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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1990), ふしぎの海のナディア / Nadia, The Secret Blue Water


ⓒ NHK, SOGO VISION, TOHO


<정보>

◈ 원안: 쥴 베른의 "해저 2만리"
◈ 총감독: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
◈ 감독: 히구치 신지(樋口真嗣)
◈ 각본: 오오카와 히사오(大川久男), 유메노 카오루(梅野かおる)
◈ 스토리보드/연출: 마스오 쇼이치(増尾昭一), 마사유키(摩砂雪), 요네타니 요시토모(米たにヨシトモ), 모리 타케시(もりたけし), 쿠부오카 토시유키(窪岡俊之), 마에다 마히로(前田真宏) 외
◈ 설정: 마에다 마히로
◈ 캐릭터 디자인: 사다모토 요시유키(貞本義行)
◈ 작화감독: 스즈키 슌지(鈴木俊二), 쿠기미야 히로시(釘宮洋), 카와나 쿠미코(川名久美子) 외
◈ 메카닉 작화감독: 마스오 쇼이치
◈ 미술감독: 사사키 히로시(佐々木洋), 키쿠치 마사노리(菊地正典), 오구라 히로마사(小倉宏昌)
◈ 음악/노래: 사기쓰 시로(鷺巣詩郎) / 모리카와 미호(森川美穂)
◈ 제작: 쿠보타 히로시(久保田弘), 마루야마 켄이치(丸山健一), 요시다 켄이치로(吉田圭一郎)
◈ 제작: 토호, KORAD / 그룹타크, GAINAX, 세영동화 / NHK
◈ 저작권: ⓒ NHK, SOGO VISION, TOHO
◈ 일자: 1990.04.13 ~ 1991.04.12
◈ 장르: SF,모험,액션
◈ 구분/등급: TVA(39화) / 중학생 이상 관람가(PG-13)


<줄거리>

발명을 좋아하는 소년 쟝은 만국박람회에서 열리는 비행 콘테스트에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오게 된다. 파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녀 나디아, 알 수 없는 호기심에 나디아를 뒤따르던 쟝은 그녀와 그녀의 신비스러운 목걸이를 뒤쫓는 괴한들을 발견하게 되고, 엉겁결에 자신이 만든 비행기에 나디아를 태운체 도주를 시작하게 된다. 바다에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표류하던 둘은 미국 군함에 의해 구조되지만, 군함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다 괴물의 습격을 받아 침몰하게 되고 쟝과 나디아는 바다 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나, 바다 괴물의 정체는 다름 아닌 네모 선장의 신비한 잠수함 노틸러스 호 였는데... 노틸러스 호에 승선하게 된 나디아와 쟝의 앞에는 앞으로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나디아를 뒤쫓던 정체불명의 일당들의 목적과 그녀가 가진 목걸이의 비밀은 무엇일까.



<소개>

<만화영화 연대기: 천공의 성 라퓨타(1986)>에서 잠시 언급했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소년과 소녀가 수수께끼의 펜던트를 차지하려는 음모에 휘말려 잠수함을 타고 세계를 여행한다'라는 컨셉의 기획안을 TV 시리즈 아니메로 NHK 방송에 제출했던 적이 있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미래소년 코난(1978)'이 NHK의 전파를 타고 방송 된 이후와 '천공의 성 라퓨타(1986)'가 제작이 결정되기 전, 그러니까 코난의 종영된 78년 10월 31일 이후부터 85년(라퓨타가 86년 8월에 극장에서 개봉되었음을 감안하면 라퓨타의 기획이 시작된 시점은 '바람계곡 나우시카(1984)' 이후의 85년 쯤으로 볼 수 있다.) 사이에 이 기획안이 제출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정황상 그 시점은 85년 보다는 78년에 더 가깝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코난이 종영된 시점이 미야자키가 NHK 측에 TV 시리즈 기획안을 내기가 좀 더 수월했던 때가 아닐까 추정되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미야자키의 기획안은 NHK에게 거절되었고, 이것을 미야자키가 수년이 흐른 뒤 라퓨타의 스토리로 재활용하게 됨은 이전에 이야기 했던 바다. 하지만, 원 기획안은 NHK의 어딘가에 방치된체 십수년의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 만화영화 연대기: 천공의 성 라퓨타 (바로가기)

NHK가 잊혀졌던 이 기획안을 어떤 이유로 다시 꺼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추론해볼 수 있는 것은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가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조금씩 그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봐야할 듯 싶다. 그러나, 이미 지브리로 이적해버린 하야오를 다시 불러들이기도 애매했을 터. 결국 NHK는 토호 그룹과 함께 이 기획을 실행에 옮기게 되고 애니메이션 제작은 그룹 타크에게 의뢰하게 된다. 바로 이 작품이 현재까지도 많은 팬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안노 히데아키의 대표작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1990)'인 것이다.

다만, 실제 애니메이션 제작은 아시다시피 그룹 타크가 아닌 가이낙스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충격님이 2009년에 작성한 포스팅을 참고하길 바란다. 핵심 스탭에 그룹 타크의 인원이 전무한 것으로 보아 타크가 토호에게 제작원청을 받은(혹은 따낸) 후 이를 가이낙스에게 하청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공동하청에 의한 제작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타크의 스탭이 나디아의 주요 애니메이션 스탭목록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이런 형태로 프로젝트를 따내고 실제 업무를 전량 외주업체에 용역을 주는 형태는 비단 애니메이션 뿐만 아니라 산업계 전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결국 가장 하위에 위치한 하청업체에게 돌아가는 보수는 그리 많지 않게 되는 것 또한 자명한 일이기도 하다.

☞ 신비한 나디아 특집 - 횡행하는 루머와 실상 (보러가기

또한, 하청업체로는 한국의 세영동화가 참여하게 되는데, 제작 초기만 해도 하청업체로서 주로 동화 파트를 전담하던 세영동화는 이후 벌어진 나디아의 제작파행(?)으로 인해 자신들의 역량 이상의 업무를 떠안으며 후일 나디아의 오점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섬 에피소드'의 최대 원인제공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위에 링크를 건 충격님의 포스팅에도 언급이 되어 있으나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당시 가이낙스는 극장판 아니메와 OVA 시리즈 하나만을 연출한 풋내기 제작회사로 총 40여화에 달하는 장편 TV 시리즈를 연출한 경험이 전무한 제작사였다.

이러한 이유로 초창기 리소스를 낭비하며 높은 퀄리티로 만화영화를 그려가던 가이낙스는 이미 초중반 에피소드 제작 이후 시간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감독인 안노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중간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통칭 무인도 에피소드를 히구치 신지와 세영동화에게 넘기고 스스로는 핵심 스텝을 이끌고 후반부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결국, 무리한 스케줄과 부족한 인원 및 자원을 떠안은 히구치 신지와 세영동화는 섬 에피소드를 기대 이하의 퀄리티로 만들어내게 되고, 이는 나디아의 가장 큰 오점으로 팬들로부터 원성을 듣고 만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일본 위키에는 안노를 총감독, 히구치 신지를 감독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디아와 세영동화에 얽힌 또다른 제작비화도 있다. 니코니코 동화 홈페이지의 오카다 토시오 브로마가 채널(岡田斗司夫ブロマガチャンネル)에 실린 나디아 관련 제작비화와 해당 동영상의 일부를 번역한 코로로 님의 포스트를 링크한다. (2013.10.23 추가)

☞ 岡田斗司夫ゼミ「誰も知らないガイナックス」(보러가기)
☞ 오카다 토시오가 본 나디아 제작비화 (보러가기)

이렇게 제작일정 상 난관에 봉착했던 나디아를 살린 것은 NHK도, 가이낙스도 아닌 이라크였다. 90년 당시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 덕분에 NHK는 한동안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특집방송으로 이라크-쿠웨이트 전을 다루게 된다. 결국 39화, 약 3쿨의 길이를 갖고 있는 나디아가 방영에 1년의 시간이 걸린 것은 이러한 원인 때문이었는데, 그 덕분에 제작시간을 벌게 된 가이낙스는 가까스로 자신들의 첫 시리즈를 비교적 성공리에 마무리 짖게 된다.


공영방송으로서 보수적 색체로 정평이 난 NHK와, (젊은 오타쿠들의 집합체로서) 보수적인 노선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가이낙스의 만남은 애초부터 많은 트러블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보인다. 특히 당시 30대의 젊은 나이로 반골정신이 극에 달했던(결혼하고 나이가 먹은 요즘은 무척 얌전해졌지만) 안노는 주인공 나디아를 검은 피부의 인도계 소녀로 그리도록 지시하는데, 이는 일본인 또는 백인 위주의 캐릭터들이 으례 주인공으로 등장하던 당시 아니메의 관례를 과감하게 비튼 일종의 안노식 도발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가이낙스만의 오타쿠적 감성이 나디아 곳곳에 심어져 은근한 노출씬과 목욕씬으로 NHK 관계자들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가이낙스의 반골정신과 NHK의 보수적 색체의 첨예한 대립, 거기에 어설픈 스케줄 관리로 인한 제작난항과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된 퀄리티의 저하에도 불구하고 나디아가 종영없이 끝까지 방영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나디아의 이야기가 시청자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아시다시피 해저 2만리를 기본적인 원안으로 삼고 있는 나디아는, 천공의 성 라퓨타와 같은 소년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장쾌한 어드벤쳐물이었지만, 여기에 가이낙스 특유의 오타쿠적 감성과 다채로운 패러디가 곳곳에 숨어들어 마니아들에게도 여러가지 이야기거리를 제공하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랑디스 일당이 타임 보칸 시리즈의 도론보 3인조를 패러디 했다는 점, 나디아의 아버지인 네모 선장의 경우는 쥴 베른의 네모 선장을 모티브로 했으나 캐릭터 디자인은 마크로스의 함장 브루노 J 글로벌이 모델이라는 점, 잠수함 연출이나 소품 디자인, 초반의 스토리 흐름에서 오자와 사토루의 코믹스 '서브마린 707(1963)'을 오마쥬했다는 점 등, 여러 포인트에서 아니메 마니아들이 아니면 모를 만한 패러디와 오마쥬가 다수 등장하고 있음이 그 예이기도. (특히, 오자와 사토루는 나디아에서 설정과 연출을 맡았던 마에다 마히로가 감독을 맡았던 풀 3D 해양 아니메 '청의 6호(1998)'의 원작자로도 알려져 있다.)

ⓒ NHK, SOGO VISION, TOHO


단순한 어드벤쳐에 그치지 않은 압도적인 스케일의 전투씬은 왠만한 SF 아니메를 능가하는 디테일과 박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반부에 펼쳐지는 악당 가고일의 공중전함의 견인광선에 사로잡혀 바다에서 끌어올려진 노틸러스 호의 사투와 최후는 당대 TV 시리즈 아니메에서는 쉽사리 보기 힘든 스케일과 디테일,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연출로 시청자들을 사로 잡는다. 여기에 가고일과의 전투로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노틸러스 호와 노틸러스 승무원들이 신조함 뉴 노틸러스호로 나디아 앞에 극적으로 등장하는 장면 또한 잊을 수 없는 명장면. 이러한 연출력은 누가 뭐래도 안노가 가진 비범함과 남다름이다. 전통적인 어드벤쳐 물과 오타쿠적인 SF 액션물을 이 정도 수준으로 버부려 낼 수 있는 연출가는 현재의 일본 아니메에서 그리 흔치 않다. 가이낙스 스탭들의 저력 또한 곳곳에서 묻어나고 있다. 특히 카나다 요시노리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은 이들의 다이나믹한 연출기법은 나디아에서도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 하겠다.


종영된지 약 두 달 뒤인 91년 6월 29일에는 극장판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다만, 안노 히데아키가 본 극장판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각본이나 스토리보드 등이 모두 가이낙스의 스탭진이 아닌 토호나 그룹 타크의 스탭 혹은 다른 하청제작사에게 맡겨지게 되었고 그 결과물은 TV 시리즈와는 분위기에서조차 너무 많은 차이가 나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TV 시리즈 이후 수년 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나 퀄리티 적인 측면에서든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든 나디아의 명성(?)에는 크게 어울리지 못하는 졸작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나디아가 종영된 뒤 이듬해인 92년 MBC를 통해서 방영되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다만, 엔하위키의 나디아 관련 글([3] 참조)을 살펴보면 PC 통신을 중심으로 꾸준한 재방영 요청과 같은 일련의 에피소드들로 인해 95년 다시 방영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90년대 당시의 이러한 시청자 재방영 요청, 특히 그것이 만화영화였다는 사실은 굉장히 이례적인 것으로서 당시 한국의 아니메 1세대, 1.5세대들에 해당하는 이들의 힘으로 인해 나디아가 한국에서 재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96년에는 투니버스에서도 방영되었으며, 투니버스 방영판이 한국에서 방영된 나디아 중에서는 가장 양호한 버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낙스의 재정상황은 여전히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하청의 하청으로 제작한 나디아였기에 가이낙스에게 돌아간 것은 오로지 제작비 뿐, 판권을 통한 부가 수입은 가이낙스와는 별개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가이낙스를 부채의 늪에서 구해낸 것은 그들의 주력사업이었던 아니메가 아닌 번외로 시작한 컴퓨터 게임이었다. 아카이 타카미(赤井孝美)의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프린세스 메이커(1991)'로 인해 가이낙스는 오랜 동안의 고난에서 벗어나 비로소 그들만의 이야기를 그려나가기 위한 초석을 세우게 된다.


<참고 사이트>

[1] ふしぎの海のナディア, Wikipedia Japan
[2] ふしぎの海のナディア(1990~1991), allcinema.net
[3]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엔하위키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NHK, SOGO VISION, TOHO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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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986년작 '천공의 성 라퓨타(1986)'는 아시다시피 너무도 유명한 미야자키 감독의 대표작으로서, '미래소년 코난(1978)'이나 '루팡 3세-칼리오스토로 성(1979)'과 같은 작품에서 보여진 유쾌한 미야자키식 어드벤쳐와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이 가져다 주는 힘과 권력에 대한 인간들의 삐뚤어진 집착, 그리고 하늘을 향한 미야자키의 동경심을 스팀펑크 스타일의 색체로 풀어낸, 가히 미야자키식 엔터테인먼트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연령가의 작품치고는 후반부에 등장한 무차별 살상장면 등이 약간 씁쓸한 뒷맛을 안겨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진가를 깎아내릴 만큼은 아니기도 하구요.

특히 이 라퓨타에 등장하는 스팀펑크 스타일의 비행정 타이거 모스(Tiger Moth; 한국어로 표현하면 호랑나방 정도?)는 미래소년 코난부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관통하는 미야자키식 메카닉 디자인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타이거 모스에 탑승하여 모험과 약탈(?)을 즐기는 도라 일당의 모습은 또다른 미야자키식 로망의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증기기관과 같은 구식 동력원을 내장한 스팀펑크풍의 기계구조, 과거의 비행선을 모티브로 삼은 고풍스러운 외양... 그러나, 타이거 모스의 진정한 매력은 그 겉모습보다는 고정된 장소에 본거지를 두지 않고 비행선 자체를 거점으로 하여 하늘에서 생활하는 공적(하늘의 도적; 바다의 도적인 해적과 산의 도적인 산적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보시면 되겠네요)들의 삶의 방식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 Nibakiri · Tokuma Shoten


설거지거리와 빨래더미, 거기에 매번 고장 수리까지... 막상 이런 생활과 맞닥뜨린다면 매력적이기 보다는 고단한 나날의 연속이겠지만, 스크린 앞에서는 한없이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여행자의 삶이 시원한 하늘의 정경과 어우러져 지극히 인간적인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것일까요. 모험의 무대가 되는 광활한 하늘과 지친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갑판 위에서 떠다니는 구름과 지는 저녁 노을을 보는 고즈넉함은 분명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과 시청자들에게는 한없는 로망을 안겨줍니다. 

자, 이렇게 타이거 모스의 로망을 오랜만에 보고 있자니 로망이 넘치는 공적들의 삶이 비단 이곳 라퓨타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하늘의 로망, 공적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여행을 한 번 떠나볼까 합니다. 아차, 여름 휴가를 다녀온지가 얼마 안됐는데, 또 여행을 떠나는군요. 그럼 일은 언제 하라고?
 
☞ '하늘의 로망과 디테일한 생활의 묘사가 돋보이는 미야자키 감독의 스타일'과 유사한 작품들을 이야기하는 글인지라 이러한 미야자키 감독만의 작품 세계를 본 포스팅에서는 '미야자키 스타일'로 줄여서 총칭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망의 시작 - 바다를 품고 우주를 꿈꾸며 마침내 하늘을 날다

© TMS

쾌한 하늘에의 모험은 만화영화에서는 하늘이 그 출발점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스티븐슨의 원작 '보물섬'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보물섬(1978)'에서는 히스파니올라호에 올라타 보물섬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소년 짐 홉킨스와, 오랫동안 소년들의 가슴 속에 남을 카리스마 외다리 사나이 실버 선장의 낭만적인 바다의 모험을 보여줍니다. 해적들과 그들의 영원한 로망인 바다, 그리고 그 위에서 펼쳐지는 가슴 떨리는 모험은 바로 공적들의 그것과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바다의 로망과는 별개로 다른 한쪽에서는 색다른 모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마츠모토 레이지가 그려낸 사나이들의 로망, '우주해적 캡틴 하록(1978)'은 정처없이 우주를 떠돌며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전설의 해적 캡틴 하록과 그의 영원한 동반자인 우주선 아르카디아호의 끝없는 모험을 선보이며, 바다가 아닌 우주를 무대로 한 무한한 로망을 선보입니다. 특히 일정한 거처없이 아르카디아호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선원들의 소박한 생활상은 라퓨타에서 보았던 공적들의 삶과도 맞닿아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다와 별바다(우주)의 로망을 자극하는 해적들의 모습은 8년여가 지나서야 진정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그때까지의 로망을 이끌던 레이지버스의 우주해적이 서서히 퇴장하고 우주를 가르는 전쟁의 포화 속에 소년, 소녀들의 우주모함 화이트 베이스의 이야기(기동전사 건담)가 리얼이라는 개념을 아니메에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로망은 만화영화의 한구석으로 조용히 자리를 양보했었는데요. 건담에서 촉발된 리얼 드라마가 정점을 달리던 8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라퓨타를 통해 공적이라는 모습으로 바다가 아닌 하늘의 로망으로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로망은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이야기(설거지, 빨래, 잠자리 등등)와 모험이 공존하는 장소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색적입니다. 몸을 싣고 있는 곳은 판타지이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현실적인 이들의 이야기는 보물섬이나 캡틴 하록과는 다른 느낌을 관객에게 선사했던 것이죠. 거기에 미야자키의 세심한 콘티와 설정은 공적의 이야기를 능숙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합니다.
 
낭만적인 공적들의 이야기는 '붉은 돼지(1992)'에 이르러서는 조금 다른 형태로 전개됩니다. 로망을 잃어버리고 빈곤한 현실에 찌들어 버린, 그러나 아직도 가슴 한켠에는 로망의 불씨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늙은 공적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앞선 라퓨타에서 보여진 공적들의 삶이 소년, 소녀들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라면, 붉은 돼지에서 보여진 공적들의 삶은 어른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여전히 그 낭만의 한자락을 놓고 있지는 않은 체로 말입니다.

© Nibakiri · TNNG


라퓨타의 편린은 또다른 곳에서 새로운 형태로 발현되기도 합니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1990, 이하 나디아)'은 에초에 NHK에 남겨져 있던 라퓨타의 기획안이 시초가 되었던 작품으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해저 2만리'의 노틸러스 호의 컨셉을 이식하여 독특한 모험물로서 재창조시켜 낸 작품입니다. 공적의 로망이 잠수함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는 것이었는데요. 그러나, 노틸러스호의 승무원들의 모습은 미야자키 스타일의 계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안노가 어린 시절 감동 받았던 '우주전함 야마토(1974)'나, 그가 스탭으로 참여했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1982)'에서 묘사된 모습과 더 가까워 보인다는 점에서 미야자키보다는 안노의 취향이 더 많이 반영된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로망의 실종 - 로맨스와 코미디에서 느와르와 판타지까지

ⓒ NHK·Sogo Vision·TOHO

얼도 로망도 쇠퇴해버린 듯한 90년대에 이르자, 공적들의 로망이란 이제 붉은 돼지에서 보았던 그들의 노쇠한 모습처럼 향수와 추억이라는 이름 하에 다락방의 낡은 일기처럼 취급되어 버립니다. 싸우는 변신소녀와 변신합체 용자로봇들이 만화영화를 수놓고, 기괴하고도 독특한 매력의 생체병기가 찢어지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써드 임팩트를 터뜨리자 시대는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라퓨타를 기본으로 시작되었던 나디아에서도 그 로망의 편린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나디아가 라퓨타의 모든 것을 계승할 의무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지만 말입니다.)
 
하늘의 로망을 대신하여 등장한 것은 새로운 스타일의 SF 모험 이야기였습니다.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의 억세게 운좋은 우주전쟁 참전기를 다룬 '무책임함장 테일러(1993, 이하 테일러)'에서의 고물구축함 미풍호, 그리고 에반게리온의 써드 임팩트 속에서도 결코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항해를 해냈던 '기동전함 나데시코(1996, 이하 나데시코)'의 최신예 우주전함 나데시코의 생활상은, 코믹함과 시트콤스러운 모습으로 항상 시끌벅적합니다.

그러나, 테일러나 나데시코의 일반적인 생활상은 개그 쪽에 관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미야자키 스타일과는 거리가 멉니다. 특히 나데시코의 경우는 그들의 일상사가 로망보다는 로맨스에 초점이 더 치우친 전개인데요.

© Hitoshi Yoshioka/Kadokawa Shoten·Tylor Project.

이렇게 이들 작품에서 펼쳐지는 등장인물들의 일상사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모험을 떠나는 이들의 뒷켠에 숨겨진 고충이나 현실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펼치는 휴먼 코미디와 아슬아슬한 사랑의 줄다리기라는 점에서 사실 미야자키의 스타일과의 접점을 찾으려하는 것 자체가 조금은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어찌보면 이 두 작품 모두 어떤 면에서는 나디아와 마찬가지로 미야자키 스타일보다는 레이지버스나 건담, 마크로스 등의 스타일을 계승하여 그 위에 로맨스와 코메디로 새롭게 재해석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곤조의 SF 로봇물이었던 '반드레드(2000)' 역시 오랜 세월 동안 적으로 나누어져 싸워왔던 남녀들이 우주해적선 메제르 호에서 동거하면서 벌어지는 각종 에피소드와 로맨스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두 작품들과 비슷한 출발선상에 놓여져 있다고 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이러한 전개는 곤조의 다음 작품에 이르러서야 조금은 미야자키 스타일로 근접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로맨스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90년대 하늘의 이야기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색다른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소년 반과 함께  이세계 가이아로 넘어온 평범한 여고생 히토미. 반과 함께 영문모를 모험 속에 빨려든 그녀는 천공의 기사 알렌 쉐자르의 비행선에 올라타 본격적인 모험의 로망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1996)'에 등장한 알렌 쉐자르 일당(?)의 비행선은 지금까지의 비행선과는 다른 형태로 운용됩니다. 바로 비행석이라 불리는 거대한 암석 두 개를 달고 프로펠러로 추진력을 내어 바람을 타고 비행을 하는 것이 그것인데요. 에스카플로네의 이 비행선은 현실도, SF도, 스팀펑크도 아닌 판타지의 세상에서 날아다니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줍니다. (기동전사 건담 이래 단바인, 바이팜, 레이즈너 등에서 선보였던) 거대한 배를 타고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는 소년, 소녀들의 리얼한 모험 이야기는, 판타지와 순정 로맨스와 합쳐지면서 색다른 형태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특히 이 비행석의 존재는 왠지 라퓨타에서 등장했던 비행석과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군요.

ⓒ Sunrise · Tokyo TV


리얼로봇의 메카인 선라이즈의 작품들은 사실상 로망이라는 요소를 아니메에서 밀어낸 장본인이기에 그 느낌이 더욱 남다른 감이 있습니다. 물론, 알렌 쉐자르의 비행선에서는 공적들이 선보인 아기자기한 스타일의 생활상은 펼쳐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건담의 화이트 베이스에서 이어져 온 스타일, 즉 모험의 베이스가 되는 움직이는 이동기지로서의 모습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도 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변모의 조짐은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로망은 그로부터 2년 뒤, 조금은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저마다의 빛바랜 과거를 숨기고 시니컬한 현재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어른들의 집합소 비밥호의 현실적인 모습으로 말입니다.
 
'카우보이 비밥(1998)'의 비밥호에는 확실히 타이거 모스의 현실적인 생활상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밥짓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게다가 취미로 분재까지...) 제트의 모습과 밥 축내기에 바쁜 더부살이 식객들인 스파이크, 페이, 에드의 모습은 개그스러움이 넘쳐납니다. 그들의 모습은 일반적인 주인공들과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어른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형태의 현실스러움은 타이거 모스의 도라 일당에 비해서 더 비참하긴 하지만, 디테일함에 있어서는 엇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붉은 돼지에 등장한 옹색한 공적들마냥, 그들은 항상 배고픔에 굶주려 궁색함을 드러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시청자들의 시선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전까지의 선라이즈의 작품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어떤 면에서 사뭇 다른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큰 에피소드의 흐름과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던 이전의 리얼로봇 계열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우주선들의 생활상과는 다른, 아기자기함이 살아 있는 모습인 것이죠. 이런 아기자기한 생활상의 묘사는 그들의 모험을 더욱 더 맛깔스럽게 가꾸어 주는 에피타이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미야자키 스타일과의 데자뷰를 느끼게 해줍니다.

ⓒ Sunrise



로망의 부활 - 레이지와 미야자키를 흠모하는가

우보이들의 궁색한 비행선이 위상차 게이트를 넘어 먼 여행을 떠나고, 뒤이어 등장한 '라스트 엑자일(2003)'의 용병함 '전멸의 실바나'는 스팀펑크적인 세계관으로 인해 확실히 시작부터 미야자키 스타일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풍스러운 비행함선 간의 포화 속에 검은색의 함체를 들어내며 압도적인 파괴력을 과시하는 알렉스 로우 함장의 실바나는 전멸이라는 별명답게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 냅니다. 어떤 면에서는 캡틴 하록과 아르카디아호의 재림이라도 되는 듯 하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고 무자비한 사나이들만이 가득할 것 같은 실바나이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면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스팀펑크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함내 구조는 우주전함보다도 우리에게는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데요. 그와 함께 간간히 보여지는 승무원들의 인간적인 모습은 전멸이라는 별명을 무색하게 하는 순수함과 익살스러움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바나와 그 내부의 모습은 미야자키 스타일을 이전까지의 90년대의 작품들과는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특히 라스트 엑자일의 이야기 전개는 라퓨타의 그것과 상당히 근접한 부분이 있어 그 친밀감이 더욱 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곤조의 이 시도는 1회성에 그쳤다는 점에서,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완성도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름 큰 아쉬움을 느끼게도 합니다.

ⓒ Gonzo · Victor Entertainment


한편, 선라이즈가 잠깐 선보였던 미야자키 스타일의 편린은 몇 년 뒤, 선라이즈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개하기 시작합니다. 비밥의 프로듀서 미나미 마사히코 등이 분사하여 만든 제작사 본즈가 선라이즈 작품들의 한 테마라 할 수 있는 화이트 베이스식 이야기와 비밥에서 보였던 미장센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스타일의 로망들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전함이 아닌, 화성의 드넓은 바다 속을 항해하는 잠수함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현란무답제 더 마즈 데이브레이크(2004)'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본즈식 로망은 '교향시편 에우레카 7(2005)'에 이르러 미야자키 스타일에 가까운 형태로 거듭나게 됩니다.
 

ⓒ Bones · Project Eureka · MBS

에우레카의 하늘은 신세대 젊은이들의 로망을 담고 있습니다. 파도타기와 마찬가지로 서프 보드에 의지한 체 하늘을 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해적이 공적으로 진화하는 것과 같은 유사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여기에 월광호에 몸을 싣고 유랑의 길을 떠나는 홀랜드의 일행과 우연치 않게 월광호에 탑승하게 된 소년 렌톤의 모험 이야기는 확실히 라퓨타에서 보여졌던 전개와도 비슷합니다. 나디아가 안노만의 스타일이 돋보였다면, 에우레카의 경우는 디테일한 그들의 생활묘사에 집중하면서 자연스레 미야자키 스타일과 겹쳐지는 부분이 생깁니다. 그리하여 에우레카는 그들만의 새로운 스타일에 미야자키 스타일이 모두 혼재하는 형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물론, 에우레카에서 보여지는 미야자키 스타일의 편린은 난해한 전개와 힙합스러운 신세대식 스타일에 가리워져 희석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라스트 엑자일에서 번쉽을 타고 하늘을 가르던 스팀펑크적인 하늘의 로망처럼, 보드를 타고 하늘에 몸을 맡기는 신세대적 로망은 오래전 미야자키가 선보였던 하늘을 나는 공적의 로망과 같은 테마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에우레카의 로망은 본즈의 최신작 '망념의 잠드(2008)'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미야자키 스타일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미야자키가 선보였던 하늘의 로망은 마야자키 자신의 작품에서는 붉은 돼지 이후로 오히려 절제되는 양상입니다. 그러나, 하늘로 정처없이 사라져 버린 라퓨타의 한 부분처럼, '하늘에의 로망'이라는 이름의 이 보석은 하늘 높이 올라가 마침내 최고점에서 부서져 지상에 흩어져 아니메의 이곳저곳에 여러 형태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가이낙스와 곤조 등이 선보였던 감각적인 스타일이나 선라이즈와 본즈 등이 만들어낸 디테일한 묘사는 라퓨타의 조각들이 떨어지면서 피어난 또다른 형태의 로망일지도 모릅니다.
 
하늘을 향한 로망이 또다시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난다면, 과연 다음에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까요. 일상의 아기자기함을 담은 잔잔한 로망일까요, 아니면 박력과 모험이 가득한 신나는 로망일까요.

ⓒ Bones · Sony Computer Entertainment Inc. · Ani P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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