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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rner Bros. Pictures


<스탭>

◈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 각본: 트레비스 비챔(Travis Beacham), 길예르모 델 토로
◈ 제작: 토마스 툴(Thomas Tull), 존 제시니(Jon Jashni), 메리 패어런트(Mary Parent)


<줄거리> 

근 미래, 카이쥬(Kaiju)라 불리우는 외계 거대생물체의 위협이 시작되었다. 태평양 심해의 포탈에서 나타난 그들은 무차별적으로 인류를 습격했고, 인류는 카이쥬의 압도적인 공포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위협에 직면하여 힘을 합하기 시작한 인류는 거대한 카이쥬에 맞서기 위해 과학력을 모아 거대 인간형 병기 '예거(Jaeger)"를 만들고, 거대한 예거를 완벽하게 컨트롤하기 위해 두 명의 파일럿이 서로의 정신을 공유하는 '드리프트' 시스템을 개발하게 된다. 드리프트 시스템과 막강한 예거의 전투력으로 세계 각지의 카이쥬들은 하나 둘 격퇴되기 시작하고, 이제 예거와 파일럿들은 인류의 구원자이자 히어로로 거듭나게 된다.

얀시 베켓(디에고 클래튼호프 분)와 롤리 베켓(챨리 헌냄 분) 형제는 예거 '집시 데인저'의 파일럿이었다. 바다 한복판에서 펼쳐진 카이쥬와 혈투에 의해 형 얀시를 잃고 반파된 예거를 혼자서 조종해 해안까지 다다른 롤리는 그 트라우마로 인해 파일럿을 그만두고 카이쥬를 방어하기 위한 장벽 공사의 인부로 살고 있었다. 인류의 지도자들이 갈수록 강해지는 카이쥬의 공격에 한계를 느끼고 예거 계획을 취소하고 장벽 만들기에 전력을 쏟자 예거 부대의 사령관 펜터코스트(이드리스 엘바 분)는 남아있는 예거들과 파일럿을 모아 카이쥬를 향한 최후의 반격을 시도하기 위해 은퇴한 롤리를 찾아나서는데...


마니아를 위한 압도적인 스케일의 헐리우드식 특촬물

'시픽 림(2013)'의 압도적인 예고편이 인터넷에 소개되기 시작하자 소년 시절의 로망으로 로봇을 품고 살았던 마니아들은 '트랜스포머(2007)' 이후 한동안 명맥을 잃었던 거대 로봇이 등장하는 실사영화에 대한 또다른 기대로 이 영화의 개봉을 학수고대 했을 듯 싶다. 만화영화 블로깅을 취미로 삼고, 어린 시절부터 거대 로봇의 로망에 몸을 맡긴 체 중년이 되어서도 가끔씩 프라모델을 사면서 그 끈을 놓치않고 사는 글쓴이에게도 이것은 마찬가지. 트랜스포머가 보여준 실사로 살아 움직이는 로봇을 넘어 아니메에서 보았던 거대 로봇이 미지의 괴수와 싸운다는 테마 하나만으로도, 퍼시픽 림은 분명 마니아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극장을 사수해야할 가치가 있는 물건인 셈이다.

트랜스포머 이후 활발했던 거대로봇 실사영화의 흐름이 한동안 주춤하고 있는 (마니아들에게는) 안타까운 현상은 그만큼 이 장르가 실사영화로 이식되기에는 여러가지 난제를 갖고 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아니메에 기원을 둔 거대로봇은 그 장르적 특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로컬라이징이 그닥 쉽지 않은 마니아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아니메 스타일에 충실하면 대중성을 잃고, 대중성에 충실하면 특유의 색깔을 잃은 이도저도 아닌 물건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 북미 TV 시리즈로 오랜 세월동안 자연스럽게 로컬라이징이 되어온 트랜스포머의 경우는 운이 좋았던 셈이랄까.

실사영화로의 이식이 어렵다는 것은 해당 장르에 대한 스탭들의 이해도도 한 몫을 한다. 한마디로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감독이 이런 마니아적인 소재를 실사로 이식하는 작업은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어벤져스(2012)'의 죠스 웨던이 마블 코믹스의 열렬한 팬이었이다는 것은 이를 증명하는 사례이며, 그런 점에서 길예르모 델 토로는 이 장르를 실사영화로 이식하기에는 적합한 연출가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그가 얼마나 로봇 아니메에 대해 높은 이해도를 갖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데,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을 연상시키는 격납고와 거대 로봇의 움직임을 실감나게 표현해낸 육중한 연출, 흡사 '자이언트 로보(1991)'처럼 디지털 방식의 동력이 아닌 원자로가 장착된 아날로그 방식이라는 점 등 여러 장면에서 로봇 아니메의 향수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퍼시픽 림은 디테일하게는 로봇 아니메의 많은 장면과 설정들에 영향을 받고 있지만, 전체적인 구도는 특촬물(특수촬영물)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외계에서 온 거대 괴수와 거대 히어로의 대결은 츠부라야 프로덕션의 '울트라맨(1966)'의 구도를 따르고 있으며, 일본식 특촬물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혼다 이치로의 '고지라(1954)'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로봇 아니메와 특촬물, 이 일본의 양대 서브컬쳐를 오마쥬한 퍼시픽 림은 과연 헐리우드식 블록버스터와 결합하여 대중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퍼시픽 림이 대중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느냐는 박스오피스의 수익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Box Office Mojo(바로가기)가 집계한 퍼시픽 림의 월드 와이드 수익은 현재 약 1억8천만 달러로 제작비 1억9천만 달러에 거의 근접한 수치를 기록 중이다. 개봉한지 약 2주가 지났음을 감안할 때 이는 실망스러운 수치라 하겠다. 북미 박스오피스 권에서도 퍼시픽림은 주말 수익 1천6백만 달러로 18일 개봉한 'RED2(2013)'의 1천8백만 달러에 뒤쳐지며 현재 6위에 머물고 있다. 이는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퍼시픽 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어내는데는 사실상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퍼시픽 림의 흥행이 저조한 이유는 마니악한(물론, 어떤 관점에서 일본 서브컬쳐는 마니악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는 않는다) 일본 서브컬쳐와 블록버스터의 조합이 실패했기 때문일까. 일본 아니메를 오랫동안 보아온 마니악한 입장에서 퍼시픽 림의 아니메/특촬물의 실사영화 이식은 무척이나 만족스럽다. 압도적인 중량감과 스케일로 펼쳐지는 거대로봇 예거와 카이쥬와의 혈투는 그 장면만을 놓고 볼 때 단연 극장에서 볼만한 가치를 지닌 장면들이다. 힘과 힘의 격돌 뿐만 아니라 위기의 순간 튀어나오눈 예거의 각종 무기 시스템, 지형지물을 이용한 카이쥬와의 혈투 등은 그야말로 마니아들 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들에게도 탄성을 가져올만한 부분. 이 액션 시퀀스에서만큼은 직전에 개봉해 전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잭 스나이더의 '맨 오브 스틸(2013)'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압도적인 스케일의 로봇과 괴수의 액션 사이사이를 이어가는 이야기의 얼개와 밀도는 다소 황당할 정도로 엉성한데, 바로 이것이 퍼시픽 림이 대중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이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캐스팅에서 보다 유명한 배우들이 기용되었다면 어느 정도 스토리의 단점들이 감춰졌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보인다. 무명의 인물을 기용하고도 대히트한 블록버스터의 예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특히, 마코 역을 맡은 기쿠치 린코는 그녀의 연기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번 작품의 캐릭터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듯 싶으며,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트라우마와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과정이 영화에서 너무 안이하게 그려져 마코 자체가 스토리의 가장 큰 오점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안타깝다.

주인공인 챨리 허냄은 이런 부실한 이야기 구조 속에서 주인공으로서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실상 퍼시픽 림의 주인공은 예거와 카이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형을 잃은 트라우마와 마코와의 관계형성에서 충분히 관객들에게 어필할만한 구도를 만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카이쥬의 등장부터 완벽한 격퇴가 러닝타임 안에 모두 그려지면서 그 기회를 잃은 듯 싶다. 그 와중에 등장한 두 박사나 특히 특별출연에 가까운 론 펄만의 하니발 챠우는 가뜩이나 풀어갈 숙제가 많은 이야기에 커다란 짐으로 작용한다. 개인적으로 론 펄만의 팬이지만, 이 작품에서 론 펄만은 등장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니발 챠우의 에피소드를 삭제하고 메인 스토리에 치중했다면 좀 더 이야기 구조가 짜임새 있어지지는 않았을까.

퍼시픽 림은 극단의 성향을 보여준 작품이다. 거대 로봇과 괴수라는 마니아적인 소재를 블록버스터에 어울리는 압도적인 영상미로 재현한 부분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지만 그로 인해 감수해야만 하는 스토리의 부실함은 그만큼 안타깝다. 이런 류의 오락물, 특히나 로봇 또는 특촬물에 관심이 큰 마니아들을 위한 장르물에서 스토리의 완성도가 크게 문제가 안될지는 몰라도 퍼시픽 림이 완성도 높은 오락물로 한 단계 더 올라서기 위해서는 적어도 최소한의 스토리 완성도는 보장되어야 했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 2억불짜리 오마주의 그저그런 흥행 성적이 추후 이런 장르의 작품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길예르모 감독의 도전은 절반의 성공 혹은 안타까운 실패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 Warner Bros. Pictures


덧붙임) 객관적인 이 영화의 평점을 이야기해보라면 5점 만점에 3.5점을 주겠지만, 주관적인 평점을 이야기하라면 5점 만점에 4점이다. 그러니까 마니아 층에는 나름 어필한 작품인 셈이다.

덧붙임) 카이주에 매달려 하늘로 끌려가는 집시의 비장의 무기인 검이 나오는 부분은 말 그대로 델 토로의 오덕스러움이 만개하는 장면. 검 모양의 아이콘이 그려진 집시의 버튼은 마치 '마징가 Z(1972)'와 같은 슈퍼 로봇의 그것을 연상시키며, 조각조각 나누어져 있던 검이 하나의 완전한 검으로 연결되는 모습은 흡사 '기갑계 가리안(1984)'이나 '천공의 에스카플로네(1996)'의 데자뷰가 느껴진다.

덧붙임) 마코의 기억 속에 등장하는 일본의 시가지와 카이쥬의 습격은 특촬물의 향수가 상당히 진하게 베어 나오는 장면이다. 이 영화는 사실 오마주 그 자체나 다름없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트랜스포머와는 확실히 다른 관점을 지니고 있다.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Warner Bros. Pictures에게 있습니다.



퍼시픽 림 (2013)

Pacific Rim 
7.2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
출연
찰리 헌냄, 이드리스 엘바, 키쿠치 린코, 찰리 데이, 로버트 카진스키
정보
SF | 미국 | 131 분 | 2013-07-11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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