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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 코스튬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준 캐릭터들


랙은 심플하면서도 동시에 복잡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칠흑과 같이 한없는 어두움과 세련되고 고상한 고귀함을 동시에 표출하지요. 검은 가죽의상처럼 젊고 파격적이며, 뇌쇄적이고 퇴폐한 느낌을 풍기다가도 검은색 슈트처럼 중후하고 귀족적인 풍취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다른 색들도 용도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을 연출하긴 합니다만, 검은색이 보여주는 양면성은 다른 색보다 확연하게 양갈래로 나누어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사악하고 어두운 절대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만, 절대적인 강함으로 정의의 편에 서는 흑기사와 같은 다크 히어로로서의 컬러로도 잘 어울립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색이라 할까요.

이리하여 검은색은 영화나 드라마, 소설과 코믹스, 만화영화에 이르기까지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캐릭터들의 퍼스널 컬러로서 사랑받아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엘로스 역시 무척 좋아하는 컬러이기도 한데요. 이번 시간에는 이 블랙이라는 색상을 멋지게 소화해내었던 가상의 인물들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을 한 번 가져보고자 합니다. 소설, 영화, 만화영화, 드라마, 코믹스, 게임에 걸쳐 기억나는 캐릭터들 중 인상적인 캐릭터들을 꼽아보았으며, 소개 순서는 캐릭터의 창작연도 순이 되겠습니다.


Character 1. 쾌걸 조로 (1919~2005) from 쾌걸 조로

1919년 존스톤 멕클레이의 소설에 등장한 조로는 검은 코스튬의 캐릭터들 중에서는 첫 번째로 엘로스에게 검은색에 대한 동경을 심어준 인물로 기억됩니다. 스페인어로 '여우'라는 뜻의 조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캘리포니아의 귀족 돈 디에고 델라베가(혹은 돈 디에고 베가)가 부패한 관리들로부터 평민들을 구하는 의적으로 분하여 활약한다는 이야기를 다룬 활극인데요. 평상시에는 겁쟁이에 어리숙한 귀족 도련님으로 행세하는 디에고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검은 망토와 검은 복면, 그리고 검은 긴 챙모자를 눌러쓰고 현란한 펜싱기술로 관리들과 병사들을 골탕 먹이는 멋진 의적으로 분하는 모습은 후일 미국의 슈퍼 히어로와도 일치하는 점이 있지요.

능숙한 마상술, 멋진 호를 그리며 상대를 제압하는 채찍, 그리고 날카롭고 재빠른 검술로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조로는 특히 순식간에 상대에게 Z자의 검상을 남기는 것으로도 인상적인데요. 수십편의 영화와 TV 드라마, 여기에 애니메이션으로도 등장하는 등, DC나 마블의 히어로들보다 더 먼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미국식 히어로라 하겠습니다. 민중의 편에서 부패한 권력자들을 응징하는 모습에서는 유럽의 의적 로빈 훗이나 한국의 고전 의적 홍길동과도 비교된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류의 의적 중에서는 가장 세련되고 패셔너블한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렷을적 계몽사(?)의 세계명작전집 등을 통해 처음 조로를 만난 이래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그를 만나볼 수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조로 중 한명은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미남 배우 알랭 드롱이 주연한 1975년작 '조로(1975)'가 아닌가 싶습니다. 1960~70년대의 대표적인 미남배우인 알랭 드롱이 연기한 조로는 후일 국내 공중파 방송에서도 몇 번씩이나 명절특선 영화나 토요 명화 등으로 방영되었던 작품으로,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스파게티 웨스턴(마카로니 웨스턴)의 조류를 타고 만들어진 작품이 아닌가 싶은데요. 특히, 라스트에서 선보인 조로의 촛불 자르기 신공(다섯개의 초가 일렬로 꽂혀진 촛대를 조로 십자로 베어버리자 양쪽의 네 개의 초는 수평으로 베어지고 가운데 초만 가운데로 갈라지는 황당무게한 조로의 기술)은 어린 나이에는 몹시도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지금 보면 어이가 없긴 합니다만)

98년에는 당대의 인기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주연을 맡은 '마스크 오브 조로(1998)'로 다시 한 번 조로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조로보다는 케서린 제타 존스의 눈부신 미모에 더 마음이 가버기도 했었죠. 반데라스의 조로는 좀 더 코믹하고 서민적인(?) 캐릭터로 묘사됩니다만, 현란한 몸놀림과 검은 망토는 여전히 멋스럽다 하겠습니다.


Character 2. 배트맨 (1939~계속) from 배트맨

ⓒ DC Comics

퍼맨과 함께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를 대표하는 히어로인 배트맨은, 다른 히어로들과는 달리 초인적인 힘을 갖지 않은 인간적인 히어로입니다. DC의 간판 슈퍼맨과 함께 가장 많이 실사영화화된 인물이기도 하지요. 북미에서 제작된 영화로만 치자면 10편으로 9편의 슈퍼맨보다 많습니다. 현재 제작되고 있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슈퍼맨 신작이 있으나, 배트맨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에 의해 새로운 속편이 등장할 예정에 있지요. 여기에 10편의 비디오 영화, 여섯번의 TV 시리즈, 이십여편의 애니메이션까지 실로 미국의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크나이트'라는 별명처럼 배트맨은 검은색에 잘 어울리는 히어로입니다. 어렷을 적 불우한 기억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갖고 있는 배트맨은 선과 혼란이 공존하는 캐릭터입니다. 백만장자라는 밝음 속에 숨겨진 외롭고 고독한 삶, 히어로라는 영광 뒤에 숨겨진 악당들을 향한 병적인 증오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블랙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고 있지요. 하지만 이런 배트맨의 양면적인 캐릭터는 1966년 TV 시리즈의 등장으로 인해 그 매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로빈과 짝을 맞춰 우스꽝스런 코스튬을 입고 경박한 톤으로 대사를 읊는 TV 시리즈의 배트맨은 분명 배트맨의 퍼스널 컬러인 블랙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실제 TV 시리즈에서 배트맨의 코스튬은 전체적으로 밝은 회색계열의 색상에 검은색 마스크와 장갑, 부츠로 마무리되어 검은색의 묘미를 살리지 못합니다. 물론, 이는 원작 코믹스에 바탕을 둔 디자인이긴 했으나, TV 시리즈로 옮겨지면서 순화된 캐릭터의 성격에 덩달아 밝은 회색의 코스튬까지 더해지면서 블랙이라는 컬러가 무색해지는 결과를 낳았지요.

하지만, 이런 배트맨은 89년 팀 버튼의 '배트맨(1989)'으로 인해 새롭게 조명받게 됩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기괴한 고담시를 배경으로 어둠 속에서 악당들을 응징하는 배트맨은 원작과는 다소 성격의 차이는 있어도 어둠과 잘 어울리는 안티히어로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강렬한 인상을 선사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팀 버튼식 블랙의 묘미가 빛나는 순간이었죠. '가위손(1990)'이나 '크리스마스의 악몽(1993)', '스위니토드(2007)' 등 팀 버튼의 영화에서 블랙은 어두움과 그로테스크함이 공존하는 기묘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이는 후속편인 '배트맨 리턴즈(1992)'에서 더더욱 확연히 드러나게 되지요. 마치 마녀의 시커먼 망토와 같은 괴기스러운 검은색은 원작과는 또다른 맛을 선사해 줍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에 의해 새롭게 그려진 '배트맨 비긴즈(2005)'와 '다크나이트(2008)'에서 배트맨은 더더욱 강렬한 블랙의 느낌을 선사합니다.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놀란의 블랙은 다크나이트라는 부제와 가장 잘 어울리는 배트맨을 창조해내게 되는 것이죠. 비록 강렬한 악역 조커의 등장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밀리긴 했지만, 다크나이트는 어둠과 빛 사이에서 방황하는 어두운 히어로의 면모를 실로 완벽에 가깝게 스크린에 묘사합니다. 2012년 다시 한 번 우리곁으로 돌아올 다크나이트의 발걸음은 그래서 더더욱 기대됩니다.


Character 3. 일지매 (1975~2009) from 일지매

국의 대표적인 토종 히어로(?)라 부를 수 있는 일지매는 홍길동과는 달리 정확한 기원이 전해지지 않은체 구전되어온 인물입니다. 조선 순조 당시 무인인 조수삼의 '추재집'에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기에 실존인물의 가능성도 있는데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검은 옷과 검은 두건을 한 일지매는 1975년 故 고우영 화백이 일간 스포츠에 연재했던 만화 '일지매(1975)'를 통해 구체적인 모습과 이야기를 갖추게 됩니다. 고우영 화백의 작품을 통해 탄력을 받은 일지매는 70년대 말엽 최초로 실사영화화 되는데요. 이것이 바로 현재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고호 감독(화가 고흐 아니구요.)의 '날으는 소년 일지매(197x)'가 되겠습니다.
 
날으는 소년 일지매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동용으로 만들어진 한국판 무술영화입니다. 당시에는 무명의 성룡이 국내에서 무술영화에 출연하는 등, 홍콩 무술영화에 영향을 받아 한국산 무술영화들도 제법 제작되던 시대였는데요.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발맞춰 만들어진 일지매는 비록 완성도에서는 아동용이라는 한계를 드러냈지만, 한국 고유의 세계관과 고유의 인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여러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일지매는 한 때 대한민국 최고의 괴작 연출가 중 한명이라 할 수 있는 남기남 감독(대표작 '영구와 땡칠이(1989)')에 의해 '슈퍼맨 일지매(1990)'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적이 있구요.(주인공이 무려 최수종) MBC에서는 최정주의 소설 일지매를 원작으로 한 8부작 드라마 '일지매(1993)'가 장동건, 염정아 주연으로 방영된 사례도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일지매는 계속적으로 영상화되면서 그 명맥을 이어온 셈이죠. 그러다가 2008년 SBS에서 이용석 연출/이준기 주연의 '일지매(2008)'를 방영하면서 일지매는 다시 화제의 중심에 올라서게 됩니다. 특히, SBS의 일지매는 민중의 편에서서 탐욕스러운 권력자와 대적하는 일지매의 활약을 상당히 통쾌하게 표현하면서 이슈가 되기도 하였죠. 당시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일지매는 기대 이상의 인기를 얻게 됩니다. 주조연의 감칠 맛나는 연기도 일품이었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이듬해에 MBC에서 제작된 황인뢰, 김수영 연출/정일우 주연의 '돌아온 일지매(2009)'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생각됩니다. 이 작품은 현대 시대에 일지매를 새롭게 조명했던 고우영 화백의 원작을 기본으로 한 작품으로, 원점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동시에 책녀를 통한 독특한 나레이션 기법과 흥미로운 연출기법 등으로 다소 거친 연출을 보여주었던 SBS의 일지매에 비해 보다 세련된 영상미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은데요. 다만, 시기를 잘 탔고, 캐릭터의 묘미가 잘 살아났던 SBS의 일지매에 비해서는 대중적 호응이 미치지 못하기도 하였죠.

인기를 끈 일지매는 2009년  SBS와 초록뱀 미디어 등의 주도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기세라면 한번쯤 메이저 실사영화로 한번쯤 제작해도 어떨까 하는 기대도 드는군요.


Character 4. 다쓰 베이더 (1977~1983) from 스타워즈

ⓒ LUCASFILM Ltd.

쓰 베이더(Darth Vader)는 검은색이 상징하는 이미지 중 하나인 악, 그리고 어둠에 가장 잘 부합하는 캐릭터 중 한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호흡장치를 통해 내뱉는 귀에 거슬리는 거친 숨소리, 왠만한 장정들을 압도하는 위압적인 체구, 얼굴을 모두 가리는 그로테스크한 검은 헬멧과 검은 갑옷으로 몸을 감싼 그는 제다이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다이 중 한 명이며, 뛰어난 파일럿이기도 합니다. 원래 이름은 아나킨 스카이워커로, 타투인 혹성에서 노예로 살던 도중 그 가능성을 알아본 제다이 마스터 콰이곤에 의해 제다이로 키워지게 되지요.

포스에 질서를 가져올 인물로, 동시에 위험한 미래를 가진 인물로 평가받던 그는 콰이곤의 사후에는 콰이곤의 제자였던 오비완에 의해 제다이로 길러집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던 아나킨은 세속의 가치관을 모두 부질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고고한 제다이의 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했고, 파드메를 향한 사랑과 강렬한 소유욕, 그리고 어머니를 잃고 나서의 상실감과 증오를 이겨내지 못하고 시쓰(Sith)의 군주인 팰퍼틴의 꾀임에 넘어가 어둠의 제다이인 시쓰의 군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오비완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빈사의 상태에 빠졌던 그는 팰퍼틴에 의해 생명유지 장치를 부착한 검은 갑옷을 입은 다쓰 베이더로 거듭납니다. 이후 그는 공화국의 잔족세력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제국의 병사에게까지 공포스러운 존재로 태어나게 되지요. 누구든지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표정을 알 수 없는 검은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다가온다면 긴장에 떨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그는 실수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부하들을 포스의 힘으로 질식사 시켜버리기도 합니다. 그가 포스로 상대방의 숨통을 죄일 때 손가락으로 마치 목줄을 잡는 듯한 시늉(포스 그립이라는 기술로도 불립니다)을 취하는데, 이 포즈는 그야말로 다쓰 베이더의 어둡고 강렬한 힘을 대표하는 포즈이기도 하지요.

특히, 에피소드 5편인 '제국의 역습(1980)'편에서 루크 스카이워커와의 결투 끝에 그를 궁지에 몬 그가 루크에게 자신이 바로 아버지임을 밝히는 장면은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자주 패러디되기도 하였죠. 마지막에 이르러 결국 본연의 선함을 되찾고 팰퍼틴 황제를 쓰러뜨리며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그는 이제까지의 영화사상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검은 코스튬의 악인 중 한명일 것입니다.


Character 5. 메텔 (1978~2004) from 은하철도 999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아하면서도 우아한 검은색의 긴 코트와 검은 색 샤프카(러시아식 털모자)를 쓴 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여인은 누가 뭐래도 아니메 역사상 가장 눈부신 여인 중 하나일 겁니다. 70년대 TV에서 그녀를 접한 남자아이들에게 있어서 그녀의 존재는 한마디로 여신과 같았지요. 이후 수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아니메에 등장하여 소년들의 이상형이 되었지만, 그녀만큼 눈부시고 그녀만큼 포근하며 동시에 그녀만큼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여인은 찾아보기 힘들 듯 싶습니다.

주인공 테츠로(철이)의 엄마를 기본으로 하여 복제된 메텔(그러나, 후일 발표된 '메텔 레전드(2000)' 등을 통해서 이러한 설정을 작가인 마츠모토 레이지 스스로 뒤엎어버립니다. 어쨋든간에)은 그 출생상의 특징으로 인해 주인공인 테츠로 뿐만 아니라 은하철도 999를 시청하는 모든 소년들에게 있어서 미래의 연인인 동시에 동경하는 누나이자 이상적인 엄마의 느낌을 주었다 하겠습니다. 엘로스도 이 메텔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어렷을 적 잠시 연상의 여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군요.

메텔이 입고 있는 검은 옷은 그녀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준다며 라메텔 혹성으로 데려가 기계인간이 되게 한 수많은 아이들을 위한 상복의 의미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검은색 코트에 가려진 그녀의 진짜 정체는 그녀의 미모에 홀려 그녀를 원했더 수많은 이들을 경악하게 할 정도로 무서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추악한 진실을 검은색 코트 속에 감춘 체 길고 긴 시간의 여행자를 자처하는 그녀는 깊은 슬픔을 간직한 체 결코 드러내지 않는 고결한 여인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그녀의 검은색은 그래서 고귀하고 슬픈, 그리고 우울한 느낌을 줍니다.

천년여왕이었던 프로메슘(유키노 야요이)의 딸이며, 동시에 우주를 방랑하는 해적 퀸 에메랄다스의 쌍동이 여동생인 그녀는 극장판 '은하철도 999(1979)'에서 테츠로에게 '소년시절의 마음에만 남아있는 청춘의 환영'이라는 잊을 수 없는 명대사를 남깁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를 동경하면서 스크린 앞에 모여있던 수많은 소년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듯 합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눈부신 그녀는 이제는 그저 어쩌다 기억나는 인상적인 만화영화의 히로인 정도로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 애니메이션 인물열전: 소년시절의 연인, 청춘의 환상 메텔 (보러가기)


Character 6. 뱀파이어 헌터 D (1983~계속) from 뱀파이어 헌터 D

Illustrated by 天野喜孝 ⓒ 菊地秀行 · 朝日新聞出版

파이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뱀파이어. 인간과 괴물, 선과 악의 경계에 서게 되는 기구한 운명의 이 창백한 미남자는 인간들의 증오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인간들을 해하는 뱀파이어들을 사냥하는 끝없는 고뇌의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공포소설의 대가 키쿠치 히데유키가 창안해 낸 소설 속의 혼혈 뱀파이어가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깊게 각인시키게 된 것은 소설의 삽화 일러스트를 맡았던 일본의 천재 일러스트레이터 아마노 요시타카의 공이 크다고 하겠는데요. 그의 손끝에서 펼쳐진 몽환적이면서도 고귀함과 세련됨, 그리고 괴기함을 겸비한 헌터 D의 일러스트는 그때까지 타츠노코 프로에서 캐릭터 디자이너로 일했던 그의 그림체와는 전혀 다른, 만화의 범주를 탈피한 시각적 센세이션이었다 하겠습니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애니메이터(아마노는 10대의 나이에 타츠노코에 입사해, 창립자 삼형제 중 막내인 쿠리 잇페이의 제자로 만화를 배움)의 손 끝에서 미대생들을 능가하는 환상적이면서도 예술적인 그림이 나오다니! 당시 아마노 요시타카의 일러스트를 접한 엘로스는 그 특이한 매력에 흠뻑 빠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뱀파이어를 상징하는 어둡디 어두운 검은색은 아마노 요시타카의 일러스트를 통해 귀족적인 고귀함과 뱀파이어의 어두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검은색으로 다시 채색되었고, 그런 D의 모습은 비극적인 출생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껴지게 합니다.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검은 옷의 미남자가 실상은 뱀파이어의 피가 섞인 어둡고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D는 키쿠치 히데유키의 소설, 그리고 아마노의 삽화로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뒤, 아시도 토요오의 85년작 OVA를 통해 아니메 팬들에게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비록, 여러가지 제작일정상의 난항으로 인해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떤 아마노가 본 작품에 참여하지 못하면서 기존의 일러스트와는 분위기가 너무도 다른 D로 그려져 개인적으로는 몹시 아쉬운 느낌을 주기도 했는데요. 후일 키쿠치 히데유키의 단짝 친구이자 하드고어 아니메의 대가인 카와지리 요시아키가 북미시장을 목표로 만든 '뱀파이어 헌터 D Bloodlust(2000)'에서는 카와지리스러운 캐릭터 스타일을 유지한 체 아마노가 그린 D를 적절히 재해석하면서 멋진 비주얼을 보여주었다 하겠습니다.

OVA의 D는 멋진 캐릭터이긴 했으나 디테일이 떨어지는 관계로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하프 뱀파이어라는 느낌이 약해진 반면, 새로운 극장판의 D는 원작의 삽화에서 보여준 귀족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그려내면서도, 원작의 스타일이 아닌 카와지리 작품다운 스타일로 재해석함으로써 보다 더 완성도 높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생각되는군요. 다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해외시장을 목표로 하면서 카와지리 특유의 작품색이 옅어져 결과적으로는 싱거운 작품이 되었다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더더욱 멋진 D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 과묵한 성격 탓인지 아니메에서 그를 만나기는 좀처럼 힘들군요.

☞ 뱀파이어 헌터 D Bloodlust (2000), 돌아온 전설의 뱀파이어 헌터 (보러가기)


Character 7. 드리즈트 도우덴 (1988~계속) from 아이스윈드데일 3부작

Illustrated by Todd Lockwood ⓒ WIZARDS OF THE COAST

가튼 렐름은 TSR사에서 출시한 TRPG 게임인 AD&D 세계관 중 하나입니다. 게임이 큰 인기를 얻게 되자, 게임 디자이너들 뿐만 아니라 게이머들 스스로가 이 매력적인 세계관에 스스로 이야기를 추가하거나 영웅적인 캐릭터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는데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 속에 포가튼 렐름은 거대하고 구체적이며 온갖 영웅들과 악당들, 신과 악마, 그리고 모험과 음모, 낭만이 존재하는 신비롭고 방대한 세상으로 자리 잡아가게 됩니다. 수많은 영웅들과 악당들이 모험 속에 스스로의 무용담과 전설을 쌓아나가고 있는 이 곳에서도 드리즈트 두어덴은 특히나 눈에 띄는 명성과 실력을 갖고 있는 다크 엘프 레인져입니다.

흑요석과 같은 검은 피부, 검은 피부와 멋진 대조를 이루는 눈부신 은발머리, 이 멋진 무채색의 대비 속에서 또렷하고 강렬하게 다가오는 보라색 안광... 드리즈트의 이 강렬한 외모는 포가튼 렐름의 영웅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을 정도로 인상적인데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이 세계에서 가장 악랄하고 비열한 종족 중의 하나인 다크 엘프 드로우라는 사실입니다. 사악한 종족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운명의 굴레를 벗고 어두운 지하세계(포가튼 렐름에서 드로우들은 언더다크라는 지하세계가 삶의 터전이죠.)를 벗어나 지상으로 향한 이 용감한 다크 엘프는 지상인들의 편견과 오해, 멸시와 증오 속에서도 그의 영원한 파트너인 검은 표범 구엔하이버와 함께 친구들과 안식처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신분과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고 운명과 싸우는 어둠의 히어로는 항상 사람들에게 강렬한 매력을 선사하게 마련이죠.

두 자루의 시미터를 현란하고 멋지게 사용하는 쌍검술의 달인이자 노련한 레인져인 그는 포가튼 렐름을 배경으로 한 R.A.Salvatore의 베스트셀러 '아이스윈드데일 3부작'을 통해 독자들에게 강렬한 매력을 선사했고, 이후 '다크 엘프 3부작', '드로우의 유산 3부작', '어둠으로의 길 3부작' 등을 통해 꾸준히 그 인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먼저 소개한 헌터 D가 아마노 요시타카의 환상적인 일러스트에 의해 시각적인 매력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드리즈트 역시 소설 삽화가로 활약한 토드 락우드에 의해 인상적인 모습을 부여받았다고 하겠는데요. 살바토레가 묘사한 드리즈트의 매력을 멋지게 화폭에 담아낸 락우드의 일러스트는 금방이라도 두 자루의 시미터를 들고 악당들을 응징하는 다크 엘프의 영웅처럼 생생하다 하겠습니다.

현재 드리즈트는 계속적으로 소설과 코믹스 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바이오웨어의 전설적인 RPG 게임 '발더스게이트'나 PS용 게임인 '데몬스톤'에서도 깜짝 카메오로 출연하는 등, D&D 마니아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죠. 개인적으로는 이 멋진 다크 엘프를 실사영화를 통해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요. 북미에서는 인기 높은 캐릭터이니 만큼 이러한 바람이 그저 헛된 망상이 아니길 마음 속으로 빌어보려 합니다.

☞ 아이스윈드데일 3부작 - 드리즈트 도어덴의 장대한 모험의 시작 (보러가기)


Character 8. 흑태자 칼 스타이너 (1995~1998) from 창세기전 I, II

ⓒ SOFTMAX Co, Ltd.

산 RPG 게임의 신기원을 열었던 소프트맥스사의 '창세기전'은 스케일 큰 서사적인 스토리라인, 만화가인 김진이 직접 일러스트한 유려한 캐릭터 디자인, 흥미진진한 게임시스템(물론, 그 흥미진진한 만큼 수많은 버그로 인해 호평에 버금가는 혹평을 듣기도 했지만) 등으로, 걸음마 수준이던 90년대 말 국산 패키지 게임시장에 신선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됩니다. 치명적인 버그를 포함하고 있던 1편을 보완하고 아직 완결되지 못한 이후의 스토리까지 모두 포함하여 다시 태어난 '창세기전 II'는 버그로 점철되었던 전작의 오명을 어느 정도 만회하면서 흥행에 성공하게 되지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버그들이 존재했지만.)

사실, 이 정도의 치명적인 버그가 있는 게임이라면 멋진 그래픽과 게임성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마련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전이 지금까지도 국내 게이머들의 입에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유는, 바로 드라마틱한 스토리 전개와 강렬한 카리스마와 매력을 발휘한 주인공 흑태자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 영국왕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를 모델로 했다고 전해지는 흑태자 칼 스타이너는 항상 검은 갑옷과 검은 투구를 쓰고 변방의 게이시르 제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대전쟁의 선봉에 서는데요. 뛰어난 무인이자 천재적인 전략가로, 사선진형이라는 신개념의 전법을 통해 적은 수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넓은 평원의 전투에서 막강한 실버애로우 연합의 대군을 궤멸시키면서 안타리아 대륙의 패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매력적인 캐릭터 설정에도 불구하고 흑태자는 게임 플레이어의 플레잉 캐릭터가 아닙니다. 오히려 흑태자에 의해 조국이 멸망당한 펜드레건의 왕녀 이올린과 라시드 왕자, 비프로스트 공국의 레인져 G.S로 흑태자의 게이시르 제국과 맞서는 것이 플레이어들의 미션인 것이죠. 세상을 위협하는 악마에 맞서싸운다는 전형적인 RPG 공식을 벗어난 이 멋진 스토리는 게임과 함께 게임 속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감정이입을 극대화하게 됩니다. (물론, 결국 플레이어는 흑태자를 플레이하게 되긴 하지요.)

세상을 지키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꿈을 버리는 흑태자의 기구한 운명과 슬픈 결말은 게임 타이틀의 수준을 넘어서는 드라마틱함을 보여줍니다. 흑태자가 사라진 후에도 창세기전 시리즈는 이 비극적인 운명과 드라마를 잘 활용하여 게임에 머물기에는 아까운 멋진 이야기들을 들려주게 되는데요. 현재 온라인 게임으로 다시 팬들에게 돌아오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는 듯 하니 그 멋진 드라마의 부활을 다시 한 번 기다려볼까 합니다.


Character 9. V (1982~2005) from 브이 포 벤데타

ⓒ WARNER BROS

은 코스튬의 히어로가 보통 선과 악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인물이라면, 브이(V)는 가장 적격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그들 중 가장 특이한 히어로 중 하나일 겁니다. 영국의 유명작가 알렌 무어와 만화가 데이비드 로이드의 일러스트에 의해 탄생된 브이는 검은색 복장과 검은색 망토, 챙긴 검은 색 모자를 쓴 전형적인 다크 히어로인데요. 특히, 그는 로마 카톨릭 혁명단체의 일원으로 저 유명한 화약음모사건을 통해 영국의 국왕 제임스1세를 암살하려 했던 전설적인 테러리스트인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즉, 그에게는 선과 악의 경계라는 다크 히어로 특유의 본질 이외에, 영웅과 테러리스트라는 양면적인 정체성을 가진 인물인 것입니다.

시점에 따라 그는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는 영웅이기도 하며, 사회 혼란을 획책하는 위험한 테러리스트로도 보여집니다. 인체실험의 대상으로 상상도 못할 지옥의 나날을 살아온 그의 과거와,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예술적 취향, 세련된 검은색의 코스튬과 우스꽝스런 가이 포크스의 가면까지... 브이는 언제나 상반되고 모순 덩어리이며, 이중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도 그는 침착함과 광기의 모습을 오가며 광적이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휴고 위빙 특유의 매력적인 보이스 컬러와 연기는 양면적인 브이의 모습을 실로 스크린에 멋지게 묘사하지 않았나 합니다. 사실, 처음 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러갈 때만 하더라도 그저 그런 액션영화로 잘못 알고 있던 엘로스는, 처음에는 지루한 전개에 실망을 느끼다가 중반 이후 스크린에 급격하게 빨려들게 되었는데요. 전혀 정보를 모른 체 접한 영화 중 무척 인상적인 영화 중 하나였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인상적인 브이의 모습만큼이나 나탈리 포트만의 호연도 인상적입니다. 극중 삭발투혼까지 발휘한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고 있음을 예견하고 있는데요. 정말로 이번 오스카에서 그녀는 '블랙스완(2010)'을 통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파 배우로의 성공적인 변신의 마침표를 찍게 되지요.

독특한 기행만큼이나 브이의 마지막 역시 장렬하면서도 강렬합니다. 광기와 신념, 정의와 복수라는 경계 속에 선 그는 어쩌면 진정한 다크 히어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부 끝.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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