슨의 암살 이후, 그는 또다시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신흥 마피아의 보스 닥터Z의 암살 의뢰를 받는다.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닥터Z의 암살에 성공한 고르고13에게 돌연 습격이 시작된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고르고13은 닥터 Z 암살의뢰인을 찾아가지만, 이미 그는 고문을 당하고 숨을 거둔 뒤였다. 숨쉴 겨를도 없이 몰아치는 암살자들의 습격과 군대 수준의 화력을 앞세운 공격. 고르고 13의 일거수 일투족은 하나도 빠짐없이 정체불명의 적에게 노출되어 있었다. 과연 고르고 13은 누구에게 습격을 당하는 것일까. 사방에서 밀려드는 강력한 적들을 하나 둘 물리치며, 고르고 13은 그 의문을 풀어나가기 시작하는데...


아니메라마, 하드보일드 액션으로 부활하다

'일의 죠(1970)', '에이스를 노려라(1973)', '보물섬(1978)', '베르사이유의 장미(1979)'와 같은 70년대의 명작 애니메이션을 관통하는 연출가 데자키 오사무의 특징은 (영상미학의 대가라 불리는 그의 불세출의 연출력을 제외하고) 만화영화임에도 성인들이 즐길 수 있는 인간 드라마에 있다 하겠습니다. 밑바닥 인생에서 세계 챔피언으로 우뚝선 뒤 자신의 젊음을 하얗게 불태웠던 풍운의 권투선수 죠, 수많은 라이벌과의 경쟁을 통해 진정한 테니스 에이스로 성장해 가는 소녀 오카 히로미, 악당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가슴에 사나의 로망을 아로 새겨넣었던 외다리 사나이 캡틴 실버, 여자로 태어나 운명을 극복하고 불꽃 같은 삶은 살다가 간 오스칼 프랑소와에 이르기까지... 그가 연출하는 만화영화의 등장인물은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에서 실사영화 이상의 생동감으로 팬들을 사로잡고,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데자키 감독의 작품들이 모두 시대를 넘어서 지금까지 사랑받고 인정받는 이유는 바로 만화영화의 범주를 넘어선 드라마틱한 인간 드라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데자키의 스승 테즈카 오사무가 창립한 무시 프로덕션은 일본 만화영화의 두가지 방향성을 제시했었습니다. 하나는 디즈니에 필적하는 만화영화를 만들자는 것으로, 이는 전통적인 풀 애니메이션 기법으로는 압도적인 제작력을 가진 디즈니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테즈카 오사무로 하여금 리미티드 기법이라고 하는 일본 아니메 고유의 제작기법을 낳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고품격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는 실험적 도전이었습니다. 이제는 성인 만화영화의 본산으로 불리는 일본 만화영화로서도 당시 이 시도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 아래 만화영화의 일본식 발음인 아니메이숀과 드라마의 합성인 '아니메라마'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무시 프로덕션의 아니메라마 3부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천일야화(1969)', '클레오파트라(1970)', '슬픔의 벨라돈나(1973)'로 이어지는 아니메라마 3부작은 영상예술로 승화된 비주얼과 이야기로 성인 만화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만, 지나치게 앞서간 작가주의와 무리한 재정투입으로 인해 무시 프로덕션의 도산을 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무시 프로덕션의 수많은 후학들에게 큰 경험과 교훈, 그리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게 되었지요. 무시 프로덕션 출신으로 현재에 이르러 명장으로 칭송받는 스기이 기사부로, 린 타로, 토미노 요시유키, 타카하시 료스케 등의 감독들이 연출한 작품들은 모두 만화영화의 범주를 넘어선 깊이 있는 드라마로 일본 아니메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던 작품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는 이번에 이야기할 데자키 오사무와 그의 작품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이야기이구요. 앞서 이야기한 70년대 그의 명작들은 하나같이 아니메라마가 지향했던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라는 테마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데자키만의 영상미학이 가미되어 시대를 넘어서도 하나같이 칭송받고 있지요.

그렇다면, 사이토 타카오가 창조해낸 희대의 스나이퍼로 일본 성인만화에 큰 족적을 남긴 전설적인 인물 고르고 13은 과연 아니메라마의 계승자이자 영상미학의 대가인 데자키 오사무의 손에 의해 어떻게 만화영화로 태어나게 되었을까요. 강렬한 하드보일드 액션과 아니메의 스타일리스트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큰 기대를 가질만 합니다.

ⓒ SAITO Production · TMS · FILMLINK



폭력과 섹스를 고급화시킨 데자키의 영상미학의 절정

록 이제까지의 필모그라피가 거의 대부분 성인취향의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자키의 작품은 80년대에 들어와 좀 더 과격하게 변모합니다. 직전년도에 연출한 '스페이스 어드벤쳐 코브라(1982)' 역시 테라사와 부이치의 동명 SF 하드보일드 액션물을 원작으로 한 성인취향의 액션 영상을 선보였는데요. 이전과는 달리 육감적인 여성미의 강조와 잔인한 폭력씬으로 인해 드라마성이 강조된 이제까지의 데자키 작품에 비해 자극적인 느낌을 주었다 하겠습니다. 물론, 내일의 죠나 보물섬 등에서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 장면을 연출해온 데자키 감독입니다만, 코브라는 몽환적인 연출로 인하여 액션장면에서는 호흡이 느려지고, 이야기는 허공에 뜬 느낌을 주었지요.

이듬해에 나온 고르고 13은 그런 면에서 분명 코브라에 비해 템포도 빠르고 긴장감도 배가되었습니다. 고르고 13에게 암살당하는 인물들의 공포에 질린 표정은 다소 과장된 표정으로 죽음의 문턱에 선 인간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해 냅니다. 여기에 특유의 하모니 기법은 정과 동을 오가는 작품의 분위기에서 매순간마다 강렬한 하이라이트를 선사하게 되지요.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회심의 결정타를 날리는 순간에 어김없이 화면은 정지되며 극화체의 일러스트가 화면을 대신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이 연출은 실로 데자키 감독의 작품들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해내는 기가 막힌 수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역동적인 액션장면 사이사이에 등장하여 역동성을 오히려 배가시키는 실로 데자키만의 필살기라고 할 수 있지요.

원작과 마찬가지로 성적인 표현에서도 이 작품은 도전적인 장면들을 선보입니다. 천일야화에 이어 만화영화에 베드씬을 그려넣는 파격을 선보인 것이죠. 스기노 아키오에 의해 그려진 육감적인 여성들은 실로 만화영화로서는 놀라울 정도의 관능미를 뽐내고 있습니다. 고르고에게 남편을 살해당한 비련의 여인 로라가 암살자 스네이크에게 능욕당하는 장면은 괴기스럽고 몽환적으로 표현되었으며, 고르고와 조력자 리타와의 정사장면 역시 어두운 음영과 실루엣으로 고혹적으로 표현해 냅니다. 이러한 선정적 묘사는 과거 아니메라마 3부작 정도는 아닐지더라도 노골적인 컷을 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감각적인 화면분할은 동시간대에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묘사를 실로 기막히게 표현해 냅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기법이지만 이러한 화면분할을 통해 고르고 13은 스파이 액션 영화로서의 진면목인 서스펜스의 느낌을 잘 살려냅니다. 오디오의 시간대와 비디오의 시간대를 달리하는 연출방식, 중요한 장면을 반복해서 다른 각도에서 보여주는 등, 작품은 만화영화로서는 절정의 테크닉과 수많은 시도를 보여줍니다. 여기에 (동문지간인 린타로 감독 역시 즐겨 사용하는) 투과광 기법과 입사광 기법까지 선보이는 등, 고르고 13은 하드보일드 액션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데자키의 모든 영상미학이 집결된 영상미학의 결정체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3년 뒤에 자신의 영상미학을 모두 쏟아낸 린 타로 감독의 사무라이 액션물 '카무이의 검(1985)'과도 비교된다 하겠습니다. 움직이는 그림에서 보다 더 고도의 기법이 적용될 여지가 많은 만화영화의 특성상 두 거장은 액션물을 연출하면서 실로 절정의 영상미학을 담아냈다고 하겠습니다.

ⓒ SAITO Production · TMS · FILMLINK



세계최초의 CG 도입, 과유불급으로 인해 실패한 시도

화영화로서 시도할 수 있는 최고의 영상연출을 화면에 쏟아부은 것 외에도 고르고 13은 아니메史의 한획을 그을 또하나의 영상적 시도를 선보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 최초로 만화영화에 컴퓨터 그래픽을 도입한 것인데요. 당시 컴퓨터 그래픽은 디즈니가 제작한 '트론(1982)'과 같은 실사영화에 등장했을 뿐 전세계적으로 영화나 만화영화에서 시도한 사례가 없었습니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 디즈니조차도 절반의 성공에 그친 체 막을 내려야 했던 CG를 불과 1년 뒤에 만화영회에 전격 도입한 데자키 오사무와 제작진의 시도는 실로 엄청난 모험이었던 셈이죠.

직전년도의 극장판 코브라에서도 4채널 돌비 입체 음향 시스템을 일본 영화 최초로 도입했던 데자키 감독은 이번에도 영상예술에 있어서 선구적인 시도를 보여준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그의 도전적인 모험은 안타깝게도 불발로 그치게 됩니다. 당시의 CG는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자본과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기에, 이로 인해 작품에서 오프닝 씬(그나마 여기서도 Full CG가 아닌 실사 스톱모셥과의 조합으로 제작)과 라스트의 헬기 전투 씬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못했던 겁니다. 게다가 조악한 당시의 CG 기술로는 지금과 같은 셀과 CG의 결합을 시도할 수 없었으며, 질감의 표현 역시 셀로 그려진 아니메 컷과 너무도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던 탓에 전체적으로 영상 속에서 너무 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물론, 이 조악한 CG가 컷에 많이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작품의 전체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만, 세계 최초로 CG를 도입한 야심찬 시도라는 의의에 부합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포스터의 COMPIX(COMputer와 PICture의 조합어.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한 만화영화라는 의의를 부각하기 위한 신조어라 볼 수 있을 듯)라는 홍보가 무색한 이 모습은 결과적으로 관객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는 부작용만 낳았습니다.

획기적으로 시도한 CG의 아쉬움 외에도 과도한 원작의 재해석은 원작의 팬들에게는 외면을 받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고급스러운 액션물이지만 너무도 판타지스럽게 표현된 데자키의 영상미학은 사실적이고 냉소적인 암살자 고르고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잔인한 폭력묘사와 선정적인 장면 역시 극장 애니메이션으로서는 흥행의 저해요소이기도 했을 겁니다. 대중적인 공감대를 형성해야 성공할텐데 고르고 13은 여기저기 마니악한 측면이 눈에 띈 작품이라고 해야 겠지요. 여러가지 흥행의 저해요소는 결국 놀라운 영상미로 무장된 이 걸작에게 흥행참패라는 굴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게 됩니다. 전년도의 코브라에 이은 고르고 13의 흥행 패배는 70년대를 풍미했던 데자키 오사무로 하여금 도미를 결심하게 되는 하나의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 SAITO Production · TMS · FILMLINK



성인 아니메의 진수를 보여준 안타까운 걸작

록 최초의 시도라는 의의 외에는 작품에서 사족이 되었던 CG 기술이나 성인 등급의 과격한 표현 수위로 인해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한 고르고 13이었지만, 데자키 오사무의 모든 영상미학이 담겨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성인용 액션 만화영화 이상의 작품성과 아우라를 갖추고 있습니다.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실사영화를 무색케 하는 각종 영화적 연출기법과 시퀀스로 인해 아니메의 영상 레벨을 한차원 끌어올린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또한 이 작품은 과거 아니메라마에서 보여주었던 판타지스러운 연출기법들에 의해 하드보일드 액션물이라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가져다 주는데요. 바로 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하드보일드 액션과 판타지스러운 연출기법의 조합이 80년대 들어 사실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팬들의 취향과 궤를 달리하며 인기몰이에 실패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예술적이고 실험적인 영상 테크닉을 지양하고, 화끈한 액션물에 충실한 연출방식을 선보였다면, 고르고 13은 원작의 팬들 뿐만 아니라 작품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작품의 상업적인 성공여부나 장르적 특징과는 어울리지 않는 영상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동안 여러 작품에서 선보인 데자키의 모든 영상 테크닉이 전부 녹아져 있으며, 거기에 더불어 CG라는 당시로서는 실로 선구적인 시도로 인해 세월이 흘러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선정성과 폭력성이라는 두 키워드에 의해 성인용 아니메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고르고 13은 영상적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성인용 아니메라는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성인 아니메의 걸작을 만나고 싶다면 고르고 13은 놓치지 말아야할 작품 중 하나일 겁니다.

ⓒ SAITO Production · TMS · FILMLINK



<참고 사이트>

[1] 고르고 13 (1983~2008) by 엘로스, 별바다의 서고
[2] 出﨑統, Wikipedia Japan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SAITO Production · TMS · FILMLINK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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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RI HIROSHI/SKY CRAWLERS Committee


<스탭>

◈ 감독: 오시이 마모루
◈ 원작: 모리 히로시
◈ 제작: 프로덕션 I.G


<시놉시스> 

번의 전쟁 후 평화가 찾아온 근 미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전쟁을 일종의 쇼로 만들어 전문기업으로 하여금 전쟁을 대행토록 한다. 이러한 가식적인 평화 속에 사람들은 TV 속에 벌어지는 전쟁을 그저 남의 일처럼 여기게 된다. 전쟁은 로스톡社과 라우테른社 간의 대결로 치닫고 있었는데, 라우테른社의 전설적인 파일럿 '티쳐'는 모든 파일럿들에게 공포이자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지고 있다.

한편, 로스톡社의 유럽전선 기지 우리스로 배속된 신참 파일럿 칸나미 유이치. 이전의 기억이 없는 그는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의 모습을 한 킬드레이다. 킬드레는 전쟁을 쇼로 만든 이 세계에서 사람들을 대신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인간이면서도 인간과는 다른 존재, 영원한 전쟁을 위해 늙지 않는 소년 소녀들이다. 우리스 기지에 배속되어 기지 책임자에게 전입신고를 하는 유이치. 기지 책임자이자 킬드레 출신인 쿠사나기 스이토와 칸나미 유이치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노센스 이후 4년만에 돌아온 오시이 마모루의 신작

작인 공각기동대의 속편 '이노센스(2004)'를 통해 오시이 감독스러운 색체의 극단적인 절정과 그로 인한 거부감(아마 이러한 평가를 감독 자신은 즐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시이 감독은 그의 영화는 1만명 정도의 관객이 좋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죠. 1편의 영화를 100만명이 1번씩 보든 만명이 100번씩 보든 같다고 생각하는 그인데요. 실제로 오시이 감독의 마니아들이라면 그의 작품을 대부분 몇 번씩은 감상했을 겁니다. 그게 당연합니다, 뭔 말인지 모르겠든요.)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오시이 마모루. '공각기동대(1995)'를 통해 그를 알게 된, 그의 작품에 다소 생소한 팬들이라면 오시이 마모루의 이런 모습은 어김없이 불편함과 지루함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상업용 대중예술로서의 만화영화, 모든 사람이 공감하며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만화영화라는 관점에서 오시이 감독의 작품들은 늘 규격 외의 것들이었죠. 실상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공각기동대도 일본 내 첫 개봉시에는 참혹할 정도로 관객의 외면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2008년, 마침내 새로운 작품을 들고 우리의 곁으로 찾아왔습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그보다 늦은 2010년에 이르러서야 개봉(현재 개봉 중이지만 언제 극장가에서 내려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중이지만, 어찌되었건 마침내 4년만에 찾아온 오시이 감독의 다소 불편할지도 모르는(?) 신작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스카이 크롤러(2008)'입니다.

언제나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문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로 '아니메의 철학자'로 불리는 그의 이번 신작은 과도한 난해함으로 인해 '현학적이고 잘난척 하는 것 같다'라는 혹평을 들었던 이노센스 직후의 작품(물론, 그 사이 어썰트 걸이라는 실사영화가 있지만)이라는 점에서 여러가지 기대와 우려를 갖게 합니다. 과연 오시이 마모루는 전작의 비평을 거울삼아 이번에는 좀더 대중친화적인 작품으로 찾아올 것인지, 아니면 이제껏 그래왔듯이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어김없이 펼쳐갈지가 말이죠. 기대 속에 베일을 벗은 스카이 크롤러는 과연 오시이 감독의 작품다움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다른, 메마름 속에 한줄기 서정적인 감성을 보여준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 MORI HIROSHI/SKY CRAWLERS Committee


늙지 않는 소년들인 킬드레와 티쳐가 작금의 일본시대의 젊은이와 기성세대를 비유한 것 때문일까요, 아니면 압도적인 영상미의 CG 공중전에서 느껴지는 시원해진 기분 때문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쿠사나기와 칸나기 유이치의 잔잔한 멜로라인 덕분일까요. 하늘을 수놓는 비행기들의 거친 엔진음 사이로 퍼지는 애잔한 카와이 켄지의 음악과 함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압도적인 영상미로 그려진 쓸쓸하고 메마른 창공

입부에 펼쳐지는 장쾌하고 실감 넘치는 프로펠러 전투기들의 공중전은 스카이 크롤러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징입니다. 이러한 압도적인 전투기들의 공중전은 참으로 오랜 만에 느껴보는데요. 짧게는 곤조의 '전투요정 유키카제(2001)'나 '라스트 엑자일(2003)'에서부터 길게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1992)'와 '천공의 성 라퓨타(1986)', 그리고 故 토리우미 히사유키의 '에어리어 88(1985)'과 '독수리 5형제(1972)'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실제로 오시이 마모루는 토리우미 감독의 제자로 독수리 5형제를 통해 연출로 데뷔했으니, 스카이 크롤러는 공중전 연출의 장인이었던 스승의 스타일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또다른 비행씬의 대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것과 비교되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현재 붉은 돼지 속편을 준비하고 있다는 루머가 들리고 있지요.)

토리우미 히사유키가 에어리어 88에서 보여주었던 실감 넘치는 공중전의 묘사는 제자인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에서도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습니다. 밀리터리 마니아인 오시이 감독의 정체성에 CG에 대한 폭넓은 이해력, 그리고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의 모습이 반영된 놀라운 퀄리티의 영상미는 좌중을 압도하는데요. 전작인 아발론이나 이노센스에서 보여준 실사와 아니메의 결합(아발론에서는 실사를 아니메처럼 촬영하고, 이노센스에서는 아니메를 실사처럼 촬영하는 시도를 함. 결국 두 번 모두 미완성에 그치지긴 하지만...)이라는 실험적 연출기법을 뒤로 하고 이번에는 보다 사람들이 보기 편한 CG로 대중적인 접근을 취했다고 보여집니다. 실제로 공중전 외에는 2D 작업과 셀 애니메이션의 활용으로 이노센스에서 느껴졌던 거부감을 상당부분 줄인 것으로 추측되는군요.

결국, 영상미에 있어서 전작의 실험정신과는 다른 대중적인 느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너무도 섬세하고 정확한 장면구성과 움직임 덕에 비주얼은 여전히 우리에게 압도적인 느낌을 줍니다. 즉, 기막히게 멋지지만 너무도 완벽한 나머지 불편함이 느껴진다는 말인데요. 마니아의 경우라면 몰라도 일반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그 영상만으로도 어려움을 느끼게 하는, 극사실주의적인 색체를 어김없이 보인다 하겠습니다. 

이런 스카이 크롤러의 완벽한 영상미학은 공중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굳이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교한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늘이 로맨티스트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반면, 오이시 마모루의 하늘은 차가우리만치 냉정한 이성주의자의 그것이라고나 할까요. 전자와 후자의 퀄리티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듯 싶군요. 단지 취향의 차이일 뿐, 오시이 감독의 영상미는 확실히 그만의 정체성을 보란듯이 화면 가득 빛내고 있습니다.

ⓒ MORI HIROSHI/SKY CRAWLERS Committee



영원한 젊은 속에 시들어가는 피터팬, 킬드레

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은 '킬드레'라고 불리는 어린 소년 소녀들입니다. 나이를 먹지않는, 정상적으로 태어났다기 보다는 무언가 인공적인 방법에 의해서 태어난 존재인 킬드레. 전쟁이라는 인류 최대의 인공적 재앙을 쇼로 만들고, 그것을 아이들의 모습을 한 킬드레가 대신한다는 스카이 크롤러의 설정은 다분히 충격적이면서도 수많은 아니메에서 볼 수 있는 설정의 심오한 변주곡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작품 내에서 킬드레는 풍요로운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길들여져 어른이 되기를 싫어하는 현재의 젊은이들을, 그들과 맞서게 되는 정체불명의 격추왕 '티쳐'와 전쟁회사에 속한 어른들은 삐뚤어진 사회를 구축한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비유로, 확실히 엔터테인먼트의 성격을 띈 아니메에 자주 등장하는 어린 소년 소녀 전사들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고 하겠지요.

스카이 크롤러는 이러한 킬드레의 모습을 비행기를 몰고 신기의 조종술로 적군들을 쓰러뜨리는 멋진 피터팬의 모습이 아닌, 자신의 어린 시절 또는 부모의 기억과 같이 정상적인 인간들이 가져야할 추억을 제거당한 체 매일매일 반복되는 전쟁 쇼 속에서 매말라가는 소년들의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보통의 아니메와는 다른 쓸쓸한 분위기를 이끌어 냅니다. 미성년자인 이들이 애연가인냥 연신 담배를 피워대거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콜걸과 잠자리에 드는 모습은 십대의 탈선이나 방황, 혹은 주인공들을 멋지게 보이기 위한 클리셰라기보다는 반복되는 전장과 잃어버린 자아라는 공허감을 메우기 위한 그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인 듯 위화감과 애처로움이 느껴지는 장면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러한 그들의 모습이 감정이 없는 듯한 메마른 표정과 함께 시종일관 잔잔하게 묘사되면서 작품의 분위기는 심연 속에 어두운 무언가가 존재하는 잔잔한 바다와 같은 형상을 띄게 됩니다.

특히, 이야기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는 우리스 기지의 지휘관 쿠사나기 스이토의 경우는, 킬드레로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생존하며 사랑을 하고 이별을 겪었으며, 그리고 아이를 키우고 있는, 마치 어른과 킬드레의 경계선 상에 위치한 인물로, 작품의 화두를 던지는 역할을 한다고 하겠는데요. 불안한 심리상태와 알 수 없는 공허감 속의 그녀는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는 킬드레가 인간다움을 갖기 시작하는 과정의 모습이며, 동시에 어른이 되기를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마침내 사회에 첫발을 들인 그 시점의 모습과도 같은 것으로, 그녀를 통해 주인공인 칸나기는 킬드레로서의 자신의 존재에 물음표를 던지게 되고, 마침내 그 운명에 맞서기 위해 티쳐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칸나기의 잊혀진 과거 역시 작품의 중요한 이야기거리입니다. 이 소재는 약간의 미스테리적인 형식을 취하면서 관객들에게 가벼운 수수께끼를 던져주게 되는데요. 이것이 그리 난해한 것은 아니지만 작품 내에서 명확하게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상으로 그럴 것이다라는 모호한 답을 남긴 체 긴 여운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전부터 그래왔지만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에는 깔끔한 결말이란 없습니다. 마치 무대의 조명이 서서히 꺼지면서 페이드인 하듯, 결말은 서서히 관객의 마음 속에서 꺼져가듯 사라지죠. 이러한 이야기는 명확함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더없는 허무함과 공허감을 안겨줍니다.

ⓒ MORI HIROSHI/SKY CRAWLERS Committee


전체적으로 무겁게 깔려 있는 분위기 속에 새로온 신참 동료의 신문 접는 모습을 보며 칸나기는 자신이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그리고 킬드레로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됩니다. 깊은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무언가가 마침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쿠사나기와 칸나기의 인연은 현재에서 벗어나 과거와 미래를 향하기 시작합니다. 


긴 여운의 결말... 그리고 오늘 밤은 별에 안기어

라울 정도의 스펙타클한 공중전과 답답할 정도로 가슴 아프고 숨막히는 킬드레의 이야기는 묘한 부조화를 던져줍니다. 오시이 감독 스스로는 자신을 상업 만화영화 감독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실상 그가 보여준 작품들의 스펙트럼은 상업영화라는 표현이 무색한 난해한 작품들이 대부분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시이표 작품들은 하나같이 그 비주얼에서 상업적인 형식을 띄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가 연출한 작품 중에 유일하게 비주얼에서도 상업적이지 않았던 작품은 '천사의 알(1985)'이 아닐까 싶군요. 그러나 그러한 상업적인 비주얼 위에 풀어놓는 오시이 표 이야기는 언제나 끊임없는 자아와 정체성의 되물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실로 부조화스러운 작품들 그 자체랄까요.

다만, 스카이 크롤러는 그런 오시이 특유의 현학적 이야기와 상업적 극사실주의 속에서 한줄기 로망의 빛이 스치고 지나간 듯한 느낌의 작품입니다. 격정적이지는 않지만 위험한 것처럼 아슬아슬한 쿠사나기와 칸나기의 애정선은 작품의 주제, 즉 성장하지 않는 젊은이들의 고뇌와 정체성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열쇠처럼 빛난다고 할까요. 너무나 메마른 느낌의 이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둘의 관계는 오히려 뜨겁지 않기에 애잔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감정이 메마른 쿠사나기가 칸나기에게 조금씩 마음을 보이는 이런 광경은 사실 오시이 감독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기도 하구요. (공각기동대나 패트레이버에서도 그랬지만, 오시이 감독의 작품에서 러브스토리는 드라마가 아닌 팩트 그 자체로 묘사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마침내 칸나기는 티쳐에게로 기수를 돌립니다. 메마른 킬드레들의 가슴에 넓고 푸른 창공은 아름답지만 차가운 요람이자 묘지입니다. 때마침 엔딩에 흐르는 아야카의 '오늘 밤도 별에 안기어(今夜も星に抱かれて)'은 너무도 작품의 엔딩과 잘맞는 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치 러닝타임 내내 참고 참았던 감정이 녹아내리듯 흘러나오는 음악 속에 장면은 서서히 페이드 아웃되고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 MORI HIROSHI/SKY CRAWLERS Committee


아, 엔딩 스탭롤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마시길. 엔딩곡이 너무도 아름답기도 하지만 그 끝에는 또다른 시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사이트>

[1] スカイ・クロラシリーズ, Wikipedia Japan
[2] 스카이 크롤러 スカイ クロラ, 2008, 씨네 21

[3] <스카이 크롤러> 오시이 감독의 수작 애니메이션, 무비조이
[4] ‘스카이 크롤러’ 오시이 마모루 감독, 존재, 그 이상의 주제는 없다!, 무비위크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MORI HIROSHI/SKY CRAWLERS Committee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이달의 영화 리뷰 2010년 11월차에 선정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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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Tatsunoko Pro. / 鴉 - KARAS 製作委員會


<스탭>

◈ 감독: 사토 케이이치
◈ 원작: 사토 케이이치
◈ 제작: 타츠노코 프로


<시놉시스> 

세상의 도시들은 긴 세월동안 정령 유리네와 그의 전사 카라스에 의해 지켜지고 있었다. 요괴들의 세상과 인간 세상을 이어가며 양쪽의 질서를 지키는 수호자 카라스 중 한 명인 혼슈인 에코는 요괴와 그들의 세상을 잊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분노, 스스로의 의지로 유리네를 배반하고 기계화된 요괴들과 함께 인간세상을 뒤엎을 음모를 꾸미게 된다. 최강의 카라스인 에코를 막으려 여러 카라스들이 도전하지만 그의 압도적인 힘 앞에 차례로 쓰러지고... 에코의 음모를 막고 인간세상과 요괴세상 모두의 질서를 되찾을 새로운 카라스는 과연 나타날 수 있을 것인가. 


타츠노코 프로 40년 노하우와 사토 케이이치 감성 디자인의 만남

'학닌자대 갓챠맨(1972)'와 '신조인간 캐산(1973)', '타임보칸(1975)' 등으로 일본 최대의 아니메 스튜디오 도에이 동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70년대를 수놓은 타츠노코 프로덕션(일본식으로는 줄여서 타츠노코 프로). 타츠노코는 아니메에 5인 전대물의 공식을 대입하는 등 히어로 액션물에서 발군의 작품들을 선보이며, 히어로물의 본가로 인정받고 있는데요. 비단 히어로물의 본가라는 명성 외에도 코믹스나 소설 등을 원작으로 하지 않고 자신만의 오리지널 아니메로 승부를 걸어 여러 명작을 탄생시킨 제작사로도 정평이 나있습니다. 히어로물 외에도 '마하 고고(1967)', '개구리 왕눈이(1973)'이라든지 '이상한 나라의 폴(1976)' 등 독창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만들어낸 아니메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죠.

비록 지금은 그 위세가 예전같지 못하다고 하지만, 토리우미 히사유키(에어리어 88 감독), 아마노 요시타카(천재 캐릭터 디자이너, 뱀파이어 헌터 D,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캐릭터 디자인), 코가와 토모노리(전설거신 이데온, 성전사 단바인 등의 캐릭터 디자인. 스튜디오 비보의 창립자로 기타즈메 히로유키, 온다 나오유키의 스승), 오카와라 쿠니오(아니메 1세대 메카닉 디자이너. 기동전사 건담의 메카닉 디자인), 오시이 마모루(아니메의 철학자. 패트레이버, 공각기동대 등 연출), 타카다 아케미(일본 최고의 미형 캐릭터 디자이너 중 한명. 마법천사 크리미마미, 오렌지로드의 캐릭터 디자인) 등 기라성 같은 애니메이터들을 키워냈으며, 타츠노코에서 분사한 Production I.G는 현재에도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걸작 아니메들을 지속적으로 제작해내는 명 제작사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카라스는 바로 이러한 전설적인 아니메 제작사 타츠노코가 자사설립 40주년(설립 1962년)을 기념하여 2005년부터 출시한 6부작 OVA로, 타츠노코의 트레이드 마크인 히어로 액션물을 기본으로 하여 특촬물과 호러물을 적절히 조합한 다크 히어로 판타지 액션 아니메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겟타로보호(1991)', '자이언트 로보(1992)'부터 'BIG O(1999)', '마징카이저(2001)' 등 레트로 퓨처 풍의 로봇 아니메에서 디자인을 맡으며 활약해온 사토 케이이치의 첫 연출작으로, 특유의 스타일리쉬함으로 멋진 액션 비주얼을 선보이게 됩니다. 사토 케이이치는 로봇물 외에도 '백수전대 가오렌쟈(2001)', '인풍전대 허리켄쟈(2002)', '폭룡전대 아바렌쟈(2003)' 등의 특촬물에서도 캐릭터 디자인을 맡아왔으며, 타츠노코가 제작한 다크히어로 액션물 '소울테이커(2001)'에서 크리쳐 디자인을 맡으며, 히어로물과 용자물에도 조예가 깊다고 하겠습니다. 2000년 NTT 도코모의 CF 영상인 'NTT 도코모 갓챠맨' 역시 그의 작품이기도 하지요.

연출경력은 없지만, 로봇물부터 특촬물과 히어로물까지 골고루 참여한 그의 이력은 이 작품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줍니다. 특히, 이 작품은 그가 기획부터 원안, 감독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력을 보이고 있어 타츠노코의 40주년 기념작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사토 케이이치를 위한, 사토 케이이치에 의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습니다.

ⓒ 2005 Tatsunoko Pro. / 鴉 - KARAS 製作委員會



2D와 3D가 혼합된 압도적인 영상미와 비주얼

프닝부터 압도적인 액션 비주얼로 팬들을 화면 깊숙히 끌어들이는 카라스의 영상은 단연코 압권입니다. 카라스의 액션 미학은 특촬물에서 볼법한 액션 시퀀스를 다이나믹하고 역동적인 표현이 가능한 아니메의 영역으로 표현해 내었다는 것인데요. 근래의 CG 기술의 도움을 얻은 바가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스의 비주얼에는 일반적인 CG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는 느끼기 힘든 질감과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실제로 제작진은 2D와 3D의 중간 정도의 느낌을 내는 것을 비주얼의 목표로 삼고 있다고 했는데요. 이를 위해 일반적인 사람들이나 엑스트라들의 경우에는 셀화로 작업한 원화를 CG로 보정해주는 작업을, 그리고 카라스나 요괴와 같이 비현실적인 캐릭터들은 CG로 작업한 기본 위에 셀화 작업과 카라스만의 강렬한 명암대비를 사용하여 CG 이면서도 마치 셀화와 실사의 중간 같은 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CG 위에 셀화로 보정을 해주는 작업에 있어서는 다른 애니메이션에서 사용되었던 툰 쉐이딩(Toon Shading: CG로 만들어진 기본 그림 위에 애니메이션에서 쓰이는 것과 같은 셀화적 색감과 그림자를 입히는 기법. 애플시드 극장판이나 마비노기와 같은 게임에서 보는 비주얼을 뜻함) 기법과는 달리 CG 캐릭터의 일부분, 즉 망토와 같은 부분은 셀화로 작업하고 나머지 CG 부분은 강렬한 명암효과를 부여하여 CG의 느낌을 최소화 시킨 다음, 각종 광원효과 등을 적용하여 CG의 기본 질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한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상당히 많은 작업량을 요구하는 속칭 노가다에 가까운 작업이었습니다만, 관록의 타츠노코 제작진답게 이런 부분에서도 특유의 장인정신을 발휘하여 높은 완성도의 비주얼을 창조해내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과도한 작업량이나 CG가 투입되면서 생긴 제작비의 상승은 제작 도중 카라스의 프로젝트를 잠시 휘청거리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한 듯 하지만, 결국 40주년이라는 명제하에 끝까지 포기를 하지 않은 제작진의 의지 덕분에 시리즈는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지요.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빗나갔지만, 이러한 카라스의 독특한 영상미는 CG 효과를 눈에 띄지 않게 한다는 것이 선결조건이었기에 될 수 있는 한 밝은 조명이나 밝은 장소에서의 액션씬은 자제하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다행히 다크 히어로와 요괴들이 등장하는 액션물이었기에 자연스레 카라스의 액션은 주로 밤을 배경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지요. 음산하고 어두운 배경 속에서 시커멓고 괴기스럽게 생긴 캐릭터들이 펼치는 하드한 액션에 강렬한 명암효과와 광원효과가 부여되면서 CG의 이질감은 상쇄되었고, 효과는 더욱 화려하게 부곽됩니다. 이런 컬러와 효과가 빠른 스피드의 액션 시퀀스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카라스의 비주얼은 강렬하고 세련된 블랙의 느낌을 선사하게 되지요.

특히, 압권은 특촬물에서 익히 볼법한 과장된 등장씬과 변신씬, 그리고 공격을 들어가기 전의 특별한 포즈 등을 들 수 있는데요. 어린이들에게 극적효과를 느끼게 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이 특촬물적인 시퀀스는 성인들이 볼법한 다크 히어로 액션물에서 강렬한 컬러링의 CG와 음산한 분위기, 그리고 적절한 음악에 맞춰 전혀 유치하지 않은 시퀀스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꽤 과격한 액션 연출이 등장하기에 어찌보면 액션에서만큼은 사실주의적 연출이 등장했을 법도 하지만, 스타일과 멋을 최대로 살려낸 이러한 연출방식은 '과장'이라는 키워드를 액션 연출에 가장 성공적으로 대입한 사례 중 하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할 즐거움을 선사해줍니다. 비주얼에서만큼은, 그리고 액션연출과 그 스타일에 있어서는 타츠노코의 40주년을 기념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아니메 중에서도 그 영상미를 내세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 2005 Tatsunoko Pro. / 鴉 - KARAS 製作委員會



호러와 느와르가 뒤섞인 강렬하고 하드한 액션

라스는 타츠노코의 히어로물 중에서도 드물게 다크 히어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애초에 기획 단계부터 제대로된 다크 히어로물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시작된 이 카라스는 사악한 쪽에 몸을 두고 있다가 그들을 배반하고 정의의 편에 선다는 다른 다크 히어로물과는 달리, 도시의 수호자로 까마귀의 형상을 한 어둡고 우울한 과거를 지닌 히어로로 묘사됩니다. 이런 면에서 카라스는 데빌맨이나 뱀파이어 헌터 D와 같은 부류라기보다는 배트맨의 부류에 가까운 히어로일지도 모르겠는데요. 전반부에는 주인공인 오토하의 과거가 거의 드러나지 않은 체 단편적인 영상만이 제공되면서(그것도 자세히 눈여겨 보지 않으면, 주인공인지 눈치채기가 힘들 정도) 오히려 베일에 쌓인 비밀스러운 히어로로 묘사됩니다.

오히려 초반부는 기계와 결합된 기괴한 모습의 요괴들이 등장하고 그들에 의해 사람들이 끔찍한 모습으로 살해되면서 이를 해결하려는 쿠레 형사와 사기사카 형사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마치 호러나 미스테리 드라마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이러한 괴기스러운 사건 속에 고양이 정령 유리네의 기묘한 주문과 함께 등장하는 카라스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전체적으로 3화까지의 전개는 이렇게 인간들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기묘한 사건이 발생한 후, 결국 정체를 드러낸 요괴 앞에 신비의 인물 카라스가 등장하는 시퀀스를 따라가고 있다고 해야겠지요.

이야기에서 또다른 중요인물로 등장하는 누에의 경우에는 요괴로서 요괴들과 그들을 이끄는 선대 카라스 에코를 배신하고 인간의 편에 선 인물이라 하겠는데요. 오히려 다크히어로의 성격 상 이 누에야말로 카라스의 진정한 다크히어로가 아닐까 합니다. 누에의 경우는 요괴이면서도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대부분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게 되는데, 뮤지션처럼 느껴지는 스타일리쉬한 패션과 금으로 도금된 멋진 권총, 그리고 오토바이와 같은 액세서리들로, 마치 느와르물에 등장하는 멋진 주인공을 연상시키게 합니다.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시점은 쿠레 형사와 사키사카 형사, 누에, 그리고 카라스의 세가지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여기에 인간의 시점에서 그들을 관찰하게 되는 시골에서 상경한 아가씨 히나루, 누에를 따르는 요괴소년, 거기에 또다른 도시에서 온 유리네와 그녀의 카라스인 호무라 등의 시점이 대입되면서 작품은 다양한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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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일부분만 드러나며 전체적인 얼개를 알 수 없었던 이야기는 이렇게 여러 인물들의 시점에서 전개된 이야기의 조각들이 하나로 얽히며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1화에 등장했던 알 수 없는 응급실의 인물이 누구인지, 왜 누에가 요괴들을 배반하고 인간들의 편에 섰는지, 오토하는 과연 누구이고 어떻게 카라스가 되었는지 등등이 차례로 밝혀지게 되지요. 여러가지 의문들과 다양한 등장인물들로 인해 내러티브가 길어지고 지루해질 우려도 있지만, 이 작품은 제법 스토리텔링과 액션의 균형을 잘잡은 작품입니다. 액션에 몰입하여 작품의 내러티브가 실종하지도 않았고, 내러티브에 집중하여 작품이 지루해지지도 않았구요. 거기에 다양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각자의 사연을 갖고 나름의 결말을 맞이하는 점도 훌륭한 편입니다. 등장인물 중 누구 하나 버리지 않았다고 해야할까요. 조연급인 인물 사기사카 형사와 그의 딸 요시코의 이야기도 카라스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다지 큰 연관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인 줄거리를 따라 적절한 전개와 클라이막스, 그리고 결말을 보여줍니다.

물론, 다른 도시의 카라스인 호무라의 등장은 조금 생뚱맞은 감도 있습니다만, 이야기 자체를 훼손시키기 보다는 그저 관찰자로서의 역할에 그치기 때문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 편입니다. 오히려 호무라의 통통 튀는 매력이 카라스의 어두운 분위기를 상쇄해준다고 할까요. 이런 인물로는 히나루를 또한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작품의 이야기와는 진짜로 전혀 상관없는 히나루는 우연치 않게도 카라스와 요괴들이 등장하는 장소마다 어김없이 찾아와 본인의 생업인 아르바이트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얼핏보면 정말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녀이지만, 이렇게 작품의 매 에피소드마다 주변인물로 등장하는 장면은 감독의 유머감각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마치 영화 속 카메오의 등장같이 말이죠. 

전체적으로 카라스의 이야기는 이처럼 여러개의 에피소드들이 조각조각 나누어져 메인 줄거리와 함께 유기적으로 흘러가다가 메인 줄거리의 전개과정에 맞춰 에피소드 각각도 나름의 결말을 보여주는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영리하고 재기넘치는 스토리 구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2005 Tatsunoko Pro. / 鴉 - KARAS 製作委員會



마니악한 40주년 기념작, 감탄과 아쉬움이 교차

라스는 타츠노코의 40주년 기념작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그야말로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정성을 들인 멋진 비주얼, 비주얼에 걸맞는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 거기에 비주얼과 이야기의 균형을 잘잡은 연출 등 완성도 면에서는 인정을 해줄 수 밖에 없는 작품이지요. 거기에 엔터테인먼트 본연의 재미에도 충실한 작품입니다. 과연 초짜 연출가의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반면, 사토 감독의 스타일이 거의 100%를 차지한다 싶은 이 작품은 40주년 기념작이라는 태그를 띄고 나면 과연 타츠노코의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연관성이 없는 편입니다. 실제 타츠노코의 인재들이 상당수 타츠노코를 떠난 후인지라 이 작품은 거의 신진급 인물들이 참여한 타츠노코의 정체성을 그다지 엿볼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히어로물이라는 장르적 특성 외에는 타츠노코와의 교집합을 찾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물론 일부 스타일에 있어서 이 작품은 타츠노코의 2001년작 소울테이커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실제로 소울테이커는 사토 감독이 디자이너로 참여한 작품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소울테이커 역시 타츠노코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신보 아키유키의 색깔이 너무 많이 드러나는 작품이기에 연관성을 찾기는 힘들다고 하겠습니다. 애초에 기획 스타일이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자는 것이었기에 이런 부분은 감안해야 하는 부분이긴 합니다. 그저 물론 작품의 호불호나 완성도와는 무관한 그저 개인적인 생각일 뿐인데요. 맛이 좋다, 없다, 짜다, 싱겁다가 아닌 '맛은 있는데, 이 집 전통의 맛은 사라졌네' 라는 정도의 느낌이랄까요.

또한, 감탄스러운 영상미와 잘 짜여진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뭔가 사람을 잡아끄는 스토리텔링에서는 역시 부족한 면이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잘 짜여졌지만,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깊이는 얕아진 측면이 있습니다. 그만큼 메인 스토리의 힘이 약해졌다고 해야할까요. 마니악한 스타일리쉬 액션으로는 100점짜리이지만, 그 이상을 보기에는 좀 아쉬운 느낌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작품은 2006년 제5회 동경 국제 아니메 어워드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지요.) 물론, 첫 연출임을 감안하면 대단하다고 하겠습니다. 40주년 기념이니만큼 타츠노코에서도 전폭적인 지원을 해서였지 않겠나 싶기도 하구요.

아쉬운 것은 타츠노코가 40주년 기념작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같은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일 겁니다. 타츠노코의 몰락 이후 아니메는 제대로 된 히어로물을 보기가 힘든 편인데요. (물론, 2000년대에도 타츠노코는 얏타맨 리메이크가 실사판 등으로 여전히 활동을 하긴 합니다만) 이제 50주년을 향해가는 타츠노코가 50주년 기념작에는 보다 더 멋진 히어로물을 들고 우리를 찾아와 주기를 기대해봅니다.

ⓒ 2005 Tatsunoko Pro. / 鴉 - KARAS 製作委員會



<참고 사이트>

[1] KARAS, Wikipedia Japan
[2] さとうけいいち, Wikipedia Japan
[3] Project K, 카라스 한국판 DVD 스페셜 피쳐
[4] 메이킹 카라스, 카라스 한국판 DVD 스페셜 피쳐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2005 Tatsunoko Pro. / 鴉 - KARAS 製作委員會에게 있습니다.



카라스 전편 일반판 박스세트 (12disc) - 10점
사토 케이치/미라지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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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畑事務所・TNHG


<스탭>

◈ 감독: 타카하타 이사오
◈ 원작: 타카하타 이사오
◈ 제작: 스튜디오 지브리


<시놉시스> 

마지역에서 다카가 숲과 스즈카 숲으로 나뉘어 살던 너구리들은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점차 숲이 없어지면서 존속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들 너구리들은 사람들이 안보일 때는 두발로 서서 다니며, 변신술과 같은 도술을 부릴 수 있는 이들이었지만, 자연을 바꿔버리는 인간들의 힘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평성 31년(평성, 일어로 헤이세이는 현재 일왕의 연호로 1988년부터 시작함. 평성 31년이면 서기로 2019년을 의미), 너구리들은 인간들에게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켜내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기로 한다. 인간들에 맞서기 위해 너구리 장로들이 내놓은 계획은 바로 오랫동안 금지되어 있던 변신술의 부활과 인간연구 5개년 계획이었는데...


지브리의 또하나의 심장, 다카하타 이사오의 걸작 판타지

튜디오 지브리하면 대게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와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들은 세심한 설정, 아름다운 배경, 서정적인 음악, 거대한 스케일, 신나는 모험, 반전의식과 환경주의가 담긴 메시지, 하늘을 향한 로망, 그리고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등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는 소재들로 가득하지요. 하지만, 스튜디오 지브리에는 미야자키에 버금가는 또하나의 거장이 자리하고 있음을 아니메를 많이 보아온 팬들이라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일본 아니메史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 감독 중의 한명, 다카하타 이사오가 있음을 말입니다.

사실, 다카하타 이사오는 스튜디오 지브리가 세워진 직후에는 연출이라는 자신의 본업보다는 제작 쪽에 주로 몸을 담으면서 지브리의 안살림을 챙겨왔습니다. 그러나 다카하타와 미야자키가 처음 조우한 60년대의 도에이 동화 시절을 지나 세계명작동화로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 닛폰 애니메이션 시절까지는 오히려 다카하타가 연출을 맡았고, 후배인 미야자키는 그를 도와 설정 등에 관여했던 적이 더 많았지요. 이 때까지 그가 연출했던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모험(1968)', '팬더와 아기팬더(1972)',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1974)', '엄마찾아 삼만리(1976)', '빨간머리 앤(1979)', '첼리스트 고슈(1982)' 등 주옥같은 작품들로 가득합니다. 흥행적인 면에서 미야자키가 앞서 있다고 하지만 작품의 네임밸류만 놓고 보자면 둘은 거의 쌍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이런 그가 스튜디오 지브리에 안착하면서부터는 자신의 작품 활동 수를 줄이고 후배인 미야자키를 전면에 내세운 체 자신은 스튜디오 내의 궂은 일을 도맡게 됩니다. 그의 필모그라피가 상당부분 세계명작동화에 기반한 현실적이고 소소한 드라마(물론, 데뷔작인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모험은 상당한 스케일의 판타지 드라마입니다만)였던 반면, 미야자키의 작품들은 대게 판타지적이고 모험이 가득한 이야기들이라는 점은 둘의 스타일이 같은 소스(세계 명작동화 스타일)에서 기반하고 있지만,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지브리에서 연출한 전작 '반딧불의 묘(1988)'와 '추억은 방울방울(1991)'은 이러한 현실주의적인 성격에 더해 그동안 선보였던 유럽식 배경을 벗어나 일본적인 색체를 물씬 풍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죠. 미야자키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이국의 모험'을 그린다면, 다카하타 감독은 '현실적이고 소소한 일상의 드라마'에 능숙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둘의 성격적 차이는 지브리의 작품 스펙트럼을 폭넓게 하는 하나의 강점이라고 할 수도 있구요.

그런 그가 94년 변신술을 사용하는 너구리가 주택개발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길 위험에 처하자 인간에 맞서 싸운다는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일상의 모험'을 다룬 재미있는 작품을 들고 나왔습니다. 바로 이번에 소개할 '헤이세이 너구리 대전쟁, 폼포코(이하 폼포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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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풍자하는 재주많고 유쾌한 너구리들의 생활

야기는 동경의 타마지역 신도시 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입니다. 주택공급 사업의 일환으로 산을 깎아 계단형태로 아파트 단지를 세우려는 개발계획이 발표되면서 두 무리로 나뉘어 서로 다투던 너구리 무리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너구리들은 두발로 서서 걸어다닐 수 있으며, 사람처럼 말도 하고, 심지어는 도술을 사용하여 자유자재로도 변신할 수 있는 영험한 동물이라는 것인데요. 이들은 인간들의 도시개발계획에 맞서 자신들의 터전을 지켜내고자 인간들을 파악하기 위한 인간연구계획과 한동안 금기시 해왔던 변신술을 부활시켜 인간들에 맞서기로 결정합니다. 실로 너구리들의 반란, 아니 너구리들의 역습인 것이죠.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너구리들이 절대 인간처럼 사악하거나 계산적이지 않은, 천성적으로 낙천적이며 놀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평화가 빼앗길 위기에 처한 너구리들이지만, 심각한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인간들을 향한 대응방식이 결정되자 바로 모든 일이 해결된 것처럼 기뻐하는 너구리들의 모습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한심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만, 천진스럽고 낙천적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누구를 해코지하거나 다치게 하려는 공격적인 방식보다는 '원만하게 잘 해결되면 그걸로 좋지 아니한가'라는 순진한 너구리들의 방식은 자신들에게 닥친 위기상황을 실로 유쾌하게 희화화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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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들 무리중에도 강경파가 있어 공사장에 진입하는 트럭을 도랑으로 떨어뜨리고 운전을 방해하여 절벽에 추락시키는 것과 같은 과격한 행동을 일삼지만, 이마저 낙천적인 그들의 성격 때문에 유야무야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들을 아예 멸망시켜버리자는 초강수를 계획하다가도 햄버거 때문에 인간들 일부는 살려둬야 한다며 웃음으로 마무리 지어버리는 너구리들의 모습은 가벼운 미소를 짓게 만들죠.

특히, 초반에 변신술을 익히는 그들의 일상은 타카하타 감독의 숨겨진 개그가 빛을 발하는 대목인데요. 변신술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해 하반신이나 상반신은 그대로 너구리인체로 변신하거나 아예 변신술을 하지 못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선생님 앞을 지나가는 어설픈 너구리들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폭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너구리들의 변신술은 게다가 한계가 있는데요. 막대한 체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변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태미너 드링크를 수시로 복용해야 한다는 재미있는 제한까지 둡니다. 인간으로 변신한 뒤 한계가 다다른 너구리들은 눈밑에 진한 다크써클이 생기면서 점차 지쳐가다가 체력이 다하면 너구리로 변하고 맙니다. 이러한 설정은 실로 디테일함과 재기가 넘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로 다채로운 너구리들의 매력은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너구리들의 모습으로 또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동물 너구리의 모습으로, 너구리들의 세계에서는 인간처럼 웃고 떠들고 걸어다니는 환상 속 너구리로, 패기를 잃어버린 비관적인 모습일 때는 더더욱 만화적인 형태의 너구리(기획단계에서 논의되었던 스기우리 시게루의 만화 '백팔백 너구리'의 너구리를 컨셉으로 한 것)로 변하면서 상황에 따라 다채롭게 변모하게 되는데요. 너구리들을 감정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이러한 연출방식은 리얼리즘과 판타지를 자유자재로 오고가는 이 작품의 성격과도 기막히게 맞아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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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변신하기 위한 너구리들의 특훈장면. 미숙한 너구리들의 변신장면은 기발한 웃음을 선사한다.


개발 지상주의를 향한 비판, 현실주의가 살아있는 동화

포코가 코믹 판타지의 형태를 띄고 있으면서도 비슷한 다른 작품들에 비해 돋보이는 것은 지브리의 테마인 환경주의를 보다 더 사실주의적인 관점에서 묘사했다는 것을 하나의 원인으로 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거대한 판타지의 세상 속에서 환경주의를 묘사했던 미야자키와는 달리, 다카하타 이사오는 변신 너구리들의 판타지스러운 세상을 사실주의가 가득한 인간의 세상 한 가운데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보다 더 이 메시지를 피부에 와닿게 하는 수법을 보이고 있는데요. 덕분에 이 작품은 판타지적인 연출이 돋보임에도 불구하고, 물과 기름처럼 판타지와 사실주의가 양립하는 기묘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만약, 이 작품이 변신 너구리들의 생활이 삭제된 체 인간의 관점에서 진행되었다면, 무분별한 개발사업으로 피폐해지는 자연의 모습과 이로 인해 살곳을 잃고 인간세상으로 먹을 것을 찾아나온 야생 너구리들의 이야기라는 지극히 다큐멘터리적인 이야기가 되었을 겁니다. 이 얼개를 유지하면서 여기에 생각하고 말하는 인간적인 너구리들을 등장시켜 다큐와 동화가 공존하는 보기드문 스타일의 풍자 판타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상반된 두 스타일을 한 작품에 융화시키는 것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로 두 가지 장르에 모두 정통한 연출가만이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모습일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타카하타 감독이기에 가능한 모습인 것이구요.

덕분에 지브리 작품의 거의 공통적인 테마라 할 수 있는 환경주의는 더더욱 설득력있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결말 역시 현실과 동화의 오묘한 결합을 보여주고 있지요. 결국, 너구리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지만, 그것은 배드 엔딩이라고 볼 수 많은 없습니다. 너구리들은 인간들로 변신하여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지요. 변신하지 못하는 너구리들은 그들대로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비록 쓰레기통을 뒤지고, 인간들에게 음식을 구걸하는 비참한 신세로 변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식의 결말은 낭만주의적인 미야자키의 스타일에 비해서는 굉장히 현실주의적인 관점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카하타의 작품은 미야자키의 작품에 비해 더 성숙한 느낌이 묻어나지요. 성숙함은 동심의 결여를 의미하지만, 폼포코에서는 유쾌한 너구리들로 인해 마냥 현실적이지만은 않습니다. 현실적인 드라마라는 레시피에 판타지라는 소스를 뿌린 맛나는 요리처럼 폼포코는 담백한 현실과 달콤한 판타지가 공존하며 인간(현실)과 자연(판타지)가 상생하기 위한 물음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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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 작품 최초로 실사장면이 삽입된 컷. 맛있는 튀김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타카하타 감독이 직접 지시를 한 장면으로, 촬영 후 튀김은 모두 스탭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는 후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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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 작품 최초로 CG를 도입한 도서관 장면. 이 장면은 작품 내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짧은 컷이었지만, 이를 위해 CG 경험이 전무한 지브리는 외주로 이 장면을 구현했다고 한다. 지브리에서 CG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작품은 3년후에 제작된 '원령공주(1997)'.
 

소소하고 잔잔한 서민적인 이야기 

포코는 다카하타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재기발랄함과 독특함이 넘쳐나는 작품입니다. 물론 '이웃의 야마다 군(1999)'과 같은 작품에서 다카하타 감독은 지브리적 스타일을 버리고 또다른 변신을 시도했지만, 사회성과 오락성을 절묘하게 조합시킨 본 작품의 매력은 역시 다카하타 감독의 작품 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브리로 옮겨와 연출한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친화도를 갖고 있기도 하구요. 한국의 극장에서 상영된 그의 유일한 작품으로, 반응도 좋았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일본적이면서도 향토적인 느낌을 가져다주는 굉장히 서민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왜색이라는 부정적인 시각과 맞물릴 수도 있지만, 유쾌하고 우화적이면서 소시민적인 취향에 잘맞는 이 작품의 느낌은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에 더 많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작품의 결말은 유쾌하면서도 해피엔딩이 아니며, 실패했음에도 슬픈 엔딩이 아닌 여운이 남는 결말을 보여주었지만, 전형적인 결말이었기에 해학적이면서도 기발했던 시작에 비해서는 김이 빠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기승전결이 굉장히 뚜렷한 드라마틱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소소하고 잔잔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도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과 대비되는 타카하타 감독만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영화는 드라마틱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이 작품 역시 영화같은 드라마틱함이 아닌 잔잔한 물결과 같은 선택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아쉬운 것은 미야자키 감독보다도 6살 연상인 타카하타 감독의 신작을 이제는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일 겁니다. 미야자키의 대를 이을 인재가 없는 것 역시 아쉬운 일이지만, 잔잔하고 서민적인 휴머니스트 거장의 대를 이을 전수자가 없다는 것 역시 지금의 아니메에서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 畑事務所・TNHG

클라이막스의 요괴대작전에는 지브리의 인기 캐릭터들인 토토로와 키키, 붉은 돼지가 특별출연 해주셨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타카하타 감독의 서비스라고나 할까.


<참고 사이트>

[1] 헤이세이 너구리 전쟁 폼포코 (1994) by 엘로스
[2] 비극적인 환경파괴의 연대기,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by 김봉석, 씨네21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畑事務所・TNHG에게 있습니다.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애니메이션 영화 리뷰 모아요~]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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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 FOCUS Films LLC.


<스탭>

◈ 감독: 쉐인 에이커
◈ 원작: 쉐인 에이커
◈ 제작: 포커스 필름


<시놉시스> 

기계문명이 극한으로 치달은 인간세상은, 자아를 갖고 폭주한 기계에 의해 전화의 불길에 휩싸인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모두 몰살당하고, 인간들이 사라진 세상은 음산하고 황량한 폐허로 변하고... 전화의 불길이 극한에 다다를 무렵, 한 과학자가 손수 만든 헝겊인형에 자신의 영혼을 나누기 시작한다. 과학자의 영혼을 나누어 받은 헝겊인형들은 생명을 부여 받고 각자의 개성을 지닌 개체로 다시 태어난다. 마지막 헝겊인형에 혼을 불어넣고 마침내 숨을 거두는 과학자. 깨어난 인형은 처음 보는 세상에 당황하게 된다. 과연 무엇을 위해 이들은 태어난 것인가. 마지막 헝겊 인형의 등에는 나인(9)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재능있는 젊은 감독의 경이롭고 창의적인 비주얼

독 쉐인 에이커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장편화한 '나인(9)'은, 2005년도 오스카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작품을 독특한 감성의 소유자 팀 버튼 감독과, '원티드'를 통해 홍콩 느와르 이상의 화려한 액션연출을 선보인 티무르 베르맘베토프가 제작을 지원하여 장편애니메이션으로 다시 태어난 작품입니다. 이 라인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젊은 신예감독의 독창적인 비주얼과, 괴기스럽고 동화적인 팀 버튼의 감성, 그리고 티무르 베르맘베토프의 스타일리쉬함이 가미된 멋진 작품이라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실제로 트레일러로 보았던 나인(9)은 단편영화의 괴이하고 독특한 비주얼에 더하여 스케일과 다이나믹함, 그리고 디스토피아스러운 배경을 잘 살린 멋진 미술로 전세계 영화팬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던 작품이기도 하지요. 

특히, 나인(9)의 세계는 그 독특함이나 기묘함에 있어서 제작자로 나선 팀 버튼의 컬러와 상당히 궁합이 잘맞는 느낌입니다. 괴기스러우면서도 동화적인 느낌을 즐겨 보여주는 독특한 감성의 소유자 팀 버튼은 자신만의 컬러가 너무나 확고하기에 타인의 작품과 어울리기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나인(9)에서 둘의 궁합만큼은 정말 훌륭하지 않나 싶군요. 실제로 팀 버튼은 쉐인 에이커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정말 그의 취향에 딱 맞는 스타일인 것 같긴 합니다.

거친 헝겊조각을 꿰메고 엮어서 만든 나인(9)의 인형들은 괴기스럽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인형과는 다른 투박하고 요상한 외모로 인해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거부감을 주기도 합니다. 특히, CG의 세밀하고 차가운 질감으로 인해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데요. 이 작품은 이런 괴상한 비주얼로 인해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연령가(G)가 아닌 초등학생 이상 관람가(PG) 등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황량하게 변해버린 세상과 폐허가 된 도시, 헝겊인형들을 습격하는 각종 기계 등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갖추었을 뿐 그 외형은 성인영화에 가까운 비주얼과 형식을 취하고 있죠.

티무르 베르맘베토프가 자칫 지루하고 거북할 수 있는 이 괴상한 동화이야기에 스타일을 부여해준 것도 큰 힘이 아니었나 합니다. 특히 뮤직비디오의 화려함을 연상시키는 영상미학이 이 독특한 작품에 가미되면서 이야기는 활극 형태의 모양새를 갖춰갑니다. 원티드에서도 이미 보여주었던 긴박한 액션 시퀀스 사이 사이에 펼쳐지는 슬로비디오 모션이 이번 나인(9)에서도 등장해주고 있는데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역시 티무르 감독이 조언을 해주었으리라 짐작이 되는 대목이지요. 덕분에 일부 액션 시퀀스는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박진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 손만한 크기의 인형들과 기계들의 전투가 이토록 큰 스케일일지는 미쳐 몰랐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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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멸망의 근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9개의 작은 인형들

야기는 모든 인류가 멸망한 시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마지막 생존자인 과학자가 자신의 영혼을 헝겊인형에 나누어주고는 숨이 끊어지는 에필로그를 지나 마침내 9번째 헝겊인형이자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인(9)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지요. 나인(9)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낯선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자신에게 무슨 사명이 있는지, 무슨 일이 앞으로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말이죠. 유약하지만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는 나인(9)의 목소리는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 역할을 맡았던 일라이저 우드가 맡았습니다. 프로도 역시 평범한 호빗으로 거대한 난관을 뚫고 중간계를 세상에서 구해내게 되는데, 이런 전작의 캐릭터는 이 나인(9)과도 잘 맞는 느낌입니다. 단, 나인(9)의 경우에는 짧은 러닝타임 내에 유약한 모습을 벗어나 인류를 멸망시킨 기계와 대적해야한다는 시간 상의 제약이 따르는데요. 결국 이 러닝타임의 차이로 인해 주인공의 심경변화나 영웅적인 모습이 작품에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 되고 맙니다.

이 작품은 나인(9)외에도 1번부터 8번까지의 8개의 헝겊인형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두 각자의 특색과 성격을 지닌 인형들이죠. 고지식한 리더 원(1), 진실을 따라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혁신적인 2인자 투(2), 쌍동이 학자들로 귀여운 아이들을 연상시키는 쓰리(3)와 포(4), 투(2)를 따르는 소심하지만 따뜻한 기술자 파이브(5),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매번 같은 모양의 괴상한 그림만을 그리는 식스(6), 빠르고 강한 여전사 세븐(7), 힘 좋고 충직한 원(1)의 보디가드(8) 등 다채로운 캐릭터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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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9)을 구하려다 투(2)가 기계 괴물에게 끌려가면서 이야기는 마침내 서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원(1)의 고지식함에 투(2)를 구하기 위해 파이브(5)와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나인(9), 때마침 등장한 세븐(7)의 도움으로 투(2)를 구하는데 성공하지만, 실수로 잠들어 있던 인류멸망의 원인인 기계가 깨어납니다. 투(2)의 영혼을 흡수하는 거대한 기계, 다시 재앙은 시작되었고, 나인(9)은 세븐(7)들과 함께 자신들이 태어난 이유와 기계의 정체를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기계가 깨어나면서부터 작품의 호흡은 가빠지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는 정적이었다면 여기서부터는 화려한 CG 액션이 등장하면서 동적으로 변하게 되지요. 결국 이야기는 저 거대한 기계에 맞서 싸우는 자그마한 인형들의 사투로 귀결됩니다.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에서 절대악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지만 특이하게 생긴 작은 인형들이 그 주인공으로 나서면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창조적인 디자인과 멋진 미술은 이 색다름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지요. 굉장히 황폐한 느낌의 세상이지만 한차원 높은 비주얼로 인해 세련된 느낌마저 듭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멋진 비주얼에 비해 스토리는 밀도가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애초에 세상을 멸망시킨 거대한 기계와의 사투가 80분 남짓한 러닝타임에 모두 펼쳐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입니다. 세계관도 설명해야 하고 평범한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각성할 시간도 필요한데다가 지루함을 상쇄시키기 위한 멋진 액션장면들도 들어가야 하니까요. 시리즈물로 나가거나 최소 2시간 정도의 러닝타임으로 제작되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느낌이지 않을까 싶은 아쉬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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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비주얼과 평이한 줄거리 사이에서 범작으로 그친 작품

국, 이 스토리의 미흡함은 작품의 발목을 잡아 당초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작품을 완결 짓습니다. 아,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편입니다. 너무 깔끔해서 오히려 평이하다고 느껴지지요. 경이로운 비주얼에 걸맞지 않은 너무 평범한 이야기는 작품의 감동을 반감시키는 악재로 작용합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 작품의 러닝타임이 좀 더 길었더라면,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거리가 첨가되었다면 이 아쉬운 감정은 놀라운 감동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장편을 연출해본 경험이 없는 신예 감독이기에 아무래도 (걸출한 제작자들 사이에서) 휘둘린 감이 있지 않나 추측도 해보는데요. 오히려 모든 스토리를 완결 지으려는 욕심을 벌이고 구상한 얘기의 일부분만을 이야기하는 선에서 끝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어 납치당한 투(2)를 구출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 극적으로 그를 구해내면서 그동안에 겪는 갖가지 모험들과 세상이 이렇게 변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정도까지만 말이죠.

하지만, 이 작품은 분명 그 재기넘치고 신선했던 원래 단편 정도의 감흥은 못주었더라도 애니메이션으로서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경이로운 비주얼이라는 표현이 조금은 과할지는 몰라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비주얼만으로도 이 작품의 가치는 충분하지요. 비록 미흡한 스토리이지만 비주얼의 가치를 완벽히 훼손시킬 정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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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2009 FOCUS Films LLC.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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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탭>

◈ 감독: 故 콘 사토시
◈ 원작: 타케우치 요시카즈
◈ 제작: 매드하우스


<시놉시스> 

여성 3인조 아이돌 그룹 챰(Cham). 팬들이 모인 야외 콘서트 장에서 인기곡을 부르고 난 후, 리더이자 팀내 최고의 인기인인 키리고에 미마가 팬들 앞에서 챰을 나와 독립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소속사 사장인 타도코로로부터 수명이 짧은 아이돌 가수에서 생명력이 긴 연기자로서의 변신을 제안받았기 때문이다. 챰의 매니저로 한 때 가수 출신이기도 했던 루미는 이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지만, 미마는 이미 연기자로의 전업을 결심한 상태이다.

비록 인기 아이돌 가수라고는 하지만, 연기자로서의 변신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몇 마디 대사가 고작인 미니 시리즈의 역할은 기대 이하로 미미했고, 연기자 변신을 시도한 그녀에 대한 팬들의 원망인 듯 팩스를 통해 저주를 퍼붓는 문구가 보내지더니, 급기야 화약이 담긴 팬레터가 보내져와 소속사 사장이 부상을 입기도 한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팬들이 자주 언급하는 미마의 방이 궁금했던 미마는 그것이 팬 사이트의 이름인 것을 알고 루미의 도움을 받아 익숙하지 않은 솜씨로 컴퓨터를 사용해 미마의 방에 접속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팬 사이트가 있다는 것을 안 미마는 신기해 하지만, 이내 사이트에 쓰여진 일기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심히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쉽지 않은 연기자의 길, 팬들의 원성과 스스로에 대한 불확실 속에 점점 멀어지는 아이돌의 과거, 누군가 자신을 엿보고 있는 것 같은 불안감, 조금씩 한계에 다다르던 어느날 미마에게 수정된 시나리오가 도착한다. 그것은 그녀의 강간 장면이 추가된 새로운 대본이었는데...


새내기 감독의 새내기 답지 않은 작품

'펙트 블루(1998)'는 2010년 8월 24일 췌장암으로 인해 급작스럽게 세상을 하직한 故 콘 사토시 감독의 유작이자 그의 첫번째 감독 연출작이기도 한 작품입니다. 첫 연출작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출과 섬세한 묘사, 그리고 완성도 높은 비주얼로 인해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특히, 불안정한 주인공의 심리와 더불어 펼쳐지는 현실과 환상의 중첩은 오로지 콘 사토시만이 해낼 수 있는 전매특허로, 아니메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지요.

애초에 실사영화로 제작을 모색하고 있던 타케우치 요시카즈의 소설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중도에 아니메로 제작방향을 선회하게 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특히, 사이코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는 작품의 소재가 실사영화에서는 식상할 정도로 자주 등장한 소재이지만, 만화영화에서는 거의 전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은 기회와 위기를 모두 지닌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는데요. 아무도 해본 적이 없기에 독창적이고 독특한 작품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아니메 팬들에게는 생소한 이 장르가 과연 얼마나 어필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아니메로 사이코 스릴러를 얼마만큼 실감나게 표현할 것인지가 큰 걸림돌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매드하우스(애니메이션 제작)와 오토모 가츠히로(스페셜 어드바이저)가 힘을 실어주면서 작품은 서서히 구색을 갖춰가기 시작합니다. 감독으로는 당시 연출경력이 전무한 콘 사토시가 선임되는데요, 콘 사토시는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코믹스를 연재하던 중 매드하우스에 입사하여 '노인 Z(1991)', '패트레이버 2(1993)'를 거쳐 '메모리즈(1995)'의 첫번째 에피소드 '마그네틱 로즈'에서 각본과 배경미술감독을 역임하면서 이제 막 주목받는 애니메이터로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이 모험적인 프로젝트에 연출 새내기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이 작품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기존의 감독이 아닌 참신한 새 인물을 물색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작품 개봉 후 성공적인 결정이었음이 밝혀지게 됩니다. 콘 사토시는 원작을 넘어서는 완성도로 그 기대와 도전에 부응하게 됩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 1997 Madhouse Inc · REX Entertainment Co., LTD.



스토커와 연쇄살인, 평범한 소재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기 아이돌에서 연기자로서의 변신을 꾀하는 주인공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토커 팬에 의해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낱낱이 노출되고, 아이돌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노출씬을 찍으면서 정체성에 방황하게 되는 와중에 벌어지는 주변인물들의 연쇄살인은 이렇게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해보았을 때도 알 수 있듯이 평범하고 단선적인 전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수없는 실사영화를 통해 비슷한 소재의 이야기가 다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외국의 드라마에서도 몇번은 다루어졌을 법한 소재이기도 하지요. 실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미마가 출연하는 미니 시리즈 역시 이러한 사이코 스릴러를 다룬 작품이라는 것도 왠지 모를 소재의 평범함을 느끼게 해주는 측면도 있습니다. 통속극에서조차 자주 쓰이는 소재, 그러나 이 평범한 소재는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전혀 다른 옷을 입고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극의 초반은 연기자로 노선을 변경한 아이돌 미마의 갈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서서히 현실의 무게를 느끼는 미마, 그리고 그로 인해 조금씩 스트레스와 신경쇠약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은 앞으로 벌어질 파국의 전조를 알리고 있지요. 게다가 발단을 지나 전개 부분에 이르르면,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이 낱낱이 드러나는 팬 사이트 '미마의 방'의 등장으로 인해 불안감이 더더욱 가중됩니다. 98년도에는 아무래도 인터넷의 보급이 지금만큼 활성화 되어있지 않은 시대, 이러한 시대에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연예인의 인신공격이나 악성댓글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꽤 선구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마의 방의 등장으로 인해 그녀의 불안감이 고조되었을 무렵, 마침내 위기가 시작됩니다. 아이돌인 그녀를 이용해 시청률을 높여볼 심산으로 극본가가 강간 장면을 극에 넣게 되는 것이죠. 거기에 사진가에 의해 전라 누드 촬영까지 강요당하면서, 그녀의 혼란은 극에 달하고 그와 함께 그녀를 괴롭히는 스토커의 분노 역시 극한을 치닫게 됩니다. 비로소 시작된 연쇄살인, 사이코 스릴러 치고는 느즈막히 첫번째 사건이 발발하는 이 작품은 이렇게 초반에는 미마의 심리묘사와 주변상황의 전달에 상당히 치중하는 편입니다. 극 초반부터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강렬한 자극을 주는 여타의 사이코 스릴러에 비해서는 상당히 드라마적인 전개이기도 한데요. 그러나, 이러한 심도 있는 심리묘사를 통해 이 작품은 만화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실사영화를 넘어서는 내러티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리무중의 연쇄 살인사건은 미마의 환상 속에서도 벌어집니다. 환상이 깨어나면 똑같은 사건이 현실에서 발생하는 것이죠. 게다가 극의 다른 한쪽에서는 누군가가 미마의 흉내를 내기 시작합니다. 미마는 환각에 빠진 상태에서 살인을 벌인 것일까요? 그렇다면 미마를 괴롭히는 그 스토커와 팬 사이트 미마의 방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게다가 미마의 흉내를 내는 정체불명의 또다른 미마까지 등장하게 되면서 이 인물이 과연 현실의 인물인지 아니면 미마의 환상인지에 대한 인물인지에 대한 미스테리까지 끼어듭니다. 위기를 지나 절정으로 흘러갈수록 이야기의 호흡은 거칠어지고 수수께끼는 또다른 수수께끼를 낳게 됩니다.

ⓒ 1997 Madhouse Inc · REX Entertainment Co., LTD.



환상과 현실의 혼란스러운 중첩, 방황하는 주인공과 빠져드는 관객

작품이 단선적인 전개임에도 불구하고 복잡다단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콘 사토시의 전매특허라고 부를 수 있는 현실과 환상의 교차편집에 있습니다. 특히 그것이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환상인지를 관객 뿐만 아니라 주인공마저도 혼란스럽게 해버림으로써 이야기 내내 관객은 이 복잡한 이야기의 실타래가 어디서 풀어질까하는 궁금증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것은 극도의 혼란한 정신세계에 빠진 미마 역시 마찬가지지요. 미마의 스트레스와 불안감이 가중될수록 현실과 환상은 더더욱 농밀하게 서로 얽히기 시작합니다.

또한, 극중에서 미마가 출연하게 되는 사이코 스릴러 드라마 '더블 바인드'마저 스토리의 전개가 미마의 현실과 유사해지면서 환상과 현실 속에서 혼란해하는 미마의 모습과 드라마 속에서의 미마의 모습이 다시 한 번 뒤섞인 절묘한 오버래핑을 보여줍니다. 마치 세 개의 이야기가 서로 물리고 물리는 뱀과 같은 형상, 이 현실과 환상의 이중 삼중 구조는 얼마전 극장 개봉을 시작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인셉션(2010)'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는데요. 물론, 그동안 다양한 아니메에서 현실과 환상을 오고가는 이야기와 연출이 선보인 것이 사실입니다만,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이 정신을 차리면 현실 속, 정신을 들고 보니 꿈 속 혹은 드라마 촬영 속이라는 퍼펙트 블루의 이야기 전개는 확실히 인셉션의 그것과도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교차편집은 후일 그의 또다른 대표작인 '천년여우(2001)'에서는 더더욱 능숙해지고 복잡해지며, TV 시리즈인 '망상대리인(2004)'에서는 더더욱 난해하게 얽히고 섥히게 됩니다만, 그 정도면에 있어서는 퍼펙트 블루가 적당하다고 보여지며, 천년여우가 가장 최적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망상대리인이나 파프리카에 이르르면 식상해짐과 동시에 지나칠 정도로 복잡한 교차 편집에 살짝 거부감을 느낄 정도랄까요.

이렇게 적당한 현실과 환상의 혼합은 작품의 단조로움을 복잡하고 치밀한 스릴러로 탈바꿈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와 맞물려 실사영화 이상의 미스테리함을 관객에게 선사하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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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의 사실감과 만화영화의 상상력을 성공적으로 융합한 작품

펙트 블루는 만화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와 감정 표현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만화영화의 형태를 빌린 실사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동안 수많은 성인용 만화영화(물론, 야하다는 의미가 아닌 진정한 성인용이라는 의미에서, 물론 이 작품에서는 강간장면이나 누드씬과 같은 에로틱한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가 아니메에 등장해 왔지만, 이토록 완벽한 성인 만화영화는 몇몇 감독의 만들어내는 작품 외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토록 사실적인 만화영화를 만들면서 만화영화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환상적인 묘사를 기가 막히게 혼합시킴으로써 작품의 단조로움과 식상함을 극적으로 상쇄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만화적인 묘사가 만화영화다운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몽환적이고 미스테리한 느낌만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만화영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만화영화적인 상상력이 작품에 적극적으로 표현되지만 리얼리티와 현실감이 사그라들지 않는 콘 감독의 스타일은 이후에도 그의 작품에서 여러번 보여지게 되지요.

비록 콘 사토시 감독의 새로운 작품을 더는 볼 수가 없게 되었지만, 분명 퍼펙트 블루는 다양한 작품들이 넘쳐나는 아니메 속에서도 기억될만한 독특한 작품일 것입니다. 독창적인 이 연출 스타일이 그만의 스타일로 끝나버린 것이 아쉽기만 할 뿐이네요.

ⓒ 1997 Madhouse Inc · REX Entertainment Co., LTD.



<참고 사이트>

[1] 퍼펙트 블루, 베스트 아니메
[2] パーフェクトブルー, Wikipedia Japan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1997 Madhouse Inc · REX Entertainment Co., LTD.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이달의 TTB 리뷰 2010년 9월차에 선정된 글입니다. 


퍼펙트 블루 : 아웃케이스 없음 - 10점
곤 사토시 감독/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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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 SUMMER WARS FILM PARTNERS.


<스탭>

◈ 감독: 호소다 마모루
◈ 각본: 오쿠데라 사토코
◈ 제작: 매드하우스


<시놉시스> 

학 올림피아드에 나갈 뻔(?)할 정도로 발군의 수학 실력을 가지고 있는 코이소 켄지는 고교 2년생으로, 동급생인 사쿠마와 함께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아르바이트에 한창이다. 그 아르바이트란, 요즘 일상생활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각광받고 있는 가상현실 시스템인 OZ의 시스템 유지보수에 관계된 일이다. 컴퓨터로 한창 작업 중이던 어느날, 같은 학교의 히로인이자 교내 남학생들의 우상인 나츠키 선배가 찾아와 한가지 아르바이를 제안한다. 그 아르바이트란 다름이 아니라 나츠키와 함께 시골에 있는 그녀의 외증조 할머니 댁에 내려갔다 오는 것.

평소에 그녀를 흠모하고 있던 켄지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하지만, 이 아르바이트에는 한가지 숨겨진 내막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켄지가 나츠키의 약혼녀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 게다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동경대 출신의 유학생으로 위장을 해야 한단다. 신랑감을 데려오라는 엄격한 외증조 할머니의 엄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나츠키가 궁여지책 끝에 생각해낸 아이디어에 켄지는 울며 겨자먹기로 남친 행세를 하게 되고... 당황한 켄지를 그녀의 가족들이 따뜻하게 맞이해준다.

나츠키의 고향집에서의 정감 넘치는(?) 저녁이 끝난 어느날 밤, 잠을 못이루는 켄지에게 갑자기 문자메시지 하나가 전송된다.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엄청난 수의 배열을 본 켄지는 특유의 수학실력을 발휘하여 암호를 풀고, 답장을 날리게 된다. 뿌듯해하며 잠드는 켄지.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는데...


호소다 마모루의 연타석 홈런, 시대가 바뀌기 시작하다

2007년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평단과 관객의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한 호소다 마모루 감독. 그의 등장은 단순하게 인기 감독 한명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섬세하고 감각있는 연출과 호소력 있는 드라마는 일본 아니메가 그토록 찾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뒤를 이을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그가 시달녀 연출 직전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연출 중에 있었고, 도쿠마 서점의 경연진 교체와 함께 석연치 않은 강판을 당했으며, 시달녀를 통해 스튜디오 지브리와 '게드 전기'에 멋지게 한방(물론, 개봉관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게드 전기'가 흥행에 있어서는 훨씬 큰 수익을 거둬들였지만, 팬과 평단은 만장일치로 호소다 감독에게 손을 들어줌)을 먹였던 터인지라 그 의의는 남달랐다고 하겠습니다. 바로 미야자키의 바톤을 이어받은 새로운 후계자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 말입니다.

이러한 팬들의 과도한 기대 속에 그로부터 2년 뒤 호소다 마모루의 두번째 작품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여름 극장가에 잘 어울릴 것 같은 한여름의 전원을 배경으로 한 가족들의 이야기와, 젊은 세대에게 익숙한 휴대폰과 컴퓨터, 그리고 네트워크와 가상현실이 어우러진 디지털 세상 OZ를 결합한 새로운 이야기의 제목은 바로 '썸머 워즈' 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썸머 워즈는 다시금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연출력을 팬들에게 확인시키면서 그를 여름 극장가의 기대주이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리를 메워줄 인물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확인시켜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섬세한 연출, 서정성과 어드벤쳐를 동시에 보여주는 다양한 재미는 확실히 미야자키의 전매특허 중 하나라고 하겠는데요. 과연 썸머워즈를 통해 그는 진정 아니메를 대표하는 연출가로 떠오를 수 있을까요?

ⓒ 2009 SUMMER WARS FILM PARTNERS.



정감어린 현실과 마법같은 가상현실을 오가는 두가지 맛의 이야기

교 2년생이며, 평범한 일본의 핵가족 환경 속에 살아오던 순진한 소년 켄지가 수많은 친족들이 한 집에 모인 나츠키의 외증조 할머니 사카에 여사댁으로 들어오는 여정은 그에게 있어서 문화적 충격입니다. 켄지는 아버지가 지방출장으로 집을 비우신데다가, 어머니마저 일에 바쁜 전형적인 맞벌이 가족의 외동 아들로, 이시대 청소년들의 외로움을 대변하고 있는 소년인데요. 그런 소년에게 있어서 수많은 친척들과 아이들이 모인 왁자지껄한 나츠키의 가족은 시끄럽지만 정신없고 어색하지만 한편으로는 푸근한 느낌입니다. 즉, 사람냄새가 난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푸근해지는 느낌을 받는 것은 켄지만이 아닙니다.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나츠키네 식구들 역시 이 외증조 할머니 댁의 귀경을 통해 안식과 휴식을 얻는 셈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새 잊고 사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의 소중함을 이 작품은 밑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마지막에 큰 힘을 발휘하는 것 역시 바로 이 가족의 힘인 것이죠.

작품의 또다른 배경이자 가상현실 시스템인 OZ는 가족적인 현실의 분위기와는 또다른 세상입니다. 가상현실에 접속하여 일상생활에 관계된 모든 것을 해갈 수 있는 OZ 시스템은 미래의 편리한 세상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런 세상이 가져다 줄 몇 가지 부작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보안의 문제가 생겼을 경우 속절없이 무너지는 시스템의 취약성은 네트워크 시스템의 크나큰 약점이기도 하지요. 특히, 근래 등장한 스마트폰과 함께 우리들 역시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으로의 진화를 꿈꾸고 있습니다만, 그와 동시에 보안이 뚫리는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수많은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심각한 사태가 올 수 있다는 아킬레스 건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바로 디지털/네트워크라는 신기술에 대한 부작용을 이 작품에서는 또다른 이슈로 다루고 있지요.

이 작품은 이처럼 현대인에게 너무도 익숙한 생활패턴과 생활아이템이 자칫 위기에 닥쳤을 경우, 이것을 고전적인 가족간의 단합과 아날로그적인 감성으로 해결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현실과 가상현실의 두 갈래 이야기로 나누어 진행하는 것이죠. 처음에는 별개였던 두 이야기는 조금씩 같은 점을 향해 치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현실 속의 대가족은 마침내 가상현실에서도 서로 힘을 합치게 됩니다. 마치 팀 플레이를 하듯이 말입니다.

ⓒ 2009 SUMMER WARS FILM PARTNERS.



가족 드라마스러운 전개, 맛깔스럽되 특별하지는 않은 이야기

지의 실수로 인해 뚫린 보안시스템과 속칭 '러브머신'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해킹 프로그램이 전 세계의 시스템을 마비시키자, 이것은 곧 현실상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더불어 사카에 여사의 90세 생신을 준비하고 있는 나츠키 네 식구들에게는 또다른 문제가 닥치죠. 90세 생신 축하를 위해 많은 이벤트를 준비했건만 가문의 남자들이 OZ에서 기인한 각종 사회 기반 시설의 오동작으로 인해 회사를 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도 시스템이 마비되고, 곳곳에 교통 정체가 시작되며, 거짓 화제경보가 여기저기 발생합니다. 시스템의 거의 모든 것을 OZ에 맡기고 있는 작품의 세계에서 OZ의 이상은 곧 세계의 이상입니다.

게다가 이 '러브머신'이라 불리는 해킹 AI가 다름 아닌 나츠키네 가족들의 일원이면서도 식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불청객 와비스케란 인물이 만들어낸 프로그램이란 것이 알려지면서 유서깊은 '진노우치 가문'인 나츠키의 가족들은 할머니의 생신잔치가 잘못되는 것 이상의 위기에 닥치게 됩니다. 할머니의 장녀이자 집안의 안주인이기도 한 마리코 여사만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사카에 여사의 생신 준비가 차질이 생기는 것에 대한 걱정만 할 뿐이지요. 그러나, 할머니의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OZ에 연결한 건강상태 전송 시스템이 OZ의 고장과 더불어 이상 상황을 발생시키면서 할머니의 신변에도 위협이 닥치게 됩니다. 이제 OZ의 문제는 나츠키들에게도 커다란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죠.

OZ에서 벌어진 전 세계적인 위협과, 진노우치 가문에 닥친 가족적인 갈등은 결국 온 가족과 이방인이었던 켄지가 힘을 합쳐 해결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묘사되는 가상현실의 방대한 모습과 컴퓨터 아바타 간의 힘있는 액션씬은 전체적인 작품의 분위기와는 또 다른 흥미로움을 보여줍니다. 스케일 큰 가상세계와 아바타들간의 격투 외에도 현실에서 나츠키 가족들이 보여주는 일상의 디테일도 역시 압권이죠. 이러한 것들이 아무래도 호소다 감독을 미야자키의 후계자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하나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호소다 감독의 그것은 좀 더 코믹하고 젊은 세대다운 생명력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대미를 장식하는 인공위성 궤도 수정하기 씬은 상당한 긴박감을 선사하는데요. 이런 수준의 연출은 확실히 범상한 연출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갈등을 풀어나가는 모습과 결과는 시달녀에 비해 구태의연하고 여운이 없어 평범한 느낌을 줍니다. 가족 드라마로서 멋진 전개와 깔끔한 결말을 보여주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너무 전형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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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다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준 작품

실 속의 이야기와 가상현실의 이야기를 적절히 섞어가며 가족의 힘, 그리고 가치를 보여준 썸머워즈는 확실히 높은 완성도를 가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호소다 감독 역시 그저 그런 범재라고 할 수 없음은 확실한 것 같구요. 분명 앞으로의 여름 극장가를 책임질 차세대 주자인 동시에, 아니메를 이끌어갈 차세대 기대주 중 하나라고 해도 무리가 없는 듯 합니다. 능숙하고 세심한 디테일과 그 속에서 보여지는 개그는 몹시 만화적이면서도 인간적입니다. 그와 함께 CG를 통해 보여준 발군의 액션감각 역시 앞으로 연출할 장르의 스펙트럼이 넓을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하구요.

반면, 이번 썸머워즈는 가족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 자체가 상당히 익숙한 전개인데다가 캐릭터의 매력 또한 시달녀만 못하여 전반적으로 임팩트가 그리 크지 못한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히로인인 나츠키의 경우는 클라이막스 이전까지 그닥 큰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구요. 켄지 역시 워낙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개성 넘치는 다양한 가족에게 둘러 쌓이면서 주인공임에도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대가족 덕분에 캐릭터 별로 비중을 두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일까요. 비중을 떠나 주연급 캐릭터의 입체적인 성격 부족은 다소 진부한 극의 스토리를 더 평면적으로 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썸머워즈는 호소다 감독의 장기와 범상치 않은 연출가로서의 자질을 보여준 작품인 동시에 호소다 감독의 한계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연출가로서는 훌륭한 실력과 감각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스토리 텔링에서는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고 할까나요. 하지만 아직 호소다 감독의 성장은 진행중이기에 여전히 우리는 그의 차기작을 기대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다음에는 얼마만큼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줄까요?

ⓒ 2009 SUMMER WARS FILM PARTNERS.


아차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 이번 썸머워즈에 등장하는 가상현실 시스템인 OZ는 공교롭게도 현재 LG 텔레콤의 모바일 인터넷 서비스인 OZ와 같은 이름입니다. 둘다 모바일과 인터넷을 사용하여 현실에서 하던 여러가지 일을 대신해주는 편의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군요.

근래 많은 아니메가 그러하듯 이번 썸머워즈에서도 다수의 한글이 작 중에 등장합니다. OZ의 시스템에서 등장하는 세계의 각종 언어에 한글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예전에 비해 한국에 대한 인식이 나아진 것일까요. 적어도 요즘의 아니메가 과거와는 달리 세계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음은 분명한 듯 해보입니다.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2009 SUMMER WARS FILM PARTNERS.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이주의 TTB 리뷰 2010년 8월차에 선정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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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NES / STRANGERS 2007


<스탭>

◈ 감독: 안도 마사히로
◈ 원작: 본즈
◈ 제작: 본즈


<시놉시스> 

승려인 쇼안과 함께 명나라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고아 소년 코타로. 의지할 데라곤 명나라에서 자신을 거두어준 승려 쇼안과 애견 토비마루 밖에 없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코타로는 명나라에서부터 계속 정체불명의 무리들에게 쫓기게 되고 가까스로 탈출한 쇼안과 코타로는 만각사에서 만나자는 말과 함께 난리통에 헤어지고 만다.

한편, 정체불명의 일행들이 전란의 일본 중 지방의 소국인 이카이케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일본인 안내자들의 인도를 받는 그들은 대부분 중국인들로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무예를 지닌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무리의 산적들이 이 일행을 습격하지만 벽안의 검사 한 명에게 모두 처참하게 도륙되고 만다. 명나라 황제의 밀명을 받은 이들은 과연 이곳을 무슨 목적으로 방문한 것일까.

쇼안과 헤어져 만각사로 향하는 힘든 여정에 들어선 코타로는 이카이케 지방의 폐허가 된 절에서 숨어지내던 도중 한 떠돌이 무사와 만나게 된다. 그를 경계하는 코타로, 하지만 충견 토비마루는 그에게 경계심을 들어내기는 커녕 자신의 생선을 그에게 나눠주려 한다. 어색한 식사가 시작될 무렵, 갑작스레 영주의 군사들이 코타로를 습격하는데...


움직이는 그림의 장점을 십분 살린 하드 액션물

한칼에 생명을 거는 승부를 펼치는 사무라이 액션은 현란한 손기술과 발기술을 선보이는 중국의 무협과는 다르게 찰나에 승부가 정해지는 긴박함과 강렬한 스피드가 특징인 무협장르입니다. 영화와 드라마, 만화영화로 일본에서 숱하게 사용된 이 인기장르를 이번에는 장인정신으로 투철한 아니메 제작사 본즈에서 도전하게 되었는데요. 카우보이 비밥에서 스파이크가 보여준 부드러운 절권도 액션과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엘릭형제가 선보인 날랜 액션이 이번에는 사무라이와 중국무사들의 처절한 액션으로 변주되었습니다. 움직이는 역동적인 샷의 연출에 있어서 그동안 높은 완성도를 보여왔던 본즈의 작화진은 확실히 액션물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믿음직스러운 느낌입니다.

근래의 아니메들은 대부분 이쁘고 화려한 색감으로 그려져 보기에는 뛰어난 퀄리티를 자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움직임이 많은 컷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빈약해진 움직임을 커버하기 위해 다른 화면 효과나 뱅크샷을 부여하는 스타일이 많아진 편입니다. 이러한 작화 스타일은 이쁘장한 캐릭터 디자인과 함께 상당한 공을 들인 작화로 인해 시청자들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좋은 평가를 주기가 그렇습니다. CG라도 쓰지 않는 이상에야 동화(움직이는 그림) 컷을 잘 사용하는 작품에 비하여 다이나믹한 씬의 구현도 완성도가 떨어지구요.

예전에 리미티드 아니메들이 풀 애니메이션에 비해 부족한 프레임 수로 인해 상대적으로 낮은 퀄리티, 또는 부자연스런 움직임을 보였던 것처럼, 요즈음의 아니메들은 발달된 CG 기술과 이쁘장하고 깔끔한 그림체로 얼핏 보기에는 퀄리티가 높은 듯 싶지만, 이전의 리미티드 기법을 십분 활용한 아니메들이 보여줬던 다이나믹함이나 역동적인 화면구성에 있어서 만족할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작품의 소재가 학원 로맨스물 등에 편중되어 있는 장르적 한계에도 원인이 있긴 합니다만.)

이런 면에 이 작품 스트레인저는 아니메로 보여줄 수 있는 다이나믹한 화면구성과 움직임을 멋지게 살린 액션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BONES / STRANGERS 2007



쾌속의 액션, 검과 검이 부딪히는 BONES의 액션 집대성

앞서도 말했듯이 이 작품은 본즈의 스탭진들이 이전작에서 선보였던 완성도 높은 액션 연출을 십분 살린 작품입니다. 감독을 맡았던 안도 마사히로가 모 인터뷰에서 소회한 바와 같이 작품에 대해 굉장히 열정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본즈의 스탭진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작화감독인 이토 요시유키의 경우에는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의 어시스턴트 작화감독이나 강철의 연금술사의 작화감독 등을 맡았던 경험이 있는지라 액션 시퀀스나 장면 연출에서 앞의 두 작품과의 유사성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작품의 경우에는 애초에 프로듀서였던 미나미 마사히코나 감독인 안노 마사히로 등이 처음부터 칼싸움이라는 소재를 아니메에서 한 번 멋지게 재현해보자는 생각을 갖고 출발한 작품이었기에 액션의 묘사는 근래의 작품들 중에서도 발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출진의 의도를 이미 여러 작품에서 멋진 액션씬을 구현해 낸 본즈의 스탭진들이 훌륭하게 구현해냈구요. 한국판 DVD 북클릿에 포함된 액션원화집에는 이들의 멋진 액션 작화가 만들어지는 흔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움직임이 많은 액션작품이지만, 풀애니메이션이 아닌 리미티드 아니메의 특성을 십분 살린 작품입니다. 순식간에 결판이 나는 쾌속의 검투장면은 유려하고 부드러운 풀 프레임의 만화영화보다는 스피드함이 살아나는 리미티드 아니메 기법이 더 어울리는 것 같네요. 특히, 완급을 조절하면서 빠른 움직임과 정지 컷을 번갈아 배치하면서 적절하고 멋진 템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흩날리는 빗발이나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찰나에 승부가 결정되는 긴박하고 속도감 넘치는 칼싸움에서 멋진 소품으로서 작용하고 있구요. 검에 깊게 베여 피가 흩뿌려지는 씬 또한 강렬한 칼싸움의 여운을 화면 가득 진하게 베이게 합니다. 모든 배경과 소품이 마치 한몸이듯이 액션장면으로 승화되는 것 같군요.

흔히들 그렇듯 이러한 액션작품에서 주인공은 다수의 실력자들과 맞딱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이번 스트레인저에서도 예외는 아니지요. 명나라에서 온 아홉명의 무사들이 이번 작품에서 주인공 나나시가 맞서게 되는 최강의 실력자들입니다. 뻔하면서도 항상 긴장감을 갖게 하는 이 설정은 이번 작품에 이르러 몇가지 설정에 의해 긴장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인공이 어떠한 이유로 인하여 다시는 검을 뽑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과, 이들에게 잡혀간 또다른 주인공인 어린 소년 코타로는 당장 이들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해져 있다는 것,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제약들은 주인공을 옥죄며,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 올립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최강의 실력자들과 맞서 나나시는 코타로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인가. 작품은 이러한 테마 속에서 검과 검이 부딛히는 사나이들의 쾌속의 액션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게 됩니다.

ⓒ BONES / STRANGERS 2007



스토리는 그저 거들 뿐. 액션물에 최적화된 단순한 스토리

사실, 이 작품의 기획의도 자체가 칼싸움이라는 소재를 아니메로 멋지게 표현해보자는 것이었던 것 만큼, 작품의 내용적 깊이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쫓기는 소년을 구해주고 그의 경호원이 되는 과거를 숨긴 사무라이와 명나라에서 넘어온 정체불명의 무인들, 그리고 그들에게서 무언가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지방영주와 그들의 부하는 상당히 전형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뻔한 구도라고 할 수 있는데요. 감독 자신이 B급이라고 밝힌 이 작품은 이런 단순한 구도를 액션이라는 장르에 최적화된 스토리텔링으로 승화시킵니다. 액션에 최적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나리오의 부실함을 드러내며 낮은 완성도를 보여준 영화나 아니메들을 우리는 종종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확실히 그런 면에서 그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지요. 

영화로서는 시덥지 않은 각본이 아니메로 이식되면 종종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준 적이 있기도 한데요. 그것이 만화영화 특유의 판타지적인 연출이나 신기의 작화기술에 근거했음을 비춰볼 때, CG로 무장된 근래의 영화와 만화영화의 차이는 점점 좁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와는 별개로 이 작품의 이야기 구조는 아니메로 구현되든, 영화로 구현되든 액션연출의 완성도만 갖춰진다면 무난하게 전개될 구조이기도 하죠.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 이야기는 영화든 만화영화든 간에 큰 임팩트를 주기보다는 '괜찮네' 정도의 평범한 호응을 이끌어낼만한 작품이라는 소리일 수도 있겠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그 정도의 호응을 주었다고 볼 수 있구요.

그러나, 평범한 이야기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소년과 충견, 그리고 소년을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뽑지 않았던 칼을 뽑고 실력자들과 맞서는 한 사나이이의 우정어린 이야기는 담백한 맛이 있습니다. 별 깊이는 없지만, 드라마틱함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군요. 이러한 느낌은 야무지고 버릇 없지만 외로운 소년의 연기를 무난히 해낸 신예 치넨 유리와 조용하고 과묵한 사무라이의 연기를 잘 소화해낸 아이돌 가수 출신 겸 배우인 나가세 토모야 덕에 잘 살아나는 느낌입니다. 명나라 무사들의 경우에도 중국어를 직접 구사하면서 좀 더 현실감이 느껴졌구요. 특히, 엄청난 실력을 가진 벽안의 무사 라로우를 연기한 야마데라 코이치의 경우에는 직접 중국어를 배워 대사를 연기하는 열성을 보여주며, 이야기에 많은 생명력을 부여해주고 있습니다.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몹시 빈약한 이 작품에서 영주의 딸인 공주로 잠깐 출연하는 성우는 사카마토 마야가 맡았군요. 안타깝게도 이번 작품에서는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담겨진 노래를 들어볼 수는 없습니다.

ⓒ BONES / STRANGERS 2007



웰메이드 B급 액션물, 본즈가 만들면 다르다

보통 유명하지 않은 배우와 저예산의 제작비로 제작되는 메이저 영화가 아닌 소규모, 혹은 독립제작사들의 영화를 B급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본즈라는 제작사의 네임밸류와 캐스팅 등을 살펴볼 때 만화영화로서 이 작품을 B급이라고 불러야할지는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B급이라 불리기에는 여기저기에서 높은 완성도와 함께 능숙한 모습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물론 작화적 완성도에 있어서는 톱클래스의 퀄리티를 보여주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어찌 보면 조금 힘을 빼고 만든 듯한 느낌도 들구요.

하지만, 과거 사무라이 액션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영상미학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린 타로 감독의 85년작 카무이의 검이나 그의 제자로 사무라이 액션을 자신만의 미학적 스타일로 승화시킨 하드코어의 대가 카와지리 요시아키 감독의 93년작 수병위인풍첩이 갖고 있는 네임밸류 정도는 얻지 못하고 있는 작품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높은 완성도이지만, 명작이라고 불리기에는 여러 면에서 혁신적인 모습은 부족한 작품이기도 하지요. 웰메이드 B급이라고 한다면 괜찮을까요.

하지만, 근래처럼 CG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아니메 제작현실에서 2D와 수작업을 통해 멋진 영상을 보여준 점에서 스트레인저가 가진 의의는 남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애니메이션의 기본을 지키면서도 재미를 놓치지 않은 작품이라고 하고 싶군요. 다만, 모쪼록 이런 작품들의 계속 만들어질 수 있는 여건이 지속되기를 희망해 보기도 합니다. 본즈의 작품들이 줄줄이 시청률 잡기나 극장흥행에 성공적이지 못한 모습이나, 그와 비슷한 작품 성향을 추구하는 제작사들이 고전하는 모습은 아니메 팬으로서는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 BONES / STRANGERS 2007



<참고 사이트 및 자료>

[1] ストレンヂア 無皇刃譚, Wikipedia Japan
[2] 『ストレンヂア』安藤真裕監督インタビュー第1回 あんなぷるは野武士の集団に見えた, WEB アニメスタイル
[3] 한국판 DVD 커멘터리
[4] 한국판 DVD 북클릿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BONES/ストレンヂア製作委員会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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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 TOKIKAKE Film Partners


<스탭>

◈ 감독: 호소다 마모루
◈ 원작: 쯔쯔이 야스타카의 소설 '시간을 달리는 소녀'
◈ 제작: 매드하우스


<시놉시스> 

고등학교 2학년의 명랑 여학생 콘노 마코토. 같은 반의 남학생 츠다 코스케, 마미야 치아키는 같이 야구를 즐기는 절친한 친구들이다. 두 명의 남자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고교생활을 보내는 그녀의 오늘 일진은 사고와 이변의 연속이다. 지친 마음으로 쪽지시험지를 선생님의 책상에 갖다놓으러 과학실을 들린 마코토, 칠판에 누군가가 쓴 'Time waits for no one'이라는 문구가 오늘따라 신경 쓰인다. 과학실에 시험지를 놓고 나가려는 찰나, 아무도 없던 실험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조심스레 과학실을 둘러보던 마코토는 무언가 자그마한 물체가 땅바닥에 굴러가는 것을 보게 된다. 떨어진 물건을 주우려는 찰나, 갑작스레 나타난 정체불명의 그림자에 놀란 마코토는 뒤로 넘어지게 되고, 그 순간 갑자기 주위가 돌변하면서 과학실은 순식간에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향하여 마구 달리기 시작한다. 마코토는 이상한 나라로 빨려가는 것일까? 두려움과 놀라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찰나, 시간과 공간은 다시 과학실로 돌아오고 마코토는 땅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 쳐지고 마는데...



청춘의 시간을 소재로 한 발랄한 시간여행

2007년 여름 개봉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이하 시달녀)'는 많이들 아시다시피 1965년작인 쯔쯔이 야스타카의 동명 인기소설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원작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동안 드라마와 영화로 수없이 리메이크 되어온 인기작이기도 한데요, 원작을 접해본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시달녀의 극장판 아니메는 원작을 애니메이션화한 것이 아닌 원작과는 다른 20년 뒤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스핀오프 작품이 되겠습니다. 원작의 주인공이었던 카즈코는 이번 작품에서 주인공 소녀인 콘노 마코토의 이모로서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군요. 원작의 팬들에게는 살짝 아쉬운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임 리프(Time leap), 즉 시간을 건너뛰는 능력을 가지게 된 한 소녀의 변해버린 일상과 변해가는 인간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소소한 갈등, 사춘기 소녀의 번민과 성장을 담은 이 작품은 10대 소년, 소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답게 무거운 분위기보다는 전반적으로 밝고 경쾌한 느낌으로 진행됩니다. 방황하는 10대의 고뇌보다는 평범한 소녀가 얻게된 특별한 능력과 경험을 통해 삶에 대한 깨달음, 시간과 관계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아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러한 테마를 소녀 특유의 발랄함과 코믹함, 참신한 구도와 카메라 워크, 그리고 유려한 배경과 서정적인 음악으로 마무리해가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10대 소년, 소녀들 뿐만 아니라 온 가족들이 보기에도 무난한 가족 영화의 성격을 띈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 2006 TOKIKAKE Film Partners



코믹하고 능란한 화면연출, 호소다의 역습

연출을 맡은 호소다 마모루 감독은 시달녀와 2009년 연출하게 되는 섬머워즈로 인해 이제는 여름 극장가의 차세대 기대주로 큰 명성을 얻고 있지만, 작품을 맡을 당시만 하더라도 디지몬 어드벤쳐 극장판과 원피스 극장판 등을 연출하면서 이제 막 연출계에 발을 내민 신예에 불과했더랬습니다. 그로서는 바로 이 시달녀를 통해 비로소 연출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요. 특히, 그는 시달녀의 연출을 전후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바로, 스튜디오 지브리의 차세대 기대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감독으로 파격 기용된 것이 그것이라 하겠는데요. 

'귀를 기울이면'을 통해 놀라운 역량을 보여주었던 지브리의 늦깍이 기대주 콘도 요시후미 감독의 갑작스런 요절 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뒤를 이을 차세대 주자를 발굴하기 위해 애쓰던 스튜디오 지브리는 사내에서의 인재 발굴 외에 외부 인재의 영입 역시 고려하게 됩니다. 그리고 호소다 감독이 그 기대주로 낙점되어 당시 스튜디오 지브리의 차기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연출을 담당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조롭던 호소다 감독의 앞날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스폰서이기도 한 도쿠마 서점의 경영진 교체로 위기를 맞게 됩니다. 새로운 경영진은 작업중이던 호소다 감독을 도중에 강판시키고 미야자키 감독을 내세우게 되는데요. 한마디로 호소다 감독은 새 경영진이 내세운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 후, 프리랜서로 전전하던 그가 지브리의 라이벌 격이라 할 수 있는 매드하우스에서 맡게 된 작품이 바로 이 시달녀 인 것입니다. (당시 새로운 경영진은 검증이 안된 신인의 작품보다는 검증된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이 아무래도 비즈니스적으로 안전하다 판단한 것 같습니다. 대외적인 네임밸류도 있고 말이죠.)

호소다 감독을 버렸던 지브리의 선택은 이 시달녀를 통해 잘못된 판단이었음이 사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섬세하고 사실적인 일상의 묘사와 잔잔하고 코믹넘치는 이야기들은 지브리가 이제껏 많은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서정적이고 세심한 묘사에 비견될 만큼 정교함을 자랑합니다. 게다가 굳이 아니메 팬이나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쉽고 재미있게 접할만큼 진입장벽이 낮은 대중적인 코드를 갖고 있구요. 아니메의 특징을 십분 살리되 모든 관객층에게 어필할 수 있으며, 잔잔한 감동마저 선사하는 이 작품은 미야자키의 스케일은 갖고 있지 못했지만, 섬세함과 서정성, 코믹과 감동을 모두 표현하면서 이제까지 지브리의 작품들이 보여주었던 스타일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배경미술로 참여한 야마모토 니죠와 오가 카즈오 등이 지브리의 수많은 작품에 참여한 베테랑 미술감독이었다는 점에서 지브리의 작품들과도 어느 정도 비슷한 분위기를 보여준 것도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구요.)

비록 최초 개봉관 수가 일본에서도 다섯 군데 밖에 안되었던 지라 같은 시기에 개봉한 게드 전기에게 흥행성적에 있어서는 비록 밀렸지만, 평단과 관객의 호응은 게드 전기를 능가하는 이변을 연출하며, 호소다 감독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됩니다. 

마침내 호소다의 역습이 시작된 것입니다.

ⓒ 2006 TOKIKAKE Film Partners



시간을 되돌리는 것의 무거움, 소녀의 성장

이야기는 시간을 건너뛰는 능력을 갖게 된 평범한 10대 소녀의 유쾌한 '능력 남용하기'로 시작됩니다. 우연치 않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여고생 마코토는 처음에는 난데없이 갖게 된 능력에 반신반의했으나, 곧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이를 요긴(?)하게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먹고 싶은 요리를 먹고 다시 그 전으로 되돌아와 요리를 또 먹거나, 노래방에서 신나게 논 다음 시간을 되돌려 다시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는 등...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갖게 된 주인공과 이를 악용하려는 악당들과의 쫓고 쫓기는 모험 정도로 진행되어도 좋을 법한 이 소재는 이렇게 평범하고 소박한 시간 되돌리기 놀이에 열중하는 소녀의 이야기 속에서 관객들에게 잔잔한 재미와 웃음을 선사합니다. 매번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서 전력으로 뛰어 시간을 건넌 다음 땅바닥에 데굴데굴 구르는 마코토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 하는데요, (미리 겪었기에) 앞으로 닥칠 위험이나 사고를 예측하는 마코토의 한 발 앞선 행동은 이런 관객들의 웃음처럼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세상 사는 걱정은 이제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잘못되면 다시 시간을 되돌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아무 문제도 없을 것만 같았던 그녀의 일상은 절친한 친구인 치아키의 사랑 고백으로 서서히 그늘이 지게 됩니다. 치아키의 고백이 부담스러운 그녀는 으례 그렇듯 시간을 되돌립니다. 그러나 되돌려도 되돌려도 치아키의 고백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요즘 방영하고 있는 KBS 2TV의 개그 콘서트의 한 프로처럼 말이죠. (어쩌면 이 프로가 시달녀에게 영감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그녀는 아예 시간을 더 건너뛰어 그와의 자리를 피해버리고 맙니다.

피하고 싶은 일들을 위해 시간을 되돌리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모인 카즈코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간을 되돌렸다면 누군가는 손해를 봤지 않았겠냐'는 말처럼 그녀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바꿔버린 시간 속에서 누군가는 상처입고, 누군가는 인생이 바뀌어 버리는 것을 그녀는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죠. 경험 속에서 성장해가는 우리들처럼 소녀는 조금씩 삶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하게 됩니다.

치아키의 고백을 없던 것으로 하면서 쿄스케와 치아키, 그리고 마코토의 우정은 (그녀가 바랬던 것처럼) 예전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서먹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치아키는 같은 반에서 그를 짝사랑 해오던 마코토의 친구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쿄스케마저 흠모하는 여학생이 나타나게 되지요.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의 무게를 깨달은 마코토는 이번에는 친구인 쿄스케와 그를 짝사랑하는 후배 카호를 위해 시간을 되돌립니다, 그와 그녀가 잘되기 위해 몇번씩 몇번씩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되돌린 시간마저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었습니다. 전혀 다른 방향에서 터지기 시작하는 비극, 소녀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치아키의 고백을 피하던 자신과 멀어지는 치아키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진짜 마음 역시 알아버리게 됩니다.

ⓒ 2006 TOKIKAKE Film Partners



Time waits for no one...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마코토가 시간을 건너뛰는 능력을 얻게 되는 과학실의 칠판에 써져 있던 이 문구는 작품의 전체적인 주제를 표현하는 문구입니다. 아름답고 즐거웠던 누군가의 학창시절, 젊은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시간들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향수 뿐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중요성까지 의미합니다. 시간의 소중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다시 되돌려 느끼려 해도 느낄 수가 없는 인생의 한번 뿐인 경험인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처럼 되돌릴 수 있다해도 이제 다 알아버린 우리에게 시간은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습니다. 되돌아왔다 해도 과거의 시간은 우리를 떠나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우연하게 얻게 된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과 그로 인한 사건 속에서 소녀는 (당연하게도)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성장하게 되지요. 작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젊은 시절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동시에, 자신의 행동이 가져다 주는 결과의 무거움 역시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한층 더 성장한 소녀의 미래를 기대하게 됩니다. 치아키와의 이별 후 새로운 친구들과의 야구 시합에서 보여준 달라진 그녀의 모습은 바로 성장하는 그녀의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감독의 의도 같기도 합니다.

친구라고만 생각해던 그의 고백을 피하기 위해 무의미하게 시간을 되돌리면서 시간의 무거움을 느낀 그녀는 동시에 치아키를 향한 자신의 마음 역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지우기 위해 시간을 되돌린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도 깨닫게 되지요. 시간을 되돌리기 전 자신에게 수줍게 고백하던 그 강가에서 그를 떠나보내며 우는 소녀의 대성통곡은 자신에 대한 회한과 그에 대한 애틋함이 뒤섞여 보는 사람을 짠하게 해줍니다. 소소한 소녀의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마코토와 마찬가지로 시간의 무게, 추억의 아름다움,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는 깊은 마음씨를 역시 깨닫게 되는 것이죠.

이 작품으로 호소다 감독의 장래를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섬머워즈를 통해 그 가능성이 단발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분명 이 작품은 수많은 일본 아니메 중에서도 자신만의 매력을 맘껏 보여준 맛깔스러운 작품인 것 만큼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그녀는, 제목과는 달리 더 이상 달리지 않을까요. 라스트에서 보여준 그녀의 전력질주처럼 아마도 그녀는 시간을 되돌리는 과거로의 질주가 아닌 미래를 향한 힘찬 스퍼트를 내딛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우리도.

ⓒ 2006 TOKIKAKE Film Partners



<참고 사이트>

[1] The Girl Who Leapt Through Time (movie), Anime News Network
[2] 時をかける少女_(アニメ映画), Wikipedia Japan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2006 TOKIKAKE Film Partners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이주의 영화리뷰 2010년 6월 3주차에 선정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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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의 '기신병단 (1993), 애매한 역사관과 복고주의가 뒤섞인 스팀펑크 액션물'을 본 블로그로 옮긴 글입니다.

기신병단 DVD 표지© 山田正紀 / 中央公論社 / PIONEER LDC, INC


<스탭>

◈ 감독: 이시야마 타카아키
◈ 원작: 야마다 마사키  
◈ 제작: 은하제국, 파이오니어 LDC


<시놉시스>

2차 세계대전 중, 미지의 외계인과의 전투를 대비하여 통칭 ‘모듈’을 만든 다카무라 박사는 이를 노리는 관동군 대좌 신타이와 외계인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는다. 미녀 의사 마리아 브라운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다카무라 박사의 아들 다이시는 ‘모듈’을 간직한 체 거리의 아이들과 살아가지만, 전란의 소용돌이는 다이시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한편, 마리아의 쌍동이 언니 에바 브라운은 모듈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다카무라 박사가 남긴 모듈을 되찾기 위해 관동군에 협력하고 있었다. 마리아라고 믿었던 에바에게 아이들은 모듈을 빼앗기게 되고, 바로 그 시각 하늘에서는 보라색 빛과 함께 외계인들의 침입이 시작된다. 관동군과 외계인의 위협 속에 절체절명 놓인 다이시, 바로 그 순간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거대로봇 뇌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1. 작품이 만들어지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기신병단은 90년대 초반 일본 아니메의 침체기가 시작되면서 유행처럼 번졌던 복고주의 작품 중 하나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여 복고적 그림 스타일, 스팀펑크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메카와 중량감 넘치는 액션씬, 그리고 유럽과 중국 등 전세계를 누비는 방대한 스케일의 로봇 액션물입니다.  

7~80년대 대호황기를 누리던 일본경제의 거품이 꺼지면서 경기침체가 발생하던 90년대 초반, 아니메 시장 역시 시장의 포화, 컨텐츠의 부족이라는 업계의 상황이 맞물려 시장이 축소되기 시작했는데, 결국 이것은 흥행이 보장되는 그만그만한 작품들이 일색인 상황으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시기가 90년대 초반인 것이죠. 시기적 특성상 90년대 초반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을만한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보다는 이전에 인기를 끌었던 스타일이 다시 주목받는 복고주의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새로이 만들어 낼 컨텐츠의 부족도 있었겠지만, 호황기였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일본인들의 정서도 어느 정도 반영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복고주의 열풍으로 이전에 흥행했던 작품들을 리메이크 하거나 그 속편을 만드는 사례가 늘어나게 됩니다. ‘바벨 2세(1992)’, ‘철인 28호 FX(1992)’, ‘마크로스2(1992)’, ‘마크로스7(1994)’, 마크로스 플러스(1994)’, ‘플란다스의 개(1992)’, ‘신조인간 캐산(1993)’, ‘요술공주 밍키(1993)’, ‘더티 페어 플래쉬(1994)’, ‘독수리 5형제(1994)’ 등은 모두 이런 복고주의와 리메이크의 바람을 타고 제작된 7~80년대의 인기작들이었죠. 이러한 현상은 95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등장하기 전까지 일본 아니메를 지배하며 아니메 업계에 기나긴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삽입그림1

90년대 복고주의 대표작 '자이언트 로보'(좌).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원작으로 90년대 복고주의 리메이크 작품 중에서는 단연코 걸출한 작품. 70년대의 초히트작 '독수리 5형제'를 우메츠 야스오미가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감독으로 새롭게 리메이크 한 '독수리 5형제(1994)'(우).


2. 거대한 스케일의 복고주의 메카 애니메이션

'기신병단'은 90년대 초반 복고주의 열풍의 선두에 섰던 작품 중 하나인 '자이언트 로보(1991)'와 여러 곳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나리오나 연출방식은 전혀 다르지만, 이 두 작품은 그동안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해오던 늘씬하고 멋진 로봇이 아닌, 육중하고 투박한 스타일의 로봇이 등장하여 건담으로 대표되던 80년대의 리얼로봇과는 다른 또다른 기계적인 리얼함을 보여줍니다.

각각 뇌신, 풍신, 용신으로 불리는 ‘기신병단’의 로봇들은 전차, 비행기, 그리고 잠수함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지금까지 일본 만화영화에서 익히 보아오던 인간형 로봇과는 달리 병기나 기계의 느낌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중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걸맞게 수동으로 엔진을 돌리고 발전기가 최고치에 다다를 때 동작하는 로봇의 모습은 와다 카오루의 웅장한 음악과 어울려 고풍스러운 멋을 보여주고 있구요. 그 외에도 ‘기신병단’의 이동수단인 중갑 기관차, 대형 프로펠러 수송기, 뇌신의 조종사 바레이오가 운전하는 클래식 자동차 소백룡 등, 작품 내내 복고주의적 향수를 일으키는 메카들은 시종일관 클래식한 멋스러움, 즉 스팀펑크 스타일의 멋을 선사합니다. 

스케일이 큰 연출 역시 이 작품의 또다른 매력입니다. ‘자이언트 로보’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나라를 누비면서 벌어지는 주인공들의 모험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 배경과 어울려 스펙타클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거기에 수상 프로펠러 비행기에서 연인을 향해 던지는 스카프 씬이라든지,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 같은 아시아 어느 도시의 한 복판에서 펼쳐지는 자동차 추격씬 등은 스팀펑크스러운 메카 액션씬 사이사이에 펼쳐지면서 감칠 맛나는 애피타이저의 역할을 해줍니다. 

그 와중에도 만화적인 연출(뇌신의 조종사 바레이오의 자동차 액션씬이나 주인공 다이시의 자전거 씬 등에서 보이는 함축과 과장의 대표적 만화적 연출)을 잃지 않음으로 인해 저 옛날의 ‘바벨 2세’나 ‘사이보그 009’ 등과 같은 모험 아니메에서 느끼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라고 할까요. 이렇게 작화와 연출은 아동용 스타일인데 비해 작품의 배경이나 이야기의 전개는 성인들도 보기에 무난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전체관람가로 아주 적절한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대중적인 오락물로서의 요건을 거의 다 갖춘 셈인 것이지요.

삽입그림2© 山田正紀 / 中央公論社 / PIONEER LDC, INC

기신병단의 주역메카들. 좌측부터 뇌신(육전형), 풍신(공중형), 용신(수중형). 조종사가 탑승하면 바로 눈에 불이 들어오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비사들이 각 부의 엔진을 일일이 수동으로 가동시키고 엔진예열이 끝나야지만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3. 침략행위가 슬그머니 축소되어 버린 안스러운 설정

(최고의 수준은 아니지만) 좋은 퀄리티의 작화와 음악, 멋진 메카들의 박진감 넘치는 액션, 그리고 큰 스케일의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기신병단’은 한가지 점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작품이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왜곡하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1화의 시작부터 일본의 대륙침략에 대해 격한 논쟁을 벌이는 엑스트라들의 대사는 현대 일본인들의 침략전쟁에 대한 사죄일까요. 아니면, 일본의 역사적 오점을 미화하는 모습일까요. 

혹자는 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한 작품이라고 이 작품을 평하기도 하지만, 제 생각은 선대의 잘못을 후대에서 잘 각색하여 이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반성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도록 최대로 미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치스, 관동군, 에일리언과 싸우는 ‘기신병단’의 멤버의 중요인물들이 모두 일본인이라는 것은 특히나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든 지워버리고 싶은 일본인의 욕구의 발로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그러나, ‘기신병단’은 분명 기존의 일본의 침략전쟁의 역사를 다룬 작품들 중에서는 꽤나 이 부분에 있어서 인정을 하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침략전쟁의 주원인을 나치스로 돌리고, 일본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관동군이라는 일개 군대에 그 잘못을 모두 돌려버리는 점이라든지, 관동군의 주 활동무대가 만주, 즉 실제 침탈을 행했던 아시아 쪽이 아닌 유럽 쪽에 치중되어 있는 것, 나치스와 에일리언의 입장은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언급은 빠진 체 관동군의 주요 간부인 신카이 대령과 그의 몇몇 부하들만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한계 역시 보이고 있지만 말입니다. (자기네 손으로 자기네 나라를 악으로 규정 짓기에는 아직 마음에 준비가 필요했었던 때였나 봅니다. 지금도 안되긴 하지만.) 

☞ 다음 단락은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거기에 재미있는 사실은 작품 종반에 등장하는 원폭투하에 관한 이야기 인데, 최초의 원폭은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되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원폭투하라는 역사적 사실은 등장시키되 이를 일본이 아닌 나치스의 영토에 위치한 에일리언 기지에 투하하려 함으로써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 원폭이라는 단어 역시 사용하지 않고 폭탄의 코드네임인 ‘글래머 걸’이라는 명칭만 사용합니다. ‘글래머 걸’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코드네임이죠.)

삽입그림3© 山田正紀 / 中央公論社 / PIONEER LDC, INC

몇가지 확인하고 싶은 대사들. 그림(좌)의 '만주를 꿈의 대룩이라고 믿고...'에서 꿈이란 것은 일본의 대륙진출을 의미하는 것일까? / 그림(중앙)의 '쓸데 없는 싸움이...'이라는 대사는 한국과 중국의 침략에 대한 일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일까? '뿐이잖아'라는 대사가 몹시 거슬린다. / 마지막 그림(우)의 대사에는 아까와는 달리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들어있지만, 피해를 입힌 상대국에 대한 사죄의 마음은 찾아볼 길이 없다.

삽입그림4© 山田正紀 / 中央公論社 / PIONEER LDC, INC

또 다른 의문들. 그림(좌)의 '하얼빈에는 731 특제 자백제...'라는 대사는 731 부대의 존재와 인체실험을 인정하는 발언? / 그림(중앙)의 나치스의 동맹이었음을 시사하는 '동맹국인 일본도 그 작전에 참가해줘야 겠다.'는 작품 내에서 몇 안되는 일본의 전쟁 참여사실 인정발언. / 그림(우)의 '나치와 일본은 동맹국이다.'라는 대사 역시 좀전의 대사에 이어 다시금 2차 대전의 전범국이었음을 인정하는 대사. 작품의 종반부에 이르러 제작진도 일본의 침략전쟁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듯. 


4. 껄끄러운 역사적 배경이 깔린 흥미로운 스팀펑크 액션?

재미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역사적 상황과 애매한 일본의 태도가 엿보인 이 작품 ‘기신병단’은 우리나라에서도 몇 번씩 케이블 TV를 통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영어로 된 오프닝/엔딩 크레딧을 보니 수출 염두에 두었거나, 후에 수출이 된 작품이라는 생각은 듭니다만.) 제 경우에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태평양 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이런 팩션(Fact[사실]+Fiction[소설]의 합성어)류의 작품의 경우, 그 사실 왜곡 여부에 있어서 가끔 논란의 여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태평양 전쟁 같은 근대의 역사의 경우에는 일본의 침탈을 받은 나라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가 심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겠죠.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서 중국의 대한 언급은 가급적 회피하고 있으며, 한국의 이야기는 아예 배제가 되어 있습니다.

일본 아니메의 경우는 현재 정상적인 루트가 아닌 P2P와 불법복제물을 통해 상당부분이 우리에게 접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성인이 된 분들이나,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아직 역사의식이 정립되지 않은 팬들에게는 이렇게 노골적인 왜곡이 아닌 가벼운 왜곡과 역사적 진실이 슬그머니 덮여진 작품이 오히려 안 좋은 건 아닐까 하는 노파심도 가져 봅니다. 

삽입그림5© 山田正紀 / 中央公論社 / PIONEER LDC, INC

그 외의 재미있는 것들. 그림(좌)에 등장하는 알버트 박사는 외모도 그렇고 바이얼린을 즐겨 연주하는 데다가 E=mc²라는 공식까지 쓴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이 양반은 과연 누구일까요? / 그림(중앙)의 대사  '글래머 걸은 나치스의 에일리언 기지에 투하하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라는 대사. 원폭투하는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만화영화로 재현되기에도 너무 쓰라린 현실인 듯 싶다. 투하장소를 슬그머니 바꿔주시는 제작진... / 그림(우)의 일본 대신 원폭에 맞을 위기에 처한 에이리언들. 명색이 에일리언인데 따발총이 왠말인가. 보통 따발총이라면 소련제 기관단총을 말하는 것인데... 그럼 혹시, 댁들 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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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에 작성했던 '애니메이션 제작진행 쿠로미짱 (2001), 웃음 속에 담겨진 애니메이터들의 꿈과 애환'을 티스토리 블로그로 옮기면서 내용과 구성을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쿠로미짱 1편 DVD 표지© 2001 Daichi Akitaroh,Watanabe Hajime,Yumeta Company


<스탭>

◈ 감독/스토리보드: 다이치 아키타로
◈ 제작: 유메타 컴퍼니


<시놉시스>

고교시절 보았던 애니메이션 '루이몬드 3세'에 감명 받아 애니메이터의 길로 들어서 오오구로 미키코(이하 쿠로미). 애니메이션 학교를 졸업하고 소원하던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제작부 직원으로 입사한다. 두근거리는 첫출근, 회사에는 아무도 안보이고... 갑자기 나타난 선임자는 현재 방송예정인 '타임 져니스' 2화의 원화작업이 거의 진행이 안되어 펑크 위기에 처해 있다는 다급한 말을 남긴 체 병원으로 실려간다. 

이제 제작부원은 쿠로미 하나뿐... 보이지도 않는 애니메이터들과 코 앞까지 닥친 마감시간... 쿠로미는 과연 첫 작품을 성공적으로 제작해낼 수 있을 것인가.


1. 개그물의 대가, 다이치 아키타로가 만들다!

'원츄!'라는 초 유행어를 탄생시킨 엽기 아니메 '멋지다 마사루(1998)'. 작품을 보신 분은 없으시더라도 인터넷 상에서 덧글로 한번쯤 '원츄'를 써보신 분들은 많이 있으실 겁니다. 우스다 쿄스케의 동명만화인 '멋지다 마사루'를 멋지게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냈던 희대(?)의 연출가는 바로 다이치 아키타로 감독이라는 인물인데요. 이번에 리뷰할 작품은 바로 이 다이치 아키타로 감독의 OVA 아니메 '애니메이션 제작진행 쿠로미짱(이하 쿠로미짱)'이 되겠습니다.

다이치 아키타로, 일본 아니메 감독 중에 그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구사하는 감독이 있을까요.(사실 꽤 있기는 한데, 강조 차원에서...) '리리카 SOS(1995)'과 같은 미소녀 변신물에서부터 '멋지다 마사루(1998)', '괴짜가족(1998)'과 같은 초엽기 개그물을 거쳐 '지금 거기에 있는 나(1999)'와 같은 진지하고 어두운 작품을 넘어 '후르츠 바스켓(2001)'과 같은 순정 멜로물까지. 그가 연출을 맡은 장르는 극과 극을 달릴 정도로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게다가 연출을 맡은 작품들을 모두 자신의 독특한 연출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그의 역량은 실로 대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아키타로 감독은 일본을 대표하는 메이저 아니메 감독은 아닙니다만, 그만의 특색이자 장기인 탁월한 개그 연출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순정물, 시대물에서부터 진지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작품에 걸맞는 연출을 해낸다는 점에서 저는 그를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대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 급의 작품을 제작하는 감독이라기 보다는 저예산의 감동과 웃음을 선사하는 작품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감독이라고나 할까요.

이 작품 '쿠로미짱' 역시 그런 아키타로 감독의 역량을 십분 살려 그의 전매특허인 정신산란하면서도 변화무쌍한 개그를 작품 전반에 걸친 메인 소스로 곁들이면서 그 내용물은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는 드라마로 조리해냄으로써,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는 보기드문 완성도의 작품을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포복절도할 개그와 잔잔한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는 이러한 그의 연출은 같은 해 제작된 순정물 '후르츠 바스켓'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2. 개그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다채롭고 입체적인 캐릭터들의 이야기

숨쉴 틈 없이 변화하는 작화(물론 작화붕괴가 아닙니다.)와 정신 사납도록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캐릭터들의 움직임은 작품의 분위기를 갑자기 끌어올렸다가 느닷없이 내리깔았다 하면서 시종일관 시청자들의 정신을 어지럽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지러움이 어지러움에 끝나지 않고 폭소를 선사한다는 점에서 이 어지러움이 감독의 연출방식으로 일정한 스타일과 리듬감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진지한 씬에서는 진지한 극화체로 묘사되다가 순식간에 개그적인 상황과 엽기스러운 캐릭터로 변모하는 장면전환과 작화변신은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말처럼 시시각각 자유자재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변화하는 것에 그치지고 않고 그 순간순간 웃음과 즐거움을 선사해 줍니다.

쿠로미짱 캡쳐사진 1© 2001 Daichi Akitaroh,Watanabe Hajime,Yumeta Company

변화무쌍하게 변신하는 캐릭터들의 얼굴. 아키타로 감독에게 걸리면 제 아무리 초절정 미녀라도 엽기괴물로 성형된다.

거기에 제각각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 점 또한 이 작품을 왁자지껄하면서도 이야기거리가 많은 작품으로 만들어 줍니다. 신입사원으로 세상의 찌든 때가 덜 묻은 순수하고 의욕이 넘치는 주인공 쿠로미, 업계의 생리에 길들여져 관조적이었으나 쿠로미의 생기에 서서히 동화되어가는 작화감독 하마코(엄청난 애연가), 그리고 각각의 독특한 개성들로 똘똘 뭉친 여러 원화맨들까지... 시종일관 이 시끄럽고 부조화스러운 캐릭터들의 일상과 에피소드는 보는 이들에게 지루함을 느낄 새 없이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다양한 레퍼토리의 콘서트처럼 펼쳐집니다.

'쿠로미짱'이 만화영화를 제작하는 애니메이터들의 생활상을 얘기하는지라, 작품에 등장하는 제작사 '스튜디오 쁘띠(petit. '작은, 소규모의'란 뜻으로 이 스튜디오가 영세하고 작은 스튜디오라는 것을 암시)'의 작품들도 중간중간 화면에 펼쳐집니다. 만화영화 내에서 서로 다른 스타일의 여러 만화영화들(루이몬드 3세, 타임 쟈니스 외에 여러가지 작품들)이 등장하는 방식은 위에서 말한 개성 넘치는 다양한 캐릭터들과 함께 작품을 더욱 더 다양한 느낌이 나도록 만들어 줍니다. 마치 백화점 같이 말입니다.

쿠로미짱 캡쳐사진 2© 2001 Daichi Akitaroh,Watanabe Hajime,Yumeta Company

작품 속에서 스튜디오 쁘띠가 제작하는 다양한 애니메이션들. 스타일도 각양각색이다.


3. 웃음이라는 조미료로 간을 맞춘 애니메이터들의 생활상

'쿠로미짱'이 주는 웃음 외의 또다른 맛은 우리는 그저 재미있게 보기만 할 뿐인 만화영화의 제작현장과 그 속에서 울고 웃는애니메이터들의 꿈과 애환을 보여주는 것으로, 작품의 개그스러움에 묻혀 그 주제의식이 사라지지 우를 범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훌륭하게 주제의식을 끌어가고 있습니다.

마감에 쫓겨 작화감독의 수정 없이 원화가 바로 동화로 넘어가는 모습은, 흔히들 우리가 '작붕(작화붕괴)'이라고 일컫는 만화영화의 제작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전 제작이 아닌 매주 다음 주 분량을 촬영하여 숨가쁘게 편집하기에 바쁜 한국의 드라마 제작현실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게다가 스튜디오의 매출을 위해 스탭들이 한꺼번에 다량의 작품들을 제작함으로써 일어나는 작품의 질적 저하라든지 스탭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방송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 작품 자체의 질을 의도적으로 낮추는 제작진의 현실적 결정은 작품의 개그스러움과는 별개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공감하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쿠로미짱 캡쳐사진 3© 2001 Daichi Akitaroh,Watanabe Hajime,Yumeta Company

작품속에 등장하는 애니 '루이몬드 3세'의 방영 비디오(좌)/리뉴얼 비디오(우). 이처럼 본방 때는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 엉망으로 제작했다가 후에 비디오나 DVD 출시 때 다시 리뉴얼하여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흔히들 '데쓰 마치(죽음의 행진. 소프트웨어 공학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에드워드 요우든이 2003년에 쓴 책의 제목으로, 실패의 길로 접어든 프로젝트의 모습이 마치 죽음의 길로 행진하는 모습과 같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용어.)'라 불리는 이러한 잘못된 프로젝트의 운영과 프로젝트에 속한 구성원들의 고난은 바로 이 '쿠로미 짱'에서 애니메이터들이 겪는 말도 안되는 제작 스케줄과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사회생활을 한 분들에게 있어 이 작품은 상당한 공감을 불러 일으킬만한 요소가 다분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 고됨과 괴로움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이 느끼는 좌절과 비애가 자신이 겪었던 괴로웠던 업무와 겹쳐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쿠로미 짱'은 성인들에게도 많은 공감을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꿈을 꺾지 않고 도전해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작품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음 속으로 그들의 꿈이 실현되기를 응원하고, 그들의 꿈이 성취됨과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줌으로써 만화영화, 아니 모든 문화 컨텐츠의 본질적인 목표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감동, 그리고 마음의 정화'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문제해결과 목표달성의 이야기는 결국, 작품 내에서의 에피소드 하나에만 해당될 뿐, 그 뒤에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더 남아있음을 보여줍니다. OVA 1화에서는 방송펑크 직전의 '타임 져니스' 2화를 어떻게 제작하는 것이냐였고 결국 아슬아슬하게 제작을 완료하지만, 다음 화의 제작 스케줄이 다시 밀어닥치는 현실로 끝을 맺습니다. OVA 2화 역시 동시에 3개의 작품을 제작해야 하는 위기상황이 주어지고, 이 위기는 어떻게든 해결해 내지만 여전히 같은 스탭진으로 동시에 3개의 작품을 제작해야한다는 현실을 남겨둔체 끝나게 됩니다.

쿠로미짱 캡쳐사진 4© 2001 Daichi Akitaroh,Watanabe Hajime,Yumeta Company

OVA 2화에서 동시에 세 작품의 진행을 위해 작화감독의 수정없이 원화맨들이 대충 그린 그림을 그대로 동화파트로 넘어가는 모습이 나온다. 동화파트는 일반적으로 외주를 주는데 예전에는 한국, 요즘은 중국에 많이 의뢰를 하고 있다.

주인공들이 위기상황을 타개하되, 절대 이상적인 결말로 끝나지 않고 현실을 계속 직시한 체 작품을 끝맺는 것은 자칫 이 이야기가 비현실적인 해피 엔딩으로만 끝나지 않게 하는 제동 장치와 같은 역할을 해주어, '아직도 만화영화의 제작에는 이러한 난관들이 많이 남아 있다.'라는 문제의식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재미와 감동, 그리고 생각할 거리를 선사해 주는 작품이 훌륭한 작품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라고 한다면, '쿠로미 짱'은 그러한 명제를 충실하게 구현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블록버스터만이 재미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준 작품

'쿠로미짱'은 제가 보아온 아니메 중 그 임팩트가 강했던 작품 중 하나입니다. 특히나, '원하던 꿈과 목표는 반드시 달콤하지만은 않고 쓴 맛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쓴 맛(현실)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채찍을 한다는 점'에서 있어서 이 작품에서 등장한 애니메이터라는 직업 뿐만 아니라, 모든 직장인들, 개인사업자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큰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특히나 사회초년생들과 매너리즘에 빠진 중견 직장인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쿠로미짱 캡쳐사진 5© 2001 Daichi Akitaroh,Watanabe Hajime,Yumeta Company

열심히 일하는 스튜디오 스텝들의 모습들. 무언가를 위해 정진하는 모습은 직업이 무엇이냐를 떠나서 항상 멋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작품 자체의 주제의식과는 별개로, '저예산과 그리 뛰어나지 않은 작화, 현실적이고 평범한 일상의 얘기로도 이렇게 멋지고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높이 평가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스타 플레이어는 없어도 탄탄한 조직력과 치밀한 전략/전술, 그리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1류의 팀을 누르는 2류의 팀이 있듯이 말이죠. 

비록 2화의 짧은 OVA 였지만 쿠로미 짱과의 만남은 몹시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참에 쿠로미 짱을 만나고 오실런지요. (아차, 국내 정발된 DVD가 없는지라 그녀와의 만남이 그다지 쉽지는 않을 듯 하군요, 물론 정식 루트로 접한다고 했을 때만.)

쿠로미짱 캡쳐사진 6© 2001 Daichi Akitaroh,Watanabe Hajime,Yumeta Company

뭐라고라고라~ 우리 DVD가 한국에 정발되지 못했다고!


<참고 사이트>

[1] Animation Runner Kuromi (OAV), Anime News Network
[2] Animation Runner Kuromi,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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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에 실려 있는 '정령의 수호자 (2007), 성장을 주제로 한 깊이 있는 동양 판타지'을 본 블로그에 옮긴 글입니다.

ⓒ上橋菜穂子 · 偕成社 · 精靈の守り人」製作委員会

<스탭>

◈ 감독: 카미야마 켄지
◈ 원작: 우에하시 나오코
◈ 제작: Production I.G


<시놉시스>

우연히 신요고황국의 둘째 황자를 구하게 된 호위무사 바르사. 둘째 황비의 초청으로 궁에 들어간 그녀는 황비로부터 둘째 황자를 호위해 이 나라에서 도망쳐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둘째 황자의 몸에 요괴가 붙어 있고, 이것이 황제의 신성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둘째 황자는 암살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8명의 목숨빚을 짊어지고 있던 바르사는 그 의뢰를 받아들여 둘째 황자와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둘째 황자의 몸에 붙어 있는 것은 요괴가 아닌 정령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넘어온 정령의 알이었는데...



등장인물



1. 십이국기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오리엔탈 판타지 대작 아니메

아시다시피 반지의 제왕에서 비롯된 서양의 판타지 세계관(편의상 유럽 판타지로 표기)은 21세기를 맞이하여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영화, 게임 등 전반적인 문화산업 새로운 소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판타지 세계관을 쓰는 양상이 되었습니다.) 원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삼시 세끼를 매 번 먹다보면 질리는 법. 그런 면에서 질리도록 소비되고 있는 서양 판타지에 대안으로 동양의 판타지 세계관(편의상 오리엔탈 판타지로 표기)은 그만큼 방대하고 다양한 소재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만, 아쉽게도 몇 몇 컨텐츠 외에는 아직까지는 이를 훌륭하게 묘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오리엔탈 판타지를 소재로 한 작품들. 좌측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십이국기(코바야시 츠네오 감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천녀유혼(서극 감독)', '후시기 유우기(카메가키 하지메 감독)'.

이런 오리엔탈 판타지 소재는 오히려 진부함을 벗기 위해 유럽 판타지에 곁들여진 양념마냥 작품에서 조금씩 사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TRPG의 세계관으로 유명한 '포가튼 렐름'의 세계관에는 일본의 도검을 모델로 한 카타나나 중국의 소림사 승려를 기본으로 한 몽크와 같은 소재와 캐릭터가 등장하고, 일본의 아니메나 RPG 게임에는 권법가나 사무라이와 같은 동양적이거나 일본적인 색체를 가진 캐릭터와 소재가 등장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컨텐츠 전체를 오리엔탈 판타지로 구성한 작품들은 아직도 유럽 판타지에 비해 그 수가 적고, 또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 판타지를 소재로 컨텐츠의 현주소이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을 전제 하에서 이번에 얘기할 작품인 '정령의 수호자'는 오리엔탈 판타지를 상당히 고급스럽고 정갈하게 묘사해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2. 공각기동대 SAC의 스탭진들이 다시 뭉치다

감독과 각본은 공각기동대 SAC 시리즈로 떠오르는, 또한 개인적으로 상당히 팬이기도 한 카미야마 켄지 감독입니다. (정령의 수호자가 방영된 시점에서) 아직 공각기동대 SAC 시리즈 외에는 이렇다 할 필모그라피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만들어낸 작품 대부분이 (흥행여부와는 관계없이) 높은 완성도를 지닌 작품들이기에 앞으로의 작품에 대한 기대치도 굉장히 높은 인물이라고나 할까요. 그의 데뷔작은 패트레이버의 외전격 단편인 '미니 파토(2002)'라는 작품으로 종이로 오려낸 캐릭터들을 실사로 촬영하는 독특한 영상기법으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이때부터 범상치 않은 그의 연출력은 빛을 발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미니 파토의 독특한 연출 방식은 그의 최신작 '동쪽의 에덴'의 엔딩 영상에서 다시 한 번 사용되기도 하지요.)

ⓒHEADGEAR / EMOTION / TFC

켄지 감독의 데뷔작인 미니파토. 종이인형을 이용한 특이한 연출과 특유의 개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패트레이버 세번째 극장판 DVD에 부록으로 들어가 있다. 공각기동대 DVD 부록인 '타치코마의 일상'과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

ⓒ 士郎正宗 · Production I.G · 講談社 · 攻殻機動隊製作委員会

정령의 수호자 스텝진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걸작, 공각기동대 SAC TV 시리즈. 비록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 아니었지만,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극장판이 전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시점에서 후속작에 대한 부담감을 안고 시작했음에도 불구, 극장판과는 또다른 매력을 선사하며 높은 완성도의 작품으로 새롭게 구성.

음악 역시 공각기동대 극장판 1편과 이노센스 등으로 유명한 일본 아니메의 대표적인 음악감독인 카와이 켄지씨가 만들어 작품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제가는 일본의 대표적인 인기 락 그룹 라르크엔시엘이 맡아 작품 초반의 희망적인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있지요. 그외에 고토 타카유키 이하 여러 작화스탭들, 다케다 유스케 미술감독 등 많은 스탭진들은 공각기동대 SAC 시리즈에 참여한 Production I.G의 베테랑 스탭진들인지라 완성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해줍니다.

캐릭터 디자인 원안을 맡은 아소 가토우씨는 18금 헨타이 코믹스 작품을 여럿 그려낸 꽤 재미있는 이력을 갖고 있는데요, 물론, 이 작품에서는 그의 이런 장기는 전혀 발휘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생각 외의 완성도를 보여준 듯 합니다. 작품의 중간중간 등장하는 일러스트가 아마 그의 일러스트가 아닐까 추정되는군요.

원작자인 소설가 우에하시 나오코씨는 정령의 수호자를 1부로 하여, 어둠의 수호자, 꿈의 수호자 등의 집필했으며, 주인공 중의 한 명인 챠그무가 주체가 되는 여행자 시리즈 또한 있다고 하니 소설로도 무척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원작자체가 상당한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베스트셀로서, 우헤하시 나오코 본인이 아니메와 공각기동대의 열렬한 팬이라고도 하는군요.


3. 판타지라는 색상으로 훌륭하게 채색된 성장 드라마

오리엔탈 판타지를 그 외관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정령의 수호자는 액션이나 어드벤처보다는 드라마에 더 집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바르사와 바르사가 호위하게 된 정령의 알을 품은 어린 황자 챠그무, 이야기는 뜻하지 않은 대자연의 숙명을 짊어지게 된 아이가 그 숙명과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하여 한 인간으로, 그리고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커다란 나무에 자그마한 에피소드들이 나뭇잎처럼 붙어서 하나의 거대한 나무로 형성화하는 듯한 느낌을 보여줍니다.

ⓒ上橋菜穂子 · 偕成社 · 精靈の守り人」製作委員会

성장 드라마에 걸맞게 챠그무는 확실히 자라고 있다, 무럭무럭. 우리 아이가 26주만에 이렇게 컸어요.

성장 드라마는 아동과 청소년이 주시청 대상인 애니메이션, 특히나 아니메에 있어서는 거의 어느 장르에나 쓰여지는 하나의 테마입니다만, 정령의 수호자는 그 주인공을 이미 성장한, 그리고 챠그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자라난 바르사라는 인물로 상정한 다음, 그가 지켜야 하는 인물인 챠그무가 성장하는 모습을 제3자적인 입장에서 보여줌으로써, 청소년 층 뿐만 아니라, 성인층에게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줍니다.

거기에 판타지라면 의례 등장하는 마법이나 괴물과 같은 요소들이 이 작품에서는 주된 이야깃거리가 아닌(물론, 정령의 알이라는 작품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판타지 요소, 그 자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의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는 그리 큰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전개를 위한 보조적인 역할로 사용되면서, 흥미보다는 스토리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점에서도 성숙한 전개를 원하는 고연령대의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上橋菜穂子 · 偕成社 · 精靈の守り人」製作委員会

작품 속에 등장하는 판타지 소재는 때로는 양념처럼, 때로는 메인 음식처럼 사용되어 결코 넘치거나 부족하지 않은 느낌이다.

보시는 분에 따라서는, 그리고 작품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이러한 전개가 자칫 지루함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정령의 수호자는 지루할 수도 있는 이런 전개를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한 각본과 연출로 멋지게 풀어 나간다는 점에서 밀도있고 심도있는 재미를 선사하지 않나 싶습니다. 공각기동대 시리즈에 이어 켄지 감독은 상당히 영화적이고도 리얼한 연출방식으로 작품을 이끌어 나갑니다.


4. 세계관 속에 교묘하게 녹아든 일본과 중국의 문화

오리엔탈 판타지는 그리스/로마 신화, 북구신화, 이집트 신화 등으로 그 소재가 이미 어느 정도 인지도가 높은 몇가지에 고정되어 있는 유럽 판타지와는 달리, 각 나라의 설화나 건국신화 등에 그 모티브를 두고 있어서 나라 별로 다양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일본인이 만든 정령의 수호자는 일본의 옛모습을 모티브로 판타지 세계를 창조해내고 있습니다. 챠그무의 나라이자 이야기의 주된 배경인 신 요고황국은 그 복식, 병사들의 무장, 주민들의 생활방식, 황궁의 모습 등을 일본의 옛모습에서 모티브를 받았다는 것이 눈에 뜨일 정도이고, 바르사의 고향인 칸발은 마치 중국을 연상시키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쉽게도 한국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지만요.)

ⓒ上橋菜穂子 · 偕成社 · 精靈の守り人」製作委員会

전체적인 복식이나 건축물, 생활상은 일본의 그것을 사용하고 있으나 간간히 외국의 것들도 등장하고 있다. 스틸 샷의 좌측 하단에 보이는 의상은 중앙 아시아나 러시아의 전통의상을 기본으로 한게 아닌가 하는 싶다. (실제로 등장인물도 파란 눈에 금발이다.)

특히, 이 작품에 바르사 일행과 대척하고 있는 요고황국의 황실무사들은 일본의 사무라이와 닌자를 연상시키는 듯한 복식과 행동으로 마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전설적인 작품 '7인의 사무라이'를 그 모티브로 삼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게 합니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7명이 아닌 8명이 나오니 거기까지는 억측일지도 모르겠군요.)


5. 쿠사나기 모토코의 환생? 강인한 여성상과 모성상을 동시에 보여준 바르사

정령의 수호자는 주인공의 한 명인 챠그무의 성장을 그 주제로 한 작품이지만, 그를 보살피고 인격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지켜주는 또 한 명의 주인공인 바르사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작품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술의 달인으로 탁월한 임기응변과 대담함, 그리고 용의주도함을 갖춘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아니메 팬들은 어떤 여성 캐릭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바로 공각기동대 시리즈의 히로인 쿠사나키 모토코 소령말입니다.

물론, 쿠사나기 모토코가 바르사의 롤모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강인한 여성 캐릭터가 모토코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 원작이 공각기동대보다 먼저 나왔다고 하니 말이죠. (애니메이션보다 소설이 먼저 나왔다는 것이고, 실제 공각기동대 코믹스보다는 정령의 수호자 쪽이 나중에 출간됐습니다. 공각기동대 코믹스는 80년대 작품.) 아마, 감독 이하 공각기동대의 스탭진이 대거 투입되다보니 작화같은 부분에서부터 자연스레 비슷한 인상을 주지 않았나 싶군요. (제 경우에는 성우가 같다는 착각을 했었는데, 알고보니 바르사는 안도 마부키씨가, 모토코는 타나카 아츠코씨가 맡았습니다.) 그러나, 바르사는 모토코와 다른 점을 하나 갖고 있는데, 그것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그녀를 가장 돋보이게 해줄지도 모르는 모성애가 아닐까 합니다.

ⓒ 士郎正宗 · Production I.G · 講談社 · 攻殻機動隊製作委員会 (좌) / ⓒ上橋菜穂子 · 偕成社 · 精靈の守り人」製作委員会 (우)

같은 스텝진이 그려낸지라 둘의 느낌은 외모 상으로도 상당히 비슷하다. 인조피부의 효과인가 화장술의 덕인가, 모토코 여사가 좀 더 뽀샤시 해보이는...

챠그무를 대하는 바르사의 모습은 단순한 호위무사 이상의, 챠그무를 강인한 인간으로 키우는 데 많은 역할이 할애되어 있고, 실제 중간의 전개과정은 그러한 바르사와 챠그무의 관계와 에피소드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모성애라기보다는 오히려 부성애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앞에서는 엄하게, 뒤에서 따뜻하게 지켜보는 그런 모습은 확실히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에 가까운 모습이랄까요. 그것은 그녀가 어머니없이 먼 타국에서 외롭게 자란 탓에 여성스러움을 잃어버린 것도 있겠지만, 지그로에게 맡겨져 길러져 온 탓에 지그로의 남성적인 육아방식에 많은 영향을 받은 탓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여성인 이상, 그것은 부성애보다는 모성애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듯 합니다. 다만, 그 외향적 모습이 무뚝뚝하고 남성적일 뿐이겠지요.

어떤 분들께선 첫 도입부에서 보여준 바르사의 현란한 액션씬에 매료되어 이 작품을 보셨을 수도 있겠고, (물론, 이 현란한 액션 역시 정령의 수호자의 장점일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중간 에피소드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액션 때문에 많은 실망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바르사의 진정한 매력은 그 현란한 무예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강인한 모성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上橋菜穂子 · 偕成社 · 精靈の守り人」製作委員会

3화에 등장한 바르사와 황실 무사들의 액션장면. 이 씬 하나로 초반 이 작품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최고조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현란한 움직임을 스피디하게 표현해낸 것도 훌륭지만, 그 빠른 전개 중에 사이 사이 슬로우 모션으로 주인공의 위기 상황을 강조한 연출력은 애니메이션으로선 매우 높은 수준의 연출 중 하나일 듯. (특히 저 창의 끈이 격투 중간중간에 조금씩 풀리는 연출은 매우 감탄)


6. 수호자 시리즈의 연이은 애니화를 기대하면서...

정령의 알을 품은 탓에 나라의 재앙으로 오인받으며 죽음에 몰린 왕자를 맡아 도망길에 오르는 젊은 여자무사의 이야기는 최초에는 긴장감 넘치는 탈주극으로 우리를 이끈 연 후,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원치 않은 사명과 업을 짊어진 어린 왕자가 백성들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드라마적인 전개와 잔잔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하다가 말미에 이르러서는 왕자가 품은 정령의 알을 빼앗기 위한 정령계의 괴물과, 시시각각 왕자를 쫓아오는 황국무사들의 추격, 그리고 정령의 알을 꺼내고 왕자를 구하기 위한 바르사 일행의 실마리 찾기 등 다양한 에피소드로 다시 늦춰진 긴장감을 팽팽히 당겨줍니다.

특히 그 중간에 등장하는 바르사의 감춰진 과거, 지그로와의 추억 등은 이 이야기의 또다른 사이드 스토리로서의 흥미를 주는 요소라고도 할 수 있지요. 사실 원작 소설의 경우는 이 에피소드의 완결 이후, 바르사가 다시금 그녀의 고향인 칸발로 돌아가 지그로 등과 얽혀진 오랜 이야기를 해결해 나가는 원톱 주인공으로서의 바르사의 모험 이야기가 다루어 집니다만, 아쉽게도 정령의 수호자의 후속작이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듯 싶습니다. 

완성도 높은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저조했던 시청률 덕에 이 작품의 후속이 더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무척 아쉽기도 합니다. 물론, 액션에 많은 관심을 두고 보신다면 지루한 작품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한 번쯤 이런 진지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매일 자극적인 패스트푸드와 서양식 식단으로 지친 우리의 몸에 깔끔한 웰빙음식과 같은 느낌을 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글쎄요,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진 아니메 팬들의 입맛이 다시금 새로운 패러다임을 원할 때는 바르사를 다시 볼 수 있지는 않을까요. 기약없는 바르사의 모험 이야기가 언제고 다시금 우리에게 들려올 날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上橋菜穂子 · 偕成社 · 精靈の守り人」製作委員会

시작은 또 다른 이야기의 결말. 끝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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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의 '라스트 유니콘 (1982), 독특한 매력의 이국적 판타지'를 수정하여 옮긴 글입니다.
 

© Peter.S.Beagle / Granada International (inherited from ITC Entertainment)


<스탭>

◈ 감독: 아써 랜킨 쥬니어 (Arthur Rankin Jr.), 쥴스 배스 (Jules Bass)
◈ 원작/각본: 피터.S.비글 (Peter.S.Beagle)
◈ 제작: ITC Entertaiment, Rankin/Bass Production, Topcraft Studio


<시놉시스>

'라스트 유니콘 (1982)'을 참고하세요.


1. 동서양이 합작한 환상적이고 고풍스러운 모험 이야기

'Last Unicorn(이하 라스트 유니콘)'은 동서양의 제작진들이 힘을 합쳐 만든 다국적 작품으로, 감독과 원작/각본과 같은 핵심 스탭진은 모두 미국에서, 그리고 스폰서는 영국의 ITC Entertainment가 맡았으며, 원화와 동화는 일본의 소규모 스튜디오인 Topcraft가 맡았습니다. 특히 이 Topcraft의 참여야말로 이 작품을 다른 영미권 작품과 차별화 시켜주는 포인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선녹음 후작화' 방식으로 제작되던 미국식 만화영화 제작 스타일과 '선작화 후녹음' 방식의 스타일로 제작되어오던 일본식 제작 방식과의 조우과 과연 어떤 형식의 작품으로 표현될지가 흥미로운 부분인 것이죠.
 
기실 Topcraft는 이 라스트 유니콘에 있어서는 하청 제작업체내지는 용역업체와 비슷한 위치(감독, 각본 등 핵심 스탭진이 모두 미국인, 비즈니스적으로는 '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라고 볼 수 있기에 실제 제작방식은 거의 미국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미국식 제작방식을 일본의 스튜디오가 얼마만큼 잘 소화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비 디즈니 계열의 극장판 만화영화로서는 꽤나 높은 완성도로 탄생되지 않았나 싶은데, 물론 디즈니라든지 일본의 탑 클래스(그러니까, 풀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제작할 수 있었던 초창기 도에이 스탭진들 같은...)의 극장판 만화영화에 비해서 객관적으로 캐릭터의 동화적 표현 등은 떨어지긴 합니다만, 동양권의 작화방식이 서양방식의 표현 스타일과 맞물려서 이루어낸 듯한 미묘한 특이함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시각적 경험이기도 합니다.
 
라스트 유니콘은 성우 캐스팅에서 놀라울 정도의 호화 캐스팅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주인공인 유니콘 역에는 존 패로우 감독의 딸이자 우디 알렌 감독의 전부인이기도 한 연기파 배우 미아 패로우(물론, 지금 들어보면 유니콘 목소리치고는 아줌마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어설픈 마법사 슈멘드릭 역에 뉴욕 비평가 협회 남우조연상, 아카데미 남주조연상 등을 수상한 연기파 배우 알란 아킨, 흥행성과 연기성을 골고루 갖춘 배우 제프 브리지스가 리르 왕자, '반지의 제왕' 사루만과 '스타워즈 에피소드'의 두쿠 백작으로 잘 알려진 크리스토퍼 리가 해거드 왕 등으로 캐스팅 되어 지금의 미국산 대작 만화영화의 스타 배우 캐스팅과 견주어도 그다지 밀릴 것 같지 않은 높은 네임밸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니콘과 숲의 장면 장면이 움직이는 동화에서 태피스트리(벽걸이용 융단) 형태로 변모하면서 마치 동화 속의 환상이 벽화로 재현되는 듯한 오프닝은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옛스럽고 엔틱합니다.(이 태피스트리는 '유니콘의 사냥'이라는 실제 작품에서 모티브를 받은 듯 싶습니다.) 배경으로 흐르던 서정적인 오프닝곡은 그룹 아메리카가 불렀는데요, 후에 케니 로긴스나 In-Mood 같은 그룹에 의해 몇 번 리메이크될 정도로 인기도 있었지요. 특히, 이 고풍스러운 벽화와 서정적인 테마로 특징 지워지는 영상은 왠지 낯설지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니메 팬들 중에서는 기억하시는 분도 많으리라 봅니다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초창기 작품이자 스튜디오 지브리의 첫번째 작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에서는 메인 테마와 함께 화면을 장식한 고풍스러운 벽화 스타일의 오프닝이 등장합니다. 다음 작품인 '천공의 성 라퓨타(1986)'의 오프닝 또한 이 나우시카의 오프닝처럼 벽화 스타일과 유사한 고풍스러운 연출을 보여주고 있지요. 짐작하셨겠지만, 이 라스트 유니콘의 만화영화 제작진과  '스튜디오 지브리'의 제작진은 동일한 제작진입니다. 스튜디오 지브리 창설 당시 Topcraft의 인재들이 흡수된지라 초창기 지브리 작품의 오프닝은 우연치 않게도 라스트 유니콘의 그것과 유사한 느낌을 줍니다.  
 

Last Unicorn, © Peter.S.Beagle / Granada International. Nausica of the Valley of Wind, © 1984 Tokuma Shoten

그림 1. Last Unicorn의 오프닝(위)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오프닝(아래) 화면.


2. 꿈의 마지막 단편을 쫓아 삐뚤어진 현실 속을 여행하는 유니콘의 이야기

라스트 유니콘의 각본은 원작자 본인인 Peter.S.Beagle이 맡았습니다. 보통은 원작자가 아닌 전문 각본가가 각본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Beagle 선생의 경우는 이미 78년에 '반지의 제왕' 만화영화의 각본을 맡았기에 (여담으로 어린시절 이 만화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던 유명인 중의 한 명이 바로 20여년 뒤 '반지의 제왕' 3부작 시리즈로 전세계적 명성을 얻은 피터 잭슨 감독이기도 합니다.) 각본가로서의 기본 소양을 갖춘 상태였고, 그로 인해 각본의 완성도는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작자가 각본을 쓴지라 작품의 이야기 전개는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만화영화를 위해 잘 안배되어졌다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스토리의 뛰어난 이식성은 이 작품의 가치를 현재까지도 이어주는 중요한 포석이 되고 있습니다.
 
초반의 이야기는 환상 속의 동물인 유니콘이 어느날 자신의 동족이 한 명(아, 아니 한마리)도 없음을 인지하고는 동족을 찾기 위해 숲을 떠나 세상을 여행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녀(성우가 여성분이니까 그녀가 맞겠죠.)는 한 정신 나간 나비(말 그대로 횡설수설합니다.)와의 만남을 통해 동족의 행방이 한 붉은 황소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붉은 황소를 찾아나서게 되는데요. 정신 나간 나비의 말 이외에는 정보를 얻을 곳이 없는 유니콘의 현실이 왠지 그녀, 즉 꿈과 추억이 현실과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다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 싶습니다.
 
(꿈과 동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유니콘을 백마로 착각합니다. 현실에 익숙해져버린 이들이 순수와 꿈의 상징인 유니콘의 뿔을 보지 못하는 모습은 현대인을 빗댄 은유이기도 하지요.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유니콘을 사악한 마법사 포르투나는 한 눈에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법사에게 있어 유니콘은 순수와 꿈의 상징이 아닌 한낱 돈벌이의 도구일 뿐입니다. 마법사는 유니콘을 붙잡아 그녀에게 가짜 뿔을 씌우고 사람들에게 유니콘이라고 속여 보여줍니다. 진짜 뿔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유니콘은 가짜 뿔이 씌워져 가짜 유니콘으로 보여지는 서글픈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 순수와 꿈을 잃어버리고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군상 역시 오버랩됩니다. 초반부의 유니콘이 처한 상황은 동화적인 표현이 돋보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비유적으로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니콘의 고난은 한 견습 마법사의 도움으로 인해 또다른 전개를 맞게 됩니다. 이 마법사는 자신을 슈멘드릭이라고 소개하는데요, 우스운 것은 슈멘드릭이라는 이름이 이디시어(블로그지기 주: 독일어에 슬라브어와 히브리어가 섞인 말)로는 '바보'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슈멘드릭은 제대로 된 마법은 구사할 줄 모르는데다가 상황판단력이 좀 뒤쳐지는 어리숙한 인물로 나옵니다.(물론, 동시에 정의감과 순수함 역시 갖고 있지만.) 유니콘의 본 모습을 알아본 그는 유니콘을 탈출시키기 위해 도움을 자처하게 됩니다.

© Peter.S.Beagle / Granada International

그림 2. 사계절 동안 동족을 찾아 헤매는 유니콘.

마법사에게서 탈출한 유니콘과 슈멘드릭은 정처없는 여행 도중 숲에서 한무리의 부랑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로빈 훗의 망령에 사로잡혀 사는 캡틴 컬리의 일당들이었는데요, 유니콘의 마법(그러나 슈멘드릭은 자신이 한 것인 줄로 착각)으로 로빈 훗과 메리언의 망령을 본 이들은 감격에 겨워합니다. 몽상에 빠진 체 현실을 거부하는 이들의 모습은 바로 이전 에피소드에서 유니콘의 진짜 뿔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짜 뿔에 현혹된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과 함께 인간을 향한 또다른 풍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 속에서 유니콘은 순수와 꿈을 간직한 또다른 동료(내지는 하녀?) 몰리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든든한(?) 동료들을 얻은 유니콘의 여정은 어두운 현실이 맞닥뜨리면서 급반전됩니다. 세상의 모든 유니콘들 잡아 해거드 왕에게 바친 붉은 황소가 등장한 것입니다. 붉은 황소에 엄청난 위압감에 유니콘 일행은 두려움에 떨고... 숲에서의 마법(로빈 훗과 메리언의 환영을 캡틴 컬리에게 보여준 것)이 자신이 한 것이라 착각한 슈멘드릭은 당당하게 마법의 주문을 읊지만 엉뚱한 결과를 가져와 유니콘을 아리따운 아가씨로 변신시키고 맙니다.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는 유니콘(슈멘드릭의 실력을 감안했을 때 오히려 감사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두꺼비나 생쥐가 아닌게 어디랍니까.)을 진정시키면서 우여곡절 끝에 해거드 왕을 찾아낸 유니콘 일행, 슈멘드릭은 얼떨결에 유니콘을 '아말띠아'라는 이름으로 해거드 왕에게 소개시키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아말띠아'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의 이름으로, 염소와 비슷한 모습으로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데, 뿔 하나에는 술이 가득 차 있고, 다른 하나에는 음식이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제우스가 뿔 하나를 부러뜨리는 바람에 아말띠아는 하나의 뿔을 갖고 있게 되며, 흰 몸과 하나의 뿔 덕에 많은 이들이 유니콘으로 오인하고 있다고도 하는군요. 바로 이 유니콘으로 오인되는 아말띠아의 이름이 인간의 껍질을 쓰고 있는 유니콘의 이름으로 사용되며, 또다시 작품은 진정한 사실을 외면한 체 허상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을 비유합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런 유니콘, 아니 유니콘의 인간 모습을 해거드 왕의 의붓아들 리르 왕자가 사랑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좀 더 미묘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죠.
 
유니콘은 해거드 왕에게 사로잡힌 자신의 동족들을 구해낼 수 있을까요. 리르 왕자와의 사랑은, 그리고 해거드 왕과 붉은 황소와의 결말은 어찌 될까요. 그녀는 과연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허상과 위선을 벗고 진실과 본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한가닥 희망인 순수와 꿈을 찾아내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 Peter.S.Beagle / Granada International

그림 3. 마녀 포르투나(좌측 상단), 슈멘드릭(우측 상단), 캡틴 컬리(좌측 하단), 그리고 붉은 황소(우측 하단).


3.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사랑받는 유니콘, 그녀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3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이 작품은 서구권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국내에서는 80년대 들어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해준 적이 있었지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과 유럽, 호주 등에서 100만장 이상의 DVD 판매량을 올린 것이 그것인데요. 유니콘이 갖고 있는 특유의 깨끗하고 투명한 느낌의 환상성은 순수함이라는 테마에 가장 잘 부합하는 소재로, 어두움과 공포의 대명사 용과 함께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재생산 되는 판타지적 소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작품은 그런 유니콘을 소재로 한 작품들 중에서는 꽤나 독특하면서도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양의 작화와 서양의 연출이 어우러져 다른 작품과는 다른 독특한 맛을 주는 이 작품은, 특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유니콘의 색다른 아름다움이 유니콘의 본 모습이 아닌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본 모습 이상의 아우라를 뿜어낸 아이러니함 역시 갖고 있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명작을 만들어낸 원작자 Beagle 선생이 저작권료를 제대로 못받아 2000년대에 들어 제작사 측과 법적 분쟁까지 갔다는 사실은 꿈과 망상,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던 극중 인물들의 모습처럼 왠지 모를 쓸씀함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작자의 아픈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화면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유니콘의 눈부신 흰색은 인간의 영원한 동경, 노스텔지어를 연상케 하는 또다른 상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Peter.S.Beagle / Granada International

그림 4. 해거드 왕(우측 상단)과 리르 왕자(좌측 상단), 그리고 인간으로 변한 유니콘 아말띠아(하단).

☞ 아,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라스트 씬에서 파도에 갇혀있던 유니콘들이 탈출하여 해변을 뒤덮는 장관은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에서 아르웬이 나즈굴을 물리치기 위해 강물에 걸었던 마법과도 오버랩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작자 Beagle 선생은 이미 78년 '반지의 제왕' 만화영화 각본을 맡은 적이 있다는 것. (물론, 톨킨 선생의 '반지의 제왕' 원작에 이미 묘사가 된 장면이지만 말입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이주의 영화리뷰 2009년 7월 3주차에 선정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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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의 '슈발리에, Le Chevalier Deon (2006)'을 수정하여 옮긴 글입니다.

© TOW UBUKATA • Production I.G/Project Chevalier 2006


<스탭>

◈ 감독/스토리보드: 후루카시 카즈히로
◈ 원안/시리즈 구성/각본: 우부카타 토우
◈ 제작: 슈발리에 제작위원회 / Production I.G


<시놉시스>

격동과 혼란의 18세기 프랑스. 기밀국의 일원으로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고 있던 여기사 리아 드 보몽의 시신이 세느강가에서 발견된다. 리아의 쌍동이 동생인 데온 드 보몽은 누이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기밀국에 몸을 담게 되고, 누이의 죽음과 근래에 벌어지고 있는 여인들의 연쇄 실종사건이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진실에 다가서려는 순간, 괴물로 변한 사람들의 습격을 받게 된 데온.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절체절명의 순간, 갑작스레 그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1. 일본식 양념이 제거된 프랑스식 정통 퓨전 요리같은 작품

슈발리에의 배경이 되는 18세기 말의 유럽은 산업혁명을 통한 농업중심의 사회에서 산업주의 사회로의 이전, 신분제, 봉건제의 붕괴에 따른 계급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사회로의 이전 등 서구 유럽사회에서 르네상스 혁명 이후로 가장 엄청난 변화들이 있었던 시기입니다. 슈발리에는 그러한 시대의 변화의 직전에 놓여있던 프랑스 왕정의 말기를 기점으로 하여, 시편과 그에 얽힌 왕가의 미스테리,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등장인물들의 모험과 드라마를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을지는 모르지만) 프랑스라는 어감에서 느낄 수 있는 고급스럽고 낭만적인 이미지로 묘사해냈습니다.

© TOW UBUKATA • Production I.G/Project Chevalier 2006

그림 1. 주인공 데온 드 보몽의 모습(좌). 남자가 되었다가 여자가 되었다가 하는 란마...는 아니고 성정체성을 잃어버린 미청년. 데온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3인의 총사 듀란, 테라고리, 로빈(중).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인력구성을 보여준다. 데옹과 그의 약혼녀 안나(우). 주인공의 약혼녀지만, 기존의 아니메와는 달리 평범한 스타일이 오히려 더 특색이 있다.

근래의 아니메에서 유럽 또는 서양의 모습이란 일반적으로 그 겉모습과 형식만 빌려왔을 뿐, 작품 속 등장인물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은 언제나 일본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겉모습만 유럽식이었던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모습들은 중세시대의 세계관을 기본으로 한 일본식 판타지 아니메에서 많이 보여졌는데요, 이런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고증이 부족한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베르사이유의 장미(1979), '엠마:영국식 사랑이야기(2005,2007)' 등과 같이 시대적 배경을 잘 살려낸 작품들도 있습니다만.
 
물론, 이런 현상(고증이 부족한 작품)은 아니메에서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만, 고증이 부족한 작품들이 많아질수록 상대적으로 고증이 철저한, 즉 리얼리티가 뛰어난 작품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는 것도 사실일겁니다. 그런 면에서 슈발리에는 18세기 말의 프랑스를 만화영화치고는 정말 멋지게 재현에 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부카타 토우'라는 촉망받는 젊은 작가의 원작에, '공각기동대 SAC(2002,2004)', '정령의 수호자(2007)' 등 고품격 성인 애니메이션의 진수를 보여주는 Production I.G의 제작 매치업은 훌륭하기 그지 없는 투톱이군요.
 
마치 본고장의 프랑스 요리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본고장의 맛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맛을 지닌 프랑스식 퓨전요리... 라면 그 표현이 정확할까요. 그림체 또한 기존의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형적인 형식에서 탈피한, 작화/극화와도 같은 그림체를 보여주어 더더욱 유럽 스타일의 맛을 살리고 있으며, 배경 또한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의 도시들을 훌륭하게 묘사해내었다고 평하고 싶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마치 일본의 아니메가 아닌, 유럽이나 서구권의 만화영화와의 기시감을 느낀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아무래도 이러한 작화 스타일은 제작진의 의도가 십분 반영된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 TOW UBUKATA • Production I.G/Project Chevalier 2006

그림 2. 혁명교단의 일원들인 로렌챠, 칼리오스트로, 막시밀리앙(좌), 엘리자베타 여제와 데온 (중),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그 남자, 데옹(우). 의상 디자인에 있어서도 상당히 심혈을 들였음을 느낄 수 있다.


2. 리얼리티 vs 판타지, 미스테리 퓨전 시대극의 진수를 보여주다.

슈발리에의 등장인물들은 상당수 실존인물들을 포진시켜 그 리얼리티를 더욱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왕인 루이 15세,16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루이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 오를레앙 공작,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와 에카테리나 여제 등이 모두 실존 인물들이며, 주인공 데온 드 보몽 또한 실제 여장 기사이자 비밀공작원으로 유명했던 인물이기도 하지요.
 
데온 드 보몽은 실제로 여장했을 때의 이름이 리아 드 보몽이었는데요, 이 이름은 작품에서 데온의 친누이이자, 사건의 모든 시작을 알려주는 리아에게 그대로 쓰여집니다. 실존 인물들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실제 역사와는 많이 틀리지만, 사치와 향락을 좋아하는 루이 15세나,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퐁파두르 백작 부인 등 그 성격적 배경은 실존인물에서 상당한 모티브를 가져온 듯도 보여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실존인물의 등장은 자칫 이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는 실존인물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나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줄 소지도 있습니다. 작품 방영시 자막 정도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실존인물들의 모습은 작품을 위하여 가공되거나 지어진 것입니다.' 정도의 문구가 들어갔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도 드는군요. (근자의 한국 사극들의 경우도 이러한 부분에서 조금은 아쉬운 감이 있기도 합니다만.)
 
이렇게 리얼리티에 충실한 드라마적인 전개는 24화로 구성된 이 TV 시리즈, 특히나 만화영화로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지루함을 주기도 합니다. 실제, 이야기가 전개되는 5화 부터 10화 정도까지는 지루한 전개로 인해 저 또한 1년 가까이 감상을 중지했다가 나중에 보았을 정도이니까요.

© TOW UBUKATA • Production I.G/Project Chevalier 2006

그림 3. 과거 기밀국의 동료들이었던 막시밀리앙, 듀란, 리아(좌). 샤프한 모습의 듀란이 여기서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리아와 영국의 메어리 왕비의 다정한 모습(중)이 막시밀리앙과 데쉬우드 주교의 어색한 모습(우)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일단 그 전개가 끝나는 순간 이 작품은 엄청난 흡인력으로 시청자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전개, 끝까지 그 진위를 파악하기 힘든 잘 짜여진 미스테리, 그리고 반전.... 기존의 만화영화에서와 같은 해피엔딩이 아닌, 그렇다고 슬픈 엔딩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긴 여운을 남기는 엔딩은 지루하고 긴 산책로를 지나 아름다운 정원으로 우리를 이끄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거대한 음모와 야망과 배신으로 얽힌 미스테리에 가미된 판타지적 요소들은 이 작품의 미스테리를 좀 더 미스테리답게 하는 소스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인용구를 사용한 마법의 영창은 시를 외우듯이 주문을 외움으로써, 기존의 판타지에서 보여주는 주문 영창과는 다른 좀 더 고급스럽고 우아한, 그러면서도 박진감이 넘치는 효과를 보여주고 있으며, 주인공 데온의 몸에 빙의된 누이의 영혼은 단순히 주인공이 강력한 힘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로 변신한다는 개념이 아닌 주인공의 비극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시의 힘으로 가고일로 변한 사람들의 모습은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하지만, 납의 피를 흩뿌리며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에서 섬뜩함과 함께 애절함이 느껴지기까지 하지요.
 
흔히 봐왔던 아니메였다면, 끔찍한 괴물로 변한 사람들을 주인공이 멋진 여성 전사로 변신하여 무찌른다...는 지독히 아니메스럽고 유치한 설정이었을테지만, 슈발리에에서는 이런 전형적인 설정을 적절히 변형하여 전혀 다른 느낌의 고급스러운 장식으로 인테리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3.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기존과 다른 성인 아니메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

슈발리에는 액션물이나 코믹물이 아닌지라, 재미나 스트레스 해소를 원하시는 분들에게는 그닥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엔딩 또한 그리 상쾌한 편은 아닌지라, 끝나고 나서의 찜찜함도 보는 이에 따라서는 클 수도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전개 부분이 지루하고, 그림체가 기존 아니메의 귀엽고 에쁜 스타일과는 상반되는 극화풍인지라, 보시는 분에 따라서는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서구권의 애니메이션에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이시라면 더 하시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련됨과 미스테리한 이야기는 아니메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함과 고급스러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치, 중세나 중세 말을 배경으로 한 기존의 미스테리 영화들에서는 느꼈을 법한 전개라고 할까요. 숀 코네리 주연의 "장미의 이름"이나, 사무엘 르 비앙, 뱅상 카셀, 모니카 벨루치가 출연한 "늑대의 후예들" 등이 비슷한 느낌의 영화일 수도 있겠군요. 이런 영화들의 스타일을 사랑하시는 분들이라면 슈발리에는 꽤나 좋은 느낌을 선사해주리라 봅니다.

© TOW UBUKATA • Production I.G/Project Chevalier 2006

그림 4. 4명의 총사들 로빈, 데온, 테라고리, 듀란 (좌). 그들의 운명은 처음은 함께였으나 끝으로 갈수록 궤적을 달리한다. 마리 왕비, 루이 15세 그리고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퐈두르 부인(중). 셋의 기묘한 관계가 왠지 잘 표현된 일러스트인 듯 싶다. 막시밀리앙와 리아(우). 리아는 이 작품의 열쇠이자 모든 사건의 교집합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다.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애니메이션 영화 리뷰 모아요~]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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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 FILMLINK International/HIDEYUKI KIKUCHI/ASAHI SONORAMA/VAMPIRE HUNTER D Production Commitee


<스탭>

◈ 감독: 카와지리 요시아키
◈ 원작: 기쿠치 히데유키
◈ 제작: 매드하우스. 필름링크 인터내셔널


<시놉시스>

핵전쟁 이후 뱀파이어들이 귀족이라 불리며 인간들 위에 군림하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한 A.D 12,090년. 자신의 딸 샬롯을 뱀파이어에게 납치당한 대부호 앨번은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혈이자 뱀파이어 헌터인 던필(이하 D)을 고용하여 백작 마이어로부터 그의 딸을 구해줄 것을 부탁한다. 의심 많은 대부호의 아들은 D 외에도 또다른 헌터집단 '마커스 형제'에게도 같은 의뢰를 맡기는데, 샬롯을 먼저 구출해야만 보상금을 받을 수 있기에 마커스 형제는 D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마커스 형제'의 일원인 여성헌터 레일라는 D에게 경계심과 동시에 호기심을 보이게 되고, 마이어 백작과의 첫 대면에서 D는 납치된 샬롯이 마이어를 감싸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마이어 백작이 암살집단인 바르바로이 일족의 3인조를 고용하게 되면서 이제 D와 마커스 형제, 바르바로이 3인조까지 얽힌 복잡한 추격전이 시작되는데... 과연 마이어가 향하는 곳은 어디이며, 샬롯과 마이어의 관계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1. 기쿠치 히데유키의 소설, 아마노 요시타카의 날개를 달고 애니메이션계에 입성하다.

알려진 바와 같이 기쿠치 히데유키 원작의 '뱀파이어 헌터 D(1983)'는 1983년 1월 처음 소설로 등장합니다. '마계도시 신주쿠(1982)'라는 소설로 공포 소설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기쿠치 히데유키는 후일 카와지리 요시아키 감독과 황금 콤비로 호러 판타지 계열의 아니메 수작을 연이어 등장시키며, 일약 '공포소설의 대가'라는 명성을 얻기에 이르르는데요. 이 뱀파이어 헌터 D는 바로 그의 작품 중에서 1번 타자로 애니메이션화된 작품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총 20권이 발표되며 30년 가까이 연재를 계속하고 있는 이 장편의 판타지 공포소설도 초창기의 기쿠치 히데유키만의 네임 밸류만으로 애니메이션화 되기에는 버거웠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이 소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면에는 당시 삽화가로서 소설에 참여한 애니메이터 아마노 요시타카의 일러스트 때문인 것도 있으니까요.

70년대 타츠노코 프로에 10대의 나이로 입사하여 천재적인 애니메이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아마노 요시타카가 애니메이터로서의 범주에만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며, 소설 삽화에 과감히 도전했던 이 작품은 원작자인 기쿠치 히데유키보다 아마노 요시타카에게 더 큰 명성을 안겨주며, 그를 애니메이터가 아닌 특급 일러스트레이터의 반열로 격상시켜주는 중대한 모멘텀이 됩니다. 물론 이 영향은 뱀파이어 헌터 D에게도, 기쿠치 히데유키에게도 동반 상승효과를 가져옵니다. 환상적인 일러스트 덕에 책의 가치는 높아졌으며,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감상을 더욱 더 배가시킨 것입니다.

ⓒ YOSHITAKA AMANO / ASAHI SONORAMA

그림 1. 아마노 요시타카의 소설 삽화 일러스트 (출처: 베스트 아니메)


그 덕분일까요, 뱀파이어 헌터 D는 85년 마침내 기쿠치 히데유키의 작품으로서는 최초로 애니메이션화 되기에 이르릅니다. 감독은 '우주전함 야마토(1974)'의 작화감독에서부터 '요술공주 밍키모모(1982)'이나 '은하표류 바이팜(1983)' 등의 캐릭터 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진 아시다 토요오가 맡았는데요. 당시 원작자인 기쿠치 히데유키가 뱀파이어 헌터 D의 제작의사를 밝혔던 아시 프로덕션의 스타일이 자신의 작품 성향과는 너무도 달라서 수차례 거절을 했었으나, 아시다 토요오의 강력한 의지로 인해 아니메로의 제작이 가능했던 숨겨진 에피소드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1] 참조)

뱀파이어 헌터 D의 1권의 이야기를 80분짜리 OVA로 아니메화한 이 작품은 지금에 와서는 그다지 높은 작화 퀄리티의 작품이라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만, 스파게티 웨스턴 스타일의 배경과 뱀파이어라는 호러 판타지적 소재가 기묘하게 어울린 숨겨진 고전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후일 '북두의 권(1986)' 극장판을 통해 센세이셔널한 고어 액션씬을 훌륭하게 선보인 아시다 토요오 감독의 액션 연출은 이 작품에서도 그 흥미를 더하죠. 특히, 단순한 뱀파이어 헌터로만 여겨졌던 D가 클라이막스 씬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힘과 그 힘에 얽힌 출생의 비밀은 크나큰 흥미와 함께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안겨준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연말 OVA 랭킹 2위에 오를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둔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속작을 내놓지 못하였고, 카와지리 요시아키 감독이 연출한 기쿠치 원작의 '요수도시(1987)'가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킨 뒤, 카와지리가 키쿠치의 작품을 연달아 아니메화하는 과정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도, 북미시장에 진출해서도 좋은 성적을 거둔 이 작품이 왜 후속 시리즈를 내지 않은 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것일까요. 의문점을 뒤로 한체 세월은 어느덧 15년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 HIDEYUKI KIKUCHI / ASAHI SONORAMA

그림 2. 85년도 OVA 트레일러 영상 스틸 컷. (출처: Youtube.com)


2. 동반자 카와지리 요시아키와의 만남... 예견된 D의 부활

'요수도시(1987)', '마계도시 신주쿠(1988)', '바람의 이름은 아무네지아(1990)' 등에서 연달아 호흡을 맞추면서 기쿠치 히데유키와 카와지리 요시아키는 황금 콤비이자 절친한 친구로 발전하게 됩니다. 스승 린 타로에게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의 정수를 물려받은 일본의 탑 클래스 애니메이션 연출가 카와지리 감독과 이제는 일본 공포소설을 대표하는 기쿠치 히데유키의 조합은 하드고어 쟝르에서 뚜렷한 두각을 나타내며 그 위치를 공고히 하게 됩니다. 만약, 뱀파이어 헌터 D가 좀 더 늦게 애니메이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카와지리 감독의 작품으로 등장했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을까요. 이러한 의문의 답은 비로소 2000년에 들어서야 그 해답을 보여주게 됩니다.

'수병위인풍첩(1993)'으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은 카와지리는 90년대 말부터 서서히 해외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선배격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데자키 오사무 감독(데자키 오사무 감독은 카와지리의 스승인 린 타로 감독과 함께 테즈카 오사무의 제자였지요. 무협소설로 치면 사숙이라 할 수 있겠군요.)도 해외진출을 했었으나, 그것이 북미에서의 러브콜이 아닌 잇단 흥행실패로 인한 도미였던 것에 비해 카와지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북미의 인지도가 꽤 높은 편이었지요. 그리고, 미일 합작 애니메이션의 감독으로 낙점되면서 그가 선택한 작품이 바로 뱀파이어 헌터 D인 것입니다. 북미에서 인기가 높았던 원작 소설과 북미에서 인기가 높은 아니메 감독의 만남, 거기에 원작자인 키쿠치와 절친한 친구라는 점에서 뱀파이어 헌터 D는 카와지리 감독의 북미권 데뷔로서는 더없는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로 인해 수천년간 인간과 뱀파이어의 경계에서 고독한 방랑을 해온 사나이가 마침내 15년만에 스크린으로 부활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뱀파이어 헌터 D: Bloodlust(2000, 이하 블러드러스트)'인 것입니다.

소설 뱀파이어 헌터 D의 세번째 에피소드 '妖殺行(Demon Deathchase)'를 영화화한 블러드러스트는 기획 단계부터 해외시장을 목표로 했기에 보통의 아니메와는 달리 외국인 스탭들이 작품에 대거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그로 인해 성우 캐스팅에 애초부터 외국인이 기용되어 연기를 펼쳤다는 것이 이색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더빙판에 비해 성우들의 연기는 작품과 좋은 매치업을 보여줍니다. 이제까지의 영어 더빙판 아니메의 경우, 아무래도 성우들의 연기력이나 동화와의 동기화 부분에 있어서 원 성우에 비해서 그닥 좋은 점수를 주기가 어려웠는데요. 그에 비해서 이 작품에서의 성우들의 연기력은 합격점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일본어로 아니메를 계속 보아온 팬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거슬리거나 위화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북미 아니메 팬들에게는 이때까지의 더빙판에 비해서는 확실히 좋은 느낌을 주었을 듯 합니다. 다만, 일부 격한 감정을 표출하는 대사에서도 읊조리는 듯한 톤으로 연기를 하여 왠지 답답한 느낌이 드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수병위인풍첩부터 카와지리의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해낸 미노와 유타카가 이번에는 카와지리식 스타일에 아마노 요시타카의 몽환적이면서도 탐미적인 D의 모습을 꽤나 훌륭하게 녹여낸 점은 이 작품의 백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뿐만 아니라 뱀파이어인 마이어나 카밀라의 귀족스러움과 괴기스러움이 혼재된 모습, 마커스 형제의 개성 넘치는 모습이나 바르바로이 일족의 흉측한 모습 등은 제각각 멋진 개성을 뽐내고 있죠. 스파게티 웨스턴과 고딕 스타일, SF와 판타지를 오가는 기묘한 크로스오버적인 배경의 묘사, OVA에 비해 격상된 퀄리티와 이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CG들, 그리고 이런 비쥬얼을 멋지게 살려주는 음악 등이 한데 어울린 블러드러스트는 하이 퀄리티의 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 2001 FILMLINK International/HIDEYUKI KIKUCHI/ASAHI SONORAMA/VAMPIRE HUNTER D Production Commitee

그림 3. 뱀파이어 헌터 D: Bloodlust 스틸 컷.


3. 멋진 구성과 고급스러운 연출, 하지만 2% 부족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원작의 경우에는 마커스 형제에게 스토리의 중심이 가있는 상황에서 D가 해결사로서 역할을 하는 형태로 전개가 됩니다. 여러 에피소드 중 하나인 이번 편에서는 주인공 D가 조금 뒤로 물러가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나, 극장판으로 이식되면서 스토리는 조금 수정이 가해지게 됩니다. 그 결과 D와 마커스 형제의 이야기가 비슷한 비중으로 맞춰지게 됩니다. 2시간 남짓한 이야기 길이 속에서 이 역할 분배는 나름 좋은 비율을 보여주는 듯 싶습니다. 역시 카와지리 감독이 톱 클래스의 연출가임을 보여주는 일례라고 할 수 있겠죠.

이전까지의 매니아적인 작품 색체(폭력미학의 대가라는 별명답게)는 북미시장을 공략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서 좀 더 대중적인 모습을 취할 수 밖에 없었기에 순화된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많은 카와지리 감독의 팬들이 상당수 이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꼈던 것 같군요. 거기에 무언가 2% 부족한 액션 덕에 고급스럽고 멋진 비주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조금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을 줍니다. 사실 스토리의 전체적인 균형적인 측면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보여짐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심심한 뒷맛은 카밀라와 D가 맞대결을 펼치는 클라이막스 씬까지 주욱 이어지게 됩니다.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작품 내 액션 씬의 비중이 적었다기 보다는 액션 자체, 특히 주인공인 D의 액션 장면이 동적인 부분보다는 정적인 씬에 대부분 머물러 있던 결과가 아닐까 싶은데요. D의 부족한 액션을 마커스 형제가 나누어서 담당하다보니 스토리의 균형과는 별개로 D의 역할은 더 축소되어 보이고 결과적으로 액션이 필요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액션이 부족한 작품으로 인식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는 한정된 셀 안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특기로 삼았던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액션 연출이 근래의 다이나믹한 액션씬에 비해 역동적인 맛을 못살리면서 생기는 아쉬움은 아닌가 합니다. 리미티드 기법의 대가답게 카와지리 감독 또한 정지영상 컷의 감각적인 배치나 광원 연출, 배경의 활용 등을 통해 멋진 액션 장면을 구현해 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고급스러운 연출 방식은 이 블러드러스트 내에서도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고 있구요. 하지만, 근래의 애니메이션 상당수가 상당히 역동적인 액션샷들을 구사하고 있기에 이러한 부분은 조금은 시대착오적인 생각도 드는군요. 그래서인지 카와지리 감독의 신작 '하이랜더(2007)'의 경우는 블러드러스트보다 훨씬 역동적인 장면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비주얼과 이야기가 보여준 블러드러스트의 멋과 완성도는 인상적입니다. OVA의 경우 D의 진정한 활약은 클라이막스에서나 펼쳐지며, 그의 출생에 얽힌 비밀까지 살짝 드러나 드라마틱한 클라이막스를 보여줍니다. 블러드러스트 역시 카밀라와의 대결에서 D의 출생의 비밀이 살짝 선보이며 드라마틱한 결말로 향하게 되는데요. 마이어 백작과 샬롯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가 작품의 메인 테마이기에 이번 시리즈는 전반적으로 D가 주인공이 아닌 마이어와 샬롯이 주인공인 이야기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다만, 이루어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의 테마가 전반적으로 흡입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이는 소재 자체의 진부함도 있겠지만, 원체 스토리 자체가 애틋한 러브 스토리에 초점을 맞추기에는 깊이가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이 원인이 아닌가 싶군요.

ⓒ 2001 FILMLINK International/HIDEYUKI KIKUCHI/ASAHI SONORAMA/VAMPIRE HUNTER D Production Commitee

그림 4. 뱀파이어 헌터 D 스틸 컷.


4. 속편의 가능성은?

사실, 개인적으로는 D가 TV 시리즈 형태의 장편으로 등장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극장판으로서의 완성도는 물론 훌륭했지만, D의 출생의 비밀과 같은 부분이 좀 더 심도있게 다루어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단편으로는 부족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런 단편 에피소드 중의 하나로 이 블러드러스트가 아니메화되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입니다.

현재까지도 계속적인 연재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D의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원작 자체의 고딕스럽고 웨스턴스러운 독특한 느낌, 그리고 아마노가 창안해낸 몽환적인 캐릭터가 기실 아니메로 제작하기에 다소 부담스러운 작품일지도 모르겠군요. 카와지리 감독 정도의 느낌을 주지 못한다면 섣부른 아니메 프로젝트는 오히려 D의 이미지를 망칠 우려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 때문에 더 이상 후속 논의가 없는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팬으로서 언젠가 다시 등장할 D의 속편은 꽤나 기대되는 기다림이라 하겠습니다. 그동안 만들어진 두 편의 작품이 모두 조금씩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언젠가 등장할지 모르는 다음 속편은 부디 전보다는 더 나은 모습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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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2007년 12월 28일, 엘로스의 네이버 블로그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에 작성된 리뷰 "큐티 하니 vs 큐티 하니 vs 큐티 하니"를 본 블로그로 옮긴 글입니다.


ⓒ LATERNA·TOEI Video·GAINAX·TOWANI


<정보>

◈ 원작: 나가이 고
◈ 감독: 사타라 히로시/카츠마타 토모하루 (큐티 하니, 973년 TV 시리즈), 나가오카 야스치카 (신 큐티 하니,1994년 OVA), 사사키 노리요 (큐티 하니 플래쉬, 1997년 TV 시리즈), 안노 히데아키 (Re:큐티 하니, 2004년 OVA)



<시놉시스>

시스터 질이 이끄는 정체불명의 조직 팬더 크로(원작명칭: 판사 크로), 그들이 노리는 것은 키사라기 박사가 발명한 공중원소 고정장치(‘Re:큐티하니’에서는 I 시스템)로, 엄청난 파워를 갖고 다양한 변신이 가능한 꿈의 장치이다. 키사라기 박사는 팬더 크로에 의해 죽기 전 공중원소 고정장치를 자신이 개발한 안드로이드 소녀 키사라기 하니에게 장착을 시키고 숨을 거둔다. 

키사라기 박사의 원수를 갚고 팬더 크로의 야망을 분쇄하기 위해 키사라기 하니는 사랑의 전사 큐티 하니로 변신하는데... (‘신 큐티하니’는 원작의 내용과는 다른 내용으로 진행되며, 다른 리메이크 작들도 원작의 내용에 각색을 가하여 조금씩 내용상의 차이가 있음.)


1. 시대를 앞서간 나가이 고의 섹시 코드, 등장하다.

큐티하니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삼십여 년 전 작품으로, '마징가Z', '그렌다이저', '겟타로보'와 같은 70년대 수퍼로봇물의 아버지인 나가이 고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가이 고, 70년대 유소년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준 만화가는 전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일본 만화영화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지만, 원래 그의 작품은 유소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코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징가 Z와 같은 그의 인기작도 원작 자체는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잔혹하거나 성적인 코드들이 많이 등장하며(사실, 애니에서도 로봇의 입에서 피 같은 기름을 뿜어내거나 팔이 뜯겨지는 장면들은 대상이 인간이 아닐 뿐, 잔혹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데빌맨(1972)’이나 ‘바이올런스 잭(1988)’과 같은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만화영화들은 그야말로 잔인함과 선정적인 묘사의 극을 달리며, 그를 ‘하드고어 장르의 개척자’로 불리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해주고 있지요.

이번에 얘기할 작품 ‘큐티하니’는 3번의 리메이크, 1번의 실사영화화를 거쳐 일본에서 TV 드라마까지 방영되었으며, 주제가도 만화영화가 리메이크 될 때마다 리메이크 되더니 결국은 한국에서까지 가수 아유미 양이 리메이크 하는 등,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섹시 변신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합니다.(원작 만화는 섹시코드가 도를 지나쳤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그의 표현방식만으로 그의 작품을 평가절하할 의도는 없으니 오해 마시길.)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이런 전설적인 큐티 하니의 최초부터 현재까지를 조금씩 살펴보면서, 나가이 고 선생이 창조한 섹시 변신물의 전설이 어떻게 변천이 되어 왔는지를 한 번 살펴보려 합니다.
 
그림 1. 좌측부터 '아바시리 일가', '파렴치 학원', '큐티 하니', '바이올런스 잭'의 코믹스 표지.


2. 성인들을 위한 변신소녀물? 70년대의 문제 소녀 큐티 하니

‘파렴치 학원(1968)’ 같은 작품(코믹스. 애니메이션화 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듯.)으로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마징가 Z (1972)’로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은 나가이 고의 변신소녀물 ‘큐티 하니’. 60~70년대의 변신소녀물이 ‘요술공주 샐리(1966)’ 시작으로 하여 액션성을 배제한 비폭력성과 소녀적 취향 및 감성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큐티 하니’는 최초로 변신소녀물에 액션장르를 결합한 작품입니다.(결국, 세일러 문의 할머니뻘 되는 셈입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큐티 하니는 꽤 기념비적이고 선구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습니다만, 나가이 고의 작품세계는 그것을 한 차원 뛰어넘은 것이었으니, 바로 선정적인 장면이 방영된 최초의 TV 시리즈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성적인 표현수준이 매우 높은 일본이지만,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표현방식은 TV에서는 허용되기 힘든 시절이었고, 이때 등장한 나가이 고의 ‘큐티 하니’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면, 즉 여성의 가슴을 노출하거나, 옷이 벗겨지면서 변신하는 센세이션 한 장면 등을 보여줌으로써, 일대의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덕분에 시청자의 항의로 조기 종영되었다는 군요. 그래도 25화나 방영했답니다, 볼 거 다보고 종영한 셈이군요.)

게다가 그 표현 수준은 TV 방영을 위해 원작인 코믹스(전 4화 발간)에 비해 파격적으로 낮춘 것이라니 원작의 포스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만, 반사회적이거나 세기말적 요소를 담고 있는 기존의 나가이 고의 작품에 비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코믹한 요소가 주를 이루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벼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앞서간 작품 소재는 어지간한 명작 만화영화들도 두어 번 밖에 리메이크가 되지 않았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무려 5번이나 리메이크(영화, 드라마 포함) 되는 진기록을 세우게 됩니다.(역시 선정성은 시대를 넘어서도 통용이 되는 것 일까요.)

ⓒ DYNAMIC Pro·TOEI Animation

그림 2. 73년작 큐티 하니 TV 시리즈의 장면. 70년대 TV 만화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나오다니... 당시로서는 파격 그 자체.


3. 소녀의 귀환, 글래머러스한 섹시미녀에서 꽃 같은 미소녀까지

수많은 화제를 뿌리고 전설의 작품이 되어버렸던 ‘큐티 하니’는 90년대 복고주의 열풍을 타고 다시 한 번 섹시한 바람을 몰고 옵니다. OVA로 재 제작된 94년작 ‘신 큐티하니’는 원작자 나가이 고가 캐릭터 원안에 참여하고 여전히 멋진(?) 변신장면을 앞세워 한껏 기대치를 올려주긴 했으나, 제작단계에서부터의 잘못된 기획으로 이야기 전개가 무너지면서 용두사미 격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4화로 기획했으나 인기가 높자, 12화로 재기획했다가 판매율이 떨어지니 8화로 급히 마무리. 베스트 아니메 참조.)

스토리 라인은 지금까지 리메이크 된 작품 중에서는 가장 엉성합니다. 원작의 스토리가 아닌 오리지널 스토리로 진행하면서, 앞부분을 급격히 생략하고 갑자기 하니가 등장하여 원작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인물구도를 알지 못한 체 작품을 감상해야 하는 불편함을 주었고, 작화 퀄리티는 높아졌으나, 디자인(메카닉, 의상, 색감 등)은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을 준 아쉬운 작품이었죠.(물론, 십수 년이 지난 지금에 평가하다 보니 지금의 관점이 선입견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 NAGAI GO/DYNAMIC Pro·TOEI Animation

그림 3. 94년작 '신: 큐티하니'의 오프닝 스틸컷. 개인적으로 네편의 큐티 하니 오프닝 중에서는 제일 좋아하는 오프닝.

그래도 희대의 변신씬이나 나가이 고 다운 장면들, 로켓펀치를 발사하는 응큼한 할아버지(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군요.)이나 데빌맨과 닮은 조연급 캐릭터의 등장은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킬 만 했습니다. ‘복고주의의 조류 속에 원작의 포스를 등에 업고 재미 좀 보려 했던 작품’이라면 너무 혹독한 표현일까요. 오히려 전 원작의 흥행 포인트 중 하나인 선정적인 요소를 과감히 제거하고, 기존의 미소녀 변신물의 공식을 그대로 적용한 97년작 TV 시리즈 ‘큐티 하니 플래쉬’를 OVA보다는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물론, 제가 좋아라하며 본 것은 OVA 였습니다만, 쿨럭.)

물론, ‘왕자스러운 꽃미남 캐릭터와 그를 사모하는 여주인공’은 이미 너무 많이들 사용한 설정인데다가 90년대의 빅히트작 '세일러 문' 시리즈의 아류라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한 모습 등 그 발상은 참신하지 못했지만, 나가이 고 원작의 특징이었던 괴기스러운 캐릭터와 흥행 포인트였던 선정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주인공인 큐티 하니만을 가져와 변신소녀물의 원래 시청층이었던 소녀들의 취향에 맞는 마법소녀 스타일로 각색하여 나름의 완성도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변신소녀물의 새장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지 못하고 결국은 아류작의 스타일로 재기하는 비운의 복귀. ‘큐티 하니’의 리메이크는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 했습니다.

ⓒ DYNAMIC Pro·IISAKA YUKAKO·TOEI Animation

그림 4. 97년작 '큐티 하니 플래쉬'의 오프닝 스틸컷. 소녀물로의 전환을 짐작할 수 있다.


4. 소녀, 패러디의 귀재 안노 히데아키와 조우하다.

‘왕년의 섹시 여가수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복귀를 시도했으나, 복귀앨범은 볼거리만 신경을 쓴 나머지 잠깐 반짝하다가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재차 내놓은 앨범은 흥행을 고려한 나머지 그녀만의 색깔을 잃고 말았죠. 그렇게 첫 번째 복귀에서 쓴 잔을 마셨던 그녀, 이번에는 흥행의 귀재라는 모 프로듀서와 함께 다시 전성기의 그녀를 연상시키는 듯한 섹시함과 함께 나이를 잊은 듯한 발랄함으로 돌아옵니다. (중략)’

큐티 하니와 안노 히데아키 감독과의 만남을 ‘전설적인 섹시가수의 복귀 스토리’라는 소재로 바꿔서 기사를 쓴다면, 이런 전개가 될까요.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감성을 가진 안노 감독은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하니의 매력을 남김없이 모두 발산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에 맞는 발랄하고 정열적인 소녀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게 됩니다.

가이낙스만의 화려하고 현란한 비주얼은 특히나 ‘Re: 큐티 하니(2004)’에서는 원색적인 색감과 극단적인 만화적 연출력까지 곁들여져, 혹자가 말하듯 키치적인 요소를 화면 가득 페로몬처럼 뿌리고 다닙니다. 게다가, 나가이 고만의 괴기스러운 캐릭터는 이러한 키치적인 요소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찰떡 궁합을 선보였던 것이죠. 70년대의 문제작을 90년대의 문제아 감독이 복귀작으로 골라 21세기에 연출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을까요. 오타쿠의 정점에 올라 오타쿠의 문화를 정면으로 부정했던 안노 감독의 복귀작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오타쿠적인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나 ‘톱을 노려라, 건 버스터’ 등에서 익히 보여준 그의 절묘한 패러디 연출력은 아예 리메이크 임을 대놓고 표명한 이 작품에서는 마치 물을 만난 고기 마냥 생동감 넘치는 꿈틀거림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런 안노 감독의 힘으로 인해 그녀는 30여 년이 지나 다시금 화려한 부활의 서곡을 알리게 됩니다.
 

ⓒ LATERNA·TOEI Video·GAINAX·TOWANI

그림 5. 2004년작 'Re:큐티 하니'의 오프닝 컷. 복고와 미국식 코믹스, 그리고 가이낙스 스타일의 집대성. 과장과 함축이라는 만화적 표현이 잘 살아 있는 스피디하고 경쾌한 오프닝.


5. 실사영화를 거쳐 TV 드라마까지... 그녀는 계속 변신한다.

하니의 변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욕심 많은 안노감독은 그녀를 실사영화에까지 등장시키게 되죠. 그라비아 모델 출신의 사토 에리코를 주연으로 기용한 실사판 ‘큐티 하니’를 애니메이션과 함께 동시 제작하는 괴력을 보여준 안노 감독, 게다가 90년대 작품에서는 그저 그렇게 리메이크 되었던 주제가 ‘큐티 하니’ 역시 일본의 대표 섹시 여가수 ‘코다 쿠미’에 의해 멋지게 재탄생 하게 됩니다.(코다 쿠미의 리메이크 곡은 실사판과 애니메이션에 모두 사용됩니다.)

실사판에 대한 평가는 제가 앞머리 5분만 본 다음 후다닥 꺼버린 관계로 본문에서는 평을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만, 극도의 키치적인 설정이 실사판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유치한 아동용 특촬물을 보는 듯한, 어떤 면에서는 괴작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주인공의 속옷씬이 자주 나오니 아동용은 물론 아니겠지만.) 마찬가지로 키치적인 느낌이 강렬했던 할리우드 영화 ‘오스틴 파워’ 시리즈와 비교해도 좋을 듯 하구요.

☞ 큐티 하니 실사판 리뷰: 괴작열전 No.55 큐티 하니 by 페니웨이, 페니웨이(TM)의 In This Film

그녀의 복귀는 이 정도로만 끝나지 않고 TV 드라마로까지 부활하며, 새로운 ‘큐티 하니’의 전성시대를 예고합니다. 이 기세라면 헐리우드의 러브 콜도 한 번 기대해봄직 하군요.(‘드래곤 볼’까지 실사영화로 리메이크되는 이 마당에 ‘큐티 하니’는 꽤나 구미가 당기는 소재임에는 분명합니다만.)

물론, 그녀의 계속적인 등장이 반드시 좋은 모습만을 보여 준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녀는 분명 좋은 의미보다는 안 좋은 의미에서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캐릭터임은 분명하니까요. 그러나, 그녀가 30여 년 동안 등장한 오프닝에서 항상 읊어대던 그 대사 ‘かわるわよ(카와루와요: 바뀔 거예요)’처럼 앞으로도 계속 변신하는 그녀를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임에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 GAINAX·WoWow (좌) / ⓒ NAGAI GO·ブロ―ドマ―クス·デイ―ブサイド·ハニ―製作委員會 (우)

그림 6. 큐티 하니 실사판(좌) 과 큐티 하니 드라마 DVD 커버(우)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애니메이션 영화 리뷰 모아요~]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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