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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徳間書店 / ⓒ 학산문화사 (한국어판)


<스탭>

◈ 글/그림: 미야자키 하야오
◈ 편집/발간: 도쿠마 서점
◈ 한국어판 편집/발간: (주) 학산문화사


<시놉시스>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서 발생한 산업문명은 수백년 동안 전세계로 퍼져, 거대 산업사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대지의 비옥함을 앗아가고 공기를 더럽히며 생명체마저 마음대로 바꾸어 버리는 거대 산업문명은 1,000년 후에 절정기에 이르렀다가 이윽고 급격한 쇠퇴를 맞게 되었다. '불의 7일간'이라 불리는 전쟁의 의해 도시는 유독물질을 뿌리며 붕괴했고, 복잡하고 고도화한 기술체계는 소실되었으며 지표의 대부분은 불모의 땅으로 변해버렸다. 그 후 산업문명은 재건되지 않았고, 인류는 영원한 황혼의 시대를 살아가게 되었다. (코믹스의 프롤로그 인용)


12년 동안의 연재 끝에 완성된 거대한 대하 SF 판타지

레콤 애니메이션에서 퇴사하면서 애니메이터가 아닌 전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82년에 연재를 시작하여 94년까지 무려 12년의 세월이 걸려 완성한 역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코믹스)는 그야말로 미야자키 월드의 시발점과 종착점을 동시에 보여준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과도한 기술문명에 대한 혐오감과 자연에 대한 경외감,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극을 이끌어가는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광활한 하늘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유럽적인 생활상과 아날로그적인 맛이 흠뻑 느껴지는 스팀펑크 적인 메카닉까지 실로 이제까지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보아왔던 여러가지 주제와 상징, 그리고 스타일이 살아있는 작품인 것입니다.

애초에 애니메이션에 대한 고려 없이 연재되던 나우시카는, 토쿠마 서점이 발간하는 아니메 잡지 '아니메쥬'의 편집장 오쿠다 히데오의 권유로 인해 애니메이션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때 나우시카의 연재는 체 2권이 완료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부득이 하게 애니메이션은 나우시카의 초반부의 스토리를 갖고 미야자키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맞게 각색을 하는데요. 초반부의 프롤로그만을 가지고 훌륭한 기승전결을 만들어 낸 미야자키의 각색은 나무랄데 없이 훌륭했습니다만, 그로 인해 나우시카의 보다더 깊은 이야기와 메시지는 오히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지 않았나 합니다.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1984) (보러가기)

나우시카 이후로 미야자키는 지브리의 창립멤버가 되어 숱한 명작 아니메들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요. 이러한 창작의 강행군 속에서 자연스레 나우시카 코믹스에 할애할 시간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나우시카는 7권이라는 비교적 짧은 이야기를 완결시키는데 있어서 무려 12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되고 맙니다. 그러나, 12년이라는 세월동안 숙성된 나우시카의 이야기는 깊은 풍미를 가진 맛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습니다. 그 깊이와 스케일은 만화영화의 그것을 뛰어넘고 있으며, 지면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마력 또한 미야자키의 아니메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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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를 위협하는 곰팡이 숲 부해와 오무에 얽힌 충격적인 진실

믹스의 이야기는 만화영화와는 좀 다르게 전개됩니다. 사실 코믹스는 동쪽의 대국 토르메키아 왕국과 서쪽의 대국 도르크 제후국과의 거대한 전면전이 작품의 주된 갈등 구조 중 하나인데요. 이 거대한 이야기축이 작품에서 거세되면서 나우시카는 토르메키아 왕국과 변방의 소국 페지테의 갈등 구조로 축소됩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오무의 새끼를 페지테의 군인들이 납치하여 오무들의 분노를 유발, 이를 이용해 토르메키아 군을 모두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는데요, 이것 역시 원작에서는 도르크 제후국이 꾸민 사건으로,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면서 각색된 설정이라 하겠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토르메키아의 군대를 강한 카리스마와 지략으로 이끄는 크샤나의 활약은 이로 인해 상당부분 극에서 축소됩니다. 실제 원작에서 크샤나의 역할은 이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요. 나우시카가 선지자의 현인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이 또한 바람계곡의 점쟁이 노파가 아닌, 도르크 제후국의 고승입니다. 페지테의 아스벨은 부해 제일의 검사 유파와 동행하지만 애니메이션처럼 모든 사건이 일단락 된 후 같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닌, 도르크 제후국으로 떠난 나우시카를 찾는 과정에서 우연히 합류하게 되지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곰팡이 숲 부해를 둘러싼 숨겨진 진실은 아니메에서는 그야말로 맛만 보여주었다 하겠습니다. 실제로 부해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 그리고 오무와 곤충들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지에 얽힌 이야기들은 나우시카의 메인 테마이자 거대한 미스테리로서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요. 이러한 것이 상당부분 축소되면서 단순한 스토리텔링에 그쳤던 아니메와는 달리, 코믹스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충격적인 진실과 방대한 역사를 지닌 뒤엉킨 진실의 실타래를 나우시카가 그 여정 속에서 풀어가면서 독자에게 만화영화를 뛰어넘는 긴장과 몰입감을 선사하게 됩니다. 즉, 이야기는 토르메키아와 도르크간의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이 고대의 기술들을 전쟁에 사용하기 시작하고, 부해의 진실과 오무의 예언을 따라 세계를 구원하는 여행을 떠난 나우시카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려, 대하 서사극과 모험극이 어우러진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7권 밖에 안되는 짧은 길이임에도 불구하고 나우시카의 여정은 생각보다 장대합니다. 권당 130여 페이지 밖에 안되지만 정보량은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 같은 느낌이네요. 여기에 투박한 펜터치에 의해 한 씬 한 씬을 파악하는 것은 예상 외로 오래 걸립니다. 사실 작화에 있어서 나우시카는 뛰어나다고 하기에는 좀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모자란 것은 아닙니다만, 감독, 각본, 콘티, 디자인 등 다방면에 걸쳐서 걸출한 재주를 보여주었던 미야자키의 네임밸류에 비하면 기대만큼은 아닌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장면구성이나 컷 전환은 훌륭하며, 작화 역시 엄밀히 말하면 힘을 빼고 편안히 그린 듯한 느낌이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뛰어난 스토리텔링에 의해 기대치보다 떨어지는 작화에도 불구하고 흡입력은 굉장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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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스러우면서도 미야자키스럽지 않은 무거운 스토리 텔링

우시카 코믹스는 미야자키의 모든 세계관과 주제의식, 스타일이 녹아든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의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어두운 편입니다. 으례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지는 평화롭고 한가한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이 작품에서는 초반부 외에는 묘사되지 않고 있죠. 특히, 나우시카가 오무의 메시지를 쫓아 도르크 제후국으로 여행을 떠난 이후에는 피냄새가 진동하는 전장과 도르크의 신성황제가 일으키는 광기의 질주, 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인간들의 절규가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마치 묵시록의 이야기처럼 나우시카 월드는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표현 수위에 있어서도 그동안 아니메로 보아왔던 미야자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수준입니다. '원령공주(1997)'에서 미야자키는 잠시 그동안 보여주었던 말랑말랑한 아니메와는 달리 비교적 잔혹하고 파격적인 표현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요. 나우시카 코믹스는 원령공주보다 더 과격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전쟁의 참상과 인류 멸망의 전조를 이야기하는 이 작품이 기존의 작품처럼 말랑말랑 하다면 설득력이 떨어지겠죠. 이런 면에서 나우시카 코믹스는 그동안 애니메이션에서 절제되어왔던 미야자키의 또다른 표현 욕구(?)를 맘껏 펼쳐낸 작품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일찌기 나우시카의 아니메를 향해 미야자키 하야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메의 거장 오시이 마모루는 군국주의적인 냄새가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매우 냉소적인 견해를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엘로스는 과연 아니메 어디에서 이런 흔적이 드러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아래의 링크를 보면 이러한 오시이 마모루의 지적이 일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삐딱하게 보기 by 성은애, 근대 영문학과 분과 게시판 (보러가기)

여기에서 언급한, 핵무기라는 인류 스스로가 만들어낸 최고의 위협을 직접 경험한 일본인들의 트라우마나, 붉게 빛나는 동그란 눈동자로 맹진하는 오무 무리들이 욱일승천기를 앞에 든체 맹진하는 제국주의적 향수를 느끼게 하는 점, 압도적인 오무의 돌진을 온몸으로 막아낸 나우시카의 카미카제에 대한 무의식적인 오마쥬, 그리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토르메키아 왕국(미국)과 이에 대해 바람(카제)을 신(카미)처럼 받아들이는 바람계곡 부족민(일본)과 같은 일부 비유는 미야자키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심결에 표현된 형태라고 할까요. 그리고, 이것을 꼬집은 오시이 감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는지 나우시카의 이야기는 이후 전혀 다른 형태로 흘러갑니다. 코믹스의 토르메키아 군은 미군처럼 바람계곡을 짓밟지 않고, 나우시카 역시 자신을 희생하여 오무의 진군을 막지는 않습니다. 

코믹스의 나우시카는 오히려 쟌다르크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나우시카의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묵시록의 세계에 한줄기 광명을 가져오는 종교적 구원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성과 인간성으로 인해 판단을 내리는 나우시카의 모습에서는 성녀보다는 오히려 영웅적인 면모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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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시카의 뒷 이야기는 만화영화 될 수 있을까.

대하고 드라마틱한 나우시카의 뒷 이야기는 이것이 만화영화로 만들어졌을 때의 감동을 상상하게끔 합니다. 과연 나우시카의 뒷 이야기를 우리는 움직이는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을까요. 과거 나우시카의 속편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번 논의되어 왔고, 실제 나우시카 아니메의 원화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던 에반게리온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는 나우시카에 등장했던 토르메키아의 황녀 크샤나의 이야기를 다룬 나우시카 외전을 연출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 모두 미야자키의 거부로 인해 진행되지는 않았는데요. 97년에 연출한 원령공주를 통해 미야자키는 나우시카의 속편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어느 정도 담아내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현재 지브리는 '붉은 돼지(1992)'의 속편을 준비 중이라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올해 일흔 하나인 미야자키의 연령을 고려하면 갈수록 나우시카 속편을 미야자키가 연출한 확률은 줄어들고 있다는 소리인데요. 개인적으로는 나우시카 속편이 미야자키 생전에 제작되지 않는다해도 미야자키의 사후 지브리에서 어떤 형태로든 속편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예상해보기도 합니다. 그만큼 나우시카는 미야자키의 모든 것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방대한 나우시카의 이야기를 감안하면, 어설픈 각색과 축약보다는 오히려 원작의 내용에 충실한 몇부작 형태의 이야기는 어떨까 싶습니다. 문제는 미야자키만큼 나우시카를 잘 영상화할 수 있는 감독의 선임이겠죠. 미야자키 월드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는 작품 나우시카, 코믹스에서만 접하기에 그 이야기는 너무 거대하고 매력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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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徳間書店 / ⓒ 학산문화사 (한국어판)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이달의 TTB 리뷰 2011년 2월차에 선정된 글입니다. (클릭)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박스판 - 전7권 - 10점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학산문화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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