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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Ryoichi Yokomizo

본 추리소설의 거장 故 요코미죠 세이시 선생의 1951년작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이라고는 하지만, 한 세기 전에 태어난 인물인지라 사실 국내에서 요코미조 세이시의 인지도 자체는 그닥 높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탐정의 이름을 들어보면 어디선가 낯익은 느낌을 갖게 되는 분들도 있으리라 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국내에서도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던 추리만화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한국판 제목: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주인공인 김전일이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명탐정이신 우리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의 바로 그 할아버지로, 요코미조 세이시가 창조해낸 희대의 명탐정이 바로 이 긴다이치 코스케인 것입니다. 실제 김전일이라는 이름은 일본어로 긴다이치로 발음하며, 김전일의 원 일본이름은 긴다이치 하지메이죠.
 
일본 추리만화 초유의 베스트셀러에서 매번 거론되는 이 인물은 요코미조 선생과 그가 창안해 낸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에 대한 일종의 존경의 표현이며, 동시에 많은 일본 추리 매니아들이 그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일 것입니다. 그리고, 김전일(실제로는 긴다이치 하지메)은 그 이름으로 인해 긴다이치 코스케의 명성과 아우라를 어느 정도 등에 업고 작품을 이끌어 가는 것이기도 하구요.
 
자, 이 정도로 일본 내에서 높은 인지도를 갖고 있는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이 작품 '악마과 와서 피리를 분다.'는 긴다이치 코스케가 등장하는 77편의 에피소드들 중 15번째에 해당하는 비교적 초창기의 작품입니다. 초창기이다보니 당시 한참 전성기의 필력을 과시하던 요코미조 선생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구요. 실제로 당시 요코미조 선생은 이 작품을 포함하여 무려 세 편의 긴다이치 코스케 이야기를 집필 중이었다고 하는군요(시공사판 소설의 후기 참조).
 
비록, 영화로 대성공을 거두며 요코미조 선생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 '이누가미 일족'이나, '옥문도', '팔묘촌'과 같은 작품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긴다이치 코스케 팬들의 인기투표에서 당당히 3위에 올랐으며, 요코미조 본인은 베스트 7에 선정할 정도로, 이 작품의 완성도와 인지도는 높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로도 수차례 제작된 사례도 있지요.
 
 
기괴하고 미스테리한 몰락귀족의 가족사에 접근하는 명탐정의 여행기
 
작품의 전개는 밀실살인을 포함한 기묘하고 괴기스러운 살인 징후, 피해자와 주변인물들의 과거 속에 숨겨진 경악스러운 진실, 범인은 결국 주변인물들 중 하나라는 결과 등이 포함되어 있는 전형적인 요코미조식 추리 전개를 따르고 있습니다. 비록 요코미조 선생의 작품을 읽지 못한 이들이더라도 이러한 전개는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에서 익히 보아온 모습이기도 하지요. 정확히 말하면, 요코미조 선생의 스타일을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 스토리 작가들이 이어받았다고 보면 될 듯 합니다.
 
다만, 이 이야기는 요코미조 선생이 이전까지 그려왔던 피해자 가문에 얽혀 있는 낡고 고루한 인습과 삐뚤어진 과거에서 좀 더 나아가, 전후 몰락한 일본의 귀족제(일본에서는 화족제도)와 사회상이 반영되었단 점에서 이전 작품들과는 달라진 스타일을 보이고 있으며, 추리소설의 백미 중의 하나인 밀실살인이나 전혀 불가능 할 것 같은 범죄장면의 묘사보다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았던 과거의 실마리를 하나둘 짜맞추어가는 이야기 전개에 그 비중이 더 맞추어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첫번째의 밀실사건이 발생한 후, 긴다이치 코스케는 사건 현장에서 실마리를 찾는 것보다는 이미 본편이 시작되기전 자살을 시도하면서 사건의 발단을 알린 피해자 가문의 가장 츠바키 자작의 행방을 쫓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30장에 이르는 본작의 구성에서 중반부는 바로 이 긴다이치 코스케의 츠바키 자작 행적 찾기에 할애되고 있지요. 이후 중후반부에 이루어지는 몇 건의 살인사건은 초반부의 밀실사건과 같은 불가능 범죄가 아닌, 일반적인 살인현장에 그치고 있어 상대적으로 살인사건 자체가 갖고 있는 미스테리함은 경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 작품은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며, 세 건의 살인사건마다 축음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플루트 곡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의 기괴한 느낌이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살한 츠바키 자작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 기괴한 플루트 곡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음산한 츠바키 가문의 저택과, 몰락한 옛 귀족들의 음험한 과거, 그리고 피폐해진 패전 후의 일본(굳이 이 작품에서는 패전이라는 말보다는 전후로만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야 일본인이 쓴 이야기니만큼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치고)의 상황과 어울려 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몹시도 괴기스럽게 이끌어가고 있지요. 특히, 한국어판을 출간한 시공사가 자사의 블로그를 통해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 이 기묘하게 음산한 플루트 곡을 들으면서 책을 읽어본다면 그 느낌은 확실히 평상시보다 강렬해질 듯 합니다.
 
 
깊은 풍미를 가진 고전적인 일본스러운 맛의 미스테리
 
전체적으로 작품의 흡입력은 강력합니다. 짧지 않은 분량이지만 독자들을 빨아들이는 느낌이 강렬하다고 할까요. 다만, 그 원동력이 긴다이치 코스케의 사건해결보다는 어둡고 사악한 악마의 과거가 숨겨진 귀족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긴다이치 코스케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미비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명탐정이 모든 사건에서 항상 결정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에피소드 등에서도 몇 차례 보아온 모습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와 많은 동질감을 느끼는(물론, 김전일의 스토리 작가들이 요코미조 선생의 스타일을 답습한 것이지만) 전개 방식은 어떤 면에서는 친근감을 느끼게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식상함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것은 작품 자체의 식상함이라기보다는 우연치 않게 비슷한 맛에 너무 길들여져 버린 독자들이 운이 없는 것이라 생각되는군요. 실제로 김전일 소년의 사건부를 권당 2~30여번은 족히 보아왔던 제게 이 작품은 분명 멋지지만, '뭔가 예전에 한번은 먹어보았던 맛인데?'라는 느낌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익숙한 맛도 확실히 거장이 만들어 낸 맛인지라 식상함 속에서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의 작품이 몇 번씩이나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다시 김전일을 통해 비슷한 스타일로 미디어 믹스화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깊은 풍미에 대한 팬들의 욕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 봅니다.
 
음산하고 음울하며 충격적인 귀족사에 얽힌 미스테리... 어쩌면 이 무덥고 습한 여름의 날씨에 제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렛츠리뷰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 10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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