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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던 안노 감독의 이력

안노 히데아키 감독. 생긴 것도 범상치(?) 않다.

마전 '마크로스와 에반게리온의 데자뷰... 반복된 선라이즈의 폭주'라는 포스트를 통해서 기동전사 건담으로 로봇 아니메의 전성기를 가져왔던 선라이즈에게 대항했던 걸출한 두 작품 마크로스와 에반게리온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 두 작품 덕에 선라이즈는 각각 80년대 초중반과 90년대 중후반 두 차례에 걸쳐 엄청난 양의 수작들을 쏟아내는 이른바 대폭주를 시작하기에 이르렀었죠.

특히, 이 두 작품의 경우에는 당시 아니메를 이끌던 거장이 주축이 아닌, 젊은 신예 애니메이터들의 힘으로 일구어 낸 것이기에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는데요. 마치 기성세대의 아성을 뛰어넘은 신세대의 모습과도 같았던 이 두 명의 인물들이 바로, 현재에는 아니메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카와모리 쇼지(마크로스 원안/감독/메카닉 디자인. 연출가 겸 메카닉 디자이너)와 안노 히데아키(에반게리온 감독/각본/메카닉 디자인. 연출가 겸 애니메이터)인 것입니다.

특히, 안노 감독의 경우에는 젊은 애니메이터들의 손으로 만든 이 마크로스 TV 시리즈에 강렬한 공감대를 형성, 대학을 자퇴하고 상경하여 원화맨으로 참여하기까지 하는데요. 이렇게 안노 감독은 애니메이터로서 마크로스를, 그리고 연출가로서 먼 훗날 에반게리온을 만들게 되면서, 로봇 아니메의 철옹성 선라이즈가 깜짝 놀랄 정도의 걸작이었던 두 작품에 모두 참여하는 이력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마크로스 TV 시리즈 참여 당시의 안노 감독은 수많은 원화맨 중의 하나인 일개 애니메이터일 뿐이었습니다. 비슷한 연배의 카와모리 쇼지는 그 재능을 인정받아 마크로스의 원안과 후일 극장 아니메의 공동연출, 그리고 메카닉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천재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지만, 보통 20대의 나이에 그런 식으로 아니메 업계에 입문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었고, 보통은 안노 감독처럼 이름없는 원화맨이나 동화맨으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죠.

그러나, 역시 인재는 인재였던 걸까요. 마크로스가 종영된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제작되는 한 작품을 통해 안노 감독의 역량은 아니메 업계에서 인정을 받기에 이르릅니다. 그것은 바로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설의 시발점이 된 작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였습니다.

©1984 Nibariki · Tokuma Shoten · Hakuhodo


국내에 발매된 나우시카의 DVD 영상특전을 보게 되면, 당시 거의 무명이다시피했던(81년 DAICON 3라는 아마츄어팀의 프로젝트 영상을 제작한 것과 마크로스 TV 시리즈의 원화맨으로 참여한 것 외에는 이렇다할 이력이 없는) 안노 감독은 당시 자신이 그렸던 그림들을 들고 미야자키 감독에게 찾아가 막무가내로 들이밀었다고 회상하고 있는데요. 미야자키 감독은 그의 범상치 않은 실력을 알아보고 전격적으로 그를 기용하기에 이르릅니다. 그리고, 햇병아리 신예 애니메이터였던 안노 감독은 이 작품에서 아래와 같은 희대의 씬을 그려내게 되는 것이죠.

©1984 Nibariki · Tokuma Shoten · Hakuhodo


도르메키아 군의 공주 크샤나가 폭주상태로 바람계곡으로 질주하는 거대곤충 오무들의 진군을 막기 위해 부활시킨 거신병이 아직 불완전한 상태로 오무의 대군에게 빔병기를 뿜어내던 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거대한 스케일의 클라이막스 씬은 초짜 애니메이터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박력과 퀄리티를 보여주며, 안노 히데아키를 주목받는 신예 애니메이터로 떠오르게 만듭니다.

당시 일본 최고의 액션작화가로, 스페셜 애니메이터로 추앙받고 있던 故 카나다 요시노리가 작품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중요한 라스트 씬을 일개 신참이었던 안노 감독이 그렸다는 사실은 굉장한 의외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아마도 이 씬을 연출할 당시 카나다 요시노리가 모종의 이유로 인해 더이상 나우시카의 작업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안노 감독의 이름을 아니메 업계에 결정적으로 각인시켜 주게 되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려준 기회는 아니었을까 싶군요.

하여간에,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아니메 업계에 심어준 그가 참여했던 다음 작품이 바로 수개월 뒤 개봉하게 되는 마크로스 시리즈의 극장판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계십니까(1984)'였던 것입니다.

ⓒ Big West ⓒ 1985 Harmony Gold USA Inc / Tatsunoko


이미 TV 시리즈에서 원화맨으로 참여하면서 마크로스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던 안노 감독이었지만, 당시에는 이름도 없는 신참 애니메이터였던 그는 TV 시리즈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20여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인정해줄 수 밖에 없는 절정의 작화 퀄리티를 보여준 이 극장판에서 또 한 번 애니메이터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게 됩니다.

ⓒ Big West ⓒ 1985 Harmony Gold USA Inc / Tatsunoko


후일 '민메이 어택'이라 불리게 되는 히로인 민메이의 노래와 함께 이타노 이치로의 유명한 유도 미사일 씬이 박진감 넘치게 펼쳐지면서 주인공 히카루의 발키리가 적의 심장부로 돌진하는 이 클라이막스 씬은 '이타노 써커스'라고 불리는 미사일 액션의 정수를 보여주었는데요. 그런데, 이 씬을 아주 자세하게(정말, 진짜로 엄청나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위의 스틸 샷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아주 진귀한 컷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미사일 세례 속에 갑자기 등장하는 '타코 파이(문어 파이?)' 자판기, 그리고 라스트를 장식하는 버드와이저 맥주 캔의 등장... 제가 이 극장판을 접했던 85년도 당시는 지금과 같은 디지털 매체가 아닌 VHS 비디오 같은 아날로그 매체가 주를 이루던 시대였는데, 마크로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제 친구가 이 장면에 흠뻑 빠져 슬로우 비디오로 몇 번씩이나 틀어보던 중 바로 이 엄청난 장면을 접하게 된 것이었죠. (여담이지만, 이 장면을 보려고 몇 번씩이나 비디오를 되감고 슬로비디오로 틀고 하는 통에 그 친구가 애지중지하던 마크로스 극장판 비디오는 결국 테이프가 늘어져버려 이 씬이 나오는 필름 부분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이 글을 쓰기 위해 DVD를 틀어놓고 캡쳐를 시도했는데,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통에 Power DVD의 슬로우 모션으로도 캡쳐가 용이하지 않았고, 곰 플레이어로 프레임 단위로 시도한 캡쳐도 정말 어렵게 캡쳐가 가능할 정도였으니, 당시 VHS 비디오로 이 장면을 발견한 그 친구의 열정에는 지금도 경의를 표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으면 말입니...

어쨋든 간에, 이 희대의 숨겨진 씬은 후에 아니메 잡지, 아니 아마 마크로스 설정집에서 완벽하게 캡쳐가 되어 팬들에게 공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타노 써커스라고 알려진 이 희대의 미사일 씬에서 저런 위트를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은 당시의 스탭 중에서는 아마 안노 감독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죠. (어디선가 안노 감독이 이 장면을 그렸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는데, 정확한 증거 자료를 찾을 수가 없기에 일단 추측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서 안노 감독이 보여준 인상적인 애니메이터로서의 기량을 보면서 우리는 국내의 모 애니메이션 전문가 분(굳이 언급하자면 송락현님)의 말마따나 그가 만약 감독을 하지 않고 애니메이터로의 길을 계속 갔더라면, 故 카나다 요시노리, 이타노 이치로의 뒤를 있는 스페셜 애니메이터로서 그 이름을 날렸으리라는 꽤 신빙성이 높은 상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노 감독은 그로부터 몇 년 뒤 정말 애니메이터로서의 절정의 기량을 입증하는 한 괴물같은 작품의 작화감독을 맡게 되는 것이죠.

ⓒ 1987 BANDAI VISUAL / GAINAX


그렇지만, 애니메이터로서의 역량 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의 역량에서도 그는 확실히 일본 아니메를 대표하는 인물임에는 분명한 사실인 듯 합니다. 저 이타노 이치로조차도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아직도 저평가 되고 있을 뿐더러 건담의 전설적인 작화감독 야스히코 요시카즈조차 감독을 맡았던 작품들의 연이은 실패로 이제는 만화가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는 현실을 보면, 그가 보여준 수어 편의 작품들은 분명 그가 단순한 애니메이터 이상의 재능을 가진 인물임을 증명하는 것이랄 수 있겠지요. (단, 좀 외도가 많아서 작품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이 아쉽다면 아쉽다랄까요.)

40년대 생 거장들이 서서히 저물어 가고 50년대 생 감독들조차 예전과 같은 힘을 보여주지 못하는 현 일본 아니메 업계는 이제 60년대 생 감독들에게 그 바톤이 넘어가고 있지 않나 합니다. 이런 시대에 60년대 생을 대표하는 그의 멋진 작품을 다시 한 번 기대해 보겠습니다. 아, 일단 에반게리온 리메이크는 잘 마무리 하시구요. 부디 토미노 감독처럼 자신의 창조한 작품의 무게에 짓눌려 방황하지는 마시길.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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