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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 코스튬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준 캐릭터들


랙은 심플하면서도 동시에 복잡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칠흑과 같이 한없는 어두움과 세련되고 고상한 고귀함을 동시에 표출하지요. 검은 가죽의상처럼 젊고 파격적이며, 뇌쇄적이고 퇴폐한 느낌을 풍기다가도 검은색 슈트처럼 중후하고 귀족적인 풍취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다른 색들도 용도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을 연출하긴 합니다만, 검은색이 보여주는 양면성은 다른 색보다 확연하게 양갈래로 나누어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사악하고 어두운 절대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만, 절대적인 강함으로 정의의 편에 서는 흑기사와 같은 다크 히어로로서의 컬러로도 잘 어울립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색이라 할까요.

이리하여 검은색은 영화나 드라마, 소설과 코믹스, 만화영화에 이르기까지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캐릭터들의 퍼스널 컬러로서 사랑받아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엘로스 역시 무척 좋아하는 컬러이기도 한데요. 이번 시간에는 이 블랙이라는 색상을 멋지게 소화해내었던 가상의 인물들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을 한 번 가져보고자 합니다. 소설, 영화, 만화영화, 드라마, 코믹스, 게임에 걸쳐 기억나는 캐릭터들 중 인상적인 캐릭터들을 꼽아보았으며, 소개 순서는 캐릭터의 창작연도 순이 되겠습니다.


Character 1. 쾌걸 조로 (1919~2005) from 쾌걸 조로

1919년 존스톤 멕클레이의 소설에 등장한 조로는 검은 코스튬의 캐릭터들 중에서는 첫 번째로 엘로스에게 검은색에 대한 동경을 심어준 인물로 기억됩니다. 스페인어로 '여우'라는 뜻의 조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캘리포니아의 귀족 돈 디에고 델라베가(혹은 돈 디에고 베가)가 부패한 관리들로부터 평민들을 구하는 의적으로 분하여 활약한다는 이야기를 다룬 활극인데요. 평상시에는 겁쟁이에 어리숙한 귀족 도련님으로 행세하는 디에고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검은 망토와 검은 복면, 그리고 검은 긴 챙모자를 눌러쓰고 현란한 펜싱기술로 관리들과 병사들을 골탕 먹이는 멋진 의적으로 분하는 모습은 후일 미국의 슈퍼 히어로와도 일치하는 점이 있지요.

능숙한 마상술, 멋진 호를 그리며 상대를 제압하는 채찍, 그리고 날카롭고 재빠른 검술로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조로는 특히 순식간에 상대에게 Z자의 검상을 남기는 것으로도 인상적인데요. 수십편의 영화와 TV 드라마, 여기에 애니메이션으로도 등장하는 등, DC나 마블의 히어로들보다 더 먼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미국식 히어로라 하겠습니다. 민중의 편에서 부패한 권력자들을 응징하는 모습에서는 유럽의 의적 로빈 훗이나 한국의 고전 의적 홍길동과도 비교된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류의 의적 중에서는 가장 세련되고 패셔너블한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렷을적 계몽사(?)의 세계명작전집 등을 통해 처음 조로를 만난 이래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그를 만나볼 수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조로 중 한명은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미남 배우 알랭 드롱이 주연한 1975년작 '조로(1975)'가 아닌가 싶습니다. 1960~70년대의 대표적인 미남배우인 알랭 드롱이 연기한 조로는 후일 국내 공중파 방송에서도 몇 번씩이나 명절특선 영화나 토요 명화 등으로 방영되었던 작품으로,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스파게티 웨스턴(마카로니 웨스턴)의 조류를 타고 만들어진 작품이 아닌가 싶은데요. 특히, 라스트에서 선보인 조로의 촛불 자르기 신공(다섯개의 초가 일렬로 꽂혀진 촛대를 조로 십자로 베어버리자 양쪽의 네 개의 초는 수평으로 베어지고 가운데 초만 가운데로 갈라지는 황당무게한 조로의 기술)은 어린 나이에는 몹시도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지금 보면 어이가 없긴 합니다만)

98년에는 당대의 인기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주연을 맡은 '마스크 오브 조로(1998)'로 다시 한 번 조로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조로보다는 케서린 제타 존스의 눈부신 미모에 더 마음이 가버기도 했었죠. 반데라스의 조로는 좀 더 코믹하고 서민적인(?) 캐릭터로 묘사됩니다만, 현란한 몸놀림과 검은 망토는 여전히 멋스럽다 하겠습니다.


Character 2. 배트맨 (1939~계속) from 배트맨

ⓒ DC Comics

퍼맨과 함께 DC 코믹스의 슈퍼히어로를 대표하는 히어로인 배트맨은, 다른 히어로들과는 달리 초인적인 힘을 갖지 않은 인간적인 히어로입니다. DC의 간판 슈퍼맨과 함께 가장 많이 실사영화화된 인물이기도 하지요. 북미에서 제작된 영화로만 치자면 10편으로 9편의 슈퍼맨보다 많습니다. 현재 제작되고 있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슈퍼맨 신작이 있으나, 배트맨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에 의해 새로운 속편이 등장할 예정에 있지요. 여기에 10편의 비디오 영화, 여섯번의 TV 시리즈, 이십여편의 애니메이션까지 실로 미국의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크나이트'라는 별명처럼 배트맨은 검은색에 잘 어울리는 히어로입니다. 어렷을 적 불우한 기억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갖고 있는 배트맨은 선과 혼란이 공존하는 캐릭터입니다. 백만장자라는 밝음 속에 숨겨진 외롭고 고독한 삶, 히어로라는 영광 뒤에 숨겨진 악당들을 향한 병적인 증오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블랙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고 있지요. 하지만 이런 배트맨의 양면적인 캐릭터는 1966년 TV 시리즈의 등장으로 인해 그 매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로빈과 짝을 맞춰 우스꽝스런 코스튬을 입고 경박한 톤으로 대사를 읊는 TV 시리즈의 배트맨은 분명 배트맨의 퍼스널 컬러인 블랙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실제 TV 시리즈에서 배트맨의 코스튬은 전체적으로 밝은 회색계열의 색상에 검은색 마스크와 장갑, 부츠로 마무리되어 검은색의 묘미를 살리지 못합니다. 물론, 이는 원작 코믹스에 바탕을 둔 디자인이긴 했으나, TV 시리즈로 옮겨지면서 순화된 캐릭터의 성격에 덩달아 밝은 회색의 코스튬까지 더해지면서 블랙이라는 컬러가 무색해지는 결과를 낳았지요.

하지만, 이런 배트맨은 89년 팀 버튼의 '배트맨(1989)'으로 인해 새롭게 조명받게 됩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기괴한 고담시를 배경으로 어둠 속에서 악당들을 응징하는 배트맨은 원작과는 다소 성격의 차이는 있어도 어둠과 잘 어울리는 안티히어로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강렬한 인상을 선사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팀 버튼식 블랙의 묘미가 빛나는 순간이었죠. '가위손(1990)'이나 '크리스마스의 악몽(1993)', '스위니토드(2007)' 등 팀 버튼의 영화에서 블랙은 어두움과 그로테스크함이 공존하는 기묘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이는 후속편인 '배트맨 리턴즈(1992)'에서 더더욱 확연히 드러나게 되지요. 마치 마녀의 시커먼 망토와 같은 괴기스러운 검은색은 원작과는 또다른 맛을 선사해 줍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에 의해 새롭게 그려진 '배트맨 비긴즈(2005)'와 '다크나이트(2008)'에서 배트맨은 더더욱 강렬한 블랙의 느낌을 선사합니다.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놀란의 블랙은 다크나이트라는 부제와 가장 잘 어울리는 배트맨을 창조해내게 되는 것이죠. 비록 강렬한 악역 조커의 등장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밀리긴 했지만, 다크나이트는 어둠과 빛 사이에서 방황하는 어두운 히어로의 면모를 실로 완벽에 가깝게 스크린에 묘사합니다. 2012년 다시 한 번 우리곁으로 돌아올 다크나이트의 발걸음은 그래서 더더욱 기대됩니다.


Character 3. 일지매 (1975~2009) from 일지매

국의 대표적인 토종 히어로(?)라 부를 수 있는 일지매는 홍길동과는 달리 정확한 기원이 전해지지 않은체 구전되어온 인물입니다. 조선 순조 당시 무인인 조수삼의 '추재집'에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기에 실존인물의 가능성도 있는데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검은 옷과 검은 두건을 한 일지매는 1975년 故 고우영 화백이 일간 스포츠에 연재했던 만화 '일지매(1975)'를 통해 구체적인 모습과 이야기를 갖추게 됩니다. 고우영 화백의 작품을 통해 탄력을 받은 일지매는 70년대 말엽 최초로 실사영화화 되는데요. 이것이 바로 현재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고호 감독(화가 고흐 아니구요.)의 '날으는 소년 일지매(197x)'가 되겠습니다.
 
날으는 소년 일지매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동용으로 만들어진 한국판 무술영화입니다. 당시에는 무명의 성룡이 국내에서 무술영화에 출연하는 등, 홍콩 무술영화에 영향을 받아 한국산 무술영화들도 제법 제작되던 시대였는데요.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발맞춰 만들어진 일지매는 비록 완성도에서는 아동용이라는 한계를 드러냈지만, 한국 고유의 세계관과 고유의 인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여러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일지매는 한 때 대한민국 최고의 괴작 연출가 중 한명이라 할 수 있는 남기남 감독(대표작 '영구와 땡칠이(1989)')에 의해 '슈퍼맨 일지매(1990)'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 적이 있구요.(주인공이 무려 최수종) MBC에서는 최정주의 소설 일지매를 원작으로 한 8부작 드라마 '일지매(1993)'가 장동건, 염정아 주연으로 방영된 사례도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일지매는 계속적으로 영상화되면서 그 명맥을 이어온 셈이죠. 그러다가 2008년 SBS에서 이용석 연출/이준기 주연의 '일지매(2008)'를 방영하면서 일지매는 다시 화제의 중심에 올라서게 됩니다. 특히, SBS의 일지매는 민중의 편에서서 탐욕스러운 권력자와 대적하는 일지매의 활약을 상당히 통쾌하게 표현하면서 이슈가 되기도 하였죠. 당시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일지매는 기대 이상의 인기를 얻게 됩니다. 주조연의 감칠 맛나는 연기도 일품이었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이듬해에 MBC에서 제작된 황인뢰, 김수영 연출/정일우 주연의 '돌아온 일지매(2009)'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생각됩니다. 이 작품은 현대 시대에 일지매를 새롭게 조명했던 고우영 화백의 원작을 기본으로 한 작품으로, 원점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동시에 책녀를 통한 독특한 나레이션 기법과 흥미로운 연출기법 등으로 다소 거친 연출을 보여주었던 SBS의 일지매에 비해 보다 세련된 영상미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은데요. 다만, 시기를 잘 탔고, 캐릭터의 묘미가 잘 살아났던 SBS의 일지매에 비해서는 대중적 호응이 미치지 못하기도 하였죠.

인기를 끈 일지매는 2009년  SBS와 초록뱀 미디어 등의 주도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기세라면 한번쯤 메이저 실사영화로 한번쯤 제작해도 어떨까 하는 기대도 드는군요.


Character 4. 다쓰 베이더 (1977~1983) from 스타워즈

ⓒ LUCASFILM Ltd.

쓰 베이더(Darth Vader)는 검은색이 상징하는 이미지 중 하나인 악, 그리고 어둠에 가장 잘 부합하는 캐릭터 중 한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호흡장치를 통해 내뱉는 귀에 거슬리는 거친 숨소리, 왠만한 장정들을 압도하는 위압적인 체구, 얼굴을 모두 가리는 그로테스크한 검은 헬멧과 검은 갑옷으로 몸을 감싼 그는 제다이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다이 중 한 명이며, 뛰어난 파일럿이기도 합니다. 원래 이름은 아나킨 스카이워커로, 타투인 혹성에서 노예로 살던 도중 그 가능성을 알아본 제다이 마스터 콰이곤에 의해 제다이로 키워지게 되지요.

포스에 질서를 가져올 인물로, 동시에 위험한 미래를 가진 인물로 평가받던 그는 콰이곤의 사후에는 콰이곤의 제자였던 오비완에 의해 제다이로 길러집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던 아나킨은 세속의 가치관을 모두 부질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고고한 제다이의 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했고, 파드메를 향한 사랑과 강렬한 소유욕, 그리고 어머니를 잃고 나서의 상실감과 증오를 이겨내지 못하고 시쓰(Sith)의 군주인 팰퍼틴의 꾀임에 넘어가 어둠의 제다이인 시쓰의 군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오비완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빈사의 상태에 빠졌던 그는 팰퍼틴에 의해 생명유지 장치를 부착한 검은 갑옷을 입은 다쓰 베이더로 거듭납니다. 이후 그는 공화국의 잔족세력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제국의 병사에게까지 공포스러운 존재로 태어나게 되지요. 누구든지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표정을 알 수 없는 검은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그가 다가온다면 긴장에 떨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그는 실수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부하들을 포스의 힘으로 질식사 시켜버리기도 합니다. 그가 포스로 상대방의 숨통을 죄일 때 손가락으로 마치 목줄을 잡는 듯한 시늉(포스 그립이라는 기술로도 불립니다)을 취하는데, 이 포즈는 그야말로 다쓰 베이더의 어둡고 강렬한 힘을 대표하는 포즈이기도 하지요.

특히, 에피소드 5편인 '제국의 역습(1980)'편에서 루크 스카이워커와의 결투 끝에 그를 궁지에 몬 그가 루크에게 자신이 바로 아버지임을 밝히는 장면은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자주 패러디되기도 하였죠. 마지막에 이르러 결국 본연의 선함을 되찾고 팰퍼틴 황제를 쓰러뜨리며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 그는 이제까지의 영화사상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검은 코스튬의 악인 중 한명일 것입니다.


Character 5. 메텔 (1978~2004) from 은하철도 999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아하면서도 우아한 검은색의 긴 코트와 검은 색 샤프카(러시아식 털모자)를 쓴 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여인은 누가 뭐래도 아니메 역사상 가장 눈부신 여인 중 하나일 겁니다. 70년대 TV에서 그녀를 접한 남자아이들에게 있어서 그녀의 존재는 한마디로 여신과 같았지요. 이후 수많은 여성 캐릭터들이 아니메에 등장하여 소년들의 이상형이 되었지만, 그녀만큼 눈부시고 그녀만큼 포근하며 동시에 그녀만큼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여인은 찾아보기 힘들 듯 싶습니다.

주인공 테츠로(철이)의 엄마를 기본으로 하여 복제된 메텔(그러나, 후일 발표된 '메텔 레전드(2000)' 등을 통해서 이러한 설정을 작가인 마츠모토 레이지 스스로 뒤엎어버립니다. 어쨋든간에)은 그 출생상의 특징으로 인해 주인공인 테츠로 뿐만 아니라 은하철도 999를 시청하는 모든 소년들에게 있어서 미래의 연인인 동시에 동경하는 누나이자 이상적인 엄마의 느낌을 주었다 하겠습니다. 엘로스도 이 메텔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어렷을 적 잠시 연상의 여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군요.

메텔이 입고 있는 검은 옷은 그녀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준다며 라메텔 혹성으로 데려가 기계인간이 되게 한 수많은 아이들을 위한 상복의 의미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검은색 코트에 가려진 그녀의 진짜 정체는 그녀의 미모에 홀려 그녀를 원했더 수많은 이들을 경악하게 할 정도로 무서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추악한 진실을 검은색 코트 속에 감춘 체 길고 긴 시간의 여행자를 자처하는 그녀는 깊은 슬픔을 간직한 체 결코 드러내지 않는 고결한 여인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그녀의 검은색은 그래서 고귀하고 슬픈, 그리고 우울한 느낌을 줍니다.

천년여왕이었던 프로메슘(유키노 야요이)의 딸이며, 동시에 우주를 방랑하는 해적 퀸 에메랄다스의 쌍동이 여동생인 그녀는 극장판 '은하철도 999(1979)'에서 테츠로에게 '소년시절의 마음에만 남아있는 청춘의 환영'이라는 잊을 수 없는 명대사를 남깁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를 동경하면서 스크린 앞에 모여있던 수많은 소년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듯 합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눈부신 그녀는 이제는 그저 어쩌다 기억나는 인상적인 만화영화의 히로인 정도로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 애니메이션 인물열전: 소년시절의 연인, 청춘의 환상 메텔 (보러가기)


Character 6. 뱀파이어 헌터 D (1983~계속) from 뱀파이어 헌터 D

Illustrated by 天野喜孝 ⓒ 菊地秀行 · 朝日新聞出版

파이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뱀파이어. 인간과 괴물, 선과 악의 경계에 서게 되는 기구한 운명의 이 창백한 미남자는 인간들의 증오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인간들을 해하는 뱀파이어들을 사냥하는 끝없는 고뇌의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공포소설의 대가 키쿠치 히데유키가 창안해 낸 소설 속의 혼혈 뱀파이어가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깊게 각인시키게 된 것은 소설의 삽화 일러스트를 맡았던 일본의 천재 일러스트레이터 아마노 요시타카의 공이 크다고 하겠는데요. 그의 손끝에서 펼쳐진 몽환적이면서도 고귀함과 세련됨, 그리고 괴기함을 겸비한 헌터 D의 일러스트는 그때까지 타츠노코 프로에서 캐릭터 디자이너로 일했던 그의 그림체와는 전혀 다른, 만화의 범주를 탈피한 시각적 센세이션이었다 하겠습니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애니메이터(아마노는 10대의 나이에 타츠노코에 입사해, 창립자 삼형제 중 막내인 쿠리 잇페이의 제자로 만화를 배움)의 손 끝에서 미대생들을 능가하는 환상적이면서도 예술적인 그림이 나오다니! 당시 아마노 요시타카의 일러스트를 접한 엘로스는 그 특이한 매력에 흠뻑 빠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뱀파이어를 상징하는 어둡디 어두운 검은색은 아마노 요시타카의 일러스트를 통해 귀족적인 고귀함과 뱀파이어의 어두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검은색으로 다시 채색되었고, 그런 D의 모습은 비극적인 출생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껴지게 합니다.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검은 옷의 미남자가 실상은 뱀파이어의 피가 섞인 어둡고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D는 키쿠치 히데유키의 소설, 그리고 아마노의 삽화로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뒤, 아시도 토요오의 85년작 OVA를 통해 아니메 팬들에게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비록, 여러가지 제작일정상의 난항으로 인해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떤 아마노가 본 작품에 참여하지 못하면서 기존의 일러스트와는 분위기가 너무도 다른 D로 그려져 개인적으로는 몹시 아쉬운 느낌을 주기도 했는데요. 후일 키쿠치 히데유키의 단짝 친구이자 하드고어 아니메의 대가인 카와지리 요시아키가 북미시장을 목표로 만든 '뱀파이어 헌터 D Bloodlust(2000)'에서는 카와지리스러운 캐릭터 스타일을 유지한 체 아마노가 그린 D를 적절히 재해석하면서 멋진 비주얼을 보여주었다 하겠습니다.

OVA의 D는 멋진 캐릭터이긴 했으나 디테일이 떨어지는 관계로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하프 뱀파이어라는 느낌이 약해진 반면, 새로운 극장판의 D는 원작의 삽화에서 보여준 귀족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그려내면서도, 원작의 스타일이 아닌 카와지리 작품다운 스타일로 재해석함으로써 보다 더 완성도 높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생각되는군요. 다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해외시장을 목표로 하면서 카와지리 특유의 작품색이 옅어져 결과적으로는 싱거운 작품이 되었다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더더욱 멋진 D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 과묵한 성격 탓인지 아니메에서 그를 만나기는 좀처럼 힘들군요.

☞ 뱀파이어 헌터 D Bloodlust (2000), 돌아온 전설의 뱀파이어 헌터 (보러가기)


Character 7. 드리즈트 도우덴 (1988~계속) from 아이스윈드데일 3부작

Illustrated by Todd Lockwood ⓒ WIZARDS OF THE COAST

가튼 렐름은 TSR사에서 출시한 TRPG 게임인 AD&D 세계관 중 하나입니다. 게임이 큰 인기를 얻게 되자, 게임 디자이너들 뿐만 아니라 게이머들 스스로가 이 매력적인 세계관에 스스로 이야기를 추가하거나 영웅적인 캐릭터들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는데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 속에 포가튼 렐름은 거대하고 구체적이며 온갖 영웅들과 악당들, 신과 악마, 그리고 모험과 음모, 낭만이 존재하는 신비롭고 방대한 세상으로 자리 잡아가게 됩니다. 수많은 영웅들과 악당들이 모험 속에 스스로의 무용담과 전설을 쌓아나가고 있는 이 곳에서도 드리즈트 두어덴은 특히나 눈에 띄는 명성과 실력을 갖고 있는 다크 엘프 레인져입니다.

흑요석과 같은 검은 피부, 검은 피부와 멋진 대조를 이루는 눈부신 은발머리, 이 멋진 무채색의 대비 속에서 또렷하고 강렬하게 다가오는 보라색 안광... 드리즈트의 이 강렬한 외모는 포가튼 렐름의 영웅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을 정도로 인상적인데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이 세계에서 가장 악랄하고 비열한 종족 중의 하나인 다크 엘프 드로우라는 사실입니다. 사악한 종족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운명의 굴레를 벗고 어두운 지하세계(포가튼 렐름에서 드로우들은 언더다크라는 지하세계가 삶의 터전이죠.)를 벗어나 지상으로 향한 이 용감한 다크 엘프는 지상인들의 편견과 오해, 멸시와 증오 속에서도 그의 영원한 파트너인 검은 표범 구엔하이버와 함께 친구들과 안식처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신분과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고 운명과 싸우는 어둠의 히어로는 항상 사람들에게 강렬한 매력을 선사하게 마련이죠.

두 자루의 시미터를 현란하고 멋지게 사용하는 쌍검술의 달인이자 노련한 레인져인 그는 포가튼 렐름을 배경으로 한 R.A.Salvatore의 베스트셀러 '아이스윈드데일 3부작'을 통해 독자들에게 강렬한 매력을 선사했고, 이후 '다크 엘프 3부작', '드로우의 유산 3부작', '어둠으로의 길 3부작' 등을 통해 꾸준히 그 인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먼저 소개한 헌터 D가 아마노 요시타카의 환상적인 일러스트에 의해 시각적인 매력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드리즈트 역시 소설 삽화가로 활약한 토드 락우드에 의해 인상적인 모습을 부여받았다고 하겠는데요. 살바토레가 묘사한 드리즈트의 매력을 멋지게 화폭에 담아낸 락우드의 일러스트는 금방이라도 두 자루의 시미터를 들고 악당들을 응징하는 다크 엘프의 영웅처럼 생생하다 하겠습니다.

현재 드리즈트는 계속적으로 소설과 코믹스 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바이오웨어의 전설적인 RPG 게임 '발더스게이트'나 PS용 게임인 '데몬스톤'에서도 깜짝 카메오로 출연하는 등, D&D 마니아들의 큰 지지를 받고 있죠. 개인적으로는 이 멋진 다크 엘프를 실사영화를 통해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요. 북미에서는 인기 높은 캐릭터이니 만큼 이러한 바람이 그저 헛된 망상이 아니길 마음 속으로 빌어보려 합니다.

☞ 아이스윈드데일 3부작 - 드리즈트 도어덴의 장대한 모험의 시작 (보러가기)


Character 8. 흑태자 칼 스타이너 (1995~1998) from 창세기전 I, II

ⓒ SOFTMAX Co, Ltd.

산 RPG 게임의 신기원을 열었던 소프트맥스사의 '창세기전'은 스케일 큰 서사적인 스토리라인, 만화가인 김진이 직접 일러스트한 유려한 캐릭터 디자인, 흥미진진한 게임시스템(물론, 그 흥미진진한 만큼 수많은 버그로 인해 호평에 버금가는 혹평을 듣기도 했지만) 등으로, 걸음마 수준이던 90년대 말 국산 패키지 게임시장에 신선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됩니다. 치명적인 버그를 포함하고 있던 1편을 보완하고 아직 완결되지 못한 이후의 스토리까지 모두 포함하여 다시 태어난 '창세기전 II'는 버그로 점철되었던 전작의 오명을 어느 정도 만회하면서 흥행에 성공하게 되지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버그들이 존재했지만.)

사실, 이 정도의 치명적인 버그가 있는 게임이라면 멋진 그래픽과 게임성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마련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전이 지금까지도 국내 게이머들의 입에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유는, 바로 드라마틱한 스토리 전개와 강렬한 카리스마와 매력을 발휘한 주인공 흑태자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 영국왕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를 모델로 했다고 전해지는 흑태자 칼 스타이너는 항상 검은 갑옷과 검은 투구를 쓰고 변방의 게이시르 제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대전쟁의 선봉에 서는데요. 뛰어난 무인이자 천재적인 전략가로, 사선진형이라는 신개념의 전법을 통해 적은 수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넓은 평원의 전투에서 막강한 실버애로우 연합의 대군을 궤멸시키면서 안타리아 대륙의 패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매력적인 캐릭터 설정에도 불구하고 흑태자는 게임 플레이어의 플레잉 캐릭터가 아닙니다. 오히려 흑태자에 의해 조국이 멸망당한 펜드레건의 왕녀 이올린과 라시드 왕자, 비프로스트 공국의 레인져 G.S로 흑태자의 게이시르 제국과 맞서는 것이 플레이어들의 미션인 것이죠. 세상을 위협하는 악마에 맞서싸운다는 전형적인 RPG 공식을 벗어난 이 멋진 스토리는 게임과 함께 게임 속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플레이어들의 감정이입을 극대화하게 됩니다. (물론, 결국 플레이어는 흑태자를 플레이하게 되긴 하지요.)

세상을 지키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꿈을 버리는 흑태자의 기구한 운명과 슬픈 결말은 게임 타이틀의 수준을 넘어서는 드라마틱함을 보여줍니다. 흑태자가 사라진 후에도 창세기전 시리즈는 이 비극적인 운명과 드라마를 잘 활용하여 게임에 머물기에는 아까운 멋진 이야기들을 들려주게 되는데요. 현재 온라인 게임으로 다시 팬들에게 돌아오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는 듯 하니 그 멋진 드라마의 부활을 다시 한 번 기다려볼까 합니다.


Character 9. V (1982~2005) from 브이 포 벤데타

ⓒ WARNER BROS

은 코스튬의 히어로가 보통 선과 악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인물이라면, 브이(V)는 가장 적격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그들 중 가장 특이한 히어로 중 하나일 겁니다. 영국의 유명작가 알렌 무어와 만화가 데이비드 로이드의 일러스트에 의해 탄생된 브이는 검은색 복장과 검은색 망토, 챙긴 검은 색 모자를 쓴 전형적인 다크 히어로인데요. 특히, 그는 로마 카톨릭 혁명단체의 일원으로 저 유명한 화약음모사건을 통해 영국의 국왕 제임스1세를 암살하려 했던 전설적인 테러리스트인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즉, 그에게는 선과 악의 경계라는 다크 히어로 특유의 본질 이외에, 영웅과 테러리스트라는 양면적인 정체성을 가진 인물인 것입니다.

시점에 따라 그는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는 영웅이기도 하며, 사회 혼란을 획책하는 위험한 테러리스트로도 보여집니다. 인체실험의 대상으로 상상도 못할 지옥의 나날을 살아온 그의 과거와,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예술적 취향, 세련된 검은색의 코스튬과 우스꽝스런 가이 포크스의 가면까지... 브이는 언제나 상반되고 모순 덩어리이며, 이중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스스로도 그는 침착함과 광기의 모습을 오가며 광적이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요.

휴고 위빙 특유의 매력적인 보이스 컬러와 연기는 양면적인 브이의 모습을 실로 스크린에 멋지게 묘사하지 않았나 합니다. 사실, 처음 극장에서 이 작품을 보러갈 때만 하더라도 그저 그런 액션영화로 잘못 알고 있던 엘로스는, 처음에는 지루한 전개에 실망을 느끼다가 중반 이후 스크린에 급격하게 빨려들게 되었는데요. 전혀 정보를 모른 체 접한 영화 중 무척 인상적인 영화 중 하나였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인상적인 브이의 모습만큼이나 나탈리 포트만의 호연도 인상적입니다. 극중 삭발투혼까지 발휘한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고 있음을 예견하고 있는데요. 정말로 이번 오스카에서 그녀는 '블랙스완(2010)'을 통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파 배우로의 성공적인 변신의 마침표를 찍게 되지요.

독특한 기행만큼이나 브이의 마지막 역시 장렬하면서도 강렬합니다. 광기와 신념, 정의와 복수라는 경계 속에 선 그는 어쩌면 진정한 다크 히어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부 끝. 2부에서 계속)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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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지버스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시리즈>


은하철도 999 (1978), 銀河鉄道999 / Galaxy Express 999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정보>

◈ 원작: 마츠모토 레이지
◈ 총감독: 니시자와 노부타카
◈ 연출: 아키히 마사유키, 유야마 쿠니히코, 사카타 유우 外
◈ 각본: 야마우라 히로야스, 후지카와 케이스케, 요시다 요시아키
◈ 캐릭터 디자인: 아라키 신고, 코가와 토모노리
◈ 총 작화감수: 코가와 토노모리 (1~63화 / 74~88화), 코마츠바라 카즈오 (64~73화)
◈ 미술설정: 우라타 마타지
◈ 음악/연주/노래: 아오키 노조무 / 콜롬비아 심포닉 오케스트라 / 사사키 이사오
◈ 기획: 벳쇼 타카하루, 요코야마 켄지, 小湊洋市
◈ 제작사: 도에이 동화, 후지 TV
◈ 저작권: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 일자: 1978.09.14
◈ 장르: SF, 드라마, 모험
◈ 구분/등급: TVA (113화) / 초등생 이상 관람가 (PG)


<시놉시스>

은하계의 행성들이 우주를 달리는 특급열차 은하철도로 연결되어 있는 서기 2221년의 세상. 부유한 이들은 자신의 몸을 기계화한 속칭 기계인간이 되어 메가로폴리스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사는 반면, 기계인간이 되지 못한 가난한 진짜 인간들은 메가로폴리스 외곽의 빈민가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가난한 인간들에게도 신분상승을 위한 하나의 희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무료로 기계인간의 몸을 준다는 꿈의 행성 안드로메다. 다만, 이 안드로메다로 향하는 은하철도는 오로지 메가로 폴리스에서 출발하는 은하철도 999로, 이 999의 승차권 역시 가난한 이들에게는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빈민가에 살고 있는 철이(호시노 테츠로)와 철이의 엄마는 눈 내리는 어느날 밤 길을 가던 도중 나타난 기계백작의 일행의 습격을 받는다. 산 사람을 사냥하여 박제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는 끔찍한 기계백작에게 철이의 엄마는 그만 목숨을 잃게 되고,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오열하던 철이는 정신을 잃고 한 여인에게 구조된다. 어머니를 닮은 아름다운 외모에 눈부시도록 긴 금발머리를 가진 여인 메텔은 철이에게 자신과 동행하는 조건으로 은하철도 999에 탑승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하게 되고... 어머니의 몫까지 행복하게 살기 위해 기계의 몸을 갖기로 한 철이는 마침내 메텔과 함께 안드로메다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오르게 되는데... 


<소개>

마츠모토 레이지의 가장 큰 출세작이자 레이지버스의 정점에 올라있는 작품. 이 작품을 통해 마츠모토 레이지는 드디어 니시자키 요시노부의 품을 떠나 진정한 인기작가로 발돋움 했고, 레이지버스라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게 된다. '우주해적 캡틴 하록(1978)'과 함께 애니메이션을 위해 기획되었으나 역시 하록과 비슷한 이유(로봇 아니메가 아닌 SF 만화영화가 과연 TV 시리즈로 아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이유)로 한동안 애니메이션화되지 못했던 이 작품은, '우주전함 야마토 극장판(1977)'의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전면적으로 TV 시리즈로 기획된다.

기계화된 몸을 갖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특권계급과, 원래 인간의 몸으로 기계인간들에게 핍박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나뉘어진 양극화된 시대배경은 당시 만화영화로서는 상당히 수준높은 설정이었다. 기계문명에 심취한 인간들의 말로를 그리는 것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부에 심취하여 인간성을 잃어가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담아내는 사회풍자적인 면면도 눈에 띈다. 이러한 부조리함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과 같은 기계의 몸이 되기를 결심한 철이가 안드로메다로 향하는 여정에서 수많은 이들의 삶을 체험한 후 성장하여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야기는 이제까지의 레이지 작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주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주인공 철이를 보살피는 작품의 상징이자 레이지버스의 상징인 메텔의 존재는 이제까지의 어떤 SF 애니메이션의 여주인공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특히 동시기의 캡틴 하록이나 실버 선장이 아이들의 이상적인 남성상이자 아버지상이었다면, 메텔은 그와 반대로 이상적인 여성상이자 어머니상의 모습을 보여준 캐릭터라 할 수 있다. 따뜻하고 사려깊은 성격, 눈부신 미모, 그리고 베일에 쌓인 신비로운 모습 등 메텔은 레이지버스의 여성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당시 청소년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당시의 아니메 세대에 있어서 메텔이라는 여성 캐릭터의 등장은 실로 적절한 타이밍이었으며, 만화영화가 어린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는 것을 입증한 레이지버스의 작품을 통해 메텔이나 하록과 같은 성인 캐릭터들은 70년대 후반부 들어 부쩍 그 존재감을 발휘하게 된다.

작품의 성숙하고 깊이있는 스토리텔링 외에 999가 보여준 매력은 레이지버스라 일컬어지는 레이지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른 작품들과 999와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에피소드였다. 시리즈 중반에 까메오로 출현하게 되는 여해적 에메랄다스와 메텔의 이야기나, 철이에게 큰 영감을 주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는 사나이의 로망 캡틴 하록, 그리고 전 우주에 4자루 밖에 없다고 전해지는 전사의 총에 관한 이야기 등, 매력적인 이야기들로 인해 작품에 대한 상상력의 나래를 더더욱 펼 수 있는 여러가지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특히, 아름다운 겉모습 속에 감춰진 메텔의 진짜 정체에 관해 시청자들의 큰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드는 암시와 에피소드가 자주 등장하는데, 현재까지도 메텔의 정체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체 팬들로부터 다양한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내는 이슈가 되고 있다.

또한, 메텔의 수영복 씬이나 누드 씬 등 당시 일본 TV 만화영화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장면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비록 코믹스에 비해 상당히 순화되기는 했어도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어린이 만화영화에서 성적 상상력을 자극시킨 작품이라는 일부의 비평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편이기도 하다. (물론, 레이지의 이러한 묘사는 나가이 고의 노골적이고 반사회적인 그것에 비하면 얌전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성숙한 여인으로서의 매력에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성적 판타지의 대상으로서도 메텔은 오랫동안 청소년들에게 회자되어온 것이다.

첫 회 시청률이 15.5 %로 시작하여 최고 시청률이 22.8%에 달하는 등, 작품은 첫 방영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레이지가 참가한 작품으로 'SF 서유기 스타징가(1978)'에 이어 연속적인 성공이었는데, 특히 본격적인 레이지버스의 작품으로서는 은하철도 999가 첫 히트작인 셈이다.(하록 선장은 지금의 유명세와는 달리 시청률은 그닥 좋지 못했다.) 은하철도 999가 레이지버스의 대표작이자 그 신호탄이 되었던 셈이다.

한국에서는 2년 뒤인 81년 MBC를 통해 방영하게 된다. 식목일 특집으로 방영('푸른하늘 은하수'라는 기가막힌 네이밍 센스로 방영. 아마, 당시 방영한 에피소드는 1편과 12편인 화석의 전사편을 연결하여 방영한 것으로 기억된다.)한 것이 기대 이상의 인기를 얻자 반년 뒤인 10월부터 일요일 아침에 정식으로 방영되었다. ([6] 참조) 당시 이 999를 보기 위해 아이들은 일요일 아침에도 불구하고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종교행사를 가야하는 일부 아이들 중에는 999를 보는 것으로 인해 부모님과 일대 신경전이 벌어질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도.

(다음 내용은 페니웨이님의 은하철도 999 블루레이 리뷰에 실린 내용을 참고로 하여 수정하였습니다.)
한국의 최초 방영은 81년 식목일 특집으로 방영되었다는 설이 그동안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여러 경로를 통해 정설처럼 전해져왔으나, '페니웨이™의 In This Film'의 운영자 페니웨이님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는 정확한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보여진다. 실제로 엘로스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를 통해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의 81년 4월 5일 방송편성표를 보았으나 은하철도 999는 커녕 아예 만화 프로그램이 편성되어 있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신문을 통해 은하철도 999가 방영되었다는 흔적은 81년 10월 4일이 현재로선 최초로 보인다. 다만 글쓴이의 경우, 에피소드 12,13화인 화석의 전사편을 1화 뒤에 바로 본 기억이 남아 있는데, 페니웨이님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MBC는 10월 4일 은하철도 999 1, 2화를 연속방영한 뒤, 일주일 뒤인 11일에 화석의 전사편을 방영하게 된다. 아마 엘로스의 기억은 이것에서 연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은하철도 999의 정규방송은 82년 1월 2일부터 다시 시작된다. 현재로선 식목일 방영설이 설득력이 없는 정보라 할 수 있다.

☞ [블루레이] 은하철도 999 극장판 박스셋 - 안녕, 내 청춘의 환영이여 by 페니웨이 (바로가기)

한국판의 방영 초기 주제가는 '눈물실은 은하철도'로 번안곡이 아닌 독자적인 곡이었는데, 애절한 멜로디와 김국환의 절절한 창법이 어우러져 엄마를 잃고 먼 여행을 떠나는 소년의 감정을 실로 기막히게 표현해낸 원 주제가 이상의 아우라를 들려주었다. 다만, 주제가가 지나치게 우울하다는 지적에 의해 이 곡은 일본 주제가의 번안곡으로 바뀌어졌으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은하철도 999의 주제가가 되시겠다. 비록 번안곡이었지만 이 곡 역시 김국환의 목소리와 완벽한 싱크로를 선보이며, 만화영화 주제가로서 영원히 사랑받는 곡이 되었다. 하지만, 이 곡에 얽힌 뒷 사연은 그리 개운치만은 않았으니 궁금하신 분은 [6]에 링크되어 있는 한국판 위키피디아 내용을 참고하시길.

☞ 애니메이션 인물열전: 소년시절의 연인, 청춘의 환상 메텔 (보러가기)


은하철도 999 극장판 (1979)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정보>

◈ 원작/감수: 마츠모토 레이지 / 이치카와 콘 (영화감독)
◈ 감독: 린 타로
◈ 각본: 이시모리 시로
◈ 캐릭터 디자인/작화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
◈ 미술감독: 무쿠오 타카무라
◈ 음악/노래: 아오키 노조무 / 고다이고
◈ 기획/제작 총지휘: 아루가 켄, 타카미 요시오 / 이마다 치아키 
◈ 제작사: 도에이 동화
◈ 저작권: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 일자: 1979.08.04
◈ 장르: SF, 드라마, 모험
◈ 구분/등급: 극장판 / 초등생 이상 관람가 (PG) 


<소개>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은 이례적으로 TV 시리즈와 동시에 기획되었으며, TV 시리즈의 총집편이 아닌, 별도의 이야기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당시 극장판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케이스로, 도에이 동화의 A형 극장판이 막을 내리고 일본 오리지널 아니메와 TV 시리즈가 그 바톤을 이어받은 후, 대부분의 극장판은 모두 TV 시리즈의 총집편이거나 스페셜 시리즈의 형태를 지닌 부가적인 작품에 그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이 999 극장판은 극장 상영을 위해서 별도로 기획되고 제작된 작품인 것이다. 내용 자체는 TV 시리즈의 도입부와 결말을 비슷하게 따라가고 있지만, 달라진 캐릭터 디자인과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과 함께 TV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극장판의 감독은 린 타로가 맡았다. 캡틴 하록을 통해 도에이의 이마다 치아키 사장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그는, 이 999에서 TV 시리즈가 아닌 극장판 감독으로 낙점받게 된다. 또한, 캡틴 하록에서 린 타로와 멋진 하모니를 보여주었던 작화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와 미술감독 무쿠오 타카무라를 모두 기용함으로써 대작 극장판에 어울리는 위용의 스탭진을 갖추게 된다. 원작 스토리를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항상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구성하는 린 타로는 이 극장판에서도 자신의 작품 세계를 유감없이 드러내는데, 먼저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설정되었던 TV 시리즈의 철이를 10대 후반의 청소년으로 설정하고(게다가 외모도 보다 더 사람에 가깝게... 바꾸어 주셨다.), 거기에 자신이 연출했던 캡틴 하록의 주인공 하록과 아르카디아호를 카메오로 참여시켜 극적인 효과를 부여하는 등, 원작자인 레이지보다 더 레이지버스의 캐릭터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게 된다.

TV 시리즈와 동시에 기획되어 TV 시리즈가 완결되기도 전에 개봉된 이 극장판은 TV 시리즈나 원작보다 먼저 자신만의 결말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원작자인 마츠모토와의 또다른 충돌이 우려되기도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무난하게 넘어갔다. 어찌보면 TV 시리즈는 최대한 원작의 분위기대로 연출하고, 극장판은 감독의 의견이 적극 반영된 실험적인 결과물이 나오길 바랬던 도에이 수뇌부의 기획이었을 듯 싶기도. 이러한 시도는 대단한 성공으로 귀결되는데, 79년 개봉당시 16억5천만엔이라는 흥행수입을 벌어들이며, 실사영화를 모두 제치고 그해 일본영화 흥행랭킹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만화영화가 실사영화를 누른 것은 이 999가 최초였으며, 이것은 야마토 극장판과 함께 레이지버스의 이야기가 성인들에게도 공감될 정도의 내러티브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린 타로의 스승이었던 테즈카 오사무가 지향했던 또하나의 목표, 즉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만화영화인 '아니메라마'라는 고지에 린 타로는 999로서 도착한 것이었다. (테즈카 오사무는 디즈니 수준의 만화영화와 함께 영화 수준의 만화영화라는 두가지 명제를 꿈꾸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일본의 유력한 영화잡지 키네마 준보에서 그해 베스트 17위로 꼽는 등, 999 극장판은 만화영화의 범주가 아닌 영화의 범주에서 평론가들과 관객들에게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원작자의 네임밸류에 따라 작품을 평가하던 당시의 만화영화 풍토에서 린 타로는 최초로 만화영화 감독의 네임밸류로 작품을 가늠하게 되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게 된다. 즉, 최초로 일반인들이 알게 된 애니메이션 연출가가 되는 것이다.

라스트 엔딩 역시 일본 만화영화사상 잊혀지지 않는 명엔딩 중 하나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철이에게 이별의 입맞춤을 하고 떠나는 메텔. 기적 소리를 울리며 아련하게 떠나가는 999를 바라보며 나레이션이 들려온다. (TV 시리즈의 에피소드별 엔딩에서도 항상 들려오는 이 나레이션 역시 개인적으로는 한국판 나레이션 쪽이 더 느낌이 좋다는데 점수를 주고 싶다.) 

'이제 젊은이의 추억을 싣고 기적이 운다. 이제 젊은이의 추억을 싣고 기차는 간다.
하나의 여행이 끝나고 다시 하나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안녕, 메텔. 안녕, 은하철도 999.

안녕, 내 어린 시절아.'


이어서 시작되는 고다이고의 엔딩 테마는 기막힌 싱크로로 극장판의 대미를 장식한다. 소년들의 연인이며 우리 청춘의 환상인 메텔의 퇴장과 함께 마침내 시대는 80년대로 넘어가게 된다.


은하철도 999, 유리의 클레어 (1980)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정보>

◈ 감독: 니시자와 노부타카
◈ 작화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
◈ 음악/노래: 아오키 노조무 / 사사키 이사오
◈ 제작사: 도에이 동화
◈ 저작권: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 일자: 1980.03.15
◈ 장르: SF, 드라마, 모험
◈ 구분/등급: 특별 극장판 / 초등생 이상 관람가 (PG)

<소개>

TV 시리즈 초반부에 등장한 은하철도 999의 승무원 클레어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단편 스페셜. 도에이 만화축제 중에 개봉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온몸이 유리로 변한 클레어의 가슴 아픈 이야기는 단편 에피소드였음에도 은하철도 999의 주제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이 이야기는 뮤지컬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당시 클레어역에는 강수지가 그 역할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안녕, 은하철도 999 - 안드로메다 종착역 (1981)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정보>

◈ 원작/구성: 마츠모토 레이지
◈ 감독: 린 타로
◈ 각본: 야마우라 히로야스
◈ 캐릭터 디자인/작화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 
◈ 미술감독: 무쿠오 타카무라
◈ 원화: 카나다 요시노리, 야마구치 야스히로, 키노시타 유키 外
◈ 음악/노래: 쇼지 오사무 / 메리 맥그리거 
◈ 기획/제작 총지휘: 아루가 켄, 타카미 요시오 / 이마다 치아키 
◈ 제작사: 도에이 동화
◈ 저작권: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 일자: 1981.08.01
◈ 장르: SF, 드라마, 모험
◈ 구분/등급: 극장판 / 초등생 이상 관람가 (PG)


<소개>

첫번째 극장판 이후 2년만에 다시 찾아온 두번째 극장판은 메텔과 헤어진 철이의 다음 이야기로 은하철도 999의 진정한 엔딩을 장식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당시 방영을 시작한 천년여왕과 메텔과의 관계, 여해적 퀸 에메랄다스와 메텔의 관계, 기계제국의 탄생배경 등, 이제까지 레이지버스에서 숱하게 제기되었던 문제점이 이 극장판에서 그 전모를 드러낸다.

메텔의 어머니인 프로메슘이 천년여왕인 야요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설정은 당시 많은 팬들에게 화제를 몰고 왔다. 또한, 이제까지 그 존재가 언급되지 않았던 철이의 아버지 파우스트의 등장으로 메텔이 철이를 데리고 안드로메다의 여행길에 오른 당위성을 설명하려는 등, 레이지버스에서 제기되어왔던 설정상의 오류를 바로 잡으려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애초에 뚜렷한 설정이 잡히지 않은체 작품이 진행된 데다가 여러 감독의 손을 거치면서 설정의 일부가 재해석되는 등의 이유로 인해 여전히 설정 상에는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고 있다.

전편을 능가하는 퀄리티와 많은 의문점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 두번째 극장판의 흥행수입은 11억 5천만엔으로 흥행에는 성공하였으나 전편만은 못했다. 그것은 이미 80년도에 기동전사 건담이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극장판이 개봉되는 등 아니메의 환경이 급변한 현실을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싶다. (이 극장판의 개봉 한달 전인 7월부터 건담의 두번째 극장판이 개봉되고 있었다.) 그러나, 높은 완성도와 작품자체가 갖고 있는 명성으로 인해 건담의 후폭풍 속에서도 선전을 펼쳤으며, 이듬해인 3월에 개봉된 '천년여왕(1982)'에서도 여전히 녹슬지 않은 명성을 보였던 레이지버스는 같은 해 7월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호(1982)'의 흥행참패로 한동안 극장가에서 그 모습을 보이지 못하게 된다.

90년대 들어 다시 은하철도 999 이야기가 재개되지만 시간 상으로는 이 극장판이 가장 나중의 일을 다루고 있기에 현재까지는 은하철도 999의 결말을 다룬 작품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은하철도 999 이터널 판타지 (1998)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정보>

◈ 원작/총설정: 마츠모토 레이지
◈ 감독: 우다 코노스케
◈ 각본: 타케가미 쥰키
◈ 캐릭터 디자인/작화감독: 카가미 타카히로
◈ 미술감독: 유키 신조
◈ 음악/노래: 타나카 고헤이 / ALFEE
◈ 제작사: 도에이 동화
◈ 저작권: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 일자: 1998.03.07
◈ 장르: SF, 드라마, 모험
◈ 구분/등급: 극장판 / 초등생 이상 관람가 (PG)


<소개>

두번째 극장판인 '안녕, 은하철도 999' 이후 무려 17년만에 등장한 은하철도 999의 후속편. 시간상으로는 안드로메다에 도착한 철이가 메텔과 헤어진 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두번째 극장판과 같은 시간대의 이야기이지만, 이 이터널 판타지는 TV 시리즈의 엔딩을 이어간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캐릭터 디자인도 극장판이 아니라 TV 시리즈의 그것과 동일하다.

극장판이지만 한 시간 정도의 분량으로 제작하여 몇 부작으로 개봉할 요량이었던 것 같다. 다만 문제는 흥행에 있었는데, 제작사인 도에이 동화의 기대치보다 훨씬 못미치는 저조한 흥행성적으로 인해 이 작품은 더 이상의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1부로 제작이 종결되고 만다. 이후, 도에이 동화는 한 때 자신들의 대표적 타이틀이기도 한 레이지버스의 제작에서 손을 떼게 되고(추측이지만, 까질한 레이지 옹이 도에이와 결별을 선언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후 레이지버스는 도에이 동화의 손을 떠나 다른 안식처를 찾게 된다.


메텔 레전드 (2000), メーテルレジェンド / Maetel Legend


ⓒ MATSUMOTO LEIJI · TSUBURAYA Creative · ART Collection House · AVEX

<정보>

◈ 원작/총설정/감수: 마츠모토 레이지
◈ 감독: 요코다 카즈요시
◈ 각본: 카미오 무키
◈ 캐릭터 디자인/작화감독: 시마즈 이쿠오
◈ 메카닉 디자인: 이타바시 카츠미
◈ 미술감독: 阿部泰三郎
◈ 음악: 아마노 마사미치
◈ 제작사: 베가 엔터테인먼트, 츠부라야 영상
◈ 저작권: ⓒ MATSUMOTO LEIJI · TSUBURAYA Creative · ART Collection House · AVEX
◈ 일자: 2000.X.X
◈ 장르: SF, 드라마, 모험
◈ 구분/등급: OVA (2화) / 초등생 이상 관람가 (PG)


<소개>

이터널 판타지의 흥행참패로 한동안 주춤했던 은하철도 999의 부활 프로젝트는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다시 불이 붙기 시작했다. 레이지버스의 세계관의 중심에 있는 은하철도와 메텔의 이야기, 그 중에서도 메텔의 과거는 설정상에 많은 오류를 갖고 있었고, 레이지는 새로이 시작된 은하철도 부활 프로젝트를 통해 바로 이 레이지버스의 오류를 바로잡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새로이 시작된 은하철도의 이야기가 바로 메텔의 어린 시절을 다룬 메텔 레전드이다.

이 작품은 이제까지 은하철도 999의 주소재라 할 수 있는 은하철도와 주인공 철이를 배제하고 메텔과 에메랄다스를 주인공으로 한 프리퀄 형태의 작품이다. 이로 인해 타이틀 자체도 메텔 레전드로 붙여지게 된다. 메텔과 그녀의 언니인 에메랄다스가 아직 어린 나이일 때 어머니인 프로메슘과 함께 라메텔에서의 생활을 다룬 이 작품은 말 그대로 그녀의 어머니인 프로메슘이 어찌하여 기계인간이 되었고, 메텔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지를 다루는 이야기라 하겠다. 특히, 에메랄다스를 메텔의 언니로, 프로메슘이 바로 천년여왕이라는 파격적인 설정을 선보이게 된다. 이것은 이전 시리즈에서의 설정을 레이지 스스로 뒤엎은 결과로, 이전 시리즈에서 천년여왕과 메텔은 프로메슘의 딸이며, 에메랄다스는 메텔과 친구 관계였었다.

천년여왕의 원 성우인 한 케이코가 프로메슘 역을 담당하는 등, 올드팬들에게는 반가운 점도 있지만, 비주얼 등에서는 이질감이 느껴지는데다가 유려한 선이 사라진 투박한 터치로, 작품 외적으로도 아쉬운 점이 눈에 띈 작품이다.


은하철도 이야기 (2003), 銀河鉄道物語 / Galaxy Railways


ⓒ 松本零士/プラネット・銀河鉄道管理局

<정보>

◈ 원작/총설정/디자인: 마츠모토 레이지
◈ 감독: 니시모토 유키 (1기)
    토미나가 츠네오 (2기)
    오오바 히데아키 (OVA)
◈ 각본: 소노다 히데키 (1기)
    야마다 야스노리 (2기) / 
    하세가와 나호코 外 (OVA)
◈ 캐릭터 디자인: 키자키 후미노리, 타케다
    이츠코 (1기) / 칸노 아키라 (2기)
    치바 미치노리 外 (OVA)
◈ 메카닉 디자인: 와타나베 코지 (1기) /
    미네기시 타츠미 外 (2기) /
    이시노 사토시 外 (OVA)
◈ 미술감독: 우미노 요시미 (1기, 2기) /
    水谷利治 (OVA)
◈ 음악: 아오키 노조무
◈ 기획/제작: 콘 히로시
◈ 제작사: BS FUJI, 은하철도 관리국 (1기) /
    CBC, 은하철도 이야기 프로젝트 (2기) /
    COMMON WEALTH Entertainment (OVA)
◈ 저작권: ⓒ 松本零士/プラネット・銀河鉄道管理局 (1기) / ⓒ 松本零士/銀河鉄道物語プロジェクト (2기)
◈ 일자: 2003.10.04 (1기) / 2006.10.04 (2기) / 2007.01.24 (OVA)
◈ 장르: SF, 드라마, 모험
◈ 구분/등급: TVA & OVA / 초등생 이상 관람가 (PG)


<소개>

마츠모토 레이지의 만화가 데뷔 50주년 기념으로 만들어진 작품. 이번에는 은하철도 999의 메인 소재인 은하철도와 그 시스템을 가져오되 중심인물인 철이와 메텔 등을 모두 제외시키고 새로운 인물들의 이야기로 꾸려가는 스핀 오프 형태의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메텔과 철이를 제외하면서 오히려 구태의연한 이야기가 아닌 신선한 등장인물들에 의한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인 점은 원 시리즈와는 별개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1기는 26화까지 방영되었으며, 3년 뒤인 2006년에 다시 26화 분량의 2기가 방영되었다. 이듬해인 2007년에는 총 4화의 OVA로 발매되기도 했다.


우주교향시 메텔 (2004), 宇宙交響詩メーテル / Space Sympony Maetel


ⓒ MATSUMOTO LEIJI · SHOGAKAN · TSUBURAYA Entertainment

<정보>

◈ 원작/총설정/감수: 마츠모토 레이지
◈ 감독: 마사키 신이치
◈ 시리즈 구성/각본: 카미오 무기
◈ 캐릭터 디자인: 마스나가 케이스케
◈ 메카닉 디자인: 이타바시 카츠미, 타무라 카츠유키
◈ 음악: 하카세 타로
◈ 기획/제작: 콘 히로시
◈ 제작사: 츠부라야 엔터테인먼트, 조이 스퀘어, AVEX
◈ 저작권: ⓒ MATSUMOTO LEIJI · SHOGAKAN · TSUBURAYA Entertainment 
◈ 일자: 2004.08.06
◈ 장르: SF, 드라마, 모험
◈ 구분/등급: TVA (13화) / 초등생 이상 관람가 (PG)


<소개>

OVA '메텔 레전드'의 속편격인 작품. 메텔 레전드가 어떻게 하여 프로메슘이 기계인간이 되었는지를 다루었다면, 이번 편에서는 프로메슘이 서서히 인간성을 잃고 사악한 기계인간으로 변하는 과정과, 메텔이 은하철도 999를 타게 되는 이유, 그리고 철이를 데려오게 되는 이유 등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그동안 까메오로만 줄곧 얼굴을 내밀던 하록과 토치로, 그리고 메텔의 언니로 그 비중의 훌쩍 커진 에메랄다스 등이 등장하여 그들의 과거의 인연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흥미롭다 하겠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하록은 애꾸눈이 아니라든지 천년여왕 방영시 이미 죽음을 맞이한 천년여왕의 어머니 라레라의 등장이라든지 여러 부분에서 또다른 설정상의 오류를 만들어내고 있다.

해설을 맡은 나이 든 메텔 역을 메텔의 원년 성우인 이케다 마사코가 맡은 것은 팬들에게 있어서는 또다른 매력일 듯 싶다. 애잔한 선율과 함께 레이지버스의 캐릭터들이 총출동하는 드라마틱한 오프닝 영상은 추억과 현재를 이어주는 묘한 감동을 선사하지 않았나 싶다.


<참고 사이트>

[1] 銀河鉄道999, Wikipedia Japan
[2] 銀河鉄道999_(アニメ), Wikipedia Japan
[3] メーテルレジェンド, Wikipedia Japan
[4] 銀河鉄道物語, Wikipedia Japan
[5] 宇宙交響詩メーテル 銀河鉄道999外伝, Wikipedia Japa
[6] 은하철도 999, 위키피디아
[7] 은하철도 999(銀河鉄道999) 1979 1981 by 캅셀, CAPSULE 블로그: 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8] 은하철도 999 - 유리의 클레어(銀河鉄道999 ガラスのクレア) 1980 by 캅셀, CAPSULE 블로그: 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9] 은하철도 999, 엔하위키 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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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 출연작
  - 은하철도 999 (1978, TV): 니시자와 노부타카(감독) /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은하철도 999 (1979, Movie): 린 타로(감독) /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은하철도 999, 유리의 클레어 (1980, Movie): 니시자와 노부타카(감독) /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안녕, 은하철도 999 (1981, Movie): 린 타로(감독) /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은하철도 999, Eternal Fantasy (1998, Movie): 우다 코노스케(감독)
  - 메텔 레전드 (2000, OVA): 요코다 카즈요시(감독)
  - 우주교향시 메텔 (2004, TV): 마사키 신이치(감독)
 
이 외에 78년 TV 시리즈 중 일부 에피소드를 편집하여 재구성한 스페셜 시리즈가 4편이 있다. 또한 그녀는 TV 에피소드 '시간성' 편과 두 편의 극장판에 우정출연(?)했던 하록선장을 위해 1999년작 '하록사가'에 잠시 출연하기도 한다. 그리고, 2006년 작 '은하철도 이야기: 잊혀진 시간의 혹성' 편에서는 비중있는 조연으로 등장하면서 그녀 또한 하록에 이어 카메오 출연에 맛을 들이게 된다, 으흠.
 
 
사나이의 우주를 사로잡은 신비로운 금발의 여인
 
일전에 '애니메이션 인물열전: 캡틴 하록... 벗이여 별바다로 떠나자'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7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스타일의 장대한 스페이스 어드벤쳐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를 선보이며, 일약 1세대 아니메 붐을 일으킨 마츠모토 레이지(물론, 야마토 성공의 일등공신은 프로듀서이자 야마토의 원안을 기획한 니시자키 요시노부가 더 유력하다고 볼 수 있지만)는 연이어 '우주해적 캡틴 하록'을 통해 마츠모토 식 SF를 팬들에게 선보이며 후에 '레이지버스(Leijiverse)'라 불리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마츠모토 레이지(이하 마츠모토로 표기)는 이 두 시리즈 이외에도 슈퍼로봇 장르에 자신만의 SF 드라마를 접목시킨 '혹성로봇 당가드 에이스(1977)'과 서유기의 세계관을 SF 어드벤쳐에 접목시킨 'SF 서유기 스타징가(1978)' 등을 연이어 선보였는데, 비록 이 두 시리즈는 레이지버스의 세계관에 속하는 것이 아닌 TV 시리즈를 위해 별도로 제작된 오리지널 에피소드였지만, 당시 마츠모토 레이지 스타일의 이야기와 캐릭터가 하나의 거대한 트렌드로 굳어져 가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츠모토의 최고의 전성기는 어쩌면 지금부터 말하려는 이 작품과 이 작품에 등장했던 한 여인으로 인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선굵은 사나이들의 꿈과 우정이 담긴 비장함이 메인 테마로 자리잡고 있던 마츠모토식 이야기의 반환점이며, 동시에 자유와 꿈을 노래하던 모험 이야기에서 휴먼 드라마와 현실의 풍자를 담은 좀 더 깊은 이야기로의 진화를 예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질병과 악조건 속에 인간의 몸을 기계의 몸으로 바꾸어 불로불사의 삶을 살아가는 미래의 지구. 기계의 몸을 가진 부유한(그렇지만 이제는 더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인간들이 기계의 몸을 갖지 못한 가난한(하지만 진짜 살아있는) 인간들을 핍박하며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극단으로 치달은 세상에서 살고 있던 소년 테츠로(한국방영 명칭 철이)는 기계 인간들에게 목숨을 잃은 어머니의 소망을 위해, 그리고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우연하게 만난 신비의 여인 메텔과 함께 은하철도 999를 타고 몸을 기계로 바꿀 수 있는 머나먼 별 '라메탈'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 속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갈등, 이별과 화해 속에서 소년은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며,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년을 이끌어 주던 신비의 여인은 여행의 종착점에서 기약없는 안녕을 고하며 떠나게 됩니다. 소년은 이제 어른으로서 홀로 미래를 헤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마츠모토식 휴머니즘에서 좀 더 진일보하여 비뚤어진 사회를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고 스스로가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 속에 진정한 삶의 의미, 인간다움에 대한 것을 깨우치는 TV 시리즈 '은하철도 999'는 관념적이고 이상적이었던 마츠모토의 이전 작품에 비하여 현실적인 소재가 투영된 인간 드라마를 선보이며 매회 색다른 감동을 선사합니다. 작품 내내 테츠로의 원 목표였던 '기계 인간이 되어 어머니의 못다한 삶까지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는 명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만화영화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성숙한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 구조를 보여줬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소년의 성장을 한 여인이 조용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지켜봐주고 이끌어 주면서 각 화마다의 엔딩은 지극히 평온한 모습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 여인은 한 번도 소년에게 강요하거나 지시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항상 스스로가 깨우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며, 특유의 포근함으로 소년을 감싸줍니다. 사나이의 무뚝뚝함과 강인함, 비장함이 작품 전체를 지배했던 마츠모토의 세계는 이 메텔이라는 여인에 의해 잔잔하고 부드럽게 변모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오히려 팬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라는 옛말처럼 메텔의 부드러움과 여성스러움은 장대한 우주를 그녀의 무대로 바꿔버릴 만큼 조용하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흡입력을 가진 블랙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츠모토 선생이 순정만화까지 섭렵할 정도로 작품 세계의 폭이 넓기에 가능했던 일 일수도 있겠습니다만.) 

마츠모토 특유의 가냘프고 고전적인 캐릭터 묘사로 표현된 그녀의 외모 또한 이러한 성격과 맞물려 큰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되는데, 이미 '우주해적 캡틴 하록'를 통해 마츠모토의 캐릭터를 훌륭하게 애니메이션화했던 작화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가 이 작품에서도 신비한 여인의 이미지를 숨막힐 정도로 멋지게 만화영화에 이식하면서 절정의 여성미를 보여주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어떤 여성 캐릭터보다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그러나 어둡고 슬픈 금발의 여인이 만화영화 전반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 잘 벗기도 합니다, 이 아가씨는. 그렇습니다, 소년들에게는 얼씨구나~였던 것입니다.) 

바야흐로 모든 소년들은 그녀를 연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정체불명의 신비로운 미녀, 항상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어머니 같으면서도 누나같이 친밀한 존재. 메텔은 모든 소년들의 로망이었고 선망이었으며, TV 시리즈 마지막 화에서 보여준 테츠로와의 이별은 이 작품을 시청해온 소년들에게도 큰 슬픔을 안겨주게 됩니다. 그렇게 그녀는 테츠로 뿐만 아니라 모든 소년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정처없는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 Matsumoto Leiji / 1978 Toei Animation

그림 1. TV 시리즈 '은하철도 999'의 스틸 및 엔딩 컷.


식을 줄 모르는 논란, 신비스러움에 가리워진 그녀의 진짜 정체는

(캡틴 하록을 성공적으로 연출했던) 린 타로 감독이 연출한 극장판 '은하철도 999'는 TV 시리즈에 이어 다시 한 번 대성공을 거두었고, 메텔은 예의 그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으로 이번에도 팬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여기서 린 타로는 하록 TV 시리즈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츠모토의 세계관을 다시 한 번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하게 되는데, 테츠로의 나이를 TV 시리즈의 10대 초반에서 10대 중반으로 바꾸어 사춘기의 방황의 끝에서 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는 소년의 모습을 좀 더 현실감 있게 그려 나갔으며, 하록을 위시한 레이지버스의 단골들을 이 작품에 특별 출연시켜 레이지버스와의 연관성을 공고하게 만드는 등, 자신의 스타일로 999와 메텔을 그려갔던 것입니다. 

감독의 재해석은 팬들의 큰 호응으로 이어졌습니다. TV 시리즈를 기본으로 만들어진 지금까지의 극장판 만화영화들이 모두 총집편 내지는 일부 에피소드 편집본의 형태에 그쳤던 것에 비해 별도의 독자적인 형태(TV 시리즈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이 시작되었고, TV 시리즈 방영 중 극장판이 공개. [2] 참조)로 진행되었던 극장판의 성공은 후속편의 제작으로 자연스레 이어졌고, 결국 2년 뒤 '안녕, 은하철도 999: 안드로메다 종착역(1981)'이 개봉되어 연타석 홈런을 날립니다. 특히, 이 후속편은 직전 극장판의 다음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아쉬운 이별을 고했던 메텔이 다시금 테츠로와 재회하고, '라메탈'과 어머니 프로메슘, 그리고 테츠로의 숨겨진 과거와의 진정한 결말을 내는 그야말로 999 세계관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 됩니다.

특히 999의 연속적인 성공에는 탄탄한 원작의 스토리와 캐릭터, 스탭진들의 노고가 담긴 작품의 완성도와 같은 요인 외에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요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영원한 히로인 메텔의 진정한 정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는 이미 TV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몸이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다름을 몇 차례 암시해 왔었으며,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그녀의 본 모습은 마치 신비스럽지만, 결코 드러내지 않은 미녀의 눈부신 나신과도 같이 소년 팬들에게는 끊임없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소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궁금증의 대상 역시 다름아닌 그녀의 그 '몸'이었던 것이구요.)

© Matsumoto Leiji / 1979 Toei Animation

그림 2. 극장판 '은하철도 999'의 스틸 컷.

메텔이 과연 인간인지 기계인지, 아니면 인간도 기계도 아닌 어떤 괴기스러운 모습의 생명체인지(혹은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대한 논의는 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아직까지도 진위가 밝혀지지 않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원작자인 마츠모토 선생의 어떠한 언급도 없는 이상 메텔의 정체는 영원한 우주 저끝처럼 신비에 묻힌 설정으로 남을 겁니다. 사실, 추측컨데 마츠모토 선생조차 그녀의 정체에 대한 구체적인 설정은 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다만, 그녀의 정체를 보았던 시리즈의 등장 인물들의 충격에 휩싸인 모습(평생 글만 쓰며 여성을 돌처럼 알고 지낸 대문호가 메텔의 아름다움에 홀려 그녀를 취하려 하다가 본 모습을 보자 강렬한 충격에 휩싸여 다시금 글에 정진한다든지, 기계 몸을 강매하는 불법업자가 메텔의 진짜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든지 하는 장면. [5] 참조)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메텔의 정체를 지속적으로 궁금해 하며 다음 편을 기대하게 하는 마츠모토식 관객 유도 장치였던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팬들에게 먹혀든 것입니다.

그녀의 정체만큼이나 또 하나의 논란거리로 이어져 온 것은 바로 999에 이어 방송된 TV 시리즈 '천년여왕'과의 관계였습니다. 1999년 9월 9일 9시 9분 9초에 지구와 충돌하는 행성 '라메탈'은 열차 999의 종착지이자 여왕 프로메슘이 지배하고 있던 999 세계관의 행성 '라메탈'과 같은 이름이었고, 긴 금발을 휘날리는 천년여왕 유키노 야요이는 마치 메텔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길고 그윽한 메텔의 눈매와는 달리 동그랗고 큰 유키노의 눈은 젊은 시절의 메텔을 묘사한 듯 보이기도 했지요.) '라메탈'의 충돌위협에서 지구를 지키기 위해 분전했던 천년여왕은 결국 오랜 세월이 흘러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어머니 프로메슘에 의해 불로불사의 어떤 것으로 몸이 바뀌었고, 이후 프로메슘의 명령에 따라 테츠로라 생각되는 소년들을 끊임없이 라메탈로 데려와 기계인간으로 만드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당시 팬들의 추측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고, 팬들 사이에서는 천년여왕과 메텔이 동일인이냐 아니냐를 놓고 끊임없는 논쟁이 오고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82년 '천년여왕'의 극장판 개봉에 맞추어 마츠모토 선생이 비로소 공개한 설정에서 유키노 야요이는 메텔이 아니며, 유키노 야요이와 메텔 모두 프로메슘의 딸([4] 참조)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메텔과 천년여왕과의 관계는 일단락이 됩니다만, 같은 레이지버스의 캡틴 하록 세계관에서 비롯된 여러가지 설정 상의 미스매치와 함께 999와 천년여왕과의 나머지 관계 및 밝혀지지 않은 각종 미스테리들은 오랜동안 레이지버스의 뜨거운 감자로 남게 됩니다.

© 1981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그림 3. 극장판 '안녕, 은하철도 999'의 스틸 컷.


돌아온 그녀, 젊은 시절을 이야기하다
 
80년대 초반을 넘기면서 레이지버스는 팬들의 관심을 잃고 먼 동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과거를 그리워하고 꿈과 자유를 동경하는 마츠모토식 복고주의와 낭만주의(거기에 보수적인 민족주의까지)는 80년대의 리얼리즘과 신세대의 사고방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스스로 과거로 남기를 자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 아득한 우주로 정처없는 여행을 떠났던 메텔 역시 그녀를 동경하고 사랑했던 수많은 소년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버린 청춘의 환영이 되어버리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의 새로운 바람 속에서 이전 것들을 다시금 부활시키고자 하는 지속적인 복고주의 열풍은 레이지버스라는 전설적인 세계와 인물들을 그냥 둘리가 만무했습니다. 1시간짜리 극장판인 98년작 '은하철도 999: 이터널 판타지'는 TV 시리즈에서 헤어졌던 테츠로와 메텔과의 재회(린 타로 감독의 극장판에서 보여준 테츠로와 메텔의 이별과 재회, 그리고 또다른 이별의 이야기와는 별개로)로 시작하여, 다시금 그녀와의 새로운 여행의 시작을 알립니다. 그 고풍스러운 증기기관차 형태의 999만큼이나 오래된 명작은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신세대 팬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며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메텔과 테츠로의 20여년만의 재회와 여행은 몇 부작으로 기획될 이 반가운 이야기의 시작점부터 처참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작품 자체의 네임 밸류에 비해 연륜이 짧은 스탭진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생겼다고 추측되는 완성도의 문제는 올드 팬들에게는 (일부를 제외하고는)그다지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듯 싶고, 이미 너무 구시대적인 마츠모토의 낭만적인 이야기와 가치관은 신시대가 받아들이기에는 노인의 옛 이야기인냥 지루했던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올드 팬과 신세대 팬 모두에게 외면을 받으며 이터널 판타지는 일회성 판타지로 끝나고 맙니다. 그리고, 그것은 후속 레이지버스의 등장에도 큰 영향을 미칠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터널 판타지의 제작을 맡았던 도에이 동화의 포기에도 불구하고 레이지버스의 작품들은 속속 다른 제작사들에 의해 제작되기 시작합니다. 같은 해에 '화성여단 다나사이트 999.9'(실제로는 이 작품이 98년도에 가장 먼저 제작된 레이지버스 작품)와 '퀸 에메랄다스'를 시작으로 이듬해 '하록사가'까지 등장하며 레이지버스의 전설들이 봉인에서 해방되면서 메텔의 재복귀에 힘을 실어주자, 2000년 그녀는 '메텔 레전드'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메텔 레전드는 여러 의미에 있어서 메텔과 그녀의 팬들에게는 색다른 것이었는데, 그것은 먼저 더이상 999에 몸을 싣고 테츠로의 성장을 지켜보는 숙녀 메텔이 아닌, '라메탈'에서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내는 소녀 메텔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제작진은 이제까지 결코 떼어낼 수 없을 것 같았던 999와 테츠로를 메텔에게서 과감히 떼어 버리고 오히려 그녀의 수많은 논란거리이자 베일에 쌓였던 과거를 공개함으로써 새로운 시점으로 메텔을 바라보는 시도를 합니다. 999와 테츠로를 대신할 자리에는 메텔의 어머니이자 천년여왕이었던 프로메슘, 그리고 그녀의 쌍둥이 언니인 에메랄다스로 바꾸어 극을 이끌어 갑니다. 이 놀라운 설정은 또다른 논란거리를 야기하는데, 이미 82년 마츠모토 자신이 밝힌 레이지버스의 인물관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메텔과 에메랄다스의 자매 설정(이전에는 친우로 표시, [4] 참조)이나, 유키노 야요이가 또다른 프로메슘의 딸이었다는 설정을 뒤집고 프로메슘 자신이라는 설정으로 과감히 바꿔버리는 등, 오랜 시절 레이지버스를 보면서 자라온 올드 팬들에게는 그동안의 설정을 모두 뒤엎어 버리는 당황스러운 전개였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흥미거리를 제공했다고 볼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러나, 메텔 뿐만이 아니라 그녀만큼이나 신비로움을 가진 레이지버스의 히로인 천년여왕과 어린 시절의 에메랄다스(어릴 때조차  해골모양의 핀을 머리에 꽂고 있는 것을 보고 실소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해적 덕후'였나 봅니다.)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올드 팬들에게 있어서는 꽤나 반가운 일임에는 분명했던 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2004년 '우주교향시 메텔'로 이어져 메텔의 성장과정을 다루게 됩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결국 그녀의 몸에 얽힌 진짜 미스테리는 여기서도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 2000 Leiji Matsumoto / Tsurubaya Creative / Art Collection House / Avex

그림 4. 메텔 레전드 스틸 컷.


그녀는 소년 시절의 연인, 청춘의 환상

그녀는 이제는 올드 팬이 되어버린 30~40대 아저씨들의 소년 시절을 빛나게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어떤 만화의 여성 캐릭터도 그녀 이상의 아우라를 가지지 못했습니다.(개인적인 편차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 중에서 결코 논외가 될 수가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일 겁니다.) 심지어 현실 속의 여배우나 가수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던 그녀. 오히려 만화 캐릭터였기에 그 정도의 신비로움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녀는 소년들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고 때로는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지켜주었으며, 어려운 인생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올바른 해답을 찾도록 옆에서 조용히 조언해주는 우주의 등대와도 같은 여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올드 팬들의 청춘 속에 머무르는 환상이었습니다. 소년들에게 있어서 연상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심어주었고, 동시에 금발의 백인 미녀에 대한 쓸데 없는 환상을 심어주기도 했으며, 비정상적으로 마른 몸을 추구하는 현대의 여성들의 다이어트 취향을 십수년이 넘게 먼저 선도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정말 소년시절의 모든 남성들이 바라마지 않는 완벽한 연인이었던 것입니다.

테츠로와 메텔, 즉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동양 소년과 늘씬한 금발의 미녀라는 인물구도는 ('천년여왕'의 유키노 야요이와 하지메, '퀸 에메랄다스'의 에메랄다스와 토치로 등 마츠모토의 대부분의 캐릭터 설정처럼) '연상의 여인에 대한 소년의 동경' 이외에도 '작고 왜소한 동양의 남성과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늘씬한 금발의 백인 미녀'라는 전형적인 구도를 보여주며, 개인적으로는 마츠모토 선생이 갖고 있던 보수적 남성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또다른 표현인 듯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숨겨진 의미(동양 남성의 우월함을 보여주고 싶은 마츠모토식 남성미의 어필. 물론 확증은 없지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가 소년들에게 있어서 긍정적인 측면, 즉 어른으로서 성장하는 소년을 이끌어주고 보살펴주는 따뜻한 여인의 모습이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을겁니다.

정말로 그녀는 어린 시절 흠모했던 환상의 여인이었고, 이제는 더이상 그녀를 봐도 어떠한 떨림도 갖지 않는 어른이 되어버린 아저씨들의 청춘의 환상일 겁니다.

© 2004 Leiji Matsumoto / Shogakan / Joy Square / Avex

그림 5. 우주교향시 메텔 오프닝 스틸 컷.


<참고 포스트>
 
[1] Galaxy Express 999, Wikipedia
[2] 은하철도 999 1979 1981 by 캅셀, Capsule☺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3] 은하철도 999 - 유리의 클레어 1980 by 캅셀, Capsule☺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4] 남겨진 메텔의 비밀 by 캅셀, Capsule☺블로그
[5] 은하철도 999와 메텔의 비밀 by 캅셀, Capsule☺블로그
[6] 은하철도 999 ~ 이터널 판타지 by 슈케르
[7] 은하철도 이야기 ~ 잊혀진 시간의 혹성 by 슈케르
[8] 은하철도 999 - 이터널 판타지 by 키웰, Kewell's Factory about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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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알라딘 이주의 TTB 리뷰 2010년 6월 1주차에 선정된 리뷰이며, 프레스블로그 2010년 07월 MP 명예의 전당에서는 발라당 미끄러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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