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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에 실었던 '판타지 아니메 연대기 (1): 일본식 중세 판타지'를 기본으로 하여 새로이 내용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 Group SNE/KADOKAWA/MARUBENI/TOKYO Broadcasting (Illustrated by Yuki Nobuteru)


<목차>



<서문>

타지라는 장르는 굉장히 포괄적인 장르입니다. 마법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이야기의 소재나 배경으로 사용되는 장르를 판타지라고 쉽게 정의할 수도 있지만, 성격에 따라서는 동화와 같은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조금은 무섭고 괴기스러운 이야기도 될 수 있습니다. 마법이 등장한다면 얼핏 고대나 중세유럽이 시대 배경이 되어야할 것 같지만 현재에 벌어지는 신비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요. 흔히들 말하는 톨킨의 세계관이나 RPG(Role Playing Game)의 토대가 되는 포가튼 렐름(Forgotten Realm)과 같은 서양 문명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동양의 신화나 전설, 그리고 무협소설의 이야기도 훌륭한 판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구라는 별에 한정될 수도 있지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지구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구요.

이렇게 다양한 스타일로 표현될 수 있는 판타지는 그 성격상 만화영화와 상당히 궁합이 잘맞는 소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물이 사람처럼 말하고 생활하는 만화영화의 표현 자체가 판타지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요. 과거 디즈니의 수많은 명작 만화영화들의 소재는 대부분 세계명작 동화를 토대로 한 것이었으며, 동화는 당연하게도 판타지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판타지에서 선보이는 여러 초자연적인 현상의 표현에 있어서도 과거에는 실사영상으로 재현하기 위한 기술적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만화영화와 더 밀접한 관련을 맺기도 했지요.

이 글은 바로 이렇게 판타지와 좋은 궁합을 선보이는 만화영화 중 일본 만화영화, 즉 아니메에 한정하여 판타지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이들 판타지 아니메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이야기 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사실, 이 글은 이미 2년 전에 글쓴이의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포스팅된 바가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작품의 소개에 너무 치중하여 전체적인 흐름을 이야기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기에 이번 포스트를 통해 새롭게 리뉴얼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당시 글을 다시 보니 여러 오류들이 있어서 정정차원의 글이기도 합니다)

글은 총 5부작으로 구성됩니다. 판타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되는 톨킨 교수가 창조해냈던 중간계의 세계관이나, 아더왕의 전설, 북유럽의 신화, 그리스 신화 등을 기본으로 한 서양 판타지 중에서 특히, 일본식 재해석이 주로 이루어졌던 중세 판타지를 다룬 아니메를 시작으로, 동양적 소재를 바탕으로 한 오리엔탈 판타지, SF와 같은 타장르와의 혼합이 인상적인 퓨전 판타지, 호러틱한 소재와 표현으로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 호러 판타지, 마지막으로 동화적인 세계관과 이야기를 선보인 동화 판타지로 이야기가 이어지게 되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법소녀물도 판타지물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번 이야기에서는 일단 마법소녀물을 제외시켰습니다.)

본 글에서 정의한 판타지 아니메의 다섯가지 분류는 오로지 글쓴 이의 주관적 판단에 의한 결과로, 공식적인 명칭과는 무관한 것이오니 읽으시면서 착오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어디가서 판타지 만화영화가 제가 말한 것처럼 다섯 종류로 나뉜다고 말씀하시다가 망신 당하시는 일이 없으시길 빌면서...


중세 판타지, 아니메의 외면을 받다(?)

세 판타지 세계관(본 글에서는 표기상의 편의를 위해 톨킨의 중간계 세계관, 북유럽 신화, 그리스 신화, 포가틀 렐름의 세계관과 같은 서양식 판타지 세계관을 통틀어 '중세 판타지 세계관'이라고 명명하도록 하겠습니다.)이 아니메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58년 '백사전'으로 상업 만화영화의 시대를 연 일본 만화영화사에서도 시간이 좀 지나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 명작동화 스타일을 추구하던 당시의 아니메가 자국의 인기만화를 원작으로 한 아니메들의 공세에 밀리게 되는, 즉 '세계적인 것의 추구'에서 '일본적인 것의 추구'로 전체적인 아니메의 방향이 선회한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후 슈퍼로봇, 마법소녀, 전대물/히어로물, 레이지버스, 리얼로봇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은 중세 판타지라는 서양식 소재가 아니메에 끼어들 틈을 거의 주지 않았다고 봐야 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트렌드가 막 틀을 잡아가던 70년대 후반 경에 중세 판타지를 소재로 한 아니메가 하나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아더왕의 전설을 소재로 한 '원탁의 기사 이야기, 불타올라라 아서(한국방영제목 '원탁의 기사'. 이하 원탁의 기사)'가 그것입니다.

'원탁의 기사 불타올라라 아서'의 주인공 아서왕.

어찌보면 이 원탁의 기사는 중세 판타지를 아니메의 소재로 쓰고자 했던 의도라기보다는 제작사인 도에이 동화가 이전에 선보였던 세계 명작동화 스타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이 방영을 시작한 79년도는 슈퍼로봇의 전성기가 정점을 거쳐 서서히 내리막을 걷던 시기이며, 기동전사 건담이 방영을 시작하며 리얼로봇 신화의 태동을 알리던 시점이기도 했는데요.

이것은 그동안 로봇 아니메를 이끌어 오던 도에이 동화가 선라이즈에게 그 바톤을 거의 넘겨줘 버렸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도에이 동화가 자신의 옛 레퍼토리인 세계명작동화들을 다시 끄집어 내는 과정에서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아더왕의 전설이 작품의 소재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원탁의 기사는 1기와 2기(2기 제목은 원탁의 기사가 아닌, 백마의 왕자로 바뀝니다.)로 나뉘어 방영됩니다. 1기가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던 탓에 작품의 진행노선에 변화를 주기 위해 불가피하게 1기와 2기로 구분되었다 보여지는데요. 전통적인 아서왕의 이야기가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지 못하자 도에이 동화측에서 히어로물의 컨셉을 이 원탁의 기사에 적용하게 되었고, 바로 이 2기의 변화는 앞으로 이야기할 일본식 중세 판타지 아니메의 방향성에 대해 모종의 단서를 제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국을 떠나 잠행을 시작한 아서왕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악의 무리를 처단하고자 갑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엑스칼리버와 빛의 방패(?)를 들고 나타나는 모습은 영락없는 일본식 히어로의 모습 그것입니다. 갑옷의 모습 또한 중세의 무거운 풀 플레이트(Full Plate) 갑옷이 아닌 가벼운 전투복 같아서 마치 전년도에 방영했던 'SF 서유기 스타징가(1978)'에 등장하는 손오공들의 코스튬 디자인을 연상시켰구요. 게다가 종반부에는 하늘을 나르는 배까지 등장하는 등([1] 참조), 거의 완벽하게 아서왕의 전설을 재구성하여 일본산 히어로물로 탈바꿈시키게 됩니다.

비록, 원탁의 기사는 일본 내에서는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조용히 막을 내립니다만, 이 아서왕 이야기의 파격적인 원작 파괴는 앞으로 중세 판타지 소재의 아니메가 가야할 어떤 방향을 암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극장판과 OVA로 방향선회, 그리고 RPG의 시동

79년 원탁의 기사를 끝으로 한동안 일본 아니메는 로봇 아니메, 특히 건담으로 대표되는 리얼로봇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렸고, 그와 함께 판타지라는 소재는 아니메에서 한동안 눈에 띄지 못하게 됩니다. 리얼로봇으로 인해 사실주의가 아니메의 대세가 되면서 SF 아니메가 다른 아니메들의 영향력을 앞질러 버리는 전개가 계속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SF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판타지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여집니다. (판타지의 약세는 리얼로봇으로 SF의 붐을 몰고 온 장본인 토미노 감독이 83년도에 판타지와 로봇이라는 요소를 결합시킨 독특한 작품 '성전사 단바인'을 제작하면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합니다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3부에서 다루도록 하구요.)

TV 아니메가 SF와 리얼로봇의 흐름에 휩쓸리고 있을 무렵, 극장용 아니메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경제의 전성기가 계속되면서 극장 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카토카와 서점의 극장시장 가세로 대작 극장판 영화와 아니메가 속속 만들어지던 무렵, 카토카와 서점의 견제를 위해 미야자키 하야오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로 성공을 거둔 도쿠마 서점이 미야자키 하야오에 이은 제2의 거장을 극장 아니메 시장에 진출시키려한 것이죠. 그 제2의 거장이란 다름 아닌 바로 야스히코 요시카즈였습니다.

선라이즈의 캐릭터 디자이너 겸 작화감독으로,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로 엄청난 유명세를 치르고 있던 그는, 토미노 요시유키의 그늘을 벗어나 크리에이터로서 일보 진화하려 하던 참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만화잡지 '류'에 '아리온'이라는 판타지 배경의 코믹스를 연재중이었고([2] 참조), 업계와 야스히코 본인의 의지가 맞물려 이 아리온이 마침내 극장 아니메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죠. 야스히코 요시카즈라는 네임 밸류와, 도쿠마 서점의 공격적인 제작의지가 맞물려 아리온은 대작 아니메로서의 위용을 어김없이 보여주게 됩니다. 특히, 그리스 신화라는 중세 판타지 소재의 단골 메뉴가 이 작품의 배경이 됨으로써 중세 판타지의 소재가 다시금 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는 OVA 베스트셀러인 유야마 쿠니히코(요술공주 밍키 감독)와 초미형 캐릭터 디자이너 이노마타 무츠미의 '환몽전기 레다(1985)'나, 역시 이 두 콤비의 극장판 아니메인  '윈다리아(1986)', 그리고 천재 일러스트레이터 아마노 요시타카의 환상적인 캐릭터를 톱 클래스의 작화가 아라키 신고/히메노 미치 부부가 멋지게 해석해낸 유메마쿠라 바쿠 원작의 '아몬 사가(1986)'와 같은 걸출한 작품들이 등장하며 판타지의 흐름을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레다나 윈다리아 등의 작품들은 모두 정통 판타지의 형식 위에 여러가지 독자적인 설정이 가미된 변형된 판타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아리온 이하 이 작품들이 아니메에서 판타지의 흐름을 주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동전사 Z 건담(1985)'을 정점으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던 리얼로봇 아니메는 87년도의 '기갑전기 드라고나'를 끝으로 사실상의 여정을 마치고 있던 참이었으며, 그러한 공백기를 틈타서 중세 판타지는 아니메가 아닌 컴퓨터 게임시장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스퀘어社의 RPG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와 에닉스社의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후일, 스퀘어는 에닉스에 합병되어 스퀘어 에닉스로 사명 변경)는 일본 게임시장에 RPG라는 장르의 성공적인 안착을 가져온 타이틀로서, 그 영향력은 게임 시장을 막 넘어설 기세였습니다. 미디어 믹스의 소재로서도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던 이 시리즈들은 코믹스를 거쳐 마침내 아니메 시장에 입성하게 되었고, 이들 중 가장 먼저 아니메化 된 것이 바로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였던 것입니다.

'드래곤 볼'이라는 희대의 히트작을 만들어낸 토리야마 아키라가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그는 드래곤 퀘스트 게임에서 이미 캐릭터 디자인을 맡고 있었는데) '드래곤 퀘스트 - 아벨탐험대(1989~1990)'는 본방의 시청률 면에서는 그닥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진 못했으나, RPG의 공식을 코믹스를 거쳐 아니메로 옮겨놓았다는 점에 있어서 성공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는 아벨 탐험대 이후에도 코믹스로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던 '드래곤 퀘스트 - 다이의 대모험(1991~1992)'을 연이어 선보이게 되지요. (세번째 시리즈인 '로토의 문장'은 TV 시리즈가 아닌 극장판으로 제작됩니다.)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의 의의는 중세 판타지 세계관이 아니메에 사용되었다는 것 외에도, 중세 판타지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게임을 통해 완벽하게 일본식 스타일로 재구성된 중세 판타지가 아니메의 소재로 쓰였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즉, 중세 판타지라고는 하지만 실제 그 모습은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철저히 바뀌어진 설정이었던 것입니다. 게임에서 사용되었던 각종 마법과 공격기술, 파티 캐릭터들의 구성 등은 중세 판타지를 토대로 RPG를 위해 일본에서 만들어진 설정이었으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더욱 더 강력한 보스와 만나게 되는 설정 역시 RPG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RPG의 모습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로봇물과 판타지를 결합한 퓨전 스타일의 '마신영웅전 와타루(1988)' 등과 함께, 아니메에서의 중세 판타지를 출신불명의 독자적인 세계관으로 자리매김 시키게 됩니다.

파이널 판타지와 함께 일본 RPG의 양대산맥을 구축한 드래곤 퀘스트. 코믹스와 아니메로 미디어믹스되며 저력을 과시한다.



전통과 변칙의 조화, 소설을 원동력으로 삼다

서 언급했듯이 RPG 게임에서 비롯된 중세 판타지의 세계관은 아니메에서도 게임 스타일에 더 정형화된 모습으로 주로 등장합니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들은 주 시청타깃층이 어린이들에게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통 판타지를 지향하기보다는 그들의 취향에 맞는 변형된 일본식 중세 판타지로의 접근이 더 맞는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은데요. 이렇게 일본 내 대중성을 고려하면서 판타지는 완벽히 일본식 입맛으로 길들여집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판타지 아니메는 몇몇 기본 뼈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변형된 일본식 스타일을 따르게 되지요. 

하지만, 90년대에 들어오면서 그 흐름은 한방향으로만 고정되지는 않았습니다. 한 작가의 판타지 소설로 인해 판타지 아니메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여 날개를 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미즈노 료 원작의 판타지 대하소설 '로도스 섬의 전기'인 것입니다.

이 소설은 이제까지의 판타지 아니메들이 그러했듯이 아동층을 타깃으로 하여 PRG의 공식을 대입한 변형된 일본식 판타지가 아닌 판타지의 전통적 아이템인 TRPG(Table Talk RPG)를 바탕으로, 중세 판타지 세계관에 충실한 설정과 매력적인 세계관, 살아 움직이는 신화속 캐릭터들로 인해 일본에서도 기대 이상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작품입니다. 소설 뿐만 아니라 PC 게임, 카드 게임을 거쳐 TV 아니메이션과 OVA 등 수많은 형태의 미디어 믹스가 전개된 가히 일본 중세 판타지의 최고 히트작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겠죠. 

특히, OVA로 제작된 13화 완결의 아니메 '로도스 섬의 전기(1990)'는 90년대 들어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하는 작화감독 유키 노부테루의 미려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캐릭터로 인해 아니메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면서 정통 판타지의 의미있는 일격을 날리게 됩니다. 이전까지의 판타지 아니메가 거의 대부분 정통 스타일을 버리고 일본식 변주를 보여주었던 것에 비하여 이 작품은 원작에 충실한 구성과 시리어스한 내용 전개로 인하여 판타지의 붐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로도스 전기를 시작으로 '은하영웅전설'을 통해 스타덤에 오른 다나카 요시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아슬란 전기(1991)'와, 타게가와 세이의 라이트 노벨을 극장판 아니메화하고 세기의 미형 캐릭터 디자이너 이노마타 무츠미와 유키 노부테루가 동시에 참여한 '바람의 대륙(1992)' 등이 로도스 섬의 전기가 다시 불러 일으킨 정통 판타지의 바람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정통 판타지의 공식을 따르거나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화된 작품들이었다. 80년대 중반의 판타지 아니메 스타일과도 맞닿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높은 완성도나 걸출한 작화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이 정통 판타지 스타일의 아니메들은 그 인기의 흐름을 이끌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뒤의 두 작품들은 모두 카도카와 서점의 작품들이었는데, 당시 카도카와 서점이 기업경영을 둘러싸고 벌어진 내흥으로 인해 그 뒷심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군요. 이후에 등장한 판타지 소설들은 정통 판타지의 공식을 바탕으로 일본식 스타일에 맞춰진 새로운 흐름으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특히 젊은 작가층이 많이 포진된 판타지 소설의 속성 상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 라이트노벨 계열에서 주 소재로 쓰여지기 시작하면서 좀 더 아니메로의 전환이 용이한 코믹적인 요소나 만화적인 설정이 적극 도입되기 시작합니다. RPG에 길들여진 신세대적 감각과 라이트노벨의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의 결합으로 인해 추후의 판타지 아니메의 노선은 보다 더 가벼워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리고, 바로 판타지 장르의 기념비적인 빅히트작이 마침내 아니메로 등장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칸자카 하지메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코믹 판타지 아니메 '슬레이어즈(1995~2009)'였던 것입니다.

슬레이어즈 시리즈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인 것이었습니다. 90년대 중반은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나 '
기동전함 나데시코(1996)'과 같은 메가톤급 히트작이 줄을 이으면서 아니메의 새로운 시동이 시작되려던 참이었는데요. 이 시기에 이들 레전드급 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한 슬레이어즈의 등장은 중세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일본식 판타지 아니메의 밝은 앞날을 말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슬레이어즈 시리는 2009년까지 총 5기의 TV 시리즈와 5편의 극장판, 2편의 OVA 뿐만 아니라 각종 게임 타이틀과 코믹스 등의 성공적인 미디어 믹스로 판타지 아니메의 레전더리로 남게 되며, 슬레이어즈의 성공은 이후 정통 스타일의 판타지보다는 코믹과 개그가 가미된 보다 더 라이트한 형태의 판타지 아니메들이 생산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슬레이어즈 이후 판타지는 다시 시리어스에서 코믹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다만, 이번에는 성적인 코드가 삽입된 작품이 왕왕 눈에 띄었다.



퓨전의 홍수 속에 정통 판타지를 그리워하다

타지 아니메는 로봇 장르나 마법소녀물과 같이 아니메에 있어서 하나의 장르로는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시대를 거쳐오면서 몇몇 걸출한 작품들이 아니메의 일부 흐름을 판타지 아니메 쪽으로 잠시 돌린 적은 있지만, 대게는 그 생명력이 얼마 가지 못했지요. 특히 아니메에서 배경과 소재로 숱하게 사용되었으면서도 정통 스타일보다는 수많은 변주와 변화가 가해진 장르가 바로 중세 판타지이기도 합니다. 자기식으로의 개조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스타일 덕분인지 일본 아니메에서 정통 판타지를 만나기란 생각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세 판타지나 혹은 중세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코믹 장르이건 시리어스한 드라마이건, 모에물이건 간에 상관없이 자주 등장하는 편입니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의 열풍 이후로 잠시동안 판타지 장르가 전세계(정확히 말하면 헐리우드)에서 상당한 관심을 받았던 당시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 싶기도 하구요.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다양한 장르의 아니메들이 선보이면서 판타지 역시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를 보이는 듯 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모에나 개그와 같은 가벼운 성격을 가진 작품들의 영향 탓인지 큰 스케일의 작품이 나타나지는 못하는 듯 합니다. 곤조의 2007년 극장 아니메 '브레이브 스토리'나 지브리의 차세대 기대주(?) 미야자키 고로의 '게드전기(2007)'는 모두 흥행에 있어서는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만, 획을 긋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게드전기의 경우에는 흥행에 비해 평단과 관객의 평가는 비참할 정도이기까지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판타지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인데요. 작품의 메인 소재라기보다는 극의 설정과 같이 서브 테마로 자주 사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로봇 아니메 또는 SF 아니메와의 결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3부인 퓨전 판타지 파트에서 좀 더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에물과 같이 최근 제작편수가 눈에 띄게 많은 장르에서도 단순 배경으로 자주 사용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퀸즈 블레이드'와 같은 노골적인 아니메에도 중세 판타지는 변형된 소재로서 등장하지요.)

하지만, 정통 판타지에 대한 흐름이 끊긴 부분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퓨전 요리와 신개념의 레시피가 많을수록 원래의 맛, 정통 맛에 대한 그리움 역시 커지는 법이 아닐까요. 일본식으로 변주된 작품들 뿐만 아니라 좀 더 정통적인 스타일에 기반한 드라마틱하고 큰 스케일의 작품도 가끔은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판타지 아니메 연대기 1부 끝. 2부에서 계속)


<참고 사이트>

[1] <원탁의 기사>(円卓の騎士物語)(1979): 불타올라라 아서(燃えろアーサー), by Kewell, Kewell's Factory about
 Something 
[2] 아리온(アリオン) 1986 by 캅셀, CAPSULE 블로그: 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3] ロードス島戦記, Wikipedia Japan
[4] スレイヤーズ, Wikipedia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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