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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는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의 '기신병단 (1993), 애매한 역사관과 복고주의가 뒤섞인 스팀펑크 액션물'을 본 블로그로 옮긴 글입니다.

기신병단 DVD 표지© 山田正紀 / 中央公論社 / PIONEER LDC, INC


<스탭>

◈ 감독: 이시야마 타카아키
◈ 원작: 야마다 마사키  
◈ 제작: 은하제국, 파이오니어 LDC


<시놉시스>

2차 세계대전 중, 미지의 외계인과의 전투를 대비하여 통칭 ‘모듈’을 만든 다카무라 박사는 이를 노리는 관동군 대좌 신타이와 외계인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는다. 미녀 의사 마리아 브라운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다카무라 박사의 아들 다이시는 ‘모듈’을 간직한 체 거리의 아이들과 살아가지만, 전란의 소용돌이는 다이시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한편, 마리아의 쌍동이 언니 에바 브라운은 모듈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다카무라 박사가 남긴 모듈을 되찾기 위해 관동군에 협력하고 있었다. 마리아라고 믿었던 에바에게 아이들은 모듈을 빼앗기게 되고, 바로 그 시각 하늘에서는 보라색 빛과 함께 외계인들의 침입이 시작된다. 관동군과 외계인의 위협 속에 절체절명 놓인 다이시, 바로 그 순간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거대로봇 뇌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1. 작품이 만들어지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기신병단은 90년대 초반 일본 아니메의 침체기가 시작되면서 유행처럼 번졌던 복고주의 작품 중 하나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여 복고적 그림 스타일, 스팀펑크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메카와 중량감 넘치는 액션씬, 그리고 유럽과 중국 등 전세계를 누비는 방대한 스케일의 로봇 액션물입니다.  

7~80년대 대호황기를 누리던 일본경제의 거품이 꺼지면서 경기침체가 발생하던 90년대 초반, 아니메 시장 역시 시장의 포화, 컨텐츠의 부족이라는 업계의 상황이 맞물려 시장이 축소되기 시작했는데, 결국 이것은 흥행이 보장되는 그만그만한 작품들이 일색인 상황으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시기가 90년대 초반인 것이죠. 시기적 특성상 90년대 초반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을만한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보다는 이전에 인기를 끌었던 스타일이 다시 주목받는 복고주의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새로이 만들어 낼 컨텐츠의 부족도 있었겠지만, 호황기였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일본인들의 정서도 어느 정도 반영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복고주의 열풍으로 이전에 흥행했던 작품들을 리메이크 하거나 그 속편을 만드는 사례가 늘어나게 됩니다. ‘바벨 2세(1992)’, ‘철인 28호 FX(1992)’, ‘마크로스2(1992)’, ‘마크로스7(1994)’, 마크로스 플러스(1994)’, ‘플란다스의 개(1992)’, ‘신조인간 캐산(1993)’, ‘요술공주 밍키(1993)’, ‘더티 페어 플래쉬(1994)’, ‘독수리 5형제(1994)’ 등은 모두 이런 복고주의와 리메이크의 바람을 타고 제작된 7~80년대의 인기작들이었죠. 이러한 현상은 95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등장하기 전까지 일본 아니메를 지배하며 아니메 업계에 기나긴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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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복고주의 대표작 '자이언트 로보'(좌).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원작으로 90년대 복고주의 리메이크 작품 중에서는 단연코 걸출한 작품. 70년대의 초히트작 '독수리 5형제'를 우메츠 야스오미가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감독으로 새롭게 리메이크 한 '독수리 5형제(1994)'(우).


2. 거대한 스케일의 복고주의 메카 애니메이션

'기신병단'은 90년대 초반 복고주의 열풍의 선두에 섰던 작품 중 하나인 '자이언트 로보(1991)'와 여러 곳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나리오나 연출방식은 전혀 다르지만, 이 두 작품은 그동안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해오던 늘씬하고 멋진 로봇이 아닌, 육중하고 투박한 스타일의 로봇이 등장하여 건담으로 대표되던 80년대의 리얼로봇과는 다른 또다른 기계적인 리얼함을 보여줍니다.

각각 뇌신, 풍신, 용신으로 불리는 ‘기신병단’의 로봇들은 전차, 비행기, 그리고 잠수함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지금까지 일본 만화영화에서 익히 보아오던 인간형 로봇과는 달리 병기나 기계의 느낌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중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걸맞게 수동으로 엔진을 돌리고 발전기가 최고치에 다다를 때 동작하는 로봇의 모습은 와다 카오루의 웅장한 음악과 어울려 고풍스러운 멋을 보여주고 있구요. 그 외에도 ‘기신병단’의 이동수단인 중갑 기관차, 대형 프로펠러 수송기, 뇌신의 조종사 바레이오가 운전하는 클래식 자동차 소백룡 등, 작품 내내 복고주의적 향수를 일으키는 메카들은 시종일관 클래식한 멋스러움, 즉 스팀펑크 스타일의 멋을 선사합니다. 

스케일이 큰 연출 역시 이 작품의 또다른 매력입니다. ‘자이언트 로보’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나라를 누비면서 벌어지는 주인공들의 모험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 배경과 어울려 스펙타클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거기에 수상 프로펠러 비행기에서 연인을 향해 던지는 스카프 씬이라든지,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 같은 아시아 어느 도시의 한 복판에서 펼쳐지는 자동차 추격씬 등은 스팀펑크스러운 메카 액션씬 사이사이에 펼쳐지면서 감칠 맛나는 애피타이저의 역할을 해줍니다. 

그 와중에도 만화적인 연출(뇌신의 조종사 바레이오의 자동차 액션씬이나 주인공 다이시의 자전거 씬 등에서 보이는 함축과 과장의 대표적 만화적 연출)을 잃지 않음으로 인해 저 옛날의 ‘바벨 2세’나 ‘사이보그 009’ 등과 같은 모험 아니메에서 느끼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라고 할까요. 이렇게 작화와 연출은 아동용 스타일인데 비해 작품의 배경이나 이야기의 전개는 성인들도 보기에 무난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전체관람가로 아주 적절한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대중적인 오락물로서의 요건을 거의 다 갖춘 셈인 것이지요.

삽입그림2© 山田正紀 / 中央公論社 / PIONEER LDC, INC

기신병단의 주역메카들. 좌측부터 뇌신(육전형), 풍신(공중형), 용신(수중형). 조종사가 탑승하면 바로 눈에 불이 들어오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비사들이 각 부의 엔진을 일일이 수동으로 가동시키고 엔진예열이 끝나야지만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3. 침략행위가 슬그머니 축소되어 버린 안스러운 설정

(최고의 수준은 아니지만) 좋은 퀄리티의 작화와 음악, 멋진 메카들의 박진감 넘치는 액션, 그리고 큰 스케일의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기신병단’은 한가지 점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작품이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왜곡하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1화의 시작부터 일본의 대륙침략에 대해 격한 논쟁을 벌이는 엑스트라들의 대사는 현대 일본인들의 침략전쟁에 대한 사죄일까요. 아니면, 일본의 역사적 오점을 미화하는 모습일까요. 

혹자는 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한 작품이라고 이 작품을 평하기도 하지만, 제 생각은 선대의 잘못을 후대에서 잘 각색하여 이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반성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도록 최대로 미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치스, 관동군, 에일리언과 싸우는 ‘기신병단’의 멤버의 중요인물들이 모두 일본인이라는 것은 특히나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든 지워버리고 싶은 일본인의 욕구의 발로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그러나, ‘기신병단’은 분명 기존의 일본의 침략전쟁의 역사를 다룬 작품들 중에서는 꽤나 이 부분에 있어서 인정을 하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침략전쟁의 주원인을 나치스로 돌리고, 일본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관동군이라는 일개 군대에 그 잘못을 모두 돌려버리는 점이라든지, 관동군의 주 활동무대가 만주, 즉 실제 침탈을 행했던 아시아 쪽이 아닌 유럽 쪽에 치중되어 있는 것, 나치스와 에일리언의 입장은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언급은 빠진 체 관동군의 주요 간부인 신카이 대령과 그의 몇몇 부하들만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한계 역시 보이고 있지만 말입니다. (자기네 손으로 자기네 나라를 악으로 규정 짓기에는 아직 마음에 준비가 필요했었던 때였나 봅니다. 지금도 안되긴 하지만.) 

☞ 다음 단락은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거기에 재미있는 사실은 작품 종반에 등장하는 원폭투하에 관한 이야기 인데, 최초의 원폭은 일본의 히로시마에 투하되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원폭투하라는 역사적 사실은 등장시키되 이를 일본이 아닌 나치스의 영토에 위치한 에일리언 기지에 투하하려 함으로써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 원폭이라는 단어 역시 사용하지 않고 폭탄의 코드네임인 ‘글래머 걸’이라는 명칭만 사용합니다. ‘글래머 걸’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코드네임이죠.)

삽입그림3© 山田正紀 / 中央公論社 / PIONEER LDC, INC

몇가지 확인하고 싶은 대사들. 그림(좌)의 '만주를 꿈의 대룩이라고 믿고...'에서 꿈이란 것은 일본의 대륙진출을 의미하는 것일까? / 그림(중앙)의 '쓸데 없는 싸움이...'이라는 대사는 한국과 중국의 침략에 대한 일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일까? '뿐이잖아'라는 대사가 몹시 거슬린다. / 마지막 그림(우)의 대사에는 아까와는 달리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들어있지만, 피해를 입힌 상대국에 대한 사죄의 마음은 찾아볼 길이 없다.

삽입그림4© 山田正紀 / 中央公論社 / PIONEER LDC, INC

또 다른 의문들. 그림(좌)의 '하얼빈에는 731 특제 자백제...'라는 대사는 731 부대의 존재와 인체실험을 인정하는 발언? / 그림(중앙)의 나치스의 동맹이었음을 시사하는 '동맹국인 일본도 그 작전에 참가해줘야 겠다.'는 작품 내에서 몇 안되는 일본의 전쟁 참여사실 인정발언. / 그림(우)의 '나치와 일본은 동맹국이다.'라는 대사 역시 좀전의 대사에 이어 다시금 2차 대전의 전범국이었음을 인정하는 대사. 작품의 종반부에 이르러 제작진도 일본의 침략전쟁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듯. 


4. 껄끄러운 역사적 배경이 깔린 흥미로운 스팀펑크 액션?

재미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역사적 상황과 애매한 일본의 태도가 엿보인 이 작품 ‘기신병단’은 우리나라에서도 몇 번씩 케이블 TV를 통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영어로 된 오프닝/엔딩 크레딧을 보니 수출 염두에 두었거나, 후에 수출이 된 작품이라는 생각은 듭니다만.) 제 경우에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 태평양 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이런 팩션(Fact[사실]+Fiction[소설]의 합성어)류의 작품의 경우, 그 사실 왜곡 여부에 있어서 가끔 논란의 여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태평양 전쟁 같은 근대의 역사의 경우에는 일본의 침탈을 받은 나라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가 심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겠죠.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서 중국의 대한 언급은 가급적 회피하고 있으며, 한국의 이야기는 아예 배제가 되어 있습니다.

일본 아니메의 경우는 현재 정상적인 루트가 아닌 P2P와 불법복제물을 통해 상당부분이 우리에게 접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성인이 된 분들이나,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아직 역사의식이 정립되지 않은 팬들에게는 이렇게 노골적인 왜곡이 아닌 가벼운 왜곡과 역사적 진실이 슬그머니 덮여진 작품이 오히려 안 좋은 건 아닐까 하는 노파심도 가져 봅니다. 

삽입그림5© 山田正紀 / 中央公論社 / PIONEER LDC, INC

그 외의 재미있는 것들. 그림(좌)에 등장하는 알버트 박사는 외모도 그렇고 바이얼린을 즐겨 연주하는 데다가 E=mc²라는 공식까지 쓴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이 양반은 과연 누구일까요? / 그림(중앙)의 대사  '글래머 걸은 나치스의 에일리언 기지에 투하하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라는 대사. 원폭투하는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만화영화로 재현되기에도 너무 쓰라린 현실인 듯 싶다. 투하장소를 슬그머니 바꿔주시는 제작진... / 그림(우)의 일본 대신 원폭에 맞을 위기에 처한 에이리언들. 명색이 에일리언인데 따발총이 왠말인가. 보통 따발총이라면 소련제 기관단총을 말하는 것인데... 그럼 혹시, 댁들 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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