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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EI Animation


<목차>



<서문>

번 시간은 판타지 연대기의 마지막인 동화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만화영화와 가장 훌륭한 궁합을 보여주었던 판타지는 사실 지금의 아니메에서는 과도한 변형과 일본식 재가공에 의해 그 본연의 맛을 살린 작품을 쉽게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부부터 4부까지 알아본 것처럼 수많은 판타지 장르의 작품들이 60년에 이르는 일본 아니메史의 한장을 당당히 장식할 정도로 음으로 양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지요. 한마디로 만화영화의 근간을 이루는 하나의 배경으로서 비록 장르적 영향력은 감소했을지언정 꾸준히 그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판타지 동화, 즉 동화라 일컫는 장르는 만화영화의 시작부터 함께 해온, 가장 만화영화와 판타지에 잘 어울리는 소재라고 할 수 있는데요.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의 만화영화는 (이전까지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주었던, 물론 여전히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만) 동화를 움직이는 영상으로 만들어내는데에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만화영화의 초창기는 동화가 소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만화영화에서는 판타지가 곧 동화이기도 했는데요. 이것은 디즈니 뿐만 아니라 일본 만화영화에서도 동일한 상황으로, 디즈니보다 후발주자였던 일본 만화영화는 초기에는 디즈니의 발자취를 쫓아 세계명작동화나 전설 등을 모티브로 한 전형적인 동화 판타지 형태의 작품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60년대에 이르러 테즈카 오사무나 요코야마 미츠테루, 이시노모리 쇼타로 같은 인기 일본 만화가들의 등장으로 일대 전환점을 맡게 됩니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세계명작동화와는 다른 자신만의 오리지널 스토리로 만화를 펴내어 아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결국 만화영화에까지 옮겨져 일본 만화영화가 디즈니의 스타일을 버리고 스스로의 색깔을 갖추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 시점부터 동화 판타지가 서서히 일본 만화영화계에서 힘을 잃기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 판타지는 여전히 판타지 세계를 대표하는, 그리고 만화영화를 대표하는 간판 장르이기도 합니다. 특히,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에 의해 동화 판타지는 자국 내에서의 이같은 트렌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 가장 큰 흥행기록을 세운 작품(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원령공주, 하울의 움직이는 성)들을 보유한 장르이기도 하지요. 뿐만 아니라 아니메 사상 처음으로 아카데미에서 상을 수상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아니메의 위상을 떨친 장르 역시 동화 판타지입니다. 60년이라는 일본 만화영화의 역사의 첫걸음부터 같이 걸어왔던 동화 판타지, 그 이야기를 끝으로 판타지 아니메 연대기의 대단원을 내려보고자 합니다.


디즈니를 바라보았던 도에이의 꿈, 아니메로 바톤 터치되다.

본이 만화영화를 시작하던 1950년대 후반부의 세계 만화영화는 월트 디즈니가 석권하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것은 즉, 일본이 만화영화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기준점이자 레퍼런스로,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들이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인데요. 실제로 '일본 만화의 신'이자 '일본의 월트 디즈니'라는 칭송(물론,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을 듣게 되는 테즈카 오사무라든지, 일본 만화영화 감독으로 아카데미 상까지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를 비롯한 당대의 일본 애니메이터들이 디즈니의 작품들을 흠모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도 합니다. 결국, 초기 일본 만화영화의 스타일은 디즈니의 것을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아직은 오리지널 창작 작품을 만들 여력이 없던 당시의 상황에서 만화영화는 자연스럽게 세계명작동화나 전래동화, 옛날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을 수 밖에 없었으며, 세분화된 만화영화 팬층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에 당연히 만화영화는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전연령가 형태의 작품들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동화 속의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소재로 한 동화 판타지들이 일본 만화영화의 서장을 수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2부 오리엔탈 판타지 아니메 이야기에서 소개된, 일본 최초의 상업용 극장 만화영화 '백사전(1958)'이라든지, 테즈카 오사무와 도에이 동화가 힘을 합친 '서유기(1960)', '신밧드의 모험(1962)', '개구쟁이 왕자의 왕뱀퇴치(1963)'와 같은 일련의 도에이 극장 만화영화는 모두 동화 판타지의 성격을 가진 작품입니다. 더군다나 신밧드의 모험과 같은 일부 작품들은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는 등, 당시 일본 만화영화는 첫시작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좋은 흐름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저에는 자국의 제품이나 컨텐츠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려하는 일본인들의 민족주의적 태도도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았나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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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동화 판타지의 약진은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자국의 오리지널 코믹스를 기반으로 한 만화영화들이 인기를 끌면서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즈음에 테즈카 오사무가 자신의 작품인 '철완 아톰(1963)'을 도에이 동화와 같은 거대 제작사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제작사를 차려 직접 제작하게 되는데요. 영세한 제작력과 부족한 인력을 가지고 있던 당시 테즈카 오사무의 무시 프로덕션은 이러한 인적자원으로 TV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리미티드 제작기법을 창안해내게 됩니다. 디즈니의 풀프레임의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답습하고 있던 당시의 일본 아니메 업계에 편당 동화매수를 획기적으로 줄인 리미티드 아니메는 극장 아니메보다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TV 시장에서 큰 호평을 얻게 됩니다. 여러 면에서 디즈니에 비해 열악했던 당시의 일본 아니메 업계에 리미티드 기법은 분명 낮은 제작비로도 만화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죠.

물론, 후일 이러한 리미티드 제작기법의 도입은 일본 애니메이터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이끌어내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만, 일본 만화영화가 디즈니에 비해 열악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많은 수의 작품을 제작하게 되는 환경적인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부정과 긍정의 두가지 측면을 보유하게 됩니다. 한편, 리미티드 기법을 이용해서도 경쟁력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음을 깨달은 도에이 동화는 이로 인해 풀 애니메이션과 세계명작동화로 대표되는 자사의 A 스튜디오의 폐쇄를 결정하고, 리미티드 제작기법과 일본 오리지널 코믹스를 기반으로 하는 B 스튜디오 극장 아니메를 주력으로 선택하게 되는데요. 바로 이 시기, 도에이 동화의 노조를 이끌던 타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는 A 스튜디오 폐쇄에 맞서 노조만의 힘으로 대작 판타지 동화 애니메이션을 완성시키게 되니 이것이 바로 저주받은 걸작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인 것입니다.

A 스튜디오의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해도 될 이 작품은 작화 매수 150,000매(상영시간 82분으로, 분당 1,830매, 초당 30여장이 사용된 진정한 풀 애니메이션. 보통 풀 프레임이라하면 1초에 24~30장이 사용되는 것을 말함)에 달하는 대작 애니메이션으로, 일본 풀 애니메이션의 정수를 담아낸 애니메이터들의 긍지의 작품이기도 했지만, 당시 불안정한 일본 사회분위기 속에서 홀로 극장가에 등장한 무리한 개봉일정은 풀애니메이션의 퇴장을 알리는 전조와도 같은 것이었고, 당연한 듯 이어진 흥행 대참패는 이후 수많은 인재들이 도에이 동화를 떠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1] 참조) 창작의지만이 작품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 속에 등장했던 이 작품의 몰락은, 자연스럽게 일본 만화영화계에서 동화 판타지의 퇴장을 예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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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츠노코와 닛폰 애니메이션의 등장, 아직도 시들지 않은 동화 세상. 

'징가 Z(1972)'라는 희대의 작품의 등장과 함께 70년대 일본 만화영화는 TV 시리즈의 전성기로 접어듭니다. TV 시리즈의 등장은 여러모로 명작동화들을 모티브로 했던 극장용 만화영화의 축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극장에 가서 돈을 지불하고 봐야하는 장소적 제약을 가진 극장 만화영화에 비해 TV용 만화영화는 (시청료는 내지만) 영화보다는 금전적 부담이 없고, 게다가 집에서 볼 수 있는 편리함까지 갖췄던 것이죠. 마징가 Z를 필두로 한 오리지널 만화영화의 등장과 함께 극장용 만화영화 역시 오리지널 작품 외에도 TV 시리즈를 편집하여 방영하는 추세가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TV 시리즈를 통하여 안정적인 고객층을 확보한 후, 이를 총집편 형태나 일부 에피소드를 극장용으로 편집하는 형태로 방영하여 제작비용 대비 흥행성과를 올리게 되는 것인데요. 이로 인해 극장상영으로만 선보이던 판타지 만화영화들은 어쩔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동화 판타지는 여러가지 의미있는 작품들을 내놓습니다. 테즈카 오사무 원작의 '바다의 트리톤(1972)'은 아틀란티스 대륙의 생존자인 트리톤이 돌고래를 타고 포세이돈 족과의 대결하는 판타지적 색체가 강한 모험극으로, 건담의 아버지인 토미노 요시유키의 감독 데뷔작으로도 유명한 작품입니다. 이보다 앞서서는 천사의 실수로 왕자로 태어나야할 아이가 공주로 태어나면서 벌어지는 중세왕국 시대의 모험이야기를 다룬 테즈카 오사무 원작의 '사파이어 왕자(1967)'가 등장하여 순정만화의 효시가 되었다는 평가와 함께 동화 판타지로서도 손색없는 이야기 구조를 보여주었지요. SF와 판타지를 가리지 않으며 넘나들었던 테즈카 오사무의 폭넓은 작품세계 덕분에 오리지널 아니메로 일본 만화영화 트렌드가 바뀌었음에도 이런 동화 판타지 작품들이 계속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만, 이는 이전의 풀 애니메이션 동화 판타지의 부활이라기보다는 일본 오리지널 동화 판타지의 새로운 탄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편, 요시다 타츠오, 요시다 켄지, 쿠리 잇페이 삼형제가 설립한 타츠노코 프로는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지 않은 오리지널 TV 만화영화를 만들어내면서 70년대 들어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개구리들이 사는 연못세상의 이야기를 현대사회에 대한 비유와 풍자를 섞어 만들어낸 명작 '개구리 왕눈이(1973)'나 4차원 세계의 대마왕에게 사로잡힌 여자친구를 구하는 소년의 모험 이야기를 다룬 '폴의 미라클 대작전(1976)'과 같은 매력적인 동화 판타지들은 바로 이 타츠노코의 작품이기도 하지요. 타츠노코에서 스튜디오 피에로로 이적한 토리우미 히사유키 역시 '닐스의 대모험(1980)'이라는 동화 판타지를 선보이기도 하는데, 타츠노코와 스튜디오 피에로는 오늘날 각각 히어로물의 본가와 마법소녀물의 본가라는 칭호를 듣는 제작사들로서, 동화 판타지와는 대치되는 일본 오리지널 만화영화 장르를 발전시킨 이들이라는 점에서 앞선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들처럼 새로운 일본식 동화 판타지를 보여준 사례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일본 오리지널 스타일의 동화 판타지들과 달리 과거 도에이 동화에서 명작동화 스타일의 만화영화를 만들었던 모리 야스지, 타카하타 이사오, 오츠카 야스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은 인물들은 도에이를 떠나 A 프로덕션을 거쳐 닛폰 애니메이션에 안착, 과거 도에이 동화 시절의 세계명작동화의 스타일을 발전시킨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를 선보이게 됩니다. 세계적인 명작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동화적 감성과 서정적인 터치를 펼쳐낸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는 비록 판타지와는 거리가 있는 장르였으나 일본 만화영화에 무국적 세계관의 동화라는 친근하면서도 독자적인 장르를 구축하며, 이후 스튜디오 지브리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장대한 동화 판타지의 토양과 양분이 되지요. 뿐만 아니라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는 비즈니스적 사정에 의해 세계명작 창작을 중지했던 도에이 동화에도 영향을 주어 세계명작동화라 불리는 일련의 극장 만화영화 시리즈를 전개하는데 있어서도 음으로 양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70년대 들어 그 주도권을 빼앗기긴 했지만 동화 판타지는 특유의 서정성과 친근함을 바탕으로 꾸준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80년대까지 흐름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 TEZUKA Production (좌) / ⓒ TATSUNOKO Production (중) / ⓒ STUDIO PIERROT (우)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비로운 세계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성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오리지널 아니메는 완벽한 장르적 완성을 가져오게 됩니다. 특히, '우주전함 야마토(1974)', '기동전사 건담(1979)'을 보며 자라온 일본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아니메의 주요 소비자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작품의 눈높이도 덩달아 고연령대의 높이로 뛰어오르게 되는데요. 이로 인해 80년대는 조숙한 만화영화들이 많았다고 해야할 만큼 동심과 상상력이 빛나는 작품보다는 치밀한 설정과 인간 드라마가 녹아들어간 작품들이 대거 제작되기에 이르릅니다. 물론, 이는 만화영화의 다양화 측면에서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낸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니메의 장르적 편중화 속에 동심을 자극하는 서정적 감성의 동화들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른 장르의 판타지 작품과 마찬가지로 동화 판타지도 이 시기에는 암울한 암흑기를 거치게 됩니다. 이즈음 일본 최대의 캐릭터 메이커 산리오와 테즈카 오사무의 후예들인 매드하우스 제작진이 힘을 합쳐 제작한 '유니코(1981)'는 기존의 동화 판타지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로, 테즈카 오사무의 스타일과 매드하우스만의 감성이 녹아든 독특한 형태의 동화 판타지를 선보이는데요. 특히, 산리오 그룹은 '별의 오르페우스(1979)'나 '시리우스의 전설(1981)'과 같은 초대작 스페이스 판타지를 선보이며, 일본 아니메 시장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기도 했지만, 완성도와는 달리 흥행에 연이어 실패하며 일본의 디즈니가 되고 싶었던 꿈을 접게 되지요. 

세계명작동화 시리즈로 동화 판타지의 마지막 끈을 놓치 않았던 도에이 동화는 '백조의 호수(1981)', '알라딘과 마법램프(1982)', '만화이솝 이야기(1983)'로 그 흐름을 계속 이어가지만, 결국 흥행 부재라는 숙제를 안고 시리즈의 대단원을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듬해 TV 시리즈로 선보인 '고깔모자 메모루(1984)'는 그동안 인기 원작만화의 판권을 사들여 작품을 제작했던 도에이가 선보인 이례적인 오리지널 아니메로서, 동화적인 비주얼과 귀여우면서도 일본적이지 않은 이국적인 캐릭터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작품이로 회자되기도 하지요.

ⓒ MADHOUSE (좌) / ⓒ TOEI Animation (중,우)


한편, 닛폰 애니메이션에서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를 선보이며 무국적 세계관과 이국적 스타일을 완성시킨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첫 극장연출작인 '루팡 3세 - 칼리오스트로의 성(1979)'를 바탕으로 극장 만화영화의 연출 노하우를 습득한 뒤, 84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를 통하여 스타 연출가로서의 인상적인 데뷔를 하기에 이르릅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미야자키가 보여준 놀라운 세계관, 서정적이고 세심한 작화, 역동적히고 박진감 넘치는 컷, 아름다운 음악, 환경 메시지 등은 스케일과 엔터테인먼트, 재미와 감동을 모두 담은 완성도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데요. 이것은 테즈카 오사무, 이시노모리 쇼타로, 요코야마 미츠테루, 나가이 고, 마츠모토 레이지로 이어져온 일본 오리지널 코믹스 기반의 아니메들과는 달리, 명작동화를 근간으로 했던 과거 도에이 A형 극장판에서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를 거쳐 진화해온 미야자키식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또 하나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미야자키의 이러한 스타일은 리미티드 아니메 기법의 여느 일본 만화영화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풀 애니메이션 기반의 유려한 움직임은 디즈니의 감성을 담고 있지만, 유럽식 풍취를 완벽하게 이식한 설정은 미국식 느낌과는 또다른 고전적 정취를 느끼게 해주지요. 여기에 미야자키만의 독특한 판타지가 가미되면서 서양도 아니고 동양도 아닌 무국적 세계관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굳이 비중으로 놓고 보면 서양적 감성에 가깝긴 하지만 미야자키의 이 무국적 세계관은 앞으로 그가 창작해내는 많은 이야기들의 하나의 공통적 스타일로 자리하게 됩니다.

나우시카를 기점으로 하여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가 주축이 되어 설립한 스튜디오 지브리는 이후 걸리버 여행기 3부를 테마로 한 '천공의 성 라퓨타(1986)'로 모험가득한 스팀펑크 스타일의 판타지를 선사하게 되구요. '이웃의 토토로(1988)'에 이르르면 서양적 스타일이 아닌 동양적 감성이 물씬 살아나는 이야기로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마녀 배달부 키키(1989)'에 이르기까지 미야자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동화 판타지는 SF와 장르물이 장악한 일본 아니메 시장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냅니다. 80년대 후반들어 일본 만화영화가 침체를 거듭하며 쇠락기에 접어들고 데자키 오사무, 토미노 요시유키, 야스히코 요시카즈와 같은 거장들이 차례로 실패의 쓴잔을 마시는 와중에서도 미야자키와 미야자키의 동화 판타지는 변하지 않는 티켓 파워를 보여주며 미야자키는 이후 일본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거장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 NIBARIKI・TOKUMA Shoten (좌,중) / ⓒ EIKO KADONO・NIBARIKI・TOKUMA Shoten (우)



노쇠하는 거장, 후계자가 없는 동화 세상의 미래는?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아니메의 침체기는 일본 아니메의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SF 장르의 몰락과 함께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깊이의 로봇 아니메가 사라지고, 용자 시리즈와 같이 다시 저연령대의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로봇 아니메가 부활하여 새로운 시청층을 공략했고, 이제 성인이 된 과거의 아니메 팬들을 위해서인지 복고주의가 아니메 업계에 불어오게 되지요. 이즈음에는 중세 판타지와 같이 판타지 계열의 아니메들이 좀 더 활발히 제작됩니다만, 결국 정통 드라마 형태로서 큰 인기를 얻지 못하자 코믹 요소를 적극 도입하면서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개그 바람을 타고 만들어진 '빨간망토 챠챠(1994)'나 '마법진 구루구루(1994)'와 같은 작품들은 중세 판타지의 설정에 동화적 스타일을 갖고 개그 코드를 적극 도입한 이색적인 작품들로 많은 사랑을 받게 되지요. (물론, 구루구루의 경우에는 동화라기보다는 엽기 컬트적인 작품이라고 보는편이 맞겠습니다만)

또한, 90년대 말에 등장한 '포켓몬(1997)' 시리즈나 '디지몬 어드벤쳐(1999)'는 판타지에서 볼법한 환상의 동물들을 게임 대전 방식의 이야기의 소환수로 등장시키면서 동화 판타지는 아니지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물론, 캐릭터적 매력은 커졌지만 예전의 드라마성이 상실된, 그저 동화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단조로운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 이러한 작품은 서서히 아니메의 트렌드가 인스턴트 스타일로 변질됨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정통 동화 판타지의 마지막 보루 스튜디오 지브리의 선전은 계속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붉은 돼지(1992)'를 통해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지브리의 또 한명의 거장 타카하타 이사오가 선보인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는 너구리를 소재로 한 일본적 색체가 강한 판타지물을 선보이게 되구요. 여기에 오랜 기다림 끝에 복귀한 미야자키의 '원령공주(1997)'가 글로벌한 성공을 거두면서 여전히 거장의 건재함을 과시하게 되지요. 닛폰 애니메이션의 세계명작극장 시리즈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물론, 2000년 대 후반에 들어 극적으로 다시 부활), 아니메 업계가 오리지널 아니메보다는 인기 원작을 바탕으로 한 비슷비슷한 작품들의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스튜디오 지브리와 미야자키의 존재는 일본 아니메와 동화 판타지에 있어서 거의 유일한 등대라 아니할 수 없던 것입니다.

ⓒ 彩花みん・集英社・テレビ東京・NAS (좌) / ⓒ 畑事務所・TNHG (중) / ⓒ 猫乃手堂・TGNDHMT (우)


후계자로 낙점받았던 콘도 요시후미의 사망으로 은퇴 선언 후 극적으로 복귀하여 만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을 통해 자신의 신화에 방점을 찍은 미야자키 하야오는 다시금 은퇴를 고려하게 됩니다만, 동화 판타지를 거의 혼자서 이끌다시피한 그의 퇴장은 극장 아니메의 막강한 티켓 파워를 지닌 인물의 퇴장이라는 상업적 고려 속에 차일피일 그 일정이 미루어지게 됩니다. '고양이의 보은(2002)'으로 미야자키 외에도 뛰어난 인재들을 대거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준 지브리이지만, 미야자키만큼의 파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우려 속에 이들은 미야자키의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지요.

포켓몬 극장판을 통해 가능성을 보여준 호소다 마모루를 영입했다가 작품 제작도중 강판시켜 버린 지브리의 스폰서 도쿠마 서점은 미야자키로 하여금 호소다 마모루가 작업했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을 마저 마무리 짓게 합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미야자키의 작품치고는 낮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큰 히트를 치면서 이러한 스폰서의 결정은 옳았던 것으로 증명되는 듯 싶었지만, 이로 인해 지브리는 후계자를 만들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되고 말았으며, 이후 이야기는 아시다시피 호소다 마모루가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4)'로 평단과 관객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반면, 미야자키의 아들이자 첫번째 후계자 후보(?)였던 미야자키 고로는 '게드전기(2007)'를 통해 평단과 관객의 혹독한 비평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아직까지 지브리는 확정적인 후계자를 구하지 못한체 '벼랑 위의 포뇨(2008)'로 미야자키가 다시 일선에 복귀하고, '마루 밑 아리에티(2010)'를 통해 미완의 대기 요네바야시 히로마사를 감독으로 기용하지만, 미야자키가 온전히 손을 떼고 작품을 맡기기에는 여전히 경험이나 역량면에서 많은 것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오히려 스튜디오 지브리와 오랜 라이벌 관계라 할 수 있는 매드하우스가 호소다 마모루나 코사카 키타로 같은 지브리의 인재들을 데려와 만족할 만한 완성도의 작품들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죠. 아직까지 동화 판타지를 표방한 작품들을 내놓고 있지는 않지만, 얼마전 매드하우스의 정신적 지주 린타로 감독이 '요나 요나 펭귄(2009)'이라는 동화 판타지 작품을 내놓는 등 미야자키의 공백을 메울 작품과 감독의 발굴에 적극적입니다. 여기에 동화 판타지와 전혀 관계없었던 Production I.G까지 '망각의 섬: 하루카와 마법의 거울(2009)'로 CG 스타일의 동화 판타지를 선보이게 됩니다.

ⓒ FUJI TV・Production I.G・電通 (좌) / ⓒ RINTAROU・MADHOUSE・YONA YONA PENGUIN Film Partners (중) / ⓒ GNDHDDTW (우)


아니메의 출발점이기도 했지만, 오리지널 아니메로 그 힘을 대부분 상실했던 동화 판타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의해 아니메의 대표적 작품이 되었고, 다시 미야자키의 노쇄와 함께 그 힘을 잃고 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차세대 주자가 그 바톤을 이어받을 차례이지만, 과거 도에이 A형 극장판부터 세계명작극장 시리즈, 그리고 스튜디오 지브리로 이어져온 아니메만의 동화 판타지 계보가 이 와중에 부디 사라지지 않고 그 명맥을 계속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디즈니가 과거의 명작 극장 애니메이션의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픽사나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에 밀려버린 전철을 지브리가 똑같이 밟게 된다면, 먼훗날 미야자키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그저 과거의 명작으로만 우리에게 남아있게 될테니까요.

(판타지 아니메 연대기 5부 끝)


<참고 사이트>

[1]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太陽の王子 ホルスの大冒険) 1968 by 캅셀, CAPSULE 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2] 유니코(ユニコ) 1981 1983 by 캅셀, CAPSULE 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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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 FILMLINK Int. · 菊地秀行 · 朝日ソノラマ · Vampire Hunger D Production Commitee


<목차>



<서문>

3부에서는 아니메 각 장르에 판타지를 대입한 새로운 형태의 퓨전 판타지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부와 2부가 지역적인 관점에서 판타지 아니메를 나눈 것이었다면, 3부는 아니메를 통해 판타지가 새롭게 변형되어진 사례를 알아보았다고 해야겠지요. 이번 4부에는 SF와 다양한 설정으로 변형된 퓨전 판타지가 아니라, 고전적인 장르인 호러를 아니메에 대입하면서 판타지적인 설정이 부각된 속칭 '호러 판타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사실, 호러 장르에는 상상 속에 볼법한 기괴한 괴물들이 등장하고 있기에 이미 판타지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호러의 단골 소재인 드라큘라나 늑대인간, 구미호와 요괴, 도깨비는 모두 상상이나 신화 속에 등장하는 판타지 세계의 크리쳐들로, 이야기의 성격이 공포심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인데요. 이러한 판타지와 호러는 생각 외로 상당히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어렷을 적 보고 자란 동화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사악한 괴물이나 마법사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동화의 성격 탓에 이야기가 순화되었을 뿐 실제로는 공포심을 유발하는 크리쳐나 현상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로, 이것만으로도 두 장르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호러와 판타지는 어찌보면 같은 출발점을 가지고 있는 장르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판타지의 어두운 단면에는 공포와 어두움이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판타지의 단골 악역인 악마와 마왕이 호러의 주테마인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실제로 호러적인 상상력과 연출방식은 판타지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큰 힘이 되기도 합니다. 판타지를 대표하는 J.R.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을 영화화한 필 잭슨 감독이 '데드 얼라이브'나 '프라이트너'와 같은 공포영화를 연출해왔던 인물이라는 점이나, '스파이더 맨' 시리즈로 잘 알려진 감독이자 실사영화판 '워크래프트'를 연출할 예정인 샘 레이미 감독이 공포영화 '이블 데드' 시리즈로 연출경력을 쌓아온 인물이라는 점은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도 있지요. 2부에서 언급한 오리엔탈 판타지 장르의 아니메 '십이국기'의 경우에도 원작자인 후유미 오노가 공포소설을 써온 여류작가라는 점도 여기에 해당되는 사례가 아닐까 합니다. 상상의 이야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호러는 마치 강한 맛을 내는 스파이스 소스같은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이번 시간은 위에서 이야기한 판타지의 어두운 단면, 즉 다크 판타지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호러 판타지를 소재로 한 아니메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공포 장르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분, 또는 노약자와 임신부는 살포시 뒤로 가기를 눌러 주....실 건 없군요. 무서운 장면 안나옵니다. 부담갖지 마시고 즐겨 주세요.


아이들의 만화영화에 귀신이야기를 접목시킨다면?

화영화가 비록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한정된 장르는 아니었으나, 만화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소재의 선택이나 사회적 분위기 등, 여러 면에서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적인 작품이 주로 만들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일본 만화영화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일본 상업용 만화영화의 시작을 장식한 도에이 동화의 작품들 모두가 세계명작동화를 소재로 한 동화 판타지의 형태였었는데요. 이런 상황이다보니 공포심을 심어줄 수 있는 호러와 같은 소재들이 만화영화에 등장하기에는 아무래도 여러가지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백사전(1958)'에 등장한 사람으로 둔갑하는 거대한 흰뱀이라든지, '소년 사루토비사스케(1959)'에 등장하는 여자요괴와 같은 설정이 어느 정도 호러라는 장르의 영향을 받았음을 감안한다면, 호러와 일본 만화영화는 먼 옛날부터 미약하지만 길고 긴 인연을 쌓아왔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디즈니의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사악한 마법사 여왕의 음침한 모습에서도 어느 정도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는데요. 물론, 이러한 것들은 공포심을 유발시키기 위한 소재이긴 했으나, 아이들이 보는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표현 수위와 같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호러의 특색이 거세된 것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아이들의 눈높이 맞게 희석시킨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호러의 소재를 만화영화에 접목시키는 것이 부분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을 때, 한 편의 작품이 요괴라는 호러적 소재를 정면에 내세워 TV 시리즈 아니메로 성공적인 모습을 선보이게 되니 그것이 바로 일본 만화영화의 대표적 아이콘이자 국민 만화라 할 수 있는 미즈키 시게루의 '게게게의 키타로(1968)'인 것입니다.

그림 연극의 일러스트에서 시작된 이 작품은, '묘지의 키타로'라는 원제에서 묘지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 덕분에 작자 자신의 어린 시절의 별명(게게루)에서 변형된 무의미한 '게게게'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로 알 수 있듯이 당시 호러 장르가 만화영화로 표현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제약을 갖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는데요. 유령족의 마지막 일족 소년 키타로와 키타로의 아버지인 눈알 아저씨, 그리고 쥐 아저씨와 같은 요괴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일본의 오래된 전승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미스테리한 괴담의 형식을 띈 원작의 이야기는 만화영화로 이식되면서 요괴소년인 키타로와 그의 동료들이 악한 요괴들과 싸운다는 어린이판 다크 히어로물의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

ⓒ 水木プロ · TOEI Animation (좌) / ⓒ 第一動画 (우)


그림연극과 만화를 거쳐오면서 이미 어른들과 아이들 모두에게 익숙한 컨텐츠로 자리잡고 있던 키타로는 만화영화로서도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특히, 요괴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엽기적이지만 친숙하고 재미있는 캐릭터들이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인기를 얻게 되는데요. 비록 여러가지 시대적인 여건에 의해 호러 판타지 본연의 색깔이 많이 탈색된 키타로였지만, 이런 소재가 대중적이고 스테디한 인기를 얻으면서 만화영화에 호러 장르가 인식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특히, 구전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요괴의 수만도 엄청나게 많을 정도로 괴담을 즐기고 괴담에 익숙한 일본의 국민성을 고려할 때, 아니메에서 호러 장르가 앞으로 보다 더 자주 등장하리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사례라 하겠지요. 

키타로와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요괴인간 벰(1968)'의 경우는 키타로에 비해 보다 더 호러의 특징을 잘 살린 작품입니다. 사람이 되고 싶은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의 이야기는 역으로 인간들의 삐뚤어진 모습을 투영하는 등 작품 내적으로도 상당히 성숙한, 당시 TV 만화영화에서는 보기 드문 전개이기도 했었는데요. 무엇보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으로 일본 내에서도 독특한 스타일의 작품 세계에 큰 인기를 끌기도 했던 작품입니다. 키타로와 함께 60년대 호러 만화영화의 큰 획을 그은 작품이기도 하지요.

70년대를 넘어서는 나가이 고의 '데빌 맨(1972)'이 그 바톤을 이어받게 됩니다. 데빌맨은 앞선 두 이야기와 비슷하게 악마가 주인공인 다크 히어로적인 성격의 작품이지만, 울트라 맨과 같은 거대 히어로의 성격이 더해진 보다 하드한 액션이 볼거리인 장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판타지보다는 히어로 액션물에 더 어울리는 형태라고 할 수도 있지요. 이에 비해 비슷한 시기에 코믹스로 그려진 데빌맨은 실로 호러 판타지에 어울리는 충격적인 표현과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묵시록적인 세계관은 평범한 히어로물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TV 시리즈와는 확연히 다른, 나가이 고만의 어둡고 암울한 작품관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그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당시로서는 충격적이라 할 수 있을만큼 하드고어스러운 표현으로 호러 판타지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비록 이러한 비주얼과 이야기는 당시 만화영화로는 표현하기 힘든 것들이었지만, 호러의 진행방향이 확실히 이전과는 달리 과격해지기 시작함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지요. 특히 나가이 고의 하드고어적인 폭력성이나 묵시록적인 세계관, 거기에 가학적 에로티시즘은 후대의 작가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후 나가이 고는 '도로롱 엔마군(1973)'과 같이 키타로의 영향을 받은 듯한 아동용 호러 판타지물을 선보이며, 호러 판타지의 끈을 놓치는 않습니다만, '마징가 Z(1972)'의 대히트로 인하여 본연의 정체성을 잠시 접어두고 로봇물의 활성화(?)에 앞정서게 됩니다. 70년대까지만해도 호러가 만화영화에서 제자리를 잡는 것은 순탄치는 않은 듯 싶었습니다.  이제 그 자리를 SF와 로봇들이 메꾸면서 호러( 판타지)는 봉인된 미이라처럼 만화영화의 심연으로 가라앉게 되고 잠시 동안의 동면에 들어갑니다.

ⓒ 永井豪 · DYNAMIC Pro · TOEI Animation



OVA의 탄생과 하드고어 호러 판타지의 대두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의 TV 아니메가 태동기에 등장하여 좋은 반응을 이끌었던 키타로와 요괴인간, 데빌맨 이후로 호러 판타지는 주목할만한 작품을 내놓치 못한 체 70년대를 지나 80년대로 들어서게 됩니다. 당시에 이와 같은 현상은 1부부터 3부까지 언급한 다른 판타지 장르도 비슷한 양상이었는데요. 82년도에 테즈카 오사무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돈 드라큘라(1982)'가 스폰서의 자금사정으로 8화라는 초 단기연재를 끝으로 조기 종영(물론, 돈 드라큘라 역시 호러의 의미가 퇴색된 가족물의 형식을 보여준 작품이지만)하는 등 호러 판타지는 80년대 중반까지 뚜렷한 대표작을 내놓지 못한 체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SF/로봇물의 득세가 무엇보다 큰 요인이었지만, 점차적으로 감상 연령층이 높아지는 아니메에서 (고정팬층이 확보된 키타로를 제외한) 아동용 호러 아니메가 경쟁력을 상실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 보구요. 장르적 특성상 TV 시리즈로 나오기에는 표현의 제약이 따랐고, 극장용으로 만들어지기에는 성공가능성이 의심되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 않을까 싶습니다. 바로 이무렵, 호러 판타지와 같은 마이너한 장르에 한가닥 희망을 던져준 일대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것이 바로 OVA(Original Video Animation)의 탄생이었습니다.

오시이 마모루의 '달로스(1983)'를 시작으로 OVA는 TV와 극장으로 양분되어 있던 아니메 시장에서 서서히 그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당시에는 주력 영상매체인 VHS 비디오와 베타 비디오 외에 레이저 디스크까지 생겨나면서 일본 미디어 시장이 점차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 영상 매체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자 마니아들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대안으로 OVA가 적격이었던 셈이지요. 장르나 표현수위가 TV 아니메나 극장용 아니메에 비해 훨씬 자유로웠던 OVA는 그동안 소외되던 장르를 위한 블루오션이었으며, 애니메이터들이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하는 기회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동안 소외받고 있던 호러 판타지 역시 새로운 추진력을 얻게 되니, 이 시기에 첫 테이프를 끊게 되는 작품이 바로 공포소설의 대가 키쿠치 히데유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시다 토요오 감독의 '뱀파이어 헌터 D(1985)'였던 것입니다.

ⓒ 菊地秀行 · 朝日ソノラマ (좌) / ⓒ 西谷史 · ANIMATE Film (우)


뱀파이어라는 호러 장르의 대표적인 캐릭터를 소재로, 인간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혼혈 뱀파이어 던필의 모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키쿠치 히데유키와 천재 일러스트레이터 아마노 요시타카의 환상적인 조합으로 단연 호러 판타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작품이 아니메로 제작된다는 것은 OVA로 인해 가능해진 표현상의 자유와 장르의 다양화가 하나의 원인이라고 하겠는데요. 특히, 이 작품은 호러 판타지에 어울리는 고어스럽고 괴기적인 비주얼로 이전보다 더 공포스러운 느낌을 선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노골적이고 잔인한 연출은 아시다 토요오의 차기작 '북두의 권(1987)' 극장판에서도 등장하며, OVA로 인해 촉발된 표현의 자유가 극장판 아니메에까지 옮겨지게하는 계기가 되지요.

OVA의 활성화와 함께 80년대 중후반에는 SF 장르가 몰락하면서 다른 장르가 조금씩 힘을 얻게 되는, 이른바 아니메의 춘추전국시대가 시작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발표된 몇몇 판타지 작품들 중에서도 호러 판타지의 활약상은 눈에 띄는 것으로, '기동전사 더블제타 건담(1987)'의 초절정 인기 애니메이터 키타즈메 히로유키가 캐릭터 디자인으로 참여하여 화제가 되었던 '여신전생(1987)'의 경우는 평범한 학생이 악마를 소환하고 합체하는 다크 히어로 액션물로 비록 아니메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게임으로 큰 호평을 받으며 호러 판타지의 흐름을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87년, 마침내 호러 판타지의 흐름을 바꾸는 새로운 이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리미티드 아니메 기법을 예술적인 경지까지 끌어올린 아니메의 영상 아티스트 린 타로 감독의 제자로서, 스승 못지 않은 기량을 갖추고 있던 카와지 요시아키가 후일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되는 뱀파이어 헌터 D의 작가 키쿠치 히데유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호러 판타지 아니메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걸작 OVA를 탄생시키게 되니 그것이 지금도 카와지리 요시아키의 걸작 필모그라피 맨 윗줄에 놓여있는 '요수도시(1987)'인 것입니다.

ⓒ 菊地秀行 · 徳間書店 · ビデオアート · JAP Home Video(좌) / ⓒ 菊地秀行 · 朝日ソノラマ · ビデオアート · JAP Home Video(우)


이 작품은 이제까지 선보였던 호러 판타지류의 작품들에 비해 호러스러운 분위기를 훨씬 더 실감나게 묘사했던 작품으로, 그동안 아니메에 있어서는 변방의 장르에 그쳤던 호러 판타지가 일부 마니아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성과 작품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괴기적인 설정 뿐만 아니라, 폭력과 에로티시즘이라는 성인물의 코드를 아니메에 실로 완벽하게 이식해내면서도 작품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는 완성도를 보여주었으며, 다크 히어로라는 우리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굴레를 벗어나 하드보일드 액션장르로의 전환을 시도하며 참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겠습니다. 단순히 말초적인 유혈장면이나 에로티시즘에 천작하지 않고, 다양한 연출기법과 뛰어난 영상미학, 그리고 독특한 설정과 디자인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 주력한 것이 요수도시의 성공원인이라 하겠지요.

카와지리 요시아키는 이듬해에 '마계도시(1988)'에서도 요수도시의 스타일을 잇는 요사스럽고 박력있는 호러 판타지 액션을 선보이며, 아니메를 대표하는 아티스트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고, 호러 판타지는 요수도시를 기점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닌자라는 사무라이 액션 소재와 요괴라는 장르를 혼합한 '전국기담 요도전(1987)'이나 코믹스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오기노 마코토 원작의 '공작왕 시리즈(1988~1994)', 카기노우치 나루미의 원작을 바탕으로 남편인 히라노 토시키가 연출한 '흡혈희 미유(1988)', 그리고 란마1/2와 메종일각으로 유명한 다카하시 루미코 '인어의 숲(1991)', '인어의 상처(1993)'과 같은 작품들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이제까지의 패턴을 벗어난 다양한 장르와의 접목을 통해 좋은 모습을 연이어 선보입니다. 특히, 흡혈희 미유나 인어의 숲 등은 액션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드라마성을 강조하는 미스테리적 요소 역시 선보이면서 수년 뒤에는 TV 시리즈로까지 호러 판타지를 진출시키는 의미있는 시도를 보여주게 됩니다.

ⓒ JVC (좌) / ⓒ 平野俊貴事務 · 所吸血姫 美夕 製作委員會 · TV 東京 (우)



18금 아니메에 의한 호러 판타지의 변질과 몰락

OVA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또 하나의 현상은 바로 본격적인 성인용 H(헨타이의 H를 이니셜로 하는, 한국어로 번역하면 변태라는 뜻. 변태의 원의미보다는 에로틱이라 용어를 대체하는 뜻으로 보면 될 듯) 아니메의 등장이었습니다. 84년 '크림레몬 - 아미'를 시작으로 성인 아니메는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하게 되는데요. 호러 본연의 거부감 때문에 상업성을 위해 예로부터 B급 호러영화들에 숱하게 에로틱한 장면들이 등장했던 것처럼, 이러한 성인 아니메의 태동은 호러장르와의 피할 수 없는 조우를 예고하고 있었다고 해야겠습니다.

이미 요수도시를 통해 호러 판타지와 에로티시즘의 궁합이 증명된 1987년, 요수도시보다 3개월 먼저 등장하여 H 아니메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호러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기괴한 작품이 등장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마에다 토시오의 원작을 기본으로 한 '초신전설 우로츠키 동자(1987)'입니다. 초창기의 H 아니메는 크림레몬에서도 보여진 바와 같이 H 아니메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성이 강조된 작품이 많았었는데, 이 우로츠키 동자 역시 인간계와 마계, 그리고 반인반수의 수인계가 존재하는 세상에 3,000년에 한번 부활하여 세갈래로 나누어진 세계를 하나의 세상으로 만들어낸다는 초신이라는 존재가 벌이는 이야기를 보여주어, 시놉시스만으로 보았을 때는 장대한 판타지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러한 초신과 요괴들이 벌이는 하드고어적인 잔혹한 액션과 요사스러운 묘사 외에도 당시 아니메의 수준을 능가하는 과격한 정사씬으로 H 아니메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데요. 특히 요괴가 자신의 촉수를 이용해 여성들을 능욕하는 이른바 '촉수물의 효시'라는 또다른 명성을 갖게 됩니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호러 판타지의 형식을 취하면서 그 표현수위에 있어서는 포르노그라피의 수준으로 당대의 H 아니메 중에서는 단연 두드러진 작품이라고 하겠는데요. 이러한 B급 포르노 아니메가 일본을 넘어 북미 등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아니메로서는 충격에 가까운 성애묘사도 묘사였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H 아니메로서는 보기드문 이야기의 완성도와 B급 아니메라고는 믿을 수 없는 뛰어난 작화 퀄리티를 그 요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실제 우로츠키 동자의 스토리텔링은 오히려 근래의 허접한 몇몇 TV 시리즈 아니메들보다도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성애묘사를 모두 삭제하거나 도입부만 보이도록 편집한 후에도 이야기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여타의 H 아니메들과는 차원을 달리했으며, 야마시타 아키히코, 오오모리 히데토시, 사토 케이이치, 고토 케이지, 야나기사와 테츠야, 코바야시 마코토 등 8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 아니메의 작화감독과 캐릭터 디자이너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스탭진의 이름만으르도 그 완성도를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특히, 이 작품의 원작자인 마에다 토시오는 '음수학원(라 블루 걸, 1989)'을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촉수물의 붐을 일으키게 하는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이러한 촉수물은 당시 OVA 시장에 붐을 일으키고 있던 하드고어와 호러액션 장르의 설정을 H 아니메로 가져와, 액션과 드라마의 비중을 줄이고 가학적인 성애묘사에 치중하는 기형적인 형태로의 변형을 시도하면서 호러 판타지의 타락을 일으키는 일등 공신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게 됩니다. 90년대 중반까지 촉수물은 H 아니메의 가장 인기있는 소재로 자리잡게 되면서 과도한 폭주 끝에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 영향력을 거의 잃다시피 하였고, 일본의 삐뚤어진 성적 판타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질타를 받아오며 일본 아니메의 어두운 부분을 상징하는 하나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변질로 인해 그 가치가 훼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촉수물은 호러 판타지의 또다른 모습이었으며 같은 핏줄을 가진 사생아라 할 수 있는 존재들로, 호러 판타지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존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 前田俊夫 · ???



호러 판타지가 TV를 만났을 때,

크 히어로 아니메의 굴레를 벗어나 하드고어라는 새로운 장르의 총아로 앞장서며 영상미학을 선도했던 호러 판타지는 폭력과 섹스라는 피할 수 없는 덫에 걸려 스스로 자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호러 판타지는 여러 장르와의 혼합을 통해 새로운 변신을 모색하기도 하는데요. 2부에서 언급한 '3X3 아이즈(1991)'는 오리엔탈 판타지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동시에 호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후지타 카즈히로의 걸작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요괴소년 호야(우시오와 토라, 1992)' 역시 호러와 오리엔탈 판타지를 접목한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키아 아사미야의 88년도 빅히트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사일런트 뫼비우스(1991)'는 호러와 싸이버펑크를 조합한 퓨전 호러 판타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키아 아사미야의 매력적인 캐릭터와 함께 좋은 평을 이끌어 내게 되지요. 

반면, 이제까지의 우울하고 음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마물헌터 요코(1990)'과 같이 미소녀와 코미디를 혼합한 밝은 형태의 장르와 같이 색다른 시도도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미소녀 장르와의 조합은 '환몽전기 레다(1985)' 이후로 이어져온 미소녀 판타지물의 코드를 계승한 작품으로 볼 수 있으며, 90년대에 들어 개그와 미소녀를 조합하여 등장하는 여러 다른 판타지 장르와 같이 호러 판타지도 어느 정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이전의 요사스러운 느낌 외에 가벼운 장르와의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르 자체의 변화와 함께 90년대에는 또다른 중요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TV 아니메가 이전보다 더 표현의 자유에 있어서 관대해졌다는 것입니다.

ⓒ 麻宮騎亜 · 角川書店 (좌) / ⓒ NCS · TOHO (중) / ⓒ 平野耕太 · 少年画報社 · Hellsing製作委員会 (우)


90년대 중반에 생긴 이러한 변화는 호러 판타지가 TV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며, 이로 인해 흡혈희 미유나 사일런트 뫼비우스 같이 OVA로 제작되었던 호러 판타지들이 TV 시리즈로 제작되었고, 이러한 양상은 21세기에 들어서도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이전에 비하여 확실히 호러라는 장르가 대중화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헬싱(2001)'과 같이 예전에는 TV 시리즈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나마 많이 순화된) 잔혹한 장면이 등장하는 작품이 버젓이 공중파로 방영되었으며, '크르노 크루세이드(2003)', '트리니티 블러드(2005)', '블러드 플러스(2005)', '디 그레이 맨(2006)' 등 편수는 많지 않지만 호러 판타지가 꾸준히 TV 시리즈로 제작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호러 판타지는 이제 더이상 특정 마니아들의 전유물이라든지, 포르노그라피를 등에 업은 변태적 성인 아니메에서난 볼 수 있는 그런 장르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흡혈귀나 괴물들과 같은 소재가 이전에 비해 A급 작품에도 빈번하게 사용되는 당시의 영화계의 시류와도 맞아 떨어져 호러 판타지를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렸던 카와지리 요시아키 감독과 같은 경우는 친구인 키쿠치 히데유키의 뱀파이어 헌터 D를 다시 한 번 극장판으로 리메이크한 '뱀파이어 헌터 D 블러드러스트(2000)'로 세계시장에 진출하였으며, TV 시리즈 블러드 플러스와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2000)'과 같은 작품의 경우도 압도적인 영상미로 세계시장에서 큰 관심을 받으며 후일 실사영화로까지 제작되기에 이르르는 것이죠.

그 뿐만 아니라 호러 판타지는 미스테리와의 조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변주 또한 선보이게 되는데, '펫숍 오브 호러즈(2000)'나 '지옥소녀(2005)', '신령수 고스트하운드(2007)'와 같은 작품들은 이제까지와의 호러와는 다른 형태의, 보다 더 호러 본연의 의미에 가까워진 모습을 보이게 되며 '바케모노가타리(2009)'와 같은 작품에 이르러서는 독특한 연출스타일과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인하여 마이너한 미스테리 호러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 地獄少女 プロジェクト · スカパーウェルシンク (좌) / ⓒ 士郎正宗 · Production I.G · 神霊狩 GHOST HOUND 製作委員会 (중) / ⓒ 西尾維新 · 講談社 · アニプレックス・シャフト


호러 장르는 근래 들어 영화에서도 단독적인 장르가 아닌, 장르를 더욱 돋보이기 위한 양념과 같은 요소로 사용되면서 전에 없는 인기를 누리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반지의 제왕 3부작 이후로 판타지가 어린이의 전유물이 아닌 어른들도 즐길 수 있고 시장성도 있음이 증명된 이후에는 성인용 판타지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그 리얼리티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호러적인 설정을 빼놓을 수가 없는 듯 싶군요. 그것은 괴담과 기담에 익숙하며 오래 전부터 만화영화에 성인용의 표현수위를 적용시켜온 일본 아니메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괴한 괴물들과 공포심을 유발하는 크리쳐가 등장할 수록 극의 흥미는 더더욱 커질 터이니 말입니다.

다만, 호러 장르는 마치 그 단어의 어감처럼 빛과 어둠의 경계에 위치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인간 내면의 어두운 본성을 자극할 여지도 있으며, 포르노와 같은 저질문화에 동화되어 타락할 여지도 가장 큰 소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양날의 검과 같은 호러를 잘 다루어 공포심과 상상력을 극대화하면서도 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있어서 아낌없는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좋은 호러 판타지 작품들이 많이 나오길 바래봅니다.

(판타지 아니메 연대기 4부 끝. 5부에서 계속)


<참고사이트>

[1] ゲゲゲの鬼太郎, Wikipedia Japan
[2] 妖怪人間ベム, Wikipedia Japan
[3] デビルマン, Wikipedia Japan
[4] 뱀파이어 헌터 D(吸血鬼ハンターD ) 1985 by 캅셀, CAPSULE 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5] 요수도시(妖獸都市) 1987 by 캅셀, CAPSULE 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6] 超神伝説うろつき童子, Wikipedia Japan
[7] Horror Party - 호러애니메이션 by 깅오바, 지나간 미래, 또는 다가올 과거를 기록하다.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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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tsu · Sunrise


<목차>



<서문>

타지 아니메 연대기 1부와 2부를 통해 여러분은 아니메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판타지인 '서양 판타지(1부)'와 '동양 판타지(2부)'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사실, 지역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판타지는 이렇게 두 종류로 나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면, 두 장르가 섞이거나 전혀 다른 세계관을 설계하여 지역적 구분이 모호해진 '무국적 판타지'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 무국적 판타지를 지역적 관점이 아닌 장르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무국적 판타지라 분류하기에는 아니메가 너무도 다양한 장르와의 혼합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그 과정 중에 어떤 작품은 서양 판타지와 로봇 아니메를, 어떤 장르는 동양 판타지와 히어로 액션물을 결합하는 것과 같이, 무국적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요소들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니메의 독창적인 장르들, 즉 로봇물, 히어로물, 마법소녀물과 같은 장르와 판타지의 결합(무국적 판타지를 포함하여)을 이번 3부에서는 '퓨전 판타지'로 명명하고자 합니다.

퓨전 판타지는 사실 판타지의 한 장르로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몇 가지 판타지적 설정이 가미되었으나 실제 작품의 성격은 판타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작품들도 많기 때문인데요. 대표적으로 '드래곤볼' 시리즈 같은 경우는 오리엔탈 판타지 서유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고 소원을 들어주는 용신이라는 판타지적 장치가 등장하고 있지만 전반부는 코믹액션물의, 후반부는 무협액션물의 성격이 짙습니다. 게다가 캡슐이나 우주선, 스카우터, 로봇 같은 SF 요소까지 등장하는 그야말로 백화점과 같은 설정의 작품이기도 하지요. 사실 드래곤 볼 쯤되면 판타지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데요. 다양한 장르에 판타지적 설정을 가미하여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어낸 아니메의 특성상, 퓨전 판타지는 어찌보면 한 장르로 정의 내리기가 어려운 가장 광범위한 장르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1부나 2부에서 언급한 작품들 중 상당수도 정통 판타지라기보다는 일본적인 재해석이나 다른 장르 아니메와의 크로스오버가 시도된 퓨전 스타일의 작품들이죠.

따라서 이번 시간에는 이토록 광범위한 퓨전 판타지의 장르에 어떤 형태의 시도들이 있는지를 알아보며, 그중 대표적인 몇몇 작품만을 소개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봇, 판타지의 대지 위에 서다

2부에서 언급한 것처럼 판타지를 주소재로 하여 시작된 일본의 상업 극장 만화영화는 60년대 중반에 들어 일본산 오리지널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만화영화가 그 자리에 들어서면서 점차 인기를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테즈카 오사무나 이시노모리 쇼타로(혹은 이시모리 쇼타로), 나가이 고와 같이,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대형 만화가들의 작품들이 TV까지 진출하면서 아니메의 장르적 완성을 가져오게 되는데요. 로봇물, 히어로물(혹는 전대물), 마법소녀물과 같은 일본만의 오리지널리티가 가득한 만화영화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판타지는 주도권을 빼앗기고 아니메의 변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합니다.

당시 아니메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로봇물은 '기동전사 건담(1979)'을 기점으로 고연령층까지 그 영역을 확대하면서, 높아진 연령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전보다 더 드라마적인 요소가 더 강해졌으며, 정통 SF 스타일이 도입되면서 논리적인 설득력이 뒷받침하는 사실주의적 성향이 강해지게 됩니다. 80년대 중후반까지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자 판타지의 입지는 그다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요. 저연령대이건 고연령대이건 가리지 않고 SF와 로봇물이 범람하면서 판타지가 들어설 곳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판타지의 부활은 이런 SF/로봇의 흐름 속에서 오히려 변방이 아닌 중심에서 부활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당시 아니메의 흐름을 만들어낸 장본인 중 한명인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이었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한데요. 이는 토미노 감독 스스로가 어느 한 장르에 안착하기보다는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는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83년도에 선라이즈에서 제작된 판타지 로봇물 '성전사 단바(1983)'인 것입니다.

ⓒ Sotsu · Sunrise


다른 차원의 세계 바이스톤 웰로 불려온 소년 쇼 자마가 그곳에서 오라력이라는 기이한 힘으로 동작하는 곤충모양의 거대 인간병기 오라 배틀러에 탑승하여 성전사로 전쟁 속에 휘말리는 단바인의 이야기는 오라력으로 움직이는 기이한 거대 병기 외에는 중세유럽의 시대배경을 지닌 지극히 판타지적 세계관을 가진 작품이었는데요. 특히, 이 작품은 판타지의 세계관을 빌렸으되 그 성격은 이전의 판타지 만화영화와는 다른 성인취향의 시리어스하고 드라마틱한 설정을 보여줬고, 세계관이 바뀌었을 뿐 그 모습은 리얼로봇의 한 장르로 보아도 될 법한 설정들로 꾸며져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성전사 단바인은 당시 최고의 인기장르인 로봇물에 판타지를 가미한 색다른 맛을 보여주며, 일본 특유의 스타일과 세계적인 것과의 성공적인 융합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도 판타지와 로봇 아니메의 퓨전은 '중전기 엘가임(1984)'과 '기갑계 가리안(1985)'을 거치면서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장르로 발전하게 되는데요. 흥미로운 것은 80년도 후반에 들어 로봇 아니메가 몰락의 길에 들어선 이후에도 이러한 시도는 계속적으로 보여진다는 것으로, 리얼로봇에서 다시 아동용 로봇물로 방향을 선회한 선라이즈의 빅히트작 '마신영웅전 와타루(1988)'나 '마동왕 그랑조트(1989)', 그리고 '패왕대계 류나이트(1994)'에서도 판타지와 로봇을 혼합하면서 90년대 들어 부활한 판타지 아니메의 인기에 힘을 실어주게 됩니다. 특히, '천공의 에스카플로네(1996)'에 이르러서는 높은 완성도의 드라마와 비주얼로 판타지와 로봇의 결합에 있어서 하나의 큰 획을 긋게 되지요.

로봇과 판타지를 결합한 판타지 로봇물은 퓨전 판타지 중에서는 가장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동시에 가장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카플로네 이후에는 크게 주목을 받은 작품은 비록 없었지만, 최근까지도 AIC가 제작을 맡은 '이세계의 성기사 이야기(2009)'(특히, 이 작품은 AIC의 전작 '엘 하자드'나 '천지무용'의 스타일에 판타지 로봇물이 더해진 형태를 보여주지요)와 XEBEC과 Production I.G의 '브레이크 블레이드(2010)'와 같은 굵직굵직한 작품으로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 어느 정도 독립된 장르로도 자리를 잡지 않았나 생각도 되는군요. 특히, 근래의 작품들은 미소녀 + 러브코미디와 같은 흥행코드를 적극 채용하면서 예전의 시리어스했던 작품들에 비해 보다 더 상업적이면서 대중적인 취향을 고려한 흔적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 Sotsu · Sunrise (좌측) / ⓒ AIC · VAP (중간) / ⓒ 吉永裕ノ介 · Flex Comix · Break Balde 製作委員会 (우측)



장르의 다양화와 함께 시작된 판타지의 다채로운 변형

80년대 들어서는 비록 SF/로봇 아니메가 아니메의 전반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아니메 시장이 커지고, OVA 시장이 열리면서 다양하고 색다른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일본 경제의 호황과 맞물려 많은 자본이 유입되고, 아니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성인들도 아니메를 즐기는 등, 80년대는 그야말로 '아니메의 황금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었죠. 이러한 시대를 맞이하여 판타지도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여러가지 시도를 하게 되는데요. 정통 판타지보다는 다양한 아니메 장르에 배경으로 사용되거나 독창적인 세계관을 가진 창작작품을 선보이는 등 다양하고 색다른 시도를 합니다.

요술공주의 밍키로 유명한 감독 유야마 쿠니히코와 미형 캐릭터 디자이너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이노마타 무츠미의 '환몽전기 레다(1985)'는 유럽식 중세 판타지를 기본으로, 비키니 형태의 전투복을 입은 미소녀와 변신 메카가 등장하는 등 여러모로 장르의 퓨전화가 이루어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두 콤비의 차기작이자 극장판 대작 아니메인 '윈다리아(1986)'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얌전했지만, 바이크 형태의 탈 것이나 총기류가 등장하는 등 역시 현대적인 아이템이 판타지 세계에서 사용되는 시간적 퓨전을 보여주기도 했지요. 특히 레다의 경우에는 나가이 고 원작의 '꿈차원 헌터 판도라(1986)'와 같은 일련의 아류작들이 양산되는 계기를 가져왔고, 우루시하라 사토시의 육감적인 캐릭터 디자인으로 유명한 '레무니아의 전설(1989)'에 이르르면 에로티시즘과의 결합을 시도하며 18금 장르로도 그 흐름이 이어지게 됩니다.

ⓒ TOHO·Kaname Pro (좌측) / ⓒ ヒロメディア·Kaname Pro·Dynamic Pro (중간) / ⓒ Urushihara Satoshi·AIC


유럽식 판타지의 배경에 현대적이거나 미래적인 소재가 등장하는 작품 외에도 아주 색다른 세계를 창조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니메의 철학자 오시이 마모루 감독과 천재 일러스트레이터 아마노 요시타카가 힘을 합친 '천사의 알(1985)'의 경우에는 시대적 배경과 시간적 배경, 그리고 공간적 배경조차 전혀 가늠할 수 기이한 세상에서 희한하게 생긴 총기류의 물건(이것조차 자세한 용도가 불명)을 든 정체불명의 사내와 역시 정체불명의 알을 품은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어떤 장르와도 연결시키기 어려운 난해한 이 작품은 실로 환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독특한 매력의 작품으로, 오히려 이런 정체불명의 성격 때문에 판타지로 분류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작품이기도 하지요. 아마노 요시타카의 몽환적인 캐릭터 디자인은 이듬해인 86년도에는 정통 판타지에 보다 가까운 스타일의 작품 '아몬사가(1986)'나 뱀파이어 헌터의 이야기를 다룬 판타지와 호러의 조합 '뱀파이어 헌터 D(1985)'에 사용되면서 아마노 특유의 몽환적인 캐릭터가 판타지와 멋진 궁합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게 됩니다. 이후, 아마노 요시타카는 RPG의 명작 타이틀 파이널 판타지의 캐릭터 디자인을 맡게 되면서 판타지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게 되지요.

80년대 아니메의 호황기와 함께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던 판타지와 타장르의 융합은, 타츠노코의 '천공전기 슈라토(1989)'에서는 일본식 전대 히어로물과 불교/힌두교 신화가 접목된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기고 했습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중반에는 오히려 이렇게 동양적인 판타지 소재가 아니메의 다른 장르들과 퓨전을 이루거나 직접적인 소재로 사용되는 사례가 많았는데요. 이 시기에는 '로도스 전기(1990)'를 기점으로 정통 판타지 또한 심심치 않게 등장하여 전반적으로 판타지가 강세를 띄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슬레이어즈(1995)' 시리즈의 폭발적인 인기로 판타지는 90년대 들어서는 TV에서도 자주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 시기에 방영된 '엘 하자드(1995)'의 경우에는 판타지 아니메에서 자주 사용되는 차원이동을 소재로 곤충군단과 마법이 등장하는 신비한 세상 엘 하자드에서 벌어지는 모험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중동의 아라비아 세계관을 도입했으나, 고대의 인간형 병기 이프리타의 등장과 물, 불, 바람을 다루는 대신관의 등장과 같이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혼합된 퓨전 판타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러브 코미디의 성격을 띄고 있어 판타지의 성격보다는 러브 코미디 장르에 더 어울리는 특징을 갖고 있기도 하지요. 이렇게 슬레이어즈 시리즈 이후 판타지 장르는 시리어스함보다는 가벼운 코미디 위주의 성격을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아카호리 사토루의 응큼한 스타일과 개그가 혼합된 '폭렬헌터(1995)'나 독특한 개그를 선보였던 '엘프를 사냥하는 사람들(1996)'은 모두 판타지 세계관을 사용하면서도 다양한 설정과 장르적 특성을 부여하여 정통보다는 퓨전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겠습니다.

ⓒ AIC·Pioneer·El Hazard Project (좌측) / ⓒ Satoru Akahori·Rei Omishi·Media Works·Bakuretsu Project·TV Tokyo·Sotsu(중간) / ⓒ Yagami Yu·Media Works·Amuse·Sotsu (우측)



게임과 소설, 코믹스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는 퓨전의 시도

와 같이 극동이나 중세 유럽 외에 인도나 중동의 소재까지 빌려오면서 다양화된 판타지는 90년대 들어서는 러브 코미디의 요소마저 합세하여 보다 더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사실 아니메에서 동양 판타지이나 서양 판타지나 모두 소수의 작품(대작 극장판이나 OVA 몇 편)을 제외하고는 대중성을 고려한 결과 일본 아니메의 특징적이 요소가 혼합되어 정통 스타일과는 다른 변질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70년대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OVA 등에서 주로 시도되었고, 90년대에 이르르면 TV 시리즈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21세기에 들어서는 판타지가 보다 더 여러 장르에 변형된 모습으로 사용되면서 이전보다 더 대중화되고 접근이 쉬워졌다는 느낌입니다. RPG와 같은 게임의 활성화도 어느 정도 한몫을 한 것도 싶은데요. 특히 80년대부터 시작하여 90년대를 넘어서 장수 시리즈이자 일본 최고의 인기 타이틀로 자리잡은 RPG 파이널 판타지의 경우에는 곤조의 TV 시리즈 '파이널 판타지 언리미티드(2001)'를 비롯하여, 스퀘어 에닉스가 직접 제작한 '파이널 판타지 Advent Children(2005)' 등의 작품으로 좋은 반응을 얻게 됩니다.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는 초창기에는 정통 판타지의 노선을 걷다가 7편에 이르러서부터는 현대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퓨전적인 배경을 보여주게 되지요. 특히, 이 시리즈는 아니메 외에도 게임 타이틀 자체에 삽입된 동영상을 통해 아니메에 근접하는 영상적 감동을 보여주었다고 하겠습니다.

게임을 소재로 한 아니메는 이외에도 지속적으로 제작되는데, TYPE MOON의 비주얼 노벨 게임인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2006)'는 원작의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TV 시리즈 아니메로 제작된 사례로, 2010년에는 극장판으로도 제작되기에 이르릅니다. 전설의 영웅을 마법으로 소환하여 자신의 서번트로 삼아 성배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마법사들의 결투는 현대적인 배경 위에서 펼쳐지며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는데요. 게다가 소환한 영웅들이 동서양을 모두 망라하는 유명인사들로 채워져 있어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모두 혼합한 퓨전 판타지를 보여주었다 하겠습니다.

ⓒ Square Enix (좌측) / ⓒ TYPE-MOON · Fate-UBW Project (우측)


이외에도 독특한 세계관으로 눈길을 끈 작품도 있습니다. 본즈가 제작한 '울프스레인(2003)'의 경우가 바로 대표적인 예인데요. 현대적인 배경 속에 하늘을 나는 거대한 배를 소유한 특권층 귀족이 존재하고, 인간으로 둔갑하여 살아가는 늑대들과 그들을 인도하는 소녀의 형상을 한 꽃이라는 기이한 소재를 사용하여, 판타지와 정통 드라마를 혼합한 멋진 완성도를 보여주다 하겠습니다. 특히, 드라마보다는 볼거리에 치중하기 시작한 최근의 아니메 트렌드와는 달리,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통 판타지는 아니었지만 정통적인 매력을 보여주기도 했지요. 드라마를 강조하는 제작사 본즈는 이외에도 눈여겨 볼만한 판타지 작품을 몇 차례 선보이는데, '스크랩드 프린세스(2003)'는 서양식 판타지를 얼개로 하여 SF를 가미한 세계관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드라마와 코미디를 적절히 섞은 퓨전 판타지를 보여줍니다. 겉모습은 예전의 판타지 아니메에서 많이 보아온 모습이지만, 매트릭스를 연상시키는 결말과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인해 다소 엉성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좋은 반응을 얻었던 작품이기도 하지요.

또한 아라카와 히로무의 동명 인기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본즈의 또다른 히트작 '강철의 연금술사(2003)'는 20세기 초반의 유럽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지구와는 거울처럼 대비되는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연금술사 엘릭 형제의 모험을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기본적으로 소년 만화의 형식을 취하면서 연금술이라는 몹시 판타지스러운 소재를 사용하여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 작품입니다. 이렇게 근대적인 세계관에 판타지적인 소재를 등장시키거나, 판타지스러운 세계관에 SF 또는 현대적인 설정을 등장시키는 혼합방식은 위와 같이 본즈가 만들어 낸 일련의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통해 90년대부터 시작된 러브 코미디 형식의 퓨전 판타지에 비해 보다 더 성숙해진 드라마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 Bones·Nobumoto Keiko·BV (좌측) / ⓒ Sakaki Ichiro·Kadokawa Shoten·Sutepri Project (중간) / ⓒ Arakawa Hiromu·Square Enix·Bones·MBS·ANX·Dentsu (우측)


지금까지 이야기한 작품들을 기본으로 요약하자면 퓨전 판타지라고 불리는 판타지를 가미한 복합적 장르의 아니메들은 다양한 세계관을 빌려와 일본의 입맛에 맞게 로컬라이징한 경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60년대의 정통파 풀 애니메이션을 거쳐 70년대의 일본식 오리지널 아니메를 지나 80년대의 장르적 완성을 거친 아니메는 이후부터는 다양한 장르와의 크로스오버와 소재의 혼합으로 작품의 매력을 더더욱 다양하게 만들고 있는데, 마치 정통 요리에서 퓨전 요리로 레시피를 다양하게 바꾼 레스토랑과도 흡사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드라마 중심에서 캐릭터 중심으로 아니메의 무게추가 기울어지면서 퓨전 판타지 역시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수단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볼거리(캐릭터)를 제공하기 위한 부차적인 소재로 활용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세계관의 깊이 있는 묘사보다는 그저 단순한 미장센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하겠습니다. '퀸즈 블레이드(2009)'와 같은 여자 캐릭터의 노출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에서 판타지는 세심한 묘사나 디테일한 세계관의 구현이 필요치 않은 쉽사리 구현 가능한 세트 디자인일 뿐이데요. 꼭 판타지라는 소재를 깊이 있게 대입한 정통 스타일의 아니메만이 해답은 아니겠지만, 세심한 설정과 드라마가 돋보이는 판타지 작품들이 하나같이 외면받거나 제작 선호도에서 밀리는 현실은 아쉽기만 합니다. (퓨전 판타지는 아니지만,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했던 '정령의 수호자(2007)'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지요.)

상업적인 관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흥미 위주의 말초적인 작품들을 위한 부가적인 소재로서의 판타지가 아닌, 보다 더 깊이있는 설정과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의 소재로서 판타지를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판타지 아니메 연대기 3부 끝. 4부에서 계속)

<참고 사이트>

[1] 판타지 로봇 서사시 - 단바인에서 에스카플로네까지 (上) by 엘로스, 별바다의 서고
[2] 판타지 로봇 서사시 - 단바인에서 에스카플로네까지 (下) by 엘로스, 별바다의 서고
[3] 환몽전기 레다(幻夢戦記レダ) 1985 by 캅셀, CAPSULE 블로그: 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4] 천사의 알(天使の卵) 1985 by 캅셀, CAPSULE 블로그: 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프레스블로그 MP(Monthly Posting) 2010년 11월차에 선정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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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

타지 아니메 연대기 1부에서는 유럽식 중세 판타지 세계관을 일본 스타일로 변주한 아니메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일본 아니메에서 중세 판타지는 80년대 아니메 전성기 시절에 이르러 다양한 소재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제작되기 시작했지만, 전반적으로는 SF 아니메의 위세에 눌려 그다지 큰 흐름을 형성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게임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RPG가 성장하고, 그로 인한 미디어 믹스가 전개되면서 역으로 이러한 소재들이 아니메 쪽으로 흘러들어 오기 시작하게 되지요.

이후 90년대 들어서는 로도스 섬의 전기를 시작으로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판타지 베스트 셀러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이를 미디어 믹스하는 과정에서 판타지 아니메들이 속속 화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중세 판타지 아니메는 몇몇 히트작을 제외하고는 주로 작품에서 양념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지 못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로봇물의 배경으로 사용되면서 퓨전 형태의 판타지로 변형되거나, 코미디 혹은 연애물의 배경으로 사용되어 색다른 느낌을 주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기도 했지요. 정통 스타일의 판타지 아니메가 그닥 없음은 엘로스의 시각에서는 좀 아쉬운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러한 중세 판타지와는 어떤 면에서 평행선에 위치하는 동양적인 판타지, 즉 오리엔탈 판타지 아니메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리엔탈 판타지로 시작된 상업용 만화영화 시대

시다시피 상업용 일본 만화영화의 시초는 1958년에 도에이에서 제작한 '백사전'이라는 극장용 만화영화였습니다. (초기만 하더라도 일본 만화영화는 아니메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아니메라는 표현이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74년 발표된 '우주전함 야마토'가 사회적 현상이 되고난 후였지요.) 작품의 시놉시스는 중국의 고전인 전등신화를 바탕으로 수천년동안 도를 닦은 백사(하얀뱀) 백소정과 선비 허 선의 러브스토리인데요, 실로 로맨틱하고 판타지스러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특히, 세계사에 최초의 장편 (컬러) 만화영화로 인식되고 있는 월트 디즈니의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1937)'가 아름다운 공주와 마법을 사용하는 사악한 여왕, 그리고 정의로운 왕자가 등장하는 지극히 중세유럽의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였던 것에 비해 아시아 권에서 가장 최초의 컬러 장편 만화영화였던 백사전이 중국의 설화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였다는 것은 만화영화와 판타지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사전의 성공에 크게 고무된 도에이는 연이어 극장용 만화영화를 제작하게 됩니다. 디즈니가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에 이어 '신데렐라(1950)',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 '피터팬(1953)', '잠자는 숲속의 미녀(1959)'와 같은 서양식 판타지 세계를 다룬 작품들을 발표했던 것처럼 도에이 쪽도 판타지적인 성격의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하게 되지요. 일본 만화영화의 초창기의 관람층은 어린이들을 위주로 한 전연령가의 성격이었기에 성인 취향의 판타지라기보다는, 모험적이고 교훈적인 소재를 가진 동화적인 판타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후일 5부에서 이야기하게 될 동화 판타지에 더 부합되는 소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초반부의 애니메이션들은 동화적인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동양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화 판타지이면서 동시에 오리엔탈 판타지에 포함된다고 하겠습니다.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1959)', '서유기(1960)', '안쥬와 즈시오마루(1961)', '신밧드의 모험(1962)', '개구리 왕자의 왕뱀퇴치(1963)', '멍멍 충신장(1963)' 등 초창기 일본 극장 만화영화는 모두 동양적 판타지 세계관을 가진 동화적 감성의 만화영화들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지요. 

ⓒ Toei Animation

초창기 일본 만화영화를 장식한 도에이의 작품들은 상당수가 동양적 배경에 판타지가 가미된 모습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서양적 동화를 다룬 디즈니와 대비되는, 즉 디즈니에 대항하기 위한 일종의 차별화 전략인 듯 싶다.

이렇게 초창기 만화영화의 절대적인 소재였던 오리엔탈 판타지는 테즈카 오사무나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같은 일본적인 색체를 가진 스타 만화가들의 등장으로 일대 국면을 맞게 됩니다. 특히, 이들은 동화적이거나 판타지적인 소재에서 벗어나 SF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는데요. 일본 최초의 TV 시리즈 만화영화이자 현재까지도 일본 만화영화의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메김한 테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1963)'의 등장, 당대 최고의 만화영화 제작 스튜디오였던 도에이로 하여금 디즈니를 지향하는 풀 애니메이션 기반의 'A형 극장판 만화영화'에서 탈피하여 일본의 오리지널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는 저예산의 'B형 극장판 만화영화'로 방향을 돌리게 한 이시노모리 쇼타로 원작의 '사이보그 009(1966)' 등의 등장은 그때까지 이어져오던 오리엔탈 판타지의 기세를 잠재워 버리게 됩니다. 
 
일본적 감성을 지닌 새로운 작품의 등장은 만화영화의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전의 A형 극장판의 비중이 줄어들자 자연스레 판타지 장르 역시 축소되었고, 특히 초반 만화영화의 분위기를 좌우하던 오리엔탈 판타지는 그 비중이 크게 줄어들게 되지요. 오리지널 스토리보다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고전설화나 세계명작 등을 기본으로 한 판타지 장르는 어차피 제한된 소재로 인해 한계가 존재하고 있었는데다가 아톰이나 사이보그 009같은 SF에 기반한 창작 캐릭터의 등장이 퇴장속도를 가속화 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절한 교체 타이밍에 등장한 셈이랄까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의미있는 시도가 있었는데요. 테즈카 오사무가 설립한 무시 프로덕션에서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예술 만화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제작된 아니메라마 1탄 '천일야화(1969)'의 경우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소재로 몽환적인 영상과 에로틱한 표현을 통해 당대의 만화영화와 그 방향을 달리한 성인취향의 스타일로 큰 호평을 얻기에 이르릅니다. 이 작품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범세계적으로 알려진 오리엔탈 판타지 '아라비안 나이트'를 소재로 삼았는데, 아라비안 나이트는 이 후에도 '알리바바와 40마리의 도적(1971)'이나 국내에도 익히 잘 알려진 TV 시리즈 '아라비안 나이트 신밧드의 모험(1975)', '알라딘과 마법램프(1982)'(역시 한국 TV에서 명절특선으로 몇 차례 방영)에서도 쓰이면서 초창기 오리엔탈 판타지의 소재로 크게 각광받게 됩니다. 아니메라마 시리즈는 이후에도 두 작품이 더 발표됩니다만, 이후의 시리즈는 판타지보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로 전환되면서 사실적이고 예술적인 방향의 작품들을 선보이게 되지요. 

ⓒ Tezuka Production (좌측) / ⓒ Toei Animation (중간) / ⓒ Nippon Animation (우측)

아라비안 나이트는 특히 초창기 오리엔탈 판타지의 단골 소재로 사용되는데,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소재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각광을 받은 듯 싶다.


아니메의 본격적인 시작, SF의 성장과 판타지의 쇠퇴

렇게 시작된 70년대 일본 만화영화 시대는 판타지에 있어서는 암흑기와도 같았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일본 만화영화의 아이덴티티가 거의 성립되는 단계로 볼 수 있는데, 로봇물, 히어로물, 마법소녀물이라는 독특한 일본 만화영화 장르가 이 때에 와서 자리를 잡게 되고, 그 외에도 세계 명작동화와 같은 장르 등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판타지가 설 자리는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 겠습니다. 오리엔탈 판타지이건, 서양 판타지이건 간에 모두 기존의 유명한 전설이나 설화, 동화를 모티브로 하여 제작된 작품들인지라 이미 한번씩 사용된 소재이다보니 신작을 만들기에도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고도 할 수 있구요.

그러나, 78년 마침내 오리엔탈 판타지 아니메의 한 획을 그을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니 그것이 바로 故 테즈카 오사무 필생의 역작 불새 시리즈의 첫 작품인 '불새 - 여명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전체적인 시리즈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오리엔탈 판타지로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드는 시공의 이야기는 어느 때는 판타지였다가 어느 때는 SF적인 세계관으로 바뀌기도 하지요. 게다가 이 여명편의 경우에는 만화영화라고 보기보다는 당시 특수효과 기술로는 재현이 불가능했던 불새를 애니메이션으로 그려 합성한 실사영화의 모습이었습니다. 이후 불새 시리즈는 풀 애니메이션 SF 판타지 성격을 지닌 테즈카 오사무 본인의 연출작 '불새 2772 - 사랑의 코스모스존(1980)'을 거쳐 테즈카 오사무의 제자 린 타로 감독의 '불새 - 봉황편(1986)'에 이르러 진정한 오리엔탈 판타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87년도에는 OVA '불새 - 야마토 편'이 출시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70년대부터 이어져온 오리엔탈 판타지의 약세는 8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 사정이 나아지지가 않았습니다. 중세 판타지가 로봇물과 결합되거나 RPG의 공식을 따르면서 변형된 형식으로 계속 이어져나간 반면, 오리엔탈 판타지는 일본적인 색체를 지닌 시대물과 겹쳐지면서 동일한 색체로 인해 그 독특함을 잃어버렸고, 판타지의 또 하나의 소재라 할 수 있는 무협 요소 역시 사무라이물이나 '북두의 권'과 같은 근미래적 세계관의 액션무협 작품들과 중첩되면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지요. SF/로봇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그 틈새를 공략하는 다양한 장르들에게마저 밀려버린 오리엔탈 판타지는, 같은 색체를 지닌 시대물이나 사무라이 물에게까지 자리를 내주면서 불새 이외에는 뚜렷할만한 작품을 보여주지 못하고 시들해져 버리게 됩니다.

ⓒ Tezuka Production

시공을 넘나들며, SF와 판타지를 오가는 대작 '불새'는 테즈카 오사무의 제자들인 린 타로, 히라타 토시오, 카와지리 요시아키, 다카하시 료스케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소재의 고갈, 판타지를 부활시키다

80년대 후반부에 시작된 아니메의 침체기는 90년도에 이르러서도 좀체로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메를 이끌고 있던 거대한 축이었던 SF/로봇 장르가 몰락하면서 다음 아니메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추진력을 확보하지 못한 아니메는 복고주의 작품들과 리메이크들이 양산되면서 그럭저럭 명맥을 이어가게 되는데요. 이 시기에 중세 판타지가 판타지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게 제작되었던 반면, 오리엔탈 판타지는 오히려 이시기에 이르러 변형된 모습과 색다른 시도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타장르와의 퓨전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죠.

89년도에 타츠노코 프로덕션에서 제작된 '천공전기 슈라토'는 이런 면에서 오리엔탈 판타지의 컨셉을 가미한 독특한 히어로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소재 또한 익숙한 일본이나 중국의 판타지가 아닌, 인도의 힌두교 신화나 불교적인 소재를 모티브로 삼는 파격을 보여주었지요. 이 독특한 소재는 슈라토에만 그치지 않고, 아름답고 화려한 그림체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CLAMP의 '성전(RG Veda)'에도 사용되는데요. 성전 역시 아수라나 야차와 같은 불교적 소재가 가미된 오리엔탈 판타지 스타일의 작품이지만, CLAMP 특유의 순정만화적인 스타일과 이국적인 캐릭터 디자인으로 오리엔탈 판타지의 느낌이 그닥 드러나지 않는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원작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낮은 완성도의 아니메 퀄리티도 크게 한몫을 했지요.

ⓒ Sotsu · Tatsunoko Pro (좌측) / ⓒ Clamp · Shinshokan


힌두교/불교적인 소재는 극동 아시아나 중동의 소재에 비해서는 신선하지만, 이를 모티브로 한 위의 두 작품은 타장르와의 퓨전이 이루어지면서 변형된 일본적 색체가 가미되어 원래의 느낌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무국적 세계관을 가진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원작 자체도 소재에 대해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기보다는 모티브만을 가져와 자신만의 색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정통 오리엔탈 판타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구요.

이와는 별개로, 다카다 유조의 히트 코믹스로 원작으로 한 OVA '3X3 아이즈(1991)'는 티벳 밀교라는 독특한 소재 바탕으로 요괴와의 하드코어한 액션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다카다 유조의 데생 스타일은 앞선 두 작품에 비해서 보다 더 오리엔탈 판타지의 느낌에 가까운 형태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데요. 요사스러운 디자인과 잔인한 묘사 등은 오리엔탈 판타지인 동시에 호러 액션물에 가까운 모양새를 보여줍니다. 역시 오리엔탈 판타지를 바탕으로 일본식 변형이 가해진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호러 액션과 오리엔탈 판타지의 결합은 3X3 Eyes 외에도 오기노 마코토의 빅히트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OVA '공작왕 시리즈(1988~1994)'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중반까지 오리엔탈 판타지의 변신은 이렇게 히어로물부터 호러액션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타장르와의 혼합을 시도하게 됩니다. 95년부터 방영되며 큰 인기를 얻었으며 투니버스를 통해 방영되어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던 '후시기 유우기(국내 방영제목 환상게임)'에 이르르면, 순정멜로물과 오리엔탈 판타지를 혼합한 또다른 형태의 모습으로도 거듭나게 되지요. 이러한 현상은 소재 고갈에 허덕이던 아니메가 상대적으로 많이 다루지 않았던 오리엔탈 판타지의 도움을 받은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히어로물이나 순정멜로와 같은 아니메 특유의 장르에 이러한 오리엔탈 판타지 소재를 가미하여 새로운 느낌을 주려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혼합 장르들은 인기의 흐름을 이어갔다기 보다는 소재의 다양화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측면에서 단발성에 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중세 판타지 스타일의 '로도스 섬의 전(1990)'나 '슬레이어즈 시리즈' 등이 어느 정도 인기몰이를 했던 것에 비하면 오리엔탈 판타지는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한체 어느 덧 시대는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 Takada Yujo · Kodansha (좌측) / ⓒ Ogino Makoto · Shueisha (우측)

이 시기의 오리엔탈 판타지는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힌두교나 밀교, 퇴마술과 같은 독특한 소재가 사용되었지만, 정통적인 스타일에 멀어지며 다른 장르와 혼합을 시도하게 된다.


동양적 소재, 글로벌 시대를 맞이하는 자세 

반게리온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아니메는 다시 새로운 추진력을 얻고 도약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는 한동안 부진했던 해외 시장의 공략 역시 공격적으로 이뤄지게 되는데요. 바로 이 시기에 마스터피스라고 불릴 수 있는 세 작품이 일본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커다란 호평을 얻게 됩니다. 먼저, 아니메의 철학자이자 사실주의자인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사이버펑크 걸작 '공각기동대 극장판(1995)'가 일본 내에서의 참패와는 정반대로 세계시장에서 극찬을 얻게 되구요. '아키라(1988)'로 과거 세계시장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던 오토모 가츠히로 또한 옴니버스 극장판 '메모리즈(1995)'로 역시 큰 호응을 얻게 됩니다. 바로 이 때, 한 편의 오리엔탈 판타지 걸작이 이 두 작품과 함께 아니메의 위상을 세계에 떨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수많은 작품을 통해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동안의 무국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일본의 설화를 바탕으로 연출한 판타지 모험극 '원령공주(1997)'는, '아니메의 세계화'라는 추세에 발맞추어 자국인 일본의 색체를 물씬 풍기는 설정과 일본의 고유 민속신앙을 바탕으로 한 판타지스러운 모험 이야기를 선보입니다. 원령공주는 한동안 아니메에서는 그 자취를 볼 수 없었던 정통 오리엔탈 판타지의 모습이었으며, 그 완성도 또한 명불허전의 것이었죠. 디즈니의 배급망을 통해 개봉된 원령공주는 미국시장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었고, 4년 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을 통해서 일본 내의 모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울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상까지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한동안 별주목을 얻지 못했던 오리엔탈 판타지는 세계화에 추세와 함께 거장의 힘을 빌려 일본 아니메 史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일본 역대 영화 흥행수입 1위 센과 치히로 행방불명, 3위는 원령공주)

ⓒ Nibariki · TNDG (좌측) / ⓒ Nibariki · TGNDDTM (우측)

정통 오리엔탈 판타지와 동화적인 오리엔탈 판타지가 일본영화 역대 흥행순위 1,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미야자키+판타지의 막강한 시너지 효과를 과시했다. 게다가 흥행순위 2위는 서양식 판타지와 멜로물을 결합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

극장가에서 큰 성공을 거둔 오리엔탈 판타지의 위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TV 시리즈에서는 지지부진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미소녀와 개그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혼합된 학원로맨스물과, 하렘물들이 큰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하는데, 중세 판타지의 경우에는 몇몇 작품이 이 흐름에 편승하여 그 소재로써 사용되지만, 오리엔탈 판타지의 경우는 좀처럼 그렇지 못했지요. 하지만, 2002년 실로 오랜만에 오리엔탈 판타지가 TV 시리즈로 등장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후유미 오노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정통 오리엔탈 판타지 대하서사극 '십이국기(2002)'인 것입니다.

공포소설로 일가견이 있는 후유미 오노가 치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이 소설은, 여성 작가로서는 드물게 거대한 스케일이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장기인 호러틱한 분위기와 여성 특유의 섬세한 필체로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이 인기는 시리어스하고 지루한 대하 서사극임에도 불구하고 십이국기를 장편 TV 아니메로 제작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는데요. 실제로 이 작품은 그 전개가 장중하고 서사적인지라 오락적인 측면에서는 매력이 없는 작품입니다만, 원작의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며 정통 오리엔탈 판타지의 참맛을 보여주었다고 하겠습니다. 유럽식 판타지가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톨킨의 세계관에 기반한 이야기와, 동화를 기반으로 한 판타지로 나뉘어 지는 반면, 오리엔탈 판타지는 각 국의 설화와 전설에 기반한 동화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십이국기와 같이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짜임새 있는 스토리의 등장했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라고 하겠지요.

이후 오리엔탈 판타지는 보다 더 시리어스한 내용을 가진 작품들로 성인층을 공략하게 됩니다. 특히 이 작품들 중에는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며 오리엔탈 판타지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 중 하나가 우루시바라 유키의 동명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독특한 판타지 미스테리 '충사(2005)'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자연현상을 벌레라는 단어로 칭하고 이로 인해 발생한 기현상을 해결하며 떠도는 충사 깅코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오리엔탈 판타지인데요. 현대적인 복장을 한 깅코와 근대화 이전의 일본의 시골을 연상시키는 배경이 혼합되어 시간 배경마저 모호하며, 거기에 이상한 자연현상이 겹치면서 실로 동양적인 판타지의 신비로움이 잘 살아난 걸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완성도 면에서도 부족한 퀄리티로 아쉬움을 남겼던 십이국기에 비해 애니메이션 자체의 완성도 역시 뛰어날 뿐만 아니라 대중성까지 두루 갖추어 실사영화로도까지 제작되기도 했으니, 21세기 들어 오리엔탈 판타지의 의미있는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 Huyumi Ono·Kodansha (좌측) / ⓒ Urushibara Yuki/ Kodansha·Mushishi Partnership (우측)

개인적으로 몹시 좋아하는 두 작품으로 십이국기는 중국을, 충사는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용면에서는 전자는 대하 서사시를, 후자는 미스테리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둘의 공통점은 흡입력있는 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충사 뿐만 아니라 뛰어난 완성도의 오리엔탈 판타지들이 계속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선라이즈에서 분사한 제작사 BONES는 '천보이문 아야카시 아야시(2006)'을 통해 일본적 색체가 강한 판타지 작품을 선보입니다. 시대물스러운 배경 위에 퇴마라는 오리엔탈 판타지 소재를 접목시켜 본즈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높은 완성도의 작품을 만들어 냈지요. BONES에 버금가는 높은 완성도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프로덕션 I.G는 우에하시 나오코의 인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정령의 수호자(2007)'로 역시 정통 판타지의 진수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두 작품들은 뛰어난 완성도와 안정적인 스토리텔링에 비해서 대중적인 관심을 끄는데는 실패하게 됩니다. 이후 오리엔탈 판타지는 두각을 나타낼만한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한 체 다시금 정체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아니메의 세계화 추세를 맞이하여 옛 일본 시대를 컨셉으로 한 시대물과 판타지물의 등장은 어찌보면 어느 정도 한계에 봉착한 듯도 싶습니다. 안정적인 스토리텔링과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흥미를 끌기에는 역부족인 셈이죠.

이제는 오리엔탈 판타지 아니메가 일본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보다 더 다채로워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비록 잠깐에 그쳤지만, 인도나 티벳 등의 소재를 사용하려 한 시도는 참신한 것이었죠. 가까운 한국의 소재에도 눈을 돌렸으면 싶지만 아직 여러모로 여의치는 않는 듯 싶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스스로도 세계에 내세울만한 전설이나 설화의 발굴에 부족했다는 생각인데요. 삼국지나 서유기, 수호지와 같이 중국에는 세계에 내세울만한 고전문학이 존재하지만, 한국은 아직 그런 측면에서는 여러 좋은 컨텐츠를 제대로 세계에 소개하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 會川昇·BONES/MBS·ANX·Dentsu(좌측) / ⓒ 上橋菜穂子·偕成社·精靈の守り人 製作委員会 (우측)

성인취향의 시리어스한 작품을 주로 제작하는 본즈와 프로덕션 I.G의 오리엔탈 판타지는 월등한 완성도와 스토리텔링에도 불구하고 흥미를 끄는 것에 실패한 비운의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는 꼭 한국인만이 한국의 설화와 전설을 소재로 하라는 법은 없지 않나 싶습니다. 구미호와 같은 소재는 만화영화나 영화로서도 꽤 매력적인 소재라고 보이는데, 이런 컨텐츠들을 선진국들이 가져다 쓸 수 있는 길이 더 열렸으면 싶구요. 실례로 '식스 센스'의 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한국의 설화를 소재로 '레이디 인 더 워터'를 연출하기도 했지요. (완성도는 안습이었습니다만.) 그외에도 한미 합작 애니메이션 '아앙의 전설(역시 샤말란 감독이 실사화 하면서 안습의 완성도로 탄생)'은 오리엔탈 판타지의 성격을 띈 보기드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한국적인 컨텐츠가 세계시장에서 각광을 받는다면, 직접적인 경제효과는 없을지 몰라도 이를 통해 한국의 문화를 더 널리 알릴 수 있으며, 여러 관광 컨텐츠나 캐릭터 사업을 열 수 있는 간접적인 경제효과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메에서도 이처럼 한국적인 소재가 쓰인 오리엔탈 판타지가 등장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판타지 아니메 연대기 2부 끝. 3부에서 계속)

덧붙임) 아, 그러고보니 95년도에 한일합작으로 홍길동을 소재로 한 '돌아온 홍길동'이라는 작품이 제작된 적이 있긴 했습니다. 신동헌 감독의 고전 홍길동을 다시 이어보자는 기획의도였지만, 전형적인 일본식 히어로물로 변질되어버린 데다가 완성도까지 안습이었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만...


<참고 사이트>

[1] 백사전(白蛇傳) 1958 by 캅셀, CAPSULE 블로그: 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2] 불새-여명편(火の鳥 · 黎明編) 1978 by 캅셀, CAPSULE 블로그: 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3] 불새-봉황편(火の鳥 · 鳳凰編) 1986 by 캅셀, CAPSULE 블로그: 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4] 火の鳥 (漫画), Wikipedia Japan
[5] 3×3 EYES, Wikipedia Japan
[6] もののけ姫, Wikipedia Japan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프레스블로그 MP(Monthly Posting)2010년 10월차에 선정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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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에 실었던 '판타지 아니메 연대기 (1): 일본식 중세 판타지'를 기본으로 하여 새로이 내용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 Group SNE/KADOKAWA/MARUBENI/TOKYO Broadcasting (Illustrated by Yuki Nobuteru)


<목차>



<서문>

타지라는 장르는 굉장히 포괄적인 장르입니다. 마법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이야기의 소재나 배경으로 사용되는 장르를 판타지라고 쉽게 정의할 수도 있지만, 성격에 따라서는 동화와 같은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조금은 무섭고 괴기스러운 이야기도 될 수 있습니다. 마법이 등장한다면 얼핏 고대나 중세유럽이 시대 배경이 되어야할 것 같지만 현재에 벌어지는 신비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요. 흔히들 말하는 톨킨의 세계관이나 RPG(Role Playing Game)의 토대가 되는 포가튼 렐름(Forgotten Realm)과 같은 서양 문명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동양의 신화나 전설, 그리고 무협소설의 이야기도 훌륭한 판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라는 별에 한정될 수도 있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지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구요.

이렇게 다양한 스타일로 표현될 수 있는 판타지는 그 성격상 만화영화와 상당히 궁합이 잘맞는 소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물이 사람처럼 말하고 생활하는 만화영화의 표현 자체가 판타지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과거 디즈니의 수많은 명작 만화영화들의 소재는 대부분 세계명작 동화를 토대로 한 것이었으며, 동화는 당연하게도 판타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판타지에서 선보이는 여러 초자연적인 현상의 표현에 있어서도 과거에는 실사영상으로 재현하기 위한 기술적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만화영화와 더 밀접한 관련을 맺기도 했지요.

이 글은 바로 이렇게 판타지와 좋은 궁합을 선보이는 만화영화 중 일본 만화영화, 즉 아니메에 한정하여 판타지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이들 판타지 아니메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이야기 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사실, 이 글은 이미 2년 전에 글쓴이의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포스팅된 바가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작품의 소개에 너무 치중하여 전체적인 흐름을 이야기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기에 이번 포스트를 통해 새롭게 리뉴얼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당시 글을 다시 보니 여러 오류들이 있어서 정정차원의 글이기도 합니다)

글은 총 5부작으로 구성됩니다. 판타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되는 톨킨 교수가 창조해냈던 중간계의 세계관이나, 아더왕의 전설, 북유럽의 신화, 그리스 신화 등을 기본으로 한 서양 판타지 중에서 특히, 일본식 재해석이 주로 이루어졌던 중세 판타지를 다룬 아니메를 시작으로, 동양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오리엔탈 판타지, SF와 같은 타장르와의 혼합이 인상적인 퓨전 판타지, 호러틱한 소재와 표현으로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 호러 판타지, 마지막으로 동화적인 세계관과 이야기를 선보인 동화 판타지로 이야기가 이어지게 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법소녀물도 판타지물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번 이야기에서는 일단 마법소녀물을 제외시켰습니다.)

본 글에서 정의한 판타지 아니메의 다섯가지 분류는 오로지 글쓴 이의 주관적 판단에 의한 결과로, 공식적인 명칭과는 무관한 것이오니 읽으시면서 착오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어디가서 판타지 만화영화가 제가 말한 것처럼 다섯 종류로 나뉜다고 말씀하시다가 망신 당하시는 일이 없으시길 빌면서...


중세 판타지, 아니메의 외면을 받다(?)

세 판타지 세계관(본 글에서는 표기상의 편의를 위해 톨킨의 중간계 세계관, 북유럽 신화, 그리스 신화, 포가틀 렐름의 세계관과 같은 서양식 판타지 세계관을 통틀어 '중세 판타지 세계관'이라고 명명하도록 하겠습니다.)이 아니메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58년 '백사전'으로 상업 만화영화의 시대를 연 일본 만화영화사에서도 시간이 좀 지나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 명작동화 스타일을 추구하던 당시의 아니메가 자국의 인기만화를 원작으로 한 아니메들의 공세에 밀리게 되는, 즉 '세계적인 것의 추구'에서 '일본적인 것의 추구'로 전체적인 아니메의 방향이 선회한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후 슈퍼로봇, 마법소녀, 전대물/히어로물, 레이지버스, 리얼로봇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은 중세 판타지라는 서양식 소재가 아니메에 끼어들 틈을 거의 주지 않았다고 봐야 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트렌드가 막 틀을 잡아가던 70년대 후반 경에 중세 판타지를 소재로 한 아니메가 하나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아더왕의 전설을 소재로 한 '원탁의 기사 이야기, 불타올라라 아서(한국방영제목 '원탁의 기사'. 이하 원탁의 기사)'가 그것입니다.

'원탁의 기사 불타올라라 아서'의 주인공 아서왕.

어찌보면 이 원탁의 기사는 중세 판타지를 아니메의 소재로 쓰고자 했던 의도라기보다는 제작사인 도에이 동화가 이전에 선보였던 세계 명작동화 스타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이 방영을 시작한 79년도는 슈퍼로봇의 전성기가 정점을 거쳐 서서히 내리막을 걷던 시기이며, 기동전사 건담이 방영을 시작하며 리얼로봇 신화의 태동을 알리던 시점이기도 했는데요.

이것은 그동안 로봇 아니메를 이끌어 오던 도에이 동화가 선라이즈에게 그 바톤을 거의 넘겨줘 버렸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도에이 동화가 자신의 옛 레퍼토리인 세계명작동화들을 다시 끄집어 내는 과정에서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아더왕의 전설이 작품의 소재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원탁의 기사는 1기와 2기(2기 제목은 원탁의 기사가 아닌, 백마의 왕자로 바뀝니다.)로 나뉘어 방영됩니다. 1기가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던 탓에 작품의 진행노선에 변화를 주기 위해 불가피하게 1기와 2기로 구분되었다 보여지는데요. 전통적인 아서왕의 이야기가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지 못하자 도에이 동화측에서 히어로물의 컨셉을 이 원탁의 기사에 적용하게 되었고, 바로 이 2기의 변화는 앞으로 이야기할 일본식 중세 판타지 아니메의 방향성에 대해 모종의 단서를 제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국을 떠나 잠행을 시작한 아서왕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악의 무리를 처단하고자 갑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엑스칼리버와 빛의 방패(?)를 들고 나타나는 모습은 영락없는 일본식 히어로의 모습 그것입니다. 갑옷의 모습 또한 중세의 무거운 풀 플레이트(Full Plate) 갑옷이 아닌 가벼운 전투복 같아서 마치 전년도에 방영했던 'SF 서유기 스타징가(1978)'에 등장하는 손오공들의 코스튬 디자인을 연상시켰구요. 게다가 종반부에는 하늘을 나르는 배까지 등장하는 등([1] 참조), 거의 완벽하게 아서왕의 전설을 재구성하여 일본산 히어로물로 탈바꿈시키게 됩니다.

비록, 원탁의 기사는 일본 내에서는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조용히 막을 내립니다만, 이 아서왕 이야기의 파격적인 원작 파괴는 앞으로 중세 판타지 소재의 아니메가 가야할 어떤 방향을 암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극장판과 OVA로 방향선회, 그리고 RPG의 시동

79년 원탁의 기사를 끝으로 한동안 일본 아니메는 로봇 아니메, 특히 건담으로 대표되는 리얼로봇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렸고, 그와 함께 판타지라는 소재는 아니메에서 한동안 눈에 띄지 못하게 됩니다. 리얼로봇으로 인해 사실주의가 아니메의 대세가 되면서 SF 아니메가 다른 아니메들의 영향력을 앞질러 버리는 전개가 계속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SF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판타지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여집니다. (판타지의 약세는 리얼로봇으로 SF의 붐을 몰고 온 장본인 토미노 감독이 83년도에 판타지와 로봇이라는 요소를 결합시킨 독특한 작품 '성전사 단바인'을 제작하면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합니다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3부에서 다루도록 하구요.)

TV 아니메가 SF와 리얼로봇의 흐름에 휩쓸리고 있을 무렵, 극장용 아니메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경제의 전성기가 계속되면서 극장 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카토카와 서점의 극장시장 가세로 대작 극장판 영화와 아니메가 속속 만들어지던 무렵, 카토카와 서점의 견제를 위해 미야자키 하야오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로 성공을 거둔 도쿠마 서점이 미야자키 하야오에 이은 제2의 거장을 극장 아니메 시장에 진출시키려한 것이죠. 그 제2의 거장이란 다름 아닌 바로 야스히코 요시카즈였습니다.

선라이즈의 캐릭터 디자이너 겸 작화감독으로,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로 엄청난 유명세를 치르고 있던 그는, 토미노 요시유키의 그늘을 벗어나 크리에이터로서 일보 진화하려 하던 참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만화잡지 '류'에 '아리온'이라는 판타지 배경의 코믹스를 연재중이었고([2] 참조), 업계와 야스히코 본인의 의지가 맞물려 이 아리온이 마침내 극장 아니메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죠. 야스히코 요시카즈라는 네임 밸류와, 도쿠마 서점의 공격적인 제작의지가 맞물려 아리온은 대작 아니메로서의 위용을 어김없이 보여주게 됩니다. 특히, 그리스 신화라는 중세 판타지 소재의 단골 메뉴가 이 작품의 배경이 됨으로써 중세 판타지의 소재가 다시금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는 OVA 베스트셀러인 유야마 쿠니히코(요술공주 밍키 감독)와 초미형 캐릭터 디자이너 이노마타 무츠미의 '환몽전기 레다(1985)'나, 역시 이 두 콤비의 극장판 아니메인  '윈다리아(1986)', 그리고 천재 일러스트레이터 아마노 요시타카의 환상적인 캐릭터를 톱 클래스의 작화가 아라키 신고/히메노 미치 부부가 멋지게 해석해낸 유메마쿠라 바쿠 원작의 '아몬 사가(1986)'와 같은 걸출한 작품들이 등장하며 판타지의 흐름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레다나 윈다리아 등의 작품들은 모두 정통 판타지의 형식 위에 여러가지 독자적인 설정이 가미된 변형된 판타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아리온 이하 이 작품들이 아니메에서 판타지의 흐름을 주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동전사 Z 건담(1985)'을 정점으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던 리얼로봇 아니메는 87년도의 '기갑전기 드라고나'를 끝으로 사실상의 여정을 마치고 있던 참이었으며, 그러한 공백기를 틈타서 중세 판타지는 아니메가 아닌 컴퓨터 게임시장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스퀘어社의 RPG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와 에닉스社의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후일, 스퀘어는 에닉스에 합병되어 스퀘어 에닉스로 사명 변경)는 일본 게임시장에 RPG라는 장르의 성공적인 안착을 가져온 타이틀로서, 그 영향력은 게임 시장을 막 넘어설 기세였습니다. 미디어 믹스의 소재로서도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던 이 시리즈들은 코믹스를 거쳐 마침내 아니메 시장에 입성하게 되었고, 이들 중 가장 먼저 아니메化 된 것이 바로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였던 것입니다.

'드래곤 볼'이라는 희대의 히트작을 만들어낸 토리야마 아키라가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그는 드래곤 퀘스트 게임에서 이미 캐릭터 디자인을 맡고 있었는데) '드래곤 퀘스트 - 아벨탐험대(1989~1990)'는 본방의 시청률 면에서는 그닥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진 못했으나, RPG의 공식을 코믹스를 거쳐 아니메로 옮겨놓았다는 점에 있어서 성공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는 아벨 탐험대 이후에도 코믹스로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던 '드래곤 퀘스트 - 다이의 대모험(1991~1992)'을 연이어 선보이게 되지요. (세번째 시리즈인 '로토의 문장'은 TV 시리즈가 아닌 극장판으로 제작됩니다.)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의 의의는 중세 판타지 세계관이 아니메에 사용되었다는 것 외에도, 중세 판타지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게임을 통해 완벽하게 일본식 스타일로 재구성된 중세 판타지가 아니메의 소재로 쓰였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즉, 중세 판타지라고는 하지만 실제 그 모습은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철저히 바뀌어진 설정이었던 것입니다. 게임에서 사용되었던 각종 마법과 공격기술, 파티 캐릭터들의 구성 등은 중세 판타지를 토대로 RPG를 위해 일본에서 만들어진 설정이었으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더욱 더 강력한 보스와 만나게 되는 설정 역시 RPG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RPG의 모습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로봇물과 판타지를 결합한 퓨전 스타일의 '마신영웅전 와타루(1988)' 등과 함께, 아니메에서의 중세 판타지를 출신불명의 독자적인 세계관으로 자리매김 시키게 됩니다.

파이널 판타지와 함께 일본 RPG의 양대산맥을 구축한 드래곤 퀘스트. 코믹스와 아니메로 미디어믹스되며 저력을 과시한다.



전통과 변칙의 조화, 소설을 원동력으로 삼다

서 언급했듯이 RPG 게임에서 비롯된 중세 판타지의 세계관은 아니메에서도 게임 스타일에 더 정형화된 모습으로 주로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들은 주 시청타깃층이 어린이들에게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통 판타지를 지향하기보다는 그들의 취향에 맞는 변형된 일본식 중세 판타지로의 접근이 더 맞는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은데요. 이렇게 일본 내 대중성을 고려하면서 판타지는 완벽히 일본식 입맛으로 길들여집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판타지 아니메는 몇몇 기본 뼈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변형된 일본식 스타일을 따르게 되지요. 

하지만, 90년대에 들어오면서 그 흐름은 한방향으로만 고정되지는 않았습니다. 한 작가의 판타지 소설로 인해 판타지 아니메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여 날개를 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미즈노 료 원작의 판타지 대하소설 '로도스 섬의 전기'인 것입니다.

이 소설은 이제까지의 판타지 아니메들이 그러했듯이 아동층을 타깃으로 하여 PRG의 공식을 대입한 변형된 일본식 판타지가 아닌 판타지의 전통적 아이템인 TRPG(Table Talk RPG)를 바탕으로,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 충실한 설정과 매력적인 세계관, 살아 움직이는 신화속 캐릭터들로 인해 일본에서도 기대 이상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작품입니다. 소설 뿐만 아니라 PC 게임, 카드 게임을 거쳐 TV 아니메이션과 OVA 등 수많은 형태의 미디어 믹스가 전개된 가히 일본 중세 판타지의 최고 히트작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겠죠. 

특히, OVA로 제작된 13화 완결의 아니메 '로도스 섬의 전기(1990)'는 90년대 들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하는 작화감독 유키 노부테루의 미려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캐릭터로 인해 아니메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면서 정통 판타지의 의미있는 일격을 날리게 됩니다. 이전까지의 판타지 아니메가 거의 대부분 정통 스타일을 버리고 일본식 변주를 보여주었던 것에 비하여 이 작품은 원작에 충실한 구성과 시리어스한 내용 전개로 인하여 판타지의 붐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로도스 전기를 시작으로 '은하영웅전설'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 다나카 요시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아슬란 전기(1991)'와, 타게가와 세이의 라이트 노벨을 극장판 아니메화하고 세기의 미형 캐릭터 디자이너 이노마타 무츠미와 유키 노부테루가 동시에 참여한 '바람의 대륙(1992)' 등이 로도스 섬의 전기가 다시 불러 일으킨 정통 판타지의 바람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정통 판타지의 공식을 따르거나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화된 작품들이었다. 80년대 중반의 판타지 아니메 스타일과도 맞닿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높은 완성도나 걸출한 작화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이 정통 판타지 스타일의 아니메들은 그 인기의 흐름을 이끌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뒤의 두 작품들은 모두 카도카와 서점의 작품들이었는데, 당시 카도카와 서점이 기업경영을 둘러싸고 벌어진 내흥으로 인해 그 뒷심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군요. 이후에 등장한 판타지 소설들은 정통 판타지의 공식을 바탕으로 일본식 스타일에 맞춰진 새로운 흐름으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특히 젊은 작가층이 많이 포진된 판타지 소설의 속성 상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라이트노벨 계열에서 주 소재로 쓰여지기 시작하면서 좀 더 아니메로의 전환이 용이한 코믹적인 요소나 만화적인 설정이 적극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RPG에 길들여진 신세대적 감각과 라이트노벨의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의 결합으로 인해 추후의 판타지 아니메의 노선은 보다 더 가벼워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리고, 바로 판타지 장르의 기념비적인 빅히트작이 마침내 아니메로 등장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칸자카 하지메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코믹 판타지 아니메 '슬레이어즈(1995~2009)'였던 것입니다.

슬레이어즈 시리즈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인 것이었습니다. 90년대 중반은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나 '
기동전함 나데시코(1996)'과 같은 메가톤급 히트작이 줄을 이으면서 아니메의 새로운 시동이 시작되려던 참이었는데요. 이 시기에 이들 레전드급 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한 슬레이어즈의 등장은 중세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일본식 판타지 아니메의 밝은 앞날을 말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슬레이어즈 시리는 2009년까지 총 5기의 TV 시리즈와 5편의 극장판, 2편의 OVA 뿐만 아니라 각종 게임 타이틀과 코믹스 등의 성공적인 미디어 믹스로 판타지 아니메의 레전더리로 남게 되며, 슬레이어즈의 성공은 이후 정통 스타일의 판타지보다는 코믹과 개그가 가미된 보다 더 라이트한 형태의 판타지 아니메들이 생산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슬레이어즈 이후 판타지는 다시 시리어스에서 코믹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다만, 이번에는 성적인 코드가 삽입된 작품이 왕왕 눈에 띄었다.



퓨전의 홍수 속에 정통 판타지를 그리워하다

타지 아니메는 로봇 장르나 마법소녀물과 같이 아니메에 있어서 하나의 장르로는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시대를 거쳐오면서 몇몇 걸출한 작품들이 아니메의 일부 흐름을 판타지 아니메 쪽으로 잠시 돌린 적은 있지만, 대게는 그 생명력이 얼마 가지 못했지요. 특히 아니메에서 배경과 소재로 숱하게 사용되었으면서도 정통 스타일보다는 수많은 변주와 변화가 가해진 장르가 바로 중세 판타지이기도 합니다. 자기식으로의 개조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스타일 덕분인지 일본 아니메에서 정통 판타지를 만나기란 생각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세 판타지나 혹은 중세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코믹 장르이건 시리어스한 드라마이건, 모에물이건 간에 상관없이 자주 등장하는 편입니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의 열풍 이후로 잠시동안 판타지 장르가 전세계(정확히 말하면 헐리우드)에서 상당한 관심을 받았던 당시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 싶기도 하구요.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다양한 장르의 아니메들이 선보이면서 판타지 역시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를 보이는 듯 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모에나 개그와 같은 가벼운 성격을 가진 작품들의 영향 탓인지 큰 스케일의 작품이 나타나지는 못하는 듯 합니다. 곤조의 2007년 극장 아니메 '브레이브 스토리'나 지브리의 차세대 기대주(?) 미야자키 고로의 '게드전기(2007)'는 모두 흥행에 있어서는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만, 획을 긋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게드전기의 경우에는 흥행에 비해 평단과 관객의 평가는 비참할 정도이기까지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판타지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요. 작품의 메인 소재라기보다는 극의 설정과 같이 서브 테마로 자주 사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로봇 아니메 또는 SF 아니메와의 결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3부인 퓨전 판타지 파트에서 좀 더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에물과 같이 최근 제작편수가 눈에 띄게 많은 장르에서도 단순 배경으로 자주 사용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퀸즈 블레이드'와 같은 노골적인 아니메에도 중세 판타지는 변형된 소재로서 등장하지요.)

하지만, 정통 판타지에 대한 흐름이 끊긴 부분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퓨전 요리와 신개념의 레시피가 많을수록 원래의 맛, 정통 맛에 대한 그리움 역시 커지는 법이 아닐까요. 일본식으로 변주된 작품들 뿐만 아니라 좀 더 정통적인 스타일에 기반한 드라마틱하고 큰 스케일의 작품도 가끔은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판타지 아니메 연대기 1부 끝. 2부에서 계속)


<참고 사이트>

[1] <원탁의 기사>(円卓の騎士物語)(1979): 불타올라라 아서(燃えろアーサー), by Kewell, Kewell's Factory about
 Something 
[2] 아리온(アリオン) 1986 by 캅셀, CAPSULE 블로그: 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3] ロードス島戦記, Wikipedia Japan
[4] スレイヤーズ, Wikipedia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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