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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에 작성한 '판타지 서사시: 단바인에서 에스카플로네까지 (下)'를 본 블로그로 옮기면서 편집과 구성을 수정한 포스트입니다.



아동용 판타지 물로의 변신, 그리고 다양한 시도

지난 번 상편의 후반부에서도 언급했듯이, 리얼로봇 장르의 쇠퇴는 평행우주 같은 장르였던 판타지 로봇장르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어,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동반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것은 리얼로봇 장르와 판타지 로봇 장르의 모두의 아버지 격인 토미노 감독의 연이은 건담 시리즈 제작으로 인한 극도의 피로감과 매너리즘에 따른 결과도 한몫을 했을 거라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만,  너무나 많은 리얼로봇 장르의 난립(특히나 건담 시리즈)에 시청자들도 식상함을 느꼈던 것도 또 하나의 이유는 아닐까 싶군요. 그리고 그것은 비슷한 스토리 전개를 보이던 판타지 로봇 장르에게도 같은 결과를 가져왔으리라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로봇물로 70년대 후반부터 큰 명성을 쌓고 있던 선라이즈는 88년, 판타지 로봇 장르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특유의 진지함과 세밀한 설정을 버리는 대신 코믹함, 그리고 아동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귀엽고 깜직한 캐릭터들과 메카닉(이른바 SD 로봇)으로 재단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마신 영웅전 와타루(1988, 이하 와타루)’였습니다.


1. 와타루의 대성공, 판타지 로봇 장르 제2의 전성기인가.

장르의 변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리얼로봇 장르의 공식을 과감히 배제함으로써 기존의 수퍼로봇물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어찌 보면 후일 인기를 얻게 되는 선라이즈의 용자 시리즈의 판타지 버전 쯤으로 보아도 무방한) 이 작품은 실로 공전의 대히트를 쳤던 것이죠. 90년과 97년에 각각 2기, 3기가 방영했고 각각의 편수도 모두 4쿨(1년치 방영 분)이나 되었다는 것은 이 작품의 인기를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와타루’의 성공에는 시청 계층의 변화도 큰 몫을 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그것은 70년대의 슈퍼로봇물을 시청했던 어린이들이 성장하여 10~20대에 들어 리얼로봇에 열광하게 되고, 그들이 성인이 되자 자연스레 그들을 타깃으로 했던 작품들 역시 설 자리를 잃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이죠. 바로 그 시기에 맞추어 그 당시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와타루’가 시의적절하게 등장한 것입니다.

그림 1. RPG 게임의 공식을 적용했던 '와타루'는 꺼져가던 판타지 로봇 장르를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시켰고, 이 흐름은 후일 선라이즈의 대표적인 용자 시리즈로 옮겨지면서 새로운 스타일의 로붓물을 정착시키게 된다. 

이후부터는 ‘와타루’의 아류작들이 판타지 로봇 장르의 흐름을 이어가는 전개가 됩니다. ‘와타루’ 1기의 종영 후, 이듬해 등장한 ‘마동왕 그랑조트(1989, 이하 그랑조트)’는 언뜻 보기에도 ‘와타루’의 후속임을 알 수 있는 작품인데요. 물론, 1인 주인공 체재였던 와타루와는 달리 3인의 주인공이 등장하여 캐릭터 성이 더 강해졌고, 특히나 등장인물 중 한명인 ‘구리구리’가 부르는 당근 송은 당시 큰 인기를 끄는 등, 와타루와는 다른 특색있는 모습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만, 결국 와타루 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한국에서는 ‘그랑조트’가 ‘와타루’보다 먼저 ‘슈퍼 그랑조’라는 제목으로 91년도에 SBS에서 방영됨으로 인해‘그랑조트’의 인지도가 더 높았다는 사실입니다.(덕분에 후일 방송된 ‘와타루’를 ‘그랑조트’의 후속으로 아는 어린이들도 많았구요.) SBS의 대히트 덕에 ‘와타루’는 한참 후인 96년, 투니버스에서 1기와 2기가 방영된 후 99년 KBS를 통해 2기와 3기가 방영을 합니다.(투니버스 방영 당시는 ‘드래곤 파이터’로 방영되었으며, 후에 KBS에서 ‘우주용사 씽씽캅’이라는 전무후무한 네이밍 센스로 재방영했지요.) ‘와타루’와 ‘그랑조트’의 연이은 성공 이후, 선라이즈의 판타지 로봇물은 ‘패왕대계 류나이트(1994)’로 계속 바통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림 2. '그랑조트'는 일본 방영당시 '와타루'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해 이후 후속편의 제작이 이루어지지 않고, 와타루 2기, 3기와 같이 와타루의 후속작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모든 판타지 로봇 장르가 선라이즈의 제작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판타지 로봇 장르를 포함한 전반적인 로봇물은 선라이즈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리얼로봇 장르의 쇠퇴와 함께 선라이즈에 대한 도전이 하나 둘 씩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96년 MBC에서도 ‘소년기사 라무’라는 제목으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NG 기사 라무네&40(1990, 이후 라무네)’입니다.

일본에서는 4쿨 예정이었으나 시청률 부진으로 3쿨로 종영이 되어 ‘와타루’나 ‘그랑조트’에 비해서는 인기가 떨어졌던 ‘라무네’는 국내에서는 어린이들 사이에 굉장히 큰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저희 동네에서도 킹스카이언을 외치면서 골목길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이 기억나는군요.) 주인공 라무네의 ‘나는 지금 무지 ~하다!’라는 대사로 어린이들 사이에 신 유행어를 탄생시키기도 했지요.

그림 3. '라무네' 1기와 2기의 스틸샷, '세이버 마리오넷', '폭렬헌터'의 아카호리 사토루가 원작을 맡았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떠나 이러한 장르의 작품을 선라이즈가 아닌 다른 제작사(‘요술공주 밍키’나 ‘돈데기리기리 돈데크만’이라는 주문으로 유명한 ‘시간 탐험대’를 제작한 아시 프로덕션이 제작)가 만들었다는 것에도 큰 의의를 둘 수 있는 작품인데요. 이러한 다른 제작사의 모험적인 시도는 그 후 또 다른 형태의 판타지 로봇 장르를 세상에 내놓게 합니다.

그림 4. 선라이즈의 94년작 '패왕대계 류나이트'는 '와타루' 스타일의 판타지 로봇 장르로서는 가장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1쿨의 길이로 방영되었으나 흥행은 그다지 좋지 않았는지 선라이즈는 97년 와타루 3기를 방영하게 된다.

 
2. 순정물의 캐릭터와 스토리가 결합된 클램프의 판타지 로봇 레이어스

너무나 화려하고 탐미적인 그림체로 인해(?) 만화영화화 하는 작품마다 고배를 마셨던 클램프가 다시 한 번 절치부심하고, ‘파사대성 단가이오(1987)’로 리얼로봇 장르의 쇠퇴말기에 스타일리쉬한 슈퍼로봇물의 향수를 느끼게 했던 히라노 토시키 감독이 손을 잡은 ‘마법기사 레이어스(1994, 이하 레이어스)’는 오히려 판타지 로봇 장르가 아동취향으로 제작되는 당시의 추세와는 달리 ‘클램프’스러운 소녀 취향의 느낌과 비극적인 스토리 라인을 견지하며, 색다른 느낌의 작품으로 시청자에게 회심의 일격을 날립니다.

클램프의 최초의 상업적 성공작이기도 했던 ‘레이어스’는 클램프만의 개성있는 그림체를 판타지 로봇 장르에 접목하는 시도가 참신했던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클램프'적인 감성으로 인해, 판타지 로봇 장르라고 보기에는 그 설정만 유사할 뿐, 오히려 소녀취향의 순정 액션물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히려 선라이즈 류의 획일화된 흥행공식이 대입되어 있는 작품에 비해 동인출신인 그녀들의 작품답게 참신하다고 해야할까요. (그래서인지 동성애 코드도 나름 등장하기도 합니다.)

또, ‘단가이오’를 만든 히라노 토시키 감독의 연출 덕에 로봇물로서도 일정 수준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판타지적인 세계관은 중후한 멋 뿐만 아니라 환상적인 모습 또한 갖고 있기에 의외로 소녀취향의 스타일에도 잘 어울리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림 5. '레이어스'에서 보여진 클램프의 스타일은 판타지 로봇물을 순정물의 스타일로 풀어가면서 참신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결과적으로 로봇물로서는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판타지 로봇 장르는 아동용 캐쥬얼 작품으로의 재탄생과 순정물과의 결합과 같은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정확히는 레이어스를 제외하고 모두 아동용 작품이었지만.) 그러나, 레이어스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요, 선라이즈 역시 96년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게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도이면서 동시에 ‘과거로의 회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90년대의 아니메의 복고주의 조류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요. 토미노 감독이 이전에 창조했던 중후한 판타지 로봇 장르를 새로운 감각과 스타일로 다시 창조하는 듯한 느낌도 있겠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천공의 에스카플로네(1996, 이하 에스카플로네)’입니다.


3. 에스카플로네, 드디어 대지 위에 서다.

‘에스카플로네’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과거의 스타일을 변형한 작품이라고 보는 게 맞을 듯 합니다. 그것은 (‘로도스 섬의 전기(1990)’부터 최근작 ‘지구로(2007)’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유키 노부테루가 캐릭터 디자이너로 참여하면서 겉모습부터 소녀취향적인 로맨틱한 외형으로 디자인 된 모습에서도 알 수 있는데, 추측으로는 2년 전 ‘레이어스’가 보여준 상업적 성공이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로맨틱한(어떻게 보면 상당히 독특하기도 한 캐릭터로, 유키 노부테루의 실험적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캐릭터로 인해, ‘에스카플로네’는 이전의 선라이즈가 선보였던 토미노식 판타지 로봇물이 아닌 또 다른 느낌의 판타지 로봇물을 선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캐릭터 디자인 뿐만 아니라, 주인공을 에스카플로네를 조종하는 파넬리아 왕국의 왕자 반이 아닌 지구에서 우연하게 넘어온 여고생 히토미로 설정하여 그녀의 시선, 즉 여성의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하는 것도 이 작품이 다른 로봇물에 비해 여성적인 느낌이나 로맨틱함에 시선을 맞춘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개는 작품을 좀더 미려하고 고급스럽게 해주는 요소가 됩니다.

그와 함께 ‘마크로스’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천재 애니메이터 카와모리 쇼지가 원안과 설정을 맡고, ‘버블검 크라이시스 OVA 6~8 (1989~91)’의 메카닉을 디자인했던 야마네 키미토시가 메카닉 디자인을 맡은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고나 할까요. 중세 기사를 연상시키는 거대로봇 ‘가이메르프’는 선라이즈의 이전작 ‘가리안’의 기갑병에 버금갈 정도로 고풍스럽고 육중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오프닝부터 선보인 가이메르프 간의 전투 장면은 그간 선라이즈가 제작한 로봇물에 대한 노하우가 모두 녹아 있는 참으로 멋지고 웅장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던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의 생체병기 에바의 움직임이 생체병기라는 설정에 어울리는 부드럽고 역동적인 살아있는 생물 같은 모습이었다면, ‘에스카플로네’의 가이메르프의 움직임은 마치 고대의 철갑옷을 두른 거인들의 움직임처럼 육중하고 둔탁하며, 기계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림 6. 가이메르프는 가리안 이후 가장 중세적 느낌을 잘살린 디자인이었다. 에스카플로네가 용으로 변신하는 설정은 변신 로봇은 판타지 로봇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속설을 깨버린 예 중 하나.


그림 7. 히토미와 반, 그리고 알렌의 삼각관계, 알렌과 말레네 공주, 그리고 밀레나 공주와의 삼각관계 등 작품에 등장하는 로맨스는 순정물의 그것과 동일한 구도와 복잡한 갈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로맨틱한 캐릭터와 고풍스러운 가이메르프의 모습을 칸노 요코의 멋지고 장엄한 음악들로 장식하여 아카네 카즈키 감독이 멋지게 지휘해낸 ‘에스카플로네’는 80년대 초반의 진지했던 판타지 로봇물에 비해 보다 부드럽고 미려한 영상과 함께, 순정물의 로맨틱한 느낌으로 판타지 로봇물을 표현해낸 보기 드문 수작 중의 하나가 된 것입니다. (물론, 취향 차이로 인해 ‘에스카플로네’에 좋은 점수를 주지 않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개인적인 취향과는 별개로 잘 만들어진 만화영화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에스카플로네'는 '에반게리온' 때문에 방영 당시 갖고 있는 퀄리티에 비해 비교적 덜 조명을 받은 작품이기도 했지만, 결국 그 진가가 알려져 2000년도에는 극장판으로 제작되기도 합니다. 극장판의 영상은 TV 시리즈에 비해 좀 더 남성적인 스타일로 변모했지만, 훨씬 업그레이드 된 퀄리티와 영상미를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TV 시리즈 전편의 내용을 하나의 극장판으로 압축함으로 인해 스토리의 개연성이 부족하고 TV 시리즈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지기는 합니다만, 기존의 중세 판타지 스타일에 사무라이적인 복식을 가미하여, 좀 더 동양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고, 무엇보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가이메르프의 전투장면은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림 8. 극장판 '에스카플로네'는 극장판에 어울리는 높은 퀄리티를 자랑했으나, TV 시리즈의 이야기를 2시간 안에 압축하면서 아쉽게도 스토리의 개연성은 떨어지고 내용도 그닥 참신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육중한 강철의 거신과 비행선이 날아다니는 신비로운 마법의 세계, 그것은 마치 19세기 말엽의 배경에 증기기관으로 극도로 발달된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는 스팀펑크적 세계관의 작품과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매력을 우리에게 주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판타지 세계관에 비해 더욱 환상적인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과거의 판타지인 마법과 (이제는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닐 수도 있지만) 미래의 판타지인 로봇의 만남은 앞으로도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줄 좋은 소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비록 ‘에스카플로네’ 이후 아직 이렇다 할 멋진 작품이 나오고 있지 않음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오히려 이런 오랜 기다림 끝에 누군가가 또다시 만들어 낼 새로운 세계에서 등장할 거대한 철거인의 얘기는 분명 더더욱 멋지고 환상적인 모습일 거라는 기대 역시 하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그림 9. 판타지 로봇 장르의 출발점인 '단바인'의 세계관을 계승한 토미노 감독의 신작 OVA '린의 날개(2005)'. 가장 최근에 제작된 판타지 로봇물이지만, 전체적인 로봇장르의 몰락과 이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할 수도 있는 토미노식 이야기 전개가 대중들에게 그다지 큰 어필을 하지는 못한 듯 싶다.


<참고 사이트>

[1] ‘거대로봇 연구서설 – 와타루&그랑조트 편’ by 백금기사, 백금기사의 기묘한 연구소 
[2] ‘거대로봇 연구서설 – 에스카플로네 편’ by 백금기사, 백금기사님의 기묘한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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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에 작성한 '판타지 서사시: 단바인에서 에스카플로네까지 (上)'를 본 블로그로 옮기면서 편집과 구성을 수정한 포스트입니다.


리얼로봇 장르의 평행우주, 그 탄생과 쇠퇴

96년 TV 시리즈로 방영된 ‘천공의 에스카플로네(1996, 이하 에스카플로네)’는 비록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에 가려 기대만큼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도 판타지와 로봇장르를 멋지게 융합시킨 뛰어난 수작이라고 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판타지 장르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지라 이 에스카플로네를 무척이나 아끼고 있습니다만, (게다가 단순 판타지 장르로만 좋아하기에는 에스카플로네에는 너무도 멋진 요소들이 많이 산재해 있었죠.) 그 덕분에 기억 한 켠에 먼지에 쌓인 체 잠들어가던 고대의 철거인들이 봉인을 풀고, 하나 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번 포스트는 특정 작품에 대한 리뷰라기 보다는 ‘성전사 단바인’을 시작으로 하여 ‘천공의 에스카플로네’까지 이어지는, 리얼로봇 장르의 패러랠 월드(Parallel World: 평행우주)라 할 수 있는 ‘판타지 로봇 장르’를 아우르는 대서사시를 한 번 펼쳐보고자 합니다.


1. 리얼로봇의 성공, 토미노 요시유키의 새로운 시도

거장 요코야마 미츠테루 원작의 ‘철인28호(1963)’에서 시작된 거대로봇의 개념은 나가이 고가 창조한 ‘마징가 Z(1972)’를 기점으로 ‘슈퍼로봇 장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아니메 史에 안착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70년대 슈퍼로봇 장르는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이 창조해낸 ‘기동전사 건담(1979, 이하 건담)’에 의해 80년대에 이르러서는 ‘리얼로봇 장르’라는 새로운 스타일에 바통을 넘겨주게 되죠. (물론, 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슈퍼로봇 장르는 용자 시리즈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변모합니다만, 이는 본 글에서 다룰 내용의 경계선을 넘어가기에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린이들의 전유물일 것만 같던 로봇은 건담을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현실적인 시점으로 전쟁을 바라보았고, 적과 감정의 교류 없는 비주얼적인 전투장면에 치중한 것이 아닌 生과 死를 통한 이념과 감정의 갈등과 대립을 보여 주었으며, 현실성 없던 로봇에 대한 치밀하고 밀리터리적인 설정을 가해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리얼리티를 적극 부여하여,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헉헉...)

그로부터 시작되는 80년대는 리얼로봇장르의 전성기였음은 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임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만, 건담을 창조한 토미노 요시유키는 그러한 리얼로봇장르의 전성기 즈음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리얼로봇 장르와 판타지와의 조우였습니다.

당시 이는 애니로서는 상당히 도전적이고 부조화스러운 시도였습니다. 로봇은 SF의 정점에 올라서 있는 하이 테크놀로지의 상징물, 이를 검이나 마법이 등장하는 판타지의 한복판에 떨어뜨려 놓는다는 것은 잘 그려놓은 한 폭의 멋진 풍경화 위에 느닷없이 컴퓨터 사진을 붙여놓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여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도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리얼로봇 리그의 제 1 선발과 구단주 격인 토미노 감독과 선라이즈가 시도한다는 것은 자칫 지금까지 쌓아 올려온 명성에 흠집을 낼 수 있는 모험이었을 것입니다.

일반적이라면, 건담의 후속 시리즈를 내는 것이 그 흥행을 이어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겠지만, 토미노 감독은 결국,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도전적인 시도를 펼칩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사 단바인(1983, 이하 단바인)’인 것입니다.


2. 토미노 요시유키의 새로운 세상, 바이스톤 웰

ⓒ SOTSU · SUNRISE

‘지구가 있는 우리의 차원과 평행 우주로 존재하는 ‘바이스톤 웰’이라는 세계로 우연하게 빨려 들어간 주인공 ‘쇼 자마’는 드레이크 군과 반 드레이크 군과의 싸움에 휘말려 오라 배틀러인 단바인에 탑승하게 됩니다.(중략)

단바인은 오라력을 가진 바이스톤 웰이라는 판타지 세계와 곤충을 닮은 획기적인 디자인의 오라 배틀러, 그리고 리얼로봇장르의 전형인 진지한 현실적인 이해 갈등관계가 적절하게 어우러지는 멋진 라인업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전 작 ‘전설의 거신 이데온(1980)’에서 보여준 ‘몰살의 토미노’란 별명에 걸맞게 등장인물들이 마구 죽어 나가는 토미노 식 결말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하지만) 이렇게 참신하고 멋진 설정을 가진 작품이 무려 20년이 지난 얘기란 것은 토미노 감독의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준 것은 아닐까요.

토미노가 창조한 바이스톤 웰의 세계관은 그 이후에도 ‘바이스톤 웰 이야기-가제이의 날개(1986)’를 거쳐 ‘린의 날개(2005)’로 이어져 토미노의 남다른 바이스톤 웰 사랑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오히려 그에게 가장 큰 명성을 가져다 준 건담 시리즈가 선라이즈와 반다이의 압력 때문에 토미노 만의 세계를 펼쳐가기 어려운 작품이었던 것에 반해, 이 바이스톤 웰은 그의 생각이 더 자유스럽게 반영될 수 있었기에 실제 더 많은 애착을 갖고 있는 세계관도 건담이 아닌 바로 이 바이스톤 웰이라고 하는군요.

그리하여, 토미노 감독의 이런 모험은 리얼로봇 장르라는 뛰어난 직구 외에도 판타지 로봇 장르라는 새로운 변화구를 아니메(아니 선라이즈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에 부여하게 되고, 이 변화구는 이듬해 84년 ‘중전기 엘가임(1984, 이하 엘가임)’이라는 또 다른 명작으로 아니메 팬들의 가슴에 스트라이크로 꽂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80년대 초 중반이야말로 그야말로 토미노 감독의 최대의 전성기이자, 아니메의 제2의 르네상스였습니다.


ⓒ SOTSU Agency · SUNRISE

그림 1. 곤충을 모티브로 한 오라 배틀러의 디자인은 로봇 만화영화의 메카인 아니메에서도 단연 독특한 멋을 자랑한다.


3. 나가노 마모루가 창안한 헤비메탈의 세상

ⓒ SOTSU · SUNRISE


엘가임의 등장에 있어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듬해 85년도에는 바로 토미노 감독의 또 다른 명작 ‘기동전사 Z건담(1985, 이하 Z 건담)이 방영되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81년부터 해마다 엄청난 작품들(‘전설거신 이데온(1981)’, ‘전투메카 자붕글(1982)’, ‘성전사 단바인(1983)’, ‘중전기 엘가임(1984)’까지…)을 만들어낸 토미노 감독이 연이어 Z 건담을 감독한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임에는 분명했을 것입니다.([2] 참조) 그리고 그것은 스텝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었을 것이구요. 이에 토미노 감독은 판타지 로봇 장르라는 변화구를 구사할 수 있는 새로운 구원투수를 등장시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Five Star Stories(이하 FSS)’를 창조해 낸 희대의 애니메이터 나가노 마모루였던 것입니다. (엘가임과 FSS는 나가노 마모루가 설정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패러랠 월드격의 작품이기에 본문에서는 둘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할 일 많은 토미노 감독을 대신하여, 그가 전격적으로 기용한 신예 나가노 마모루는 지금까지 아니메에서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메카닉들과 캐릭터를 선보이며, 대서사시적인 스토리 라인으로 매니아들을 단번에 사로잡아 버립니다. 그리하여 엘가임은 토미노 감독의 선발로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가노 마모루라는 구원투수의 이름을 세상에 더 널리 알리게 되는 것이죠.

어찌 보면, 이 엘가임이나 FSS는 판타지 로봇 장르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지도 모릅니다. 고풍스럽다기 보다는 독특하고 세련된 거대 로봇 ‘헤비 메탈’ 이외에도 헤비 메탈이 사용하는 거대한 광선포 버스터 런쳐, 하이테크의 상징인 광선검에 비행이 가능한 오토바이 형 탈 것 등은 오히려 '스타워즈'스러운 느낌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비단 등장하는 메카닉 뿐만 아니라, 인간형 안드로이드 파티마가 등장하는 발달된 과학력에 왕정정치가 이루어지는 작품의 배경적인 측면에서 말입니다.)

ⓒ SOTSU Agency · SUNRISE

그림 2. 고풍스럽고 탐미적인 나가노 마모루의 헤비메탈은 단바인의 기괴한 오라 배틀러와는 또다른 독특한 매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배경은 중세 스타일 판타지와는 분명 다르지만, 미래적인 느낌이 강한 판타지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FSS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아마테라스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의 건국신화까지 녹아 들어간, 시대를 아우르는 퓨전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시대관과 배경이 반영된 FSS는 21세기를 넘어서 아직도 연재가 되고 있으니, 그야말로 20세기에서 21세기를 넘는 ‘시대를 넘어간’ 작품이라 불려도 괜찮을 듯 하군요.

엘가임은 그 이후 후속편이나 극장판의 제작 없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FSS(1989)’ 극장판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멋진 모터 헤드(엘가임에서는 헤비메탈로 명명)의 자태를 드러냅니다. 하이 퀄리티의 비쥬얼이 돋보이는 이 작품에서 펼쳐지는 아마테라스의 전용기 ‘나이트 오브 골드’의 자태는 너무나 눈부시고 우아했으며, 유키 노부테루가 선보인 캐릭터들은 나가노 마모루의 스타일을 잘 계승하면서도 미형 캐릭터로서의 기본적인 스타일이 잘 매치업된 미려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 MCMLXXXVIII · KADOKAWA PICTURES

그림 3. 80년대 후반, 카도카와 서점에 선라이즈와 반다이까지 가세하여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투입되었던 대작 로봇 판타지 FSS. 단, 초반부의 에피소드만을 극장판으로 재구성하였기에 프롤로그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후속편의 가능성은 원작의 완결여부만큼이나 미지수.


4. 육중한 기갑병의 등장, 그리고 리얼로봇의 쇠퇴

ⓒ SUNRISE

83년과 84년 판타지 로봇장르로 연타석 삼진을 일궈낸 선라이즈는 이에 용기(?)를 얻어 84년 말에 다시금 세 번째 판타지 로봇장르의 작품을 내놓게 됩니다. 이제는 토미노 감독이 Z 건담에 집중할 시기였기에 선라이즈로서는 대안이 필요했던 시기, 때마침 선라이즈에는 또 다른 괴물 투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장갑기병 보톰즈(1983)’로 리얼로봇 장르에 있어서 토미노 감독 다음의 명장으로 불리는 다카하시 료스케 였습니다.(이니셜 D의 다카하시 료스케가 아닙니다, 물론.)

명장 다카하시 감독을 필두로, 건담을 만들어 낸 불세출의 메카닉 디자이너 오가와라 쿠니오(가리안만 디자인)와 단바인에서부터 이후 ‘패트레이버’ 시리즈의 메카닉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이즈부치 유타카가 합세한 ‘기갑계 가리안(1984, 이하 가리안)’은 단바인의 독특하고 생물학적인 디자인이나, 엘가임의 독창적이고 세련된 모습과는 또 다른 중세의 철갑옷을 연상시키는 듯한 육중한 디자인의 메카를 선보임으로써, 판타지 로봇 장르의 작품 중에서 가장 중세 스타일의 판타지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뛰어난 과학력으로 혹성 아스트를 정복한 마달에 의해 멸망한 보더 왕국의 왕자 조조가 지하에 잠들어 있던 가리안을 타고 마달의 기갑병들과 싸운다는 내용은 얼핏 들어도 히토미가 빠진 에스카플로네의 세계관이나 내용 전개와 유사하죠. 어떻게 보면 에스카플로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지구인인 주인공이 판타지 세계로 소환되는 부분은 단바인의 설정과 유사한 부분입니다만.) 특히, 가리안의 기갑병들은 국내에서는 80년도 중반 프라모델로 출시되면서, 그 당시 학생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리안은 이전의 단바인이나 엘가임에 비해서 그리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하고 조기 종영되는 불운한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글쎄요,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습니다만, 가리안의 스폰서인 모 프라모델 업체(반다이가 아닌, 다카라라는 프라모델 업체가 스폰서입니다.)가 프라모델의 판매부진을 이유로 방영시간의 단축에 대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뒷 이야기가 있군요.([4] 참조) 거기에 나름대로의 원인을 짚어보자면, 85년도에 방영된 Z 건담의 영향도 한 몫을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선라이즈도 어서 빨리 Z 건담에 역량을 집중하고 싶었겠죠.)

ⓒ SUNRISE

그림 4. 중세 판타지에 잘 어울리는 고풍스러운 이야기와 멋진 기갑병들이 눈길을 끌었지만, 제작 여건상의 한계로 인해 가리안은 사람들에게 잊혀져 버린 비운의 작품이 되었다.

덕분에 훌륭한 설정을 가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조기종영에 의해 전반부에는 무난히 흐르던 전개가 후반부에 이르러 놀라운 속도로 펼쳐져 이 작품의 완성도를 더욱 떨어뜨리게 되어 버립니다. 결국, 선라이즈의 세 번째 변화구는 아쉽게도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로 판정이 나게 되는 것이죠. 멋진 작품의 불운한 결말에 대한 아쉬움인지, 아니면 OVA의 재발매를 통한 비디오 시장에서의 매출을 노렸는지는 모르겠지만(둘 다 였을 수도 있겠지만), 가리안은 이후 86년에 ‘대지의 장’, ‘천공의 장’, ‘철의 문장’의 3부작 OVA로 다시 제작되어 미진하나마 그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대지의 장’과 ‘천공의 장’은 TV 시리즈의 총집편이고, 온전히 새로 만든 작품은 ‘철의 문장’입니다.)

그리고, 89년에 등장했던 FSS 극장판을 끝으로 판타지 로봇 장르는 조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름대로 추측해보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러한 판타지 로봇 장르가 리얼로봇 장르를 이끌던 감독들이 만들어낸 것들이었기에 80년대 말의 리얼로봇 장르의 쇠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동반 몰락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나, 토미노 감독이나 다카하시 감독 모두 80년대 후반부터는 이렇다 할 화제작을 만들지 못했고, 판타지 로봇 장르를 만들었던 두 명장의 부진은 결국 리얼로봇과 판타지 장르를 융합시킨 이 일련의 거대한 실험에 마침표를 찍게 한 가장 큰 원인은 아닐까요.

다음 편에는 새로운 컨셉으로 다시 부활하는 판타지 로봇 장르의 뒷이야기를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림 5. OVA 철의 문장에 등장하는 기갑병들의 피규어 모형.

OVA의 기갑병들은 이즈부치 유타카에 의해 좀더 고풍스럽고 육중한 철거인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특히, TV 시리즈에서 변신 합체 기능의 추가로 인해 작품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주역메카 가리안(상단 좌측)의 경우는 변신합체 기능이 삭제된 원래 기갑병의 이미지에 걸맞는 모습으로 태어난다.
우측 하단의 비갑병은 새의 날개 깃털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으로 후에 '건담 윙'의 날개 디자인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참고 사이트>

[1] ‘성전사 단바인’ by 만보, Harbest Days
[2] ‘<중전기 엘가임>과 <F.S.S (Five Start Stories)> by 만보, Harbest Days
[3] ‘파이브 스타 스토리’ by 만보, Harbest Days
[4] ‘기갑계 가리안’ by 만보, Harbest Days
[5] ‘중전기 엘가임’ by 액슬, Rocket Queen
[6] ‘성전사 단바인’ by 액슬, Rocket Queen
[7] ‘기갑계 가리안’ by 액슬, Rocket Queen
[8] ‘나가노 마모루’ by 니힐리스트, ARE U READY FOR GUNDAM?
[9] ‘이즈부치 유타카’ by 니힐리스트, ARE U READY FOR GUNDAM?
[10] ‘오가와라 쿠니오’ by 니힐리스트, ARE U READY FOR GUNDAM?
[11] ‘토미노 요시유키’ by 니힐리스트, ARE U READY FOR GUNDAM?
[12] ‘오가와라 쿠니오’ by 니힐리스트, ARE U READY FOR GUNDAM?
[13] ‘나가노 마모루’ by 니힐리스트, ARE U READY FOR GUN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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