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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 (1978), 宝島 / Treasure Island


ⓒ TMS


<정보>

◈ 원작: 로버트 L 스티븐슨
◈ 감독: 데자키 오사무
◈ 연출: 타케우치 요시오, 타카야시키 히데오
◈ 각본: 야마자키 하루야, 시노자키 요시미
◈ 콘티: 사키마쿠라, 紺屋行男, 今切洗
◈ 캐릭터 디자인/작화감독: 스기노 아키오
◈ 미술감독: 고바야시 시치로
◈ 오프닝 애니메이션: 오오하시 마나부
◈ 음악/노래: 하네다 켄타로 / 마치다 요시토 (주제가)
◈ 기획: 吉川斌
◈ 제작사: 도쿄무비신사, 니혼 TV, 매드하우스 (협력)
◈ 저작권: ⓒ TMS
◈ 일자: 1978.10.08
◈ 장르: 모험, 액션
◈ 구분/등급: TVA (26화) / 전연령가 (G)


<시놉시스>

영국의 작은 해변마을 블랙힐의 애드머럴(제독) 벤보우 여관을 엄마와 함께 꾸려가고 있는 씩씩하고 용감한 13살의 소년 짐 홉킨스.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날 밤, 빌리 본즈라는 선원이 여관에 투숙한다. 그가 투숙하고 얼마 안있어서 검은 개라 불리는 사나이가 빌리 본즈를 쫓아 여관을 찾아온다. 격투 중에 검은 개는 도망가고 빌리는 그만 쇼크로 쓰러지고 만다. 짐에게 자신의 옷상자 열쇠를 맡기는 빌리. 그 속에는 빌리가 말한 중요한 서류가 있었다. 외다리에게서 그 서류를 지켜달라며 숨을 거두는 빌리.

짐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마을의 지주 트릴로니와 의사 리브시 선생에게 서류를 보여준다. 이들은 이것이 전설적인 해적 플린트가 숨겨놓은 보물이 있는 섬을 가리키는 지도임을 알게 된다. 트릴로니는 바로 보물섬으로 떠날 채비를 갖추게 되고, 짐 역시 이 흥분되는 모험에 동참하게 된다. 떠나기전 서류 하나를 망원경 주점의 외다리 주인에게 전하라는 심부름을 받게 된 짐. 빌리가 두려워 한 인물이 외다리라는 것을 알고 있던 짐은 그 외다리와 망원경 주점의 외다리가 동일인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마침내 외다리를 만나게 된 짐. 사나이의 이름은 실버, 존 실버였다.


<소개>

로버트 L 스티븐슨이 어린이 잡지에 연재했던 어린이용 해양모험 소설을 '내일의 죠(1970)', '에이스를 노려라(1973)'의 스타일리쉬 연출가 데자키 오사무가 TV 시리즈로 제작한 작품. 데자키 오사무의 스승인 테즈카 오사무도 65년 스티븐슨의 원작을 바탕으로 의인화된 만화영화 '신 보물섬(1965)'을 연출한 적이 있으니 스승과 제자의 손을 모두 거친 작품이라 하겠다. 물론, 두 작품 간의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하모니 기법이라 불리는 동화에서 순간적으로 정지된 일러스트 컷으로 장면을 전환시키는 극적인 기법과, 감각적인 화면분활, 영상반복, 투과광 기법 등으로 아니메 연출가 중 가장 스타일리쉬한 연출기법을 선보였던 영상 아티스트 데자키 오사무는 연출 뿐만 아니라 스토리 텔링에 있어서도 원작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닌 항상 그만의 독특한 재해석으로 유명한데, 특히 그 재해석이 원작과는 또다른 재미와 매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실로 비주얼과 스토리 모두에서 탑 클래스의 거장이라 할 수 있다.(개인적으로는 만화영화 감독 중에서 가장 처음 좋아하게 된 인물도 데자키 오사무 되시겠다.) 이 보물섬 역시 바로 이 데자키 오사무식 재해석이 가미되어 원작 이상으로 바다의 로망을 잘 살린 명작 만화영화라 할 수 있다.

원작에서는 단순한 악역이었던 외다리 선원 실버에게 악역 이상의 설정과 매력을 부여함으로써 내일의 죠의 죠나 베르사이유 장미의 오스칼 등과 함께 데자키 오사무의 필모그라피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캐릭터이자 페르소나로 승화시키게 된다. 비록 주인공과 대적하게 되는 해적이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과 강인함, 그리고 사나이 다운 그의 매력은 짐 뿐만 아니라 TV를 시청하는 모든 소년들이 동경하는 남자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 실버는 비슷한 시기에 방영했던 마츠모토 레이지의 '우주해적 캡틴 하록(1978)'의 캡틴 하록과 함께 소년들이 동경하는 이상적인 어른 남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당대의 작품들과 다른 방향을 보여주게 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짐 홉킨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어른들일 정도로 작품의 주시청층인 아이들 또래의 캐릭터 비중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멋진 이야기가 일품인 작품이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대의 만화영화 중에서는 캡틴 하록을 제외하고는 보기 힘든 이례적인 설정이었다. 비록 어린이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이런 이야기 구조는 기존의 어린이용 만화영화에 비해서는 상당히 성숙한 극화적 느낌을 주는 것으로 유럽적인 비주얼과 함께 이국적이고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겠다. 

오프닝 영상은 후일 '로봇 카니발(1987)'의 에피소드 연출로 알려진 오오하시 마나부가 맡았는데, 명작 오프닝 애니메이션 중 하나로 평론가들이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2] 참조) 동화적인 색감과 연출, 거기에 명작곡가로 이름 높은 하네다 켄타로의 데뷔곡 '보물섬'이 어우러진 영상미는 지금 보아도 항해를 떠나기전의 두근거림이 느껴지는 멋진 영상이 아닐까 싶다. 한국판 오프닝은 지금에 와서는 다른 만화영화 주제가에 비하여 레어한 물건이 되긴 했지만, 역시 소년들이 꿈꾸는 모험의 로망이 살아 있는 곡으로 기억되고 있다. (기억하기로는 일본판 오프닝의 번안곡이 아닌 독자적인 곡으로 기억된다. 생각나는 가사를 읊어보면 '가자, 가자. 꿈에 본 섬으로~ 바람 타고 물결 넘어 바다로 가아자~...' 정도 된다.) 

라스트 엔딩은 만화영화 사상 잊혀지지 않는 명장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 건장한 뱃사람이 된 짐 홉킨스가 우연히 아프리카의 어느 항구에서 늙어버린 실버를 만나는 장면은, 사나이를 동경하던 소년이 어느새 사나이 만큼의 나이가 되어 늙고 병약한 자신의 우상을 만나는 실로 극적인 엔딩을 보여주고 있다. 감격스런 상봉 속에 말없이 팔씨름으로 모든 것을 주고 받은 둘. 떠나는 실버를 향한 짐 홉킨스의 마지막 한마디는 이 작품이 실버의, 실버에 의한, 실버를 위한 작품임을 다시금 우리에게 되새겨 준다.

있었다구, 역시... 나의, 나의 실버가!

ⓒ TMS



백경전설 (1997), 白鯨伝説 / Hakugei: Legend of the Moby Dick


ⓒ Tezuka Production

<정보>

◈ 원작: 데자키 오사무, 스기노 아키오 
◈ 감독: 데자키 오사무
◈ 각본: 데자키 오사무, 우에다 코지 外
◈ 캐릭터 디자인/작화감독: 타카야 히로토시, 사토 마사키
◈ 미술감독: 코노 지로
◈ 음악/노래: 안도 마사히로, 이즈미 히로타카 / 오치아이 히로히토 (주제가)
◈ 기획/제작: 마츠타니 타카유키
◈ 제작사: 테즈카 프로덕션, 이미지케이, 소니뮤직
◈ 저작권: ⓒ Tezuka Production
◈ 일자: 1997
◈ 장르: SF, 모험, 액션
◈ 구분/등급: TVA (26화) / 전연령가 (G)

<소개>

'디어 브라더(1991)'로 '스페이스 코브라(1982)' 이후 8년 만에 성공적으로 TV 시리즈 아니메로 복귀한 데자키 오사무가 6년만에 내놓은 두번째 복귀 TV 시리즈. 그의 필모그라피에서 가장 큰 위치를 차지하는 캐릭터 중 하나인 실버 선장의 캐릭터를 모티브 삼아 H 멜빌의 소설 '백경'의 이야기를 SF 어드벤쳐에 접목시킨 작품이다. 그의 단짝이자 멘토라 할 수 있는 스기노 아키오가 작화감독으로 참여하지 않은 관계로 캐릭터 디자인과 비주얼은 이전의 데자키 감독의 작품과 비교하면 이질적이라 할 수 있지만, 압도적인 퀄리티로 인해 TV 시리즈를 능가하는 비주얼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제작여건에 있었는데, 방송사인 NHK와의 마찰과 높은 퀄리티의 비주얼을 유지하기 위해 총집편과 재방영으로 에피소드 중간중간을 채우면서([1] 참조) 방영기간이 늘어지게 되었고, 결국 26화로 원래의 이야기에 비해 조기종영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이후 데자키 감독은 또다시 TV 시리즈의 연출에서 한동안 손을 떼게 되었고, 8년여만인 2005년에 이르러서야 '눈의 여왕(2005)'으로 다시금 TV 시리즈에 복귀하게 된다.


<참고 사이트>

[1] 宝島, Wikipedia Japan
[2] 보물섬(宝島) 1987 by 캅셀, CAPSULE 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3] 白鯨伝説, Wikipedia Japan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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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986년작 '천공의 성 라퓨타(1986)'는 아시다시피 너무도 유명한 미야자키 감독의 대표작으로서, '미래소년 코난(1978)'이나 '루팡 3세-칼리오스토로 성(1979)'과 같은 작품에서 보여진 유쾌한 미야자키식 어드벤쳐와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이 가져다 주는 힘과 권력에 대한 인간들의 삐뚤어진 집착, 그리고 하늘을 향한 미야자키의 동경심을 스팀펑크 스타일의 색체로 풀어낸, 가히 미야자키식 엔터테인먼트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연령가의 작품치고는 후반부에 등장한 무차별 살상장면 등이 약간 씁쓸한 뒷맛을 안겨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진가를 깎아내릴 만큼은 아니기도 하구요.

특히 이 라퓨타에 등장하는 스팀펑크 스타일의 비행정 타이거 모스(Tiger Moth; 한국어로 표현하면 호랑나방 정도?)는 미래소년 코난부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관통하는 미야자키식 메카닉 디자인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타이거 모스에 탑승하여 모험과 약탈(?)을 즐기는 도라 일당의 모습은 또다른 미야자키식 로망의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증기기관과 같은 구식 동력원을 내장한 스팀펑크풍의 기계구조, 과거의 비행선을 모티브로 삼은 고풍스러운 외양... 그러나, 타이거 모스의 진정한 매력은 그 겉모습보다는 고정된 장소에 본거지를 두지 않고 비행선 자체를 거점으로 하여 하늘에서 생활하는 공적(하늘의 도적; 바다의 도적인 해적과 산의 도적인 산적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보시면 되겠네요)들의 삶의 방식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 Nibakiri · Tokuma Shoten


설거지거리와 빨래더미, 거기에 매번 고장 수리까지... 막상 이런 생활과 맞닥뜨린다면 매력적이기 보다는 고단한 나날의 연속이겠지만, 스크린 앞에서는 한없이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여행자의 삶이 시원한 하늘의 정경과 어우러져 지극히 인간적인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것일까요. 모험의 무대가 되는 광활한 하늘과 지친 하루 일과를 끝내고 갑판 위에서 떠다니는 구름과 지는 저녁 노을을 보는 고즈넉함은 분명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과 시청자들에게는 한없는 로망을 안겨줍니다. 

자, 이렇게 타이거 모스의 로망을 오랜만에 보고 있자니 로망이 넘치는 공적들의 삶이 비단 이곳 라퓨타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하늘의 로망, 공적들의 흔적을 찾아보는 여행을 한 번 떠나볼까 합니다. 아차, 여름 휴가를 다녀온지가 얼마 안됐는데, 또 여행을 떠나는군요. 그럼 일은 언제 하라고?
 
☞ '하늘의 로망과 디테일한 생활의 묘사가 돋보이는 미야자키 감독의 스타일'과 유사한 작품들을 이야기하는 글인지라 이러한 미야자키 감독만의 작품 세계를 본 포스팅에서는 '미야자키 스타일'로 줄여서 총칭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망의 시작 - 바다를 품고 우주를 꿈꾸며 마침내 하늘을 날다

© TMS

쾌한 하늘에의 모험은 만화영화에서는 하늘이 그 출발점은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스티븐슨의 원작 '보물섬'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보물섬(1978)'에서는 히스파니올라호에 올라타 보물섬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소년 짐 홉킨스와, 오랫동안 소년들의 가슴 속에 남을 카리스마 외다리 사나이 실버 선장의 낭만적인 바다의 모험을 보여줍니다. 해적들과 그들의 영원한 로망인 바다, 그리고 그 위에서 펼쳐지는 가슴 떨리는 모험은 바로 공적들의 그것과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바다의 로망과는 별개로 다른 한쪽에서는 색다른 모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마츠모토 레이지가 그려낸 사나이들의 로망, '우주해적 캡틴 하록(1978)'은 정처없이 우주를 떠돌며 악당들과 맞서 싸우는 전설의 해적 캡틴 하록과 그의 영원한 동반자인 우주선 아르카디아호의 끝없는 모험을 선보이며, 바다가 아닌 우주를 무대로 한 무한한 로망을 선보입니다. 특히 일정한 거처없이 아르카디아호 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선원들의 소박한 생활상은 라퓨타에서 보았던 공적들의 삶과도 맞닿아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다와 별바다(우주)의 로망을 자극하는 해적들의 모습은 8년여가 지나서야 진정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그때까지의 로망을 이끌던 레이지버스의 우주해적이 서서히 퇴장하고 우주를 가르는 전쟁의 포화 속에 소년, 소녀들의 우주모함 화이트 베이스의 이야기(기동전사 건담)가 리얼이라는 개념을 아니메에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로망은 만화영화의 한구석으로 조용히 자리를 양보했었는데요. 건담에서 촉발된 리얼 드라마가 정점을 달리던 8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라퓨타를 통해 공적이라는 모습으로 바다가 아닌 하늘의 로망으로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로망은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지극히 현실적인 삶의 이야기(설거지, 빨래, 잠자리 등등)와 모험이 공존하는 장소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색적입니다. 몸을 싣고 있는 곳은 판타지이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현실적인 이들의 이야기는 보물섬이나 캡틴 하록과는 다른 느낌을 관객에게 선사했던 것이죠. 거기에 미야자키의 세심한 콘티와 설정은 공적의 이야기를 능숙하게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합니다.
 
낭만적인 공적들의 이야기는 '붉은 돼지(1992)'에 이르러서는 조금 다른 형태로 전개됩니다. 로망을 잃어버리고 빈곤한 현실에 찌들어 버린, 그러나 아직도 가슴 한켠에는 로망의 불씨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늙은 공적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앞선 라퓨타에서 보여진 공적들의 삶이 소년, 소녀들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라면, 붉은 돼지에서 보여진 공적들의 삶은 어른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여전히 그 낭만의 한자락을 놓고 있지는 않은 체로 말입니다.

© Nibakiri · TNNG


라퓨타의 편린은 또다른 곳에서 새로운 형태로 발현되기도 합니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1990, 이하 나디아)'은 에초에 NHK에 남겨져 있던 라퓨타의 기획안이 시초가 되었던 작품으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이  '해저 2만리'의 노틸러스 호의 컨셉을 이식하여 독특한 모험물로서 재창조시켜 낸 작품입니다. 공적의 로망이 잠수함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는 것이었는데요. 그러나, 노틸러스호의 승무원들의 모습은 미야자키 스타일의 계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안노가 어린 시절 감동 받았던 '우주전함 야마토(1974)'나, 그가 스탭으로 참여했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1982)'에서 묘사된 모습과 더 가까워 보인다는 점에서 미야자키보다는 안노의 취향이 더 많이 반영된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로망의 실종 - 로맨스와 코미디에서 느와르와 판타지까지

ⓒ NHK·Sogo Vision·TOHO

얼도 로망도 쇠퇴해버린 듯한 90년대에 이르자, 공적들의 로망이란 이제 붉은 돼지에서 보았던 그들의 노쇠한 모습처럼 향수와 추억이라는 이름 하에 다락방의 낡은 일기처럼 취급되어 버립니다. 싸우는 변신소녀와 변신합체 용자로봇들이 만화영화를 수놓고, 기괴하고도 독특한 매력의 생체병기가 찢어지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써드 임팩트를 터뜨리자 시대는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라퓨타를 기본으로 시작되었던 나디아에서도 그 로망의 편린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나디아가 라퓨타의 모든 것을 계승할 의무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지만 말입니다.)
 
하늘의 로망을 대신하여 등장한 것은 새로운 스타일의 SF 모험 이야기였습니다.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의 억세게 운좋은 우주전쟁 참전기를 다룬 '무책임함장 테일러(1993, 이하 테일러)'에서의 고물구축함 미풍호, 그리고 에반게리온의 써드 임팩트 속에서도 결코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항해를 해냈던 '기동전함 나데시코(1996, 이하 나데시코)'의 최신예 우주전함 나데시코의 생활상은, 코믹함과 시트콤스러운 모습으로 항상 시끌벅적합니다.

그러나, 테일러나 나데시코의 일반적인 생활상은 개그 쪽에 관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미야자키 스타일과는 거리가 멉니다. 특히 나데시코의 경우는 그들의 일상사가 로망보다는 로맨스에 초점이 더 치우친 전개인데요.

© Hitoshi Yoshioka/Kadokawa Shoten·Tylor Project.

이렇게 이들 작품에서 펼쳐지는 등장인물들의 일상사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모험을 떠나는 이들의 뒷켠에 숨겨진 고충이나 현실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펼치는 휴먼 코미디와 아슬아슬한 사랑의 줄다리기라는 점에서 사실 미야자키의 스타일과의 접점을 찾으려하는 것 자체가 조금은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어찌보면 이 두 작품 모두 어떤 면에서는 나디아와 마찬가지로 미야자키 스타일보다는 레이지버스나 건담, 마크로스 등의 스타일을 계승하여 그 위에 로맨스와 코메디로 새롭게 재해석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곤조의 SF 로봇물이었던 '반드레드(2000)' 역시 오랜 세월 동안 적으로 나누어져 싸워왔던 남녀들이 우주해적선 메제르 호에서 동거하면서 벌어지는 각종 에피소드와 로맨스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두 작품들과 비슷한 출발선상에 놓여져 있다고 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이러한 전개는 곤조의 다음 작품에 이르러서야 조금은 미야자키 스타일로 근접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리고, 로맨스에 초점이 맞추어졌던 90년대 하늘의 이야기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색다른 형태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소년 반과 함께  이세계 가이아로 넘어온 평범한 여고생 히토미. 반과 함께 영문모를 모험 속에 빨려든 그녀는 천공의 기사 알렌 쉐자르의 비행선에 올라타 본격적인 모험의 로망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천공의 에스카플로네(1996)'에 등장한 알렌 쉐자르 일당(?)의 비행선은 지금까지의 비행선과는 다른 형태로 운용됩니다. 바로 비행석이라 불리는 거대한 암석 두 개를 달고 프로펠러로 추진력을 내어 바람을 타고 비행을 하는 것이 그것인데요. 에스카플로네의 이 비행선은 현실도, SF도, 스팀펑크도 아닌 판타지의 세상에서 날아다니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줍니다. (기동전사 건담 이래 단바인, 바이팜, 레이즈너 등에서 선보였던) 거대한 배를 타고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는 소년, 소녀들의 리얼한 모험 이야기는, 판타지와 순정 로맨스와 합쳐지면서 색다른 형태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특히 이 비행석의 존재는 왠지 라퓨타에서 등장했던 비행석과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군요.

ⓒ Sunrise · Tokyo TV


리얼로봇의 메카인 선라이즈의 작품들은 사실상 로망이라는 요소를 아니메에서 밀어낸 장본인이기에 그 느낌이 더욱 남다른 감이 있습니다. 물론, 알렌 쉐자르의 비행선에서는 공적들이 선보인 아기자기한 스타일의 생활상은 펼쳐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건담의 화이트 베이스에서 이어져 온 스타일, 즉 모험의 베이스가 되는 움직이는 이동기지로서의 모습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도 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변모의 조짐은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의 로망은 그로부터 2년 뒤, 조금은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저마다의 빛바랜 과거를 숨기고 시니컬한 현재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어른들의 집합소 비밥호의 현실적인 모습으로 말입니다.
 
'카우보이 비밥(1998)'의 비밥호에는 확실히 타이거 모스의 현실적인 생활상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밥짓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게다가 취미로 분재까지...) 제트의 모습과 밥 축내기에 바쁜 더부살이 식객들인 스파이크, 페이, 에드의 모습은 개그스러움이 넘쳐납니다. 그들의 모습은 일반적인 주인공들과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어른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형태의 현실스러움은 타이거 모스의 도라 일당에 비해서 더 비참하긴 하지만, 디테일함에 있어서는 엇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붉은 돼지에 등장한 옹색한 공적들마냥, 그들은 항상 배고픔에 굶주려 궁색함을 드러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시청자들의 시선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이전까지의 선라이즈의 작품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어떤 면에서 사뭇 다른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큰 에피소드의 흐름과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던 이전의 리얼로봇 계열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우주선들의 생활상과는 다른, 아기자기함이 살아 있는 모습인 것이죠. 이런 아기자기한 생활상의 묘사는 그들의 모험을 더욱 더 맛깔스럽게 가꾸어 주는 에피타이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미야자키 스타일과의 데자뷰를 느끼게 해줍니다.

ⓒ Sunrise



로망의 부활 - 레이지와 미야자키를 흠모하는가

우보이들의 궁색한 비행선이 위상차 게이트를 넘어 먼 여행을 떠나고, 뒤이어 등장한 '라스트 엑자일(2003)'의 용병함 '전멸의 실바나'는 스팀펑크적인 세계관으로 인해 확실히 시작부터 미야자키 스타일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풍스러운 비행함선 간의 포화 속에 검은색의 함체를 들어내며 압도적인 파괴력을 과시하는 알렉스 로우 함장의 실바나는 전멸이라는 별명답게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 냅니다. 어떤 면에서는 캡틴 하록과 아르카디아호의 재림이라도 되는 듯 하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고 무자비한 사나이들만이 가득할 것 같은 실바나이지만, 그 내부로 들어가면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스팀펑크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함내 구조는 우주전함보다도 우리에게는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데요. 그와 함께 간간히 보여지는 승무원들의 인간적인 모습은 전멸이라는 별명을 무색하게 하는 순수함과 익살스러움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바나와 그 내부의 모습은 미야자키 스타일을 이전까지의 90년대의 작품들과는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특히 라스트 엑자일의 이야기 전개는 라퓨타의 그것과 상당히 근접한 부분이 있어 그 친밀감이 더욱 크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곤조의 이 시도는 1회성에 그쳤다는 점에서,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완성도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나름 큰 아쉬움을 느끼게도 합니다.

ⓒ Gonzo · Victor Entertainment


한편, 선라이즈가 잠깐 선보였던 미야자키 스타일의 편린은 몇 년 뒤, 선라이즈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개하기 시작합니다. 비밥의 프로듀서 미나미 마사히코 등이 분사하여 만든 제작사 본즈가 선라이즈 작품들의 한 테마라 할 수 있는 화이트 베이스식 이야기와 비밥에서 보였던 미장센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스타일의 로망들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전함이 아닌, 화성의 드넓은 바다 속을 항해하는 잠수함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현란무답제 더 마즈 데이브레이크(2004)'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본즈식 로망은 '교향시편 에우레카 7(2005)'에 이르러 미야자키 스타일에 가까운 형태로 거듭나게 됩니다.
 

ⓒ Bones · Project Eureka · MBS

에우레카의 하늘은 신세대 젊은이들의 로망을 담고 있습니다. 파도타기와 마찬가지로 서프 보드에 의지한 체 하늘을 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해적이 공적으로 진화하는 것과 같은 유사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여기에 월광호에 몸을 싣고 유랑의 길을 떠나는 홀랜드의 일행과 우연치 않게 월광호에 탑승하게 된 소년 렌톤의 모험 이야기는 확실히 라퓨타에서 보여졌던 전개와도 비슷합니다. 나디아가 안노만의 스타일이 돋보였다면, 에우레카의 경우는 디테일한 그들의 생활묘사에 집중하면서 자연스레 미야자키 스타일과 겹쳐지는 부분이 생깁니다. 그리하여 에우레카는 그들만의 새로운 스타일에 미야자키 스타일이 모두 혼재하는 형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물론, 에우레카에서 보여지는 미야자키 스타일의 편린은 난해한 전개와 힙합스러운 신세대식 스타일에 가리워져 희석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라스트 엑자일에서 번쉽을 타고 하늘을 가르던 스팀펑크적인 하늘의 로망처럼, 보드를 타고 하늘에 몸을 맡기는 신세대적 로망은 오래전 미야자키가 선보였던 하늘을 나는 공적의 로망과 같은 테마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에우레카의 로망은 본즈의 최신작 '망념의 잠드(2008)'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미야자키 스타일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미야자키가 선보였던 하늘의 로망은 마야자키 자신의 작품에서는 붉은 돼지 이후로 오히려 절제되는 양상입니다. 그러나, 하늘로 정처없이 사라져 버린 라퓨타의 한 부분처럼, '하늘에의 로망'이라는 이름의 이 보석은 하늘 높이 올라가 마침내 최고점에서 부서져 지상에 흩어져 아니메의 이곳저곳에 여러 형태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가이낙스와 곤조 등이 선보였던 감각적인 스타일이나 선라이즈와 본즈 등이 만들어낸 디테일한 묘사는 라퓨타의 조각들이 떨어지면서 피어난 또다른 형태의 로망일지도 모릅니다.
 
하늘을 향한 로망이 또다시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난다면, 과연 다음에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까요. 일상의 아기자기함을 담은 잔잔한 로망일까요, 아니면 박력과 모험이 가득한 신나는 로망일까요.

ⓒ Bones · Sony Computer Entertainment Inc. · Ani P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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