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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트는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의 '애니메이션 인물열전: 우주해적 캡틴하록... 벗이여 별바다로 떠나자'를 티스토리로 옮긴 글입니다.


<프로필>
 
◈ 주요 출연작
   - 우주해적 캡틴하록 (TV, 1978):  린 타로(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우주해적 캡틴하록: 아르카디아호의 비밀 (Movie, 1978):  린 타로(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Movie, 1982):  카츠마타 토모하루(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무한궤도 SSX (TV, 1982):  카츠마타 토모하루(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하록사가, 니벨룽겐의 반지~라인의 황금~ (OVA, 1999):  타케우치 요시오(감독),  모토하시 히데유키(작화감독)
   - 건 프론티어 (TV, 2002):  젠 소이치로(감독),  시마즈 이쿠오(작화감독)
   - 우주해적 캡틴하록, Endless Odyssey (OVA, 2003):  린 타로(감독),  유키 노부테루(작화감독)
 
◈ 카메오/조연급 출연작
   - 은하철도 999 (TV, 1978) 시간성 편
   - 은하철도 999 (Movie, 1979) 
   - 안녕, 은하철도 999 (Movie, 1981) 
   - 퀸 에메랄다스 (OVA, 1998) 
   - 코스모 워리어 제로 (TV, 2001)  
   - 우주교향시 메텔 (OVA, 2004) 
 
☞ 글쓴이 주 #1: 캡틴 하록을 포함한 레이지버스의 작품을 감상하실 때의 주의점

'천년여왕 - 우주전함 야마토 - 은하철도999 - 캡틴 하록 - 퀸 에메랄다스'로 대표된는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들은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야마토의 경우는 예외라고 해도 될 듯)이지만 각 작품 간의 정합성은 항상 조금씩 어긋나 있고, 등장인물들의 상관관계도 이전작과 다르거나 다소 혼란스러운 경우도 있다. 이것은 애초부터 그(각 작품 간의 연관성)에 대해 원작자가 세세하고 면밀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도 있지만, 그의 작품을 연출했던 린 타로 감독이나 다른 연출 및 각본 스탭들의 독자적인 해석과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토치로의 딸 마유는 린 타로가 TV판에 등장시키고 후에 레이지가 이를 인정하고 자신의 원작에 등장시킨다. [2]참조)에 의해 생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후일 마츠모토 레이지 선생이 자신의 세계관을 일부 변경(예를 들면, 천년여왕과 메텔이 동일인인 듯 묘사했다가 나중에는 메텔을 그녀의 딸로 설정했다든지, 메텔과 에메랄다스를 라이벌처럼 표현했다가 후일 자매로 설정했다든지 하는 부분)함으로써 이전 작품과의 스토리적 정합성에서 더더욱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 개별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기에 레이지버스의 작품 모두를 동일한 시간축에 놓고 앞뒤가 꼭 맞게 배치하려는 불가능한 노력만 자재한다면 감상에는 무리가 없다.
 
결국, 각 작품을 모두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스핀 오프의 작품(실제로 '건 프론티어'의 경우는 완전히 스핀오프를 표방한다고 할 수 있다.) 정도로 보면 어떨까 싶으며, 82년 TV 시리즈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무한궤도 SSX(이하 무한궤도 SSX)' 이후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레이지버스의 작품들이 99년부터 다시 제작되면서 마츠모토 레이지 선생이 세계관을 나름대로 깔끔히 정리하신 듯 싶으니 굳이 말끔히 정리된 세계관을 원한다면 그의 최신작에 묘사된 세계관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듯. (예를 들면, 우주교향시 메텔 같은 작품.) 
 
☞ 글쓴이 주 #2: 레이지버스란?

레이지 + 유니버스의 합성어로 마츠모토 레이지가 창안해낸 세계관과 그 세계관을 차용한 작품들을 통털어 일컫는 말. 보통 '우주전함 야마토', '우주해적 캡틴 하록', '은하철도 999', '천년 여왕' 정도를 지칭하며, 원작만화가 아니라 TV 방영을 위해 기획된 'SF 서유기 스타징가'나 '혹성로봇 당가도 에이스'와 같이 마츠모토 레이지가 원작으로 참여한 오리지널 아니메의 경우는 이 레이지버스의 세계관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프롤로그 - 별바다의 태동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일본은 자괴감과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일례로, 일본에 주둔한 미군들 중 일부가 (구시대의 많은 점령군이 그러했듯) 점령지의 여인들을 욕보이는 사건이 속출했지만, 패배감에 젖은 일본의 남자들은 그런 미군의 행패를 그냥 조용히 눈감고 지켜볼 뿐 누구 하나도 용기있게 나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화는 그즈음 일본에서 최고의 무술 고수가 되기 위해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던 젊은 시절의 최배달(최영의) 선생이 이런 미군들의 행패를 좌시하지 못하고 몇 차례에 걸쳐 미군들을 혼내주자 양식있는 몇몇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미군에게 받았던 모욕적인 처사를 능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조선의) 이 젊은 무술인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고 합니다. (고우영 화백의 '바람의 파이터' 참조)


시대가 흘러, 패전의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일본인들이었지만,(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다시 일어서게 된 원동력 중의 하나가 한 때 자신들이 침략했던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이었고) 여전히 그들 마음 한켠에는 아직도 패배주의가 사라지지 않은 체 트라우마처럼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런 자신들의 과거를 미래의 아이들에게는 물려주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것 중의 하나가 애니메이션 사업이었습니다. 인기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와 영화사로 명성을 쌓고 있던 도에이를 필두로 시작된 일본의 만화영화는 눈부신 성장을 시작했고, 미국과는 다른 새롭고 경제적인 제작기법과 참신한 소재들을 바탕으로 서서히 일본의 아이들에게 꿈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해내게 됩니다.


60년대의 아니메 성장기를 거치면서 자라난 아이들이 청소년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만화영화, 즉 아니메는 중대한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아니메를 보며 자라난 아이들을 계속 수요층으로 자리잡게 할 좀 더 고연령대를 위한 작품이 필요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제 아니메는 더이상 아이들만의 것이 아닌 일본인들을 위한 하나의 대중 영상매체로 성장하기 위한 저변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그것'이 등장한 것입니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이 건조한 세계 최대(最大)의 전함이었던 야마토를 모델로 하여, 환경위기에 봉착한 지구를 구원하기 위해 우주 저편의 환경 정화장치를 가져오는 임무를 맡고 출발한 우주전함 야마토와 승무원들의 스페이스 어드벤쳐를 다룬 마츠모토 레이지 원작의 '그것', '우주전함 야마토(74년작, 한국 방영제목 날으는 전함 V호)'는 지금까지의 아니메를 한단계 상회하는 과학적 고증과 짜임새 있는 휴먼 드라마, 그리고 우주 전함 간의 장대하고 스펙타클한 전투장면을 그려내며, 일약 1세대 아니메 붐을 일으키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됩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일본 아니메 종사자들이 최고로 치고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우주전함 야마토'의 성공은 단순히 아니메의 레벨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이 부끄러워하던 과거의 소재를 과감히 채용하여 새시대를 열어가는 소재로 사용함으로써 잠재되어 있던 일본인들의 패배의식을 자긍심으로 바꾸고, 신세대 젊은이들에게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일종의 사이코 드라마로서의 역할을 해냈던 것입니다. 비로소 아니메가 어린이를 넘어 어른들까지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대충매체로서의 도약의 기회가 되었고, 이 새로운 아니메 붐은 바로 마츠모토 레이지라는 일개 만화가를 일류 만화가의 반열에 올려놓기 시작합니다.


© Matsumoto Leiji & Nishizaki Yoshinobu

우주전함 야마토 극장판 포스터. 레이지버스의 시초가 된 작품.



캡틴 하록, 사나이의 로망을 싣고 별바다를 모험하다


'우주전함 야마토'의 대성공 이후, 마츠모토 레이지(편의상 별도의 존칭없이 마츠모토로 표기하겠습니다.)는 도에이의 간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도에이가 이끌어 오던 로봇 아니메의 주도권이 그들의 손을 떠나 선라이즈로 넘어가기 시작한 70년대 후반, 마츠모토의 장대한 스페이스 어드벤쳐는 도에이의 또다른 대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죠. 그리고 78년, 드디어 레이지버스의 세계의 한축을 지탱하는 한 사나이가 과묵한 걸음걸이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야마토와는 또다른 사나이들의 로망을 실은 우주 전함 아르카디아호와 함께 온 사나이의 이름은 캡틴 하록이었습니다.


78년 TV 시리즈 '우주해적 캡틴하록'은 스토리 텔링에 있어서는 '우주전함 야마토'에 비해 상대적으로 허술합니다. '지구를 침략한 마존에 맞서 자유를 위해 홀로 싸우는 우주해적'이라는 시놉시스는 지구의 오염된 환경을 구하기 위해 장대한 우주여행을 떠나는 야마토의 그것에 비교해 메시지나 신선도에 있어서도 별반 나을 점이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주에서의 모험과 항모들간의 장렬한 전투라는 야마토의 소재에 캡틴 하록이라는 강렬한 캐릭터가 가세한 후속 아류작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과묵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사나이의 마초적인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하록의 강렬한 카리스마는 원작의 깊이와는 관계없이 마츠모토 스타일의 로망을 시청자에게 강하게 인식시키게 됩니다. 어떠한 위험과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강인한 정신력, 그것은 과거 패전 이후 자격지심에 짓눌려 있던 일본인들의 모습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었으며, 동시에 강인한 사무라이 정신을 다시 일깨우고 싶은 민족주의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우주인 침략자 앞에서도 제 밥그릇 찾기에 바빴던 한심하고 무능한 지구의 정부와 군은 과거의 부정적인 일본(또는 일본의 기성세대)에 대한 마츠모토의 우회적인 비판이었으며, 동시에 그들과는 달리 자유와 꿈을 위해 홀로 악전고투하는 하록과 아르카디아호의 승무원들은 마츠모토의 바람이 담긴 미래의 일본상이자 일본의 젊은이의 나아갈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불행하게도, 한국과 같은 나라에게 있어서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본 제국주의의 편린과도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하록 선장은 기실 원작자인 마츠모토가 탄생시킬 당시만 하더라도 대중적인 공감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습니다만(아무래도 당시 마츠모토 선생은 야마토 쪽에 좀더 비중을 두었던 듯 싶군요.), 이를 린 타로 감독이 맡아 연출하게 되면서 원작의 캐릭터를 린 타로 스타일로 재해석하여 기대 이상의 호응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78년 TV 시리즈에 등장한 하록의 친우 토치로의 딸 마야의 경우가 바로 이런 린 타로 식 재해석의 산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투쟁과 방랑에 길들여진 거친 해적의 이미지에 친우의 딸을 보살피고 지켜주는 따뜻한 어른의 모습을 오버랩시켜 하록을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움을 갖춘 멋진 사나이로 묘사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본편의 작화감독을 맡은 코마츠바라 카즈오는 특유의 신들린 듯한 솜씨로 호리호리하지만 강한 정신력을 가진 원작의 하록과 나긋나긋하면서도 가냘픈 마츠모토 특유의 여성 캐릭터들, 땅딸막하고 보잘 것 없지만 각자의 개성과 실력을 겸비한 아르카디아호의 승무원들을 멋지게 재구성하여 시각적 공감대를 가져다 줍니다. (특히, 마츠모토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작고 못생긴 주변 인물들은 얼핏 보기에도 동양인, 아니 일본인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싶으며 이것 역시 마츠모토식 민족주의의 발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 멋진 환상의 콤비가 이후 은하철도 999로 이어지는 마츠모토 원작 만화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 감은 주지의 사실이기도 합니다.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첫번째 TV 시리즈 우주해적 캡틴하록의 오프닝 스틸 컷.


 

풍랑 속에 길을 잃은 해적, 별바다에 잠들고

TV 시리즈의 방영 이후, 극장판(우주해적 캡틴 하록: 아르카디아호의 비밀, 1978년작)으로 제작되며 '은하철도 999'와 함께 당당히 레이지버스의 한축으로 야마토를 이어가기 시작한 하록. 뒤이은 마츠모토의 초 히트작 '은하철도 999' TV 시리즈의 에피소드 '시간성' 편과,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 시리즈 2편에 모두 카메오 또는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명실공히 마츠모토의 페르소나로 팬들에게 깊게 각인되기 시작합니다.

마츠모토가 그렸던 성장하는 주인공으로서의 모습이 '캡틴 하록'의 다이바, '은하철도 999'의 테츠로, '천년여왕'의 하지메로 그 모습을 바꾸어 형상화 되었다면, 이 하록은 이미 완성된 캐릭터로서 성장하는 청소년들을 지켜보고 도움을 주는 든든한 후원자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하록은 이처럼 다른 작품에 등장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작품에서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팬들에게 심어주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마치, 크게 히트한 이후 출연을 자제하며, CF나 뮤직 비디오에만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는 스타들처럼 말입니다.)


그로부터 4년 후, 하록은 드디어 카츠마타 토모하루 감독(마징가 Z, 그레이트 마징가, 우주전함 야마토:사랑의전사 연출)이 원톱 감독으로 나선 새로운 극장판에 등장하게 됩니다. 하록의 젊은 시절, 즉 애꾸눈이 되기 이전의 모습부터 토치로, 에메랄다스와 같은 그의 절친한 동료들을 만나게 되는 하록의 최초의 여정을 다룬 극장판 '나의 청춘 아르카디아호(1982)'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막을 연 이 작품은 기대에 못미치는 흥행 결과로 레이지버스 작품들의 흥행가도에 큰 제동을 걸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이 20여년 가까이 만화영화화 되지 못하는 (극장판의 후일담을 다룬 '무한궤도 SSX' 외에는 20여년 동안 만화영화화 되지 않음) 단초를 제공하는 오명을 갖게 되지요. 82년 당시 흥행수입 6억 5천만엔은 대성공은 아니더라도 대참패라고는 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같은 해 개봉했던 극장판 '1000년 여왕'의 흥행수입이 10억엔 정도로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랭킹 92위에 들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이는 나름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정가도를 달리고 있던 마츠모토 원작이라는 네임밸류는 이미 그 정도의 수익은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기대치를 갖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82년도 극장판 나의 청춘 아르카디아호의 스틸 컷.

 

추측하기로는 81년부터 82년을 거쳐 전 일본적인 관심을 몰고 온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 3부작'의 열풍이 아동층에 한정되어 있던 로봇 장르를 성인층과 마니아층까지 본격적으로 확장시키면서 낭만적이고 신파적인 마츠모토식 SF에서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와 드라마로 가득찬 토미노식 리얼 SF의 세계로 팬들의 관심이 쏠린 것도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교적 진부해진 레이지버스의 SF 설정도 그렇지만, 이미 그 드라마적인 전개에 있어서도 마츠모토식 로망스, 즉 선굵은 남성들의 꿈을 향한 낭만적이고 비장한 이야기가 불과 몇 년을 기점으로 낡은 구시대식의 사고방식으로 전락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요.


게다가, 이 극장판은 작품 내내 비장미, 사나이의 기개, 정복당한 지구인들의 참상에 대한 우울한 묘사에 치우친 체 하록과 토치로들의 본격적인 활약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지는, TV 시리즈의 프롤로그적 성격이 강한 모습을 보여주어, 극장을 찾았던 많은 관객들에게 긴 시간 동안 우울함과 지루함을 선사해주었을 듯 합니다. 게다가 클라이막스 또한 그다지 상쾌한 결말이 되지 못했구요. 하록의 첫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의의 외에는 너무 무겁고 지리했던 이 작품의 분위기가 바로 가장 큰 실패의 요인이 아닐까 싶군요.  

또한, 일루미다스 군에게 점령당한 지구인들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미군에게 패배한 일본을 비유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한국인으로서는 그런 설정이 마치 일본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구한말의 모습과도 겹쳐지며, 또 이러한 모습을 일본의 만화영화가 묘사하면서 강한 거부감이 느껴진 것 역시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일본 관객들이 한국인인 제가 느낀 감정을 가졌을 리는 만무하지만, 경제대국인 된 일본에게 있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오래 전의 이야기는 이제 고리타분하거나 관심 밖의 소재는 아니었을까요.


여러가지 악재로 인해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둔 하록은 같은 해, TV 시리즈 '무한궤도 SSX'를 통해 극장판 이후의 본격적인 하록들의 첫 모험을 다룹니다. 그러나, 린 타로 감독이 이전 시리즈에서 시도했던 설정들은 이 작품에 이르러 틀어지기 시작하는데, 토치로와 에메랄다스가 극장판에서 첫 만남을 갖은 이후, 이 시리즈를 통해서 절친한 동료로 발전하고 연인의 감정을 쌓아가는 순간 토치로를 사망시킴으로써, 이전 린 타로의 TV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토치로와 에메랄다스의 딸 마야의 출생(연인이 되기 전 사망한 토치로가 에메랄다스 사이에서 마야를 낳을 시간적 여유가 없음)에 대한 오류가 발생했고, 극장판부터 함수에 거대한 해골문양을 새겨넣었던 아르카디아호는 수십년 뒤 다시 만들어진 하록 시리즈에서도 여전히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최초의 TV 시리즈에 등장했던 해골문양의 함수가 없는 아르카디아호(일설에는 이 최초의 아르카디아호는 데쓰 쉐도우 호이고, 이후의 것이 아르카디아 호로 구분된다고 합니다만)의 존재를 무색하게 하는 등, 이전 시리즈와의 많은 설정상의 마찰을 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이 작품이 만들어 낸 문제라기보다는 레이지버스의 작품들이 여러 감독의 손을 거치면서 각 시리즈의 이야기 전개를 위한 나름의 설정을 만들어 내면서 원작과의 절충을 위한 과정을 거치는 중, 이전 시리즈의 고려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것이 고의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간에) 발생한 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겠지만, 이후 수많은 팬들에게 있어서 설정의 진위 여부로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하면서 작품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레이지버스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팬들에게 의해 재해석되고 재해부되며 여러가지 가십거리를 낳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두번째 TV 시리즈 '무한궤도 SSX'의 오프닝 스틸 컷.



해적, 과거에서 부활하여 신세기를 항해하다


이후, 수십년동안 레이지버스는 만화영화 팬들의 뇌리에서 거짓말처럼 잊혀져 버렸습니다. 저 90년대 초반의 리메이크 붐 당시에도 레이지버스는 그 어떤 재탄생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1세대 아니메의 붐을 일으켰던, 아니메 시대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전설의 작품(물론, 하록은 야마토나 은하철도 999에 비해서 그 의의가 비교적 약했지만)은 철저히 신세대에게 외면받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1998년, 레이지버스의 최초의 태동을 이야기하는 '화성여단 다나사이트 999.9'가 OVA로 등장하면서 레이지버스는 오랜동안의 봉인을 풀고 신세기로의 항해를 위한 엔진 예열에 들어갑니다. 연이어 '은하철도 999 ~ 이터널 판타지'와 '퀸 에메랄다스'가 우주로의 항해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 '퀸 에메랄다스'에서 하록은 오랜만에 카메오로 출연하며 20년만의 스크린 복귀로 팬들에게 짧은 인사를 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하록의 등장씬은 말 그대로 짧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99년, 하록은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북구 전설 '니벨룽겐의 반지'를 토대로 한 유명한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을 모티브로 한 OVA '하록 사가, 니벨룽겐의 반지~라인의 황금~(이하 하록 사가)'은, 레이지버스의 유명인사들인 하록의 영원한 벗 토치로, 토치로의 연인이자 하록의 오랜 동료인 여해적 에메랄다스, 그리고 신비의 여인 메텔 등이 모두 등장하는 가슴 뛰는 도입부와 함께 새로운 하록 전설의 시작을 알리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인간으로서는 대적할 수 없는 하록의 압도적인 강함 때문이었는지 신과 대적하는 해적이라는 거창한 판타지적 이야기 전개(물론, 모티브가 된 이야기가 북구전설이었던 것도 원인이겠지만)를 선보이면서 이전의 하록 선장과는 달리 허무맹랑하고 관념적인 이야기를 선보입니다. 거기에 6부작이라는 짧은 OVA의 편수에 비해 그 전개가 너무 늘어지면서 스케일은 굉장히 크게 시작하여 결말 자체는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실망스러운 이야기의 완성도를 보여줬던 것입니다.


결국, 이 작품은 아쉽게도 새로운 작화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하록과 레이지버스의 인물들, 그리고 장중한 오페라와의 접목이라는 의의 외에는 재미 뿐만 아니라 완성도에 있어서도 많은 아쉬움을 준 작품이 되고 맙니다. 이미 오랜 시절 구축되어온 지나치리만치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이미지는 몇 마디의 대사와 함께 가끔 역동적으로 아르카디아호의 키를 조종하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과묵하게 서있기만 하는 도를 넘치는 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느린 전개와 맞물려 스케일만 큰 지리한 클래식 오페라처럼 인식시키고 맙니다. 하록의 모습은 기존의 이미지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작품의 재미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배우의 자세를 잊어버린 왕년의 톱클래스 탤런트와 같은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맞이하여 레이지버스는 본격적인 시동을 겁니다. '코스모 워리어 제로(2001)'를 통해 새롭게 시동을 건 레이지버스의 스페이스 어드벤쳐에서 하록은 주인공에게 쫓기는 우주 해적이라는 비중있는 조연으로 등장했고, '건 프론티어(2002)'에서는 뜬금없이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혀 선보이지 않았던 썰렁한 개그까지 말이죠.) 20년만에 복귀하여 옛 이미지 그대로 연기했다가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자 연기 변신을 시도한 톱 탤런트의 모습과 같다고 할까요. 전설로 회자되던 한 남자의 복귀는 그렇게 순탄치는 않았던 것입니다.

©1999 Leiji Matsumoto • Shinchousha/Bandai Visual • 81produce

99년작 '하록사가'의 스틸 컷.



벗이여 언젠가 또 별바다로 떠나자, 해적의 깃발 아래서...


신세기에 들어 미소녀에 대한 편향된 작품의 제작 스타일, 그리고 오래가는 작품보다는 패스트푸드처럼 금방 소비가 가능한 소재가 트렌드가 되어가면서 레이지버스의 작품들은 요즘의 기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70년대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가 그 이미지에 너무나 많이 녹아 들어있는, 비장하고 진지한 하록의 모습은 그가 갖고 있는 고전적인 남성미와 더불어 구시대의 대표적인 상징처럼 여겨지는군요.


2003년 린 타로 감독이 다시 연출한 '우주해적 캡틴하록: 끝이 없는 오딧세이'는 하록의 내면을 심도있게 다루어 보려한 린 타로 감독의 의지가 엿보인 작품이었습니다만, 덕분에 작품은 한층 더 무거워졌고, 게다가 '하록사가'에 이어 다시 한 번 초자연적인 존재와 아르카디아호와의 대결을 묘사하면서 지루한 이야기 전개를 피해가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일루미다스나 마존과 같은 실존하는 적과의 스펙타클한 스페이스 액션을 소재로 했다면 좀 더 좋은 반응을 얻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노장의 연출력은 여전히 빛났고, 과거 코마츠바라 카즈오에 버금가는 유키 노부테루의 캐릭터 디자인은 전작의 명성에 버금갈 정도였지만, 아쉽게도 이미 시대는 옛 해적의 이야기에 환호하기에는 너무 많은 다른 것들에 익숙해져 버린 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는 21세기에 리메이크된 여타 하록 시리즈에 비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주인공은 바뀝니다. 전설적인 해적의 귀항은 비록 기대에는 못미쳤지만, 그동안 그가 항해해온 수많은 별바다의 항해기록이 모두 헛되었던 것이 아니듯 이 여정 역시 그의 전설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의 항해는 우리의 추억과 맞닿아있기에 여전히 동경의 대상이고, 저 옛날 별바다를 함께 항해했던 동반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의 여정에는 제국주의의, 일본의 국수주의의 냄새가 나 가끔을 멀미가 나는 부분도 있었지만, 거대한 그의 분신 아르카디아호와 별바다를 향한 그의 항해에는 여전히 우리의 지난 시절과 추억이 흩날리는 해적의 깃발처럼 그의 옆에 영원히 놓여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그는 별바다를 향한 기나긴 여정에 오를 겁니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면서.
 

© LEIJI MATSUMOTO/Kobunsha • VAP • NTV ©2002 VAP • NTV

2003년작 '우주해적 캡틴하록: 끝없는 오딧세이'의 스틸 컷.



<참고 포스트>

 

[1] Captain Harlock, Wikipedia

[2] 우주해적 캡틴 하록 by 만보, Habest Days

[3] 우주해적 캡틴 하록 1978 by 캅셀, Capsule☺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4]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1982 by 캅셀, Capsule☺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5] 캡틴 하록 TV 시리즈 by 슈케르

[6]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by 슈케르

[7] 무한궤도 SSX by 슈케르

[8] 하록사가: 니벨룽겐의 반지 ~ 라인의 황금 by 슈케르

[9] 우주해적 캡틴 하록 - Endless Odyssey Outside Legend by Kewell, Kewell's Factory about Some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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