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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 출연작
  - 은하철도 999 (1978, TV): 니시자와 노부타카(감독) /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은하철도 999 (1979, Movie): 린 타로(감독) /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은하철도 999, 유리의 클레어 (1980, Movie): 니시자와 노부타카(감독) /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안녕, 은하철도 999 (1981, Movie): 린 타로(감독) /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은하철도 999, Eternal Fantasy (1998, Movie): 우다 코노스케(감독)
  - 메텔 레전드 (2000, OVA): 요코다 카즈요시(감독)
  - 우주교향시 메텔 (2004, TV): 마사키 신이치(감독)
 
이 외에 78년 TV 시리즈 중 일부 에피소드를 편집하여 재구성한 스페셜 시리즈가 4편이 있다. 또한 그녀는 TV 에피소드 '시간성' 편과 두 편의 극장판에 우정출연(?)했던 하록선장을 위해 1999년작 '하록사가'에 잠시 출연하기도 한다. 그리고, 2006년 작 '은하철도 이야기: 잊혀진 시간의 혹성' 편에서는 비중있는 조연으로 등장하면서 그녀 또한 하록에 이어 카메오 출연에 맛을 들이게 된다, 으흠.
 
 
사나이의 우주를 사로잡은 신비로운 금발의 여인
 
일전에 '애니메이션 인물열전: 캡틴 하록... 벗이여 별바다로 떠나자'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7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스타일의 장대한 스페이스 어드벤쳐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를 선보이며, 일약 1세대 아니메 붐을 일으킨 마츠모토 레이지(물론, 야마토 성공의 일등공신은 프로듀서이자 야마토의 원안을 기획한 니시자키 요시노부가 더 유력하다고 볼 수 있지만)는 연이어 '우주해적 캡틴 하록'을 통해 마츠모토 식 SF를 팬들에게 선보이며 후에 '레이지버스(Leijiverse)'라 불리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마츠모토 레이지(이하 마츠모토로 표기)는 이 두 시리즈 이외에도 슈퍼로봇 장르에 자신만의 SF 드라마를 접목시킨 '혹성로봇 당가드 에이스(1977)'과 서유기의 세계관을 SF 어드벤쳐에 접목시킨 'SF 서유기 스타징가(1978)' 등을 연이어 선보였는데, 비록 이 두 시리즈는 레이지버스의 세계관에 속하는 것이 아닌 TV 시리즈를 위해 별도로 제작된 오리지널 에피소드였지만, 당시 마츠모토 레이지 스타일의 이야기와 캐릭터가 하나의 거대한 트렌드로 굳어져 가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츠모토의 최고의 전성기는 어쩌면 지금부터 말하려는 이 작품과 이 작품에 등장했던 한 여인으로 인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선굵은 사나이들의 꿈과 우정이 담긴 비장함이 메인 테마로 자리잡고 있던 마츠모토식 이야기의 반환점이며, 동시에 자유와 꿈을 노래하던 모험 이야기에서 휴먼 드라마와 현실의 풍자를 담은 좀 더 깊은 이야기로의 진화를 예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질병과 악조건 속에 인간의 몸을 기계의 몸으로 바꾸어 불로불사의 삶을 살아가는 미래의 지구. 기계의 몸을 가진 부유한(그렇지만 이제는 더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인간들이 기계의 몸을 갖지 못한 가난한(하지만 진짜 살아있는) 인간들을 핍박하며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극단으로 치달은 세상에서 살고 있던 소년 테츠로(한국방영 명칭 철이)는 기계 인간들에게 목숨을 잃은 어머니의 소망을 위해, 그리고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우연하게 만난 신비의 여인 메텔과 함께 은하철도 999를 타고 몸을 기계로 바꿀 수 있는 머나먼 별 '라메탈'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 속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갈등, 이별과 화해 속에서 소년은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며,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년을 이끌어 주던 신비의 여인은 여행의 종착점에서 기약없는 안녕을 고하며 떠나게 됩니다. 소년은 이제 어른으로서 홀로 미래를 헤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마츠모토식 휴머니즘에서 좀 더 진일보하여 비뚤어진 사회를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고 스스로가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 속에 진정한 삶의 의미, 인간다움에 대한 것을 깨우치는 TV 시리즈 '은하철도 999'는 관념적이고 이상적이었던 마츠모토의 이전 작품에 비하여 현실적인 소재가 투영된 인간 드라마를 선보이며 매회 색다른 감동을 선사합니다. 작품 내내 테츠로의 원 목표였던 '기계 인간이 되어 어머니의 못다한 삶까지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는 명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만화영화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성숙한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 구조를 보여줬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소년의 성장을 한 여인이 조용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지켜봐주고 이끌어 주면서 각 화마다의 엔딩은 지극히 평온한 모습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 여인은 한 번도 소년에게 강요하거나 지시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항상 스스로가 깨우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며, 특유의 포근함으로 소년을 감싸줍니다. 사나이의 무뚝뚝함과 강인함, 비장함이 작품 전체를 지배했던 마츠모토의 세계는 이 메텔이라는 여인에 의해 잔잔하고 부드럽게 변모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오히려 팬들에게 더욱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라는 옛말처럼 메텔의 부드러움과 여성스러움은 장대한 우주를 그녀의 무대로 바꿔버릴 만큼 조용하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흡입력을 가진 블랙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츠모토 선생이 순정만화까지 섭렵할 정도로 작품 세계의 폭이 넓기에 가능했던 일 일수도 있겠습니다만.) 

마츠모토 특유의 가냘프고 고전적인 캐릭터 묘사로 표현된 그녀의 외모 또한 이러한 성격과 맞물려 큰 시너지 효과를 내게 되는데, 이미 '우주해적 캡틴 하록'를 통해 마츠모토의 캐릭터를 훌륭하게 애니메이션화했던 작화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가 이 작품에서도 신비한 여인의 이미지를 숨막힐 정도로 멋지게 만화영화에 이식하면서 절정의 여성미를 보여주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어떤 여성 캐릭터보다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그러나 어둡고 슬픈 금발의 여인이 만화영화 전반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 잘 벗기도 합니다, 이 아가씨는. 그렇습니다, 소년들에게는 얼씨구나~였던 것입니다.) 

바야흐로 모든 소년들은 그녀를 연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정체불명의 신비로운 미녀, 항상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어머니 같으면서도 누나같이 친밀한 존재. 메텔은 모든 소년들의 로망이었고 선망이었으며, TV 시리즈 마지막 화에서 보여준 테츠로와의 이별은 이 작품을 시청해온 소년들에게도 큰 슬픔을 안겨주게 됩니다. 그렇게 그녀는 테츠로 뿐만 아니라 모든 소년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정처없는 여행길에 오르게 됩니다.

© Matsumoto Leiji / 1978 Toei Animation

그림 1. TV 시리즈 '은하철도 999'의 스틸 및 엔딩 컷.


식을 줄 모르는 논란, 신비스러움에 가리워진 그녀의 진짜 정체는

(캡틴 하록을 성공적으로 연출했던) 린 타로 감독이 연출한 극장판 '은하철도 999'는 TV 시리즈에 이어 다시 한 번 대성공을 거두었고, 메텔은 예의 그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으로 이번에도 팬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여기서 린 타로는 하록 TV 시리즈에서와 마찬가지로 마츠모토의 세계관을 다시 한 번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하게 되는데, 테츠로의 나이를 TV 시리즈의 10대 초반에서 10대 중반으로 바꾸어 사춘기의 방황의 끝에서 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는 소년의 모습을 좀 더 현실감 있게 그려 나갔으며, 하록을 위시한 레이지버스의 단골들을 이 작품에 특별 출연시켜 레이지버스와의 연관성을 공고하게 만드는 등, 자신의 스타일로 999와 메텔을 그려갔던 것입니다. 

감독의 재해석은 팬들의 큰 호응으로 이어졌습니다. TV 시리즈를 기본으로 만들어진 지금까지의 극장판 만화영화들이 모두 총집편 내지는 일부 에피소드 편집본의 형태에 그쳤던 것에 비해 별도의 독자적인 형태(TV 시리즈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이 시작되었고, TV 시리즈 방영 중 극장판이 공개. [2] 참조)로 진행되었던 극장판의 성공은 후속편의 제작으로 자연스레 이어졌고, 결국 2년 뒤 '안녕, 은하철도 999: 안드로메다 종착역(1981)'이 개봉되어 연타석 홈런을 날립니다. 특히, 이 후속편은 직전 극장판의 다음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아쉬운 이별을 고했던 메텔이 다시금 테츠로와 재회하고, '라메탈'과 어머니 프로메슘, 그리고 테츠로의 숨겨진 과거와의 진정한 결말을 내는 그야말로 999 세계관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 됩니다.

특히 999의 연속적인 성공에는 탄탄한 원작의 스토리와 캐릭터, 스탭진들의 노고가 담긴 작품의 완성도와 같은 요인 외에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요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영원한 히로인 메텔의 진정한 정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는 이미 TV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몸이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다름을 몇 차례 암시해 왔었으며,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그녀의 본 모습은 마치 신비스럽지만, 결코 드러내지 않은 미녀의 눈부신 나신과도 같이 소년 팬들에게는 끊임없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소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궁금증의 대상 역시 다름아닌 그녀의 그 '몸'이었던 것이구요.)

© Matsumoto Leiji / 1979 Toei Animation

그림 2. 극장판 '은하철도 999'의 스틸 컷.

메텔이 과연 인간인지 기계인지, 아니면 인간도 기계도 아닌 어떤 괴기스러운 모습의 생명체인지(혹은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대한 논의는 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아직까지도 진위가 밝혀지지 않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원작자인 마츠모토 선생의 어떠한 언급도 없는 이상 메텔의 정체는 영원한 우주 저끝처럼 신비에 묻힌 설정으로 남을 겁니다. 사실, 추측컨데 마츠모토 선생조차 그녀의 정체에 대한 구체적인 설정은 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다만, 그녀의 정체를 보았던 시리즈의 등장 인물들의 충격에 휩싸인 모습(평생 글만 쓰며 여성을 돌처럼 알고 지낸 대문호가 메텔의 아름다움에 홀려 그녀를 취하려 하다가 본 모습을 보자 강렬한 충격에 휩싸여 다시금 글에 정진한다든지, 기계 몸을 강매하는 불법업자가 메텔의 진짜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든지 하는 장면. [5] 참조)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메텔의 정체를 지속적으로 궁금해 하며 다음 편을 기대하게 하는 마츠모토식 관객 유도 장치였던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팬들에게 먹혀든 것입니다.

그녀의 정체만큼이나 또 하나의 논란거리로 이어져 온 것은 바로 999에 이어 방송된 TV 시리즈 '천년여왕'과의 관계였습니다. 1999년 9월 9일 9시 9분 9초에 지구와 충돌하는 행성 '라메탈'은 열차 999의 종착지이자 여왕 프로메슘이 지배하고 있던 999 세계관의 행성 '라메탈'과 같은 이름이었고, 긴 금발을 휘날리는 천년여왕 유키노 야요이는 마치 메텔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길고 그윽한 메텔의 눈매와는 달리 동그랗고 큰 유키노의 눈은 젊은 시절의 메텔을 묘사한 듯 보이기도 했지요.) '라메탈'의 충돌위협에서 지구를 지키기 위해 분전했던 천년여왕은 결국 오랜 세월이 흘러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어머니 프로메슘에 의해 불로불사의 어떤 것으로 몸이 바뀌었고, 이후 프로메슘의 명령에 따라 테츠로라 생각되는 소년들을 끊임없이 라메탈로 데려와 기계인간으로 만드는 임무를 수행한다는 당시 팬들의 추측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고, 팬들 사이에서는 천년여왕과 메텔이 동일인이냐 아니냐를 놓고 끊임없는 논쟁이 오고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82년 '천년여왕'의 극장판 개봉에 맞추어 마츠모토 선생이 비로소 공개한 설정에서 유키노 야요이는 메텔이 아니며, 유키노 야요이와 메텔 모두 프로메슘의 딸([4] 참조)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메텔과 천년여왕과의 관계는 일단락이 됩니다만, 같은 레이지버스의 캡틴 하록 세계관에서 비롯된 여러가지 설정 상의 미스매치와 함께 999와 천년여왕과의 나머지 관계 및 밝혀지지 않은 각종 미스테리들은 오랜동안 레이지버스의 뜨거운 감자로 남게 됩니다.

© 1981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그림 3. 극장판 '안녕, 은하철도 999'의 스틸 컷.


돌아온 그녀, 젊은 시절을 이야기하다
 
80년대 초반을 넘기면서 레이지버스는 팬들의 관심을 잃고 먼 동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과거를 그리워하고 꿈과 자유를 동경하는 마츠모토식 복고주의와 낭만주의(거기에 보수적인 민족주의까지)는 80년대의 리얼리즘과 신세대의 사고방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스스로 과거로 남기를 자처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 아득한 우주로 정처없는 여행을 떠났던 메텔 역시 그녀를 동경하고 사랑했던 수많은 소년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버린 청춘의 환영이 되어버리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의 새로운 바람 속에서 이전 것들을 다시금 부활시키고자 하는 지속적인 복고주의 열풍은 레이지버스라는 전설적인 세계와 인물들을 그냥 둘리가 만무했습니다. 1시간짜리 극장판인 98년작 '은하철도 999: 이터널 판타지'는 TV 시리즈에서 헤어졌던 테츠로와 메텔과의 재회(린 타로 감독의 극장판에서 보여준 테츠로와 메텔의 이별과 재회, 그리고 또다른 이별의 이야기와는 별개로)로 시작하여, 다시금 그녀와의 새로운 여행의 시작을 알립니다. 그 고풍스러운 증기기관차 형태의 999만큼이나 오래된 명작은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신세대 팬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며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지만, 메텔과 테츠로의 20여년만의 재회와 여행은 몇 부작으로 기획될 이 반가운 이야기의 시작점부터 처참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작품 자체의 네임 밸류에 비해 연륜이 짧은 스탭진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생겼다고 추측되는 완성도의 문제는 올드 팬들에게는 (일부를 제외하고는)그다지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듯 싶고, 이미 너무 구시대적인 마츠모토의 낭만적인 이야기와 가치관은 신시대가 받아들이기에는 노인의 옛 이야기인냥 지루했던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올드 팬과 신세대 팬 모두에게 외면을 받으며 이터널 판타지는 일회성 판타지로 끝나고 맙니다. 그리고, 그것은 후속 레이지버스의 등장에도 큰 영향을 미칠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터널 판타지의 제작을 맡았던 도에이 동화의 포기에도 불구하고 레이지버스의 작품들은 속속 다른 제작사들에 의해 제작되기 시작합니다. 같은 해에 '화성여단 다나사이트 999.9'(실제로는 이 작품이 98년도에 가장 먼저 제작된 레이지버스 작품)와 '퀸 에메랄다스'를 시작으로 이듬해 '하록사가'까지 등장하며 레이지버스의 전설들이 봉인에서 해방되면서 메텔의 재복귀에 힘을 실어주자, 2000년 그녀는 '메텔 레전드'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메텔 레전드는 여러 의미에 있어서 메텔과 그녀의 팬들에게는 색다른 것이었는데, 그것은 먼저 더이상 999에 몸을 싣고 테츠로의 성장을 지켜보는 숙녀 메텔이 아닌, '라메탈'에서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내는 소녀 메텔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제작진은 이제까지 결코 떼어낼 수 없을 것 같았던 999와 테츠로를 메텔에게서 과감히 떼어 버리고 오히려 그녀의 수많은 논란거리이자 베일에 쌓였던 과거를 공개함으로써 새로운 시점으로 메텔을 바라보는 시도를 합니다. 999와 테츠로를 대신할 자리에는 메텔의 어머니이자 천년여왕이었던 프로메슘, 그리고 그녀의 쌍둥이 언니인 에메랄다스로 바꾸어 극을 이끌어 갑니다. 이 놀라운 설정은 또다른 논란거리를 야기하는데, 이미 82년 마츠모토 자신이 밝힌 레이지버스의 인물관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메텔과 에메랄다스의 자매 설정(이전에는 친우로 표시, [4] 참조)이나, 유키노 야요이가 또다른 프로메슘의 딸이었다는 설정을 뒤집고 프로메슘 자신이라는 설정으로 과감히 바꿔버리는 등, 오랜 시절 레이지버스를 보면서 자라온 올드 팬들에게는 그동안의 설정을 모두 뒤엎어 버리는 당황스러운 전개였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흥미거리를 제공했다고 볼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러나, 메텔 뿐만이 아니라 그녀만큼이나 신비로움을 가진 레이지버스의 히로인 천년여왕과 어린 시절의 에메랄다스(어릴 때조차  해골모양의 핀을 머리에 꽂고 있는 것을 보고 실소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해적 덕후'였나 봅니다.)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올드 팬들에게 있어서는 꽤나 반가운 일임에는 분명했던 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2004년 '우주교향시 메텔'로 이어져 메텔의 성장과정을 다루게 됩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결국 그녀의 몸에 얽힌 진짜 미스테리는 여기서도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 2000 Leiji Matsumoto / Tsurubaya Creative / Art Collection House / Avex

그림 4. 메텔 레전드 스틸 컷.


그녀는 소년 시절의 연인, 청춘의 환상

그녀는 이제는 올드 팬이 되어버린 30~40대 아저씨들의 소년 시절을 빛나게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어떤 만화의 여성 캐릭터도 그녀 이상의 아우라를 가지지 못했습니다.(개인적인 편차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 중에서 결코 논외가 될 수가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일 겁니다.) 심지어 현실 속의 여배우나 가수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던 그녀. 오히려 만화 캐릭터였기에 그 정도의 신비로움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녀는 소년들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고 때로는 절체절명의 위기로부터 지켜주었으며, 어려운 인생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올바른 해답을 찾도록 옆에서 조용히 조언해주는 우주의 등대와도 같은 여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올드 팬들의 청춘 속에 머무르는 환상이었습니다. 소년들에게 있어서 연상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심어주었고, 동시에 금발의 백인 미녀에 대한 쓸데 없는 환상을 심어주기도 했으며, 비정상적으로 마른 몸을 추구하는 현대의 여성들의 다이어트 취향을 십수년이 넘게 먼저 선도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정말 소년시절의 모든 남성들이 바라마지 않는 완벽한 연인이었던 것입니다.

테츠로와 메텔, 즉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동양 소년과 늘씬한 금발의 미녀라는 인물구도는 ('천년여왕'의 유키노 야요이와 하지메, '퀸 에메랄다스'의 에메랄다스와 토치로 등 마츠모토의 대부분의 캐릭터 설정처럼) '연상의 여인에 대한 소년의 동경' 이외에도 '작고 왜소한 동양의 남성과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늘씬한 금발의 백인 미녀'라는 전형적인 구도를 보여주며, 개인적으로는 마츠모토 선생이 갖고 있던 보수적 남성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또다른 표현인 듯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숨겨진 의미(동양 남성의 우월함을 보여주고 싶은 마츠모토식 남성미의 어필. 물론 확증은 없지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가 소년들에게 있어서 긍정적인 측면, 즉 어른으로서 성장하는 소년을 이끌어주고 보살펴주는 따뜻한 여인의 모습이 더욱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을겁니다.

정말로 그녀는 어린 시절 흠모했던 환상의 여인이었고, 이제는 더이상 그녀를 봐도 어떠한 떨림도 갖지 않는 어른이 되어버린 아저씨들의 청춘의 환상일 겁니다.

© 2004 Leiji Matsumoto / Shogakan / Joy Square / Avex

그림 5. 우주교향시 메텔 오프닝 스틸 컷.


<참고 포스트>
 
[1] Galaxy Express 999, Wikipedia
[2] 은하철도 999 1979 1981 by 캅셀, Capsule☺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3] 은하철도 999 - 유리의 클레어 1980 by 캅셀, Capsule☺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4] 남겨진 메텔의 비밀 by 캅셀, Capsule☺블로그
[5] 은하철도 999와 메텔의 비밀 by 캅셀, Capsule☺블로그
[6] 은하철도 999 ~ 이터널 판타지 by 슈케르
[7] 은하철도 이야기 ~ 잊혀진 시간의 혹성 by 슈케르
[8] 은하철도 999 - 이터널 판타지 by 키웰, Kewell's Factory about Something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 이 리뷰는 알라딘 이주의 TTB 리뷰 2010년 6월 1주차에 선정된 리뷰이며, 프레스블로그 2010년 07월 MP 명예의 전당에서는 발라당 미끄러진 글입니다.


은하철도 999 극장판 박스세트 (3disc)  -  10점
린타로 감독/DVD 애니 (DVD 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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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트는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의 '애니메이션 인물열전: 우주해적 캡틴하록... 벗이여 별바다로 떠나자'를 티스토리로 옮긴 글입니다.


<프로필>
 
◈ 주요 출연작
   - 우주해적 캡틴하록 (TV, 1978):  린 타로(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우주해적 캡틴하록: 아르카디아호의 비밀 (Movie, 1978):  린 타로(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Movie, 1982):  카츠마타 토모하루(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무한궤도 SSX (TV, 1982):  카츠마타 토모하루(감독),  코마츠바라 카즈오(작화감독)
   - 하록사가, 니벨룽겐의 반지~라인의 황금~ (OVA, 1999):  타케우치 요시오(감독),  모토하시 히데유키(작화감독)
   - 건 프론티어 (TV, 2002):  젠 소이치로(감독),  시마즈 이쿠오(작화감독)
   - 우주해적 캡틴하록, Endless Odyssey (OVA, 2003):  린 타로(감독),  유키 노부테루(작화감독)
 
◈ 카메오/조연급 출연작
   - 은하철도 999 (TV, 1978) 시간성 편
   - 은하철도 999 (Movie, 1979) 
   - 안녕, 은하철도 999 (Movie, 1981) 
   - 퀸 에메랄다스 (OVA, 1998) 
   - 코스모 워리어 제로 (TV, 2001)  
   - 우주교향시 메텔 (OVA, 2004) 
 
☞ 글쓴이 주 #1: 캡틴 하록을 포함한 레이지버스의 작품을 감상하실 때의 주의점

'천년여왕 - 우주전함 야마토 - 은하철도999 - 캡틴 하록 - 퀸 에메랄다스'로 대표된는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들은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야마토의 경우는 예외라고 해도 될 듯)이지만 각 작품 간의 정합성은 항상 조금씩 어긋나 있고, 등장인물들의 상관관계도 이전작과 다르거나 다소 혼란스러운 경우도 있다. 이것은 애초부터 그(각 작품 간의 연관성)에 대해 원작자가 세세하고 면밀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도 있지만, 그의 작품을 연출했던 린 타로 감독이나 다른 연출 및 각본 스탭들의 독자적인 해석과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토치로의 딸 마유는 린 타로가 TV판에 등장시키고 후에 레이지가 이를 인정하고 자신의 원작에 등장시킨다. [2]참조)에 의해 생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후일 마츠모토 레이지 선생이 자신의 세계관을 일부 변경(예를 들면, 천년여왕과 메텔이 동일인인 듯 묘사했다가 나중에는 메텔을 그녀의 딸로 설정했다든지, 메텔과 에메랄다스를 라이벌처럼 표현했다가 후일 자매로 설정했다든지 하는 부분)함으로써 이전 작품과의 스토리적 정합성에서 더더욱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 개별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에는 큰 무리가 없기에 레이지버스의 작품 모두를 동일한 시간축에 놓고 앞뒤가 꼭 맞게 배치하려는 불가능한 노력만 자재한다면 감상에는 무리가 없다.
 
결국, 각 작품을 모두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스핀 오프의 작품(실제로 '건 프론티어'의 경우는 완전히 스핀오프를 표방한다고 할 수 있다.) 정도로 보면 어떨까 싶으며, 82년 TV 시리즈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무한궤도 SSX(이하 무한궤도 SSX)' 이후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레이지버스의 작품들이 99년부터 다시 제작되면서 마츠모토 레이지 선생이 세계관을 나름대로 깔끔히 정리하신 듯 싶으니 굳이 말끔히 정리된 세계관을 원한다면 그의 최신작에 묘사된 세계관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듯. (예를 들면, 우주교향시 메텔 같은 작품.) 
 
☞ 글쓴이 주 #2: 레이지버스란?

레이지 + 유니버스의 합성어로 마츠모토 레이지가 창안해낸 세계관과 그 세계관을 차용한 작품들을 통털어 일컫는 말. 보통 '우주전함 야마토', '우주해적 캡틴 하록', '은하철도 999', '천년 여왕' 정도를 지칭하며, 원작만화가 아니라 TV 방영을 위해 기획된 'SF 서유기 스타징가'나 '혹성로봇 당가도 에이스'와 같이 마츠모토 레이지가 원작으로 참여한 오리지널 아니메의 경우는 이 레이지버스의 세계관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프롤로그 - 별바다의 태동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일본은 자괴감과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일례로, 일본에 주둔한 미군들 중 일부가 (구시대의 많은 점령군이 그러했듯) 점령지의 여인들을 욕보이는 사건이 속출했지만, 패배감에 젖은 일본의 남자들은 그런 미군의 행패를 그냥 조용히 눈감고 지켜볼 뿐 누구 하나도 용기있게 나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화는 그즈음 일본에서 최고의 무술 고수가 되기 위해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던 젊은 시절의 최배달(최영의) 선생이 이런 미군들의 행패를 좌시하지 못하고 몇 차례에 걸쳐 미군들을 혼내주자 양식있는 몇몇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미군에게 받았던 모욕적인 처사를 능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조선의) 이 젊은 무술인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고 합니다. (고우영 화백의 '바람의 파이터' 참조)


시대가 흘러, 패전의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일본인들이었지만,(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다시 일어서게 된 원동력 중의 하나가 한 때 자신들이 침략했던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이었고) 여전히 그들 마음 한켠에는 아직도 패배주의가 사라지지 않은 체 트라우마처럼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런 자신들의 과거를 미래의 아이들에게는 물려주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것 중의 하나가 애니메이션 사업이었습니다. 인기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와 영화사로 명성을 쌓고 있던 도에이를 필두로 시작된 일본의 만화영화는 눈부신 성장을 시작했고, 미국과는 다른 새롭고 경제적인 제작기법과 참신한 소재들을 바탕으로 서서히 일본의 아이들에게 꿈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역할을 해내게 됩니다.


60년대의 아니메 성장기를 거치면서 자라난 아이들이 청소년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만화영화, 즉 아니메는 중대한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아니메를 보며 자라난 아이들을 계속 수요층으로 자리잡게 할 좀 더 고연령대를 위한 작품이 필요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제 아니메는 더이상 아이들만의 것이 아닌 일본인들을 위한 하나의 대중 영상매체로 성장하기 위한 저변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그것'이 등장한 것입니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이 건조한 세계 최대(最大)의 전함이었던 야마토를 모델로 하여, 환경위기에 봉착한 지구를 구원하기 위해 우주 저편의 환경 정화장치를 가져오는 임무를 맡고 출발한 우주전함 야마토와 승무원들의 스페이스 어드벤쳐를 다룬 마츠모토 레이지 원작의 '그것', '우주전함 야마토(74년작, 한국 방영제목 날으는 전함 V호)'는 지금까지의 아니메를 한단계 상회하는 과학적 고증과 짜임새 있는 휴먼 드라마, 그리고 우주 전함 간의 장대하고 스펙타클한 전투장면을 그려내며, 일약 1세대 아니메 붐을 일으키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됩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일본 아니메 종사자들이 최고로 치고 있는 작품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우주전함 야마토'의 성공은 단순히 아니메의 레벨에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들이 부끄러워하던 과거의 소재를 과감히 채용하여 새시대를 열어가는 소재로 사용함으로써 잠재되어 있던 일본인들의 패배의식을 자긍심으로 바꾸고, 신세대 젊은이들에게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일종의 사이코 드라마로서의 역할을 해냈던 것입니다. 비로소 아니메가 어린이를 넘어 어른들까지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대충매체로서의 도약의 기회가 되었고, 이 새로운 아니메 붐은 바로 마츠모토 레이지라는 일개 만화가를 일류 만화가의 반열에 올려놓기 시작합니다.


© Matsumoto Leiji & Nishizaki Yoshinobu

우주전함 야마토 극장판 포스터. 레이지버스의 시초가 된 작품.



캡틴 하록, 사나이의 로망을 싣고 별바다를 모험하다


'우주전함 야마토'의 대성공 이후, 마츠모토 레이지(편의상 별도의 존칭없이 마츠모토로 표기하겠습니다.)는 도에이의 간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도에이가 이끌어 오던 로봇 아니메의 주도권이 그들의 손을 떠나 선라이즈로 넘어가기 시작한 70년대 후반, 마츠모토의 장대한 스페이스 어드벤쳐는 도에이의 또다른 대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죠. 그리고 78년, 드디어 레이지버스의 세계의 한축을 지탱하는 한 사나이가 과묵한 걸음걸이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야마토와는 또다른 사나이들의 로망을 실은 우주 전함 아르카디아호와 함께 온 사나이의 이름은 캡틴 하록이었습니다.


78년 TV 시리즈 '우주해적 캡틴하록'은 스토리 텔링에 있어서는 '우주전함 야마토'에 비해 상대적으로 허술합니다. '지구를 침략한 마존에 맞서 자유를 위해 홀로 싸우는 우주해적'이라는 시놉시스는 지구의 오염된 환경을 구하기 위해 장대한 우주여행을 떠나는 야마토의 그것에 비교해 메시지나 신선도에 있어서도 별반 나을 점이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주에서의 모험과 항모들간의 장렬한 전투라는 야마토의 소재에 캡틴 하록이라는 강렬한 캐릭터가 가세한 후속 아류작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과묵하고 진지한 모습으로 사나이의 마초적인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하록의 강렬한 카리스마는 원작의 깊이와는 관계없이 마츠모토 스타일의 로망을 시청자에게 강하게 인식시키게 됩니다. 어떠한 위험과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강인한 정신력, 그것은 과거 패전 이후 자격지심에 짓눌려 있던 일본인들의 모습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었으며, 동시에 강인한 사무라이 정신을 다시 일깨우고 싶은 민족주의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우주인 침략자 앞에서도 제 밥그릇 찾기에 바빴던 한심하고 무능한 지구의 정부와 군은 과거의 부정적인 일본(또는 일본의 기성세대)에 대한 마츠모토의 우회적인 비판이었으며, 동시에 그들과는 달리 자유와 꿈을 위해 홀로 악전고투하는 하록과 아르카디아호의 승무원들은 마츠모토의 바람이 담긴 미래의 일본상이자 일본의 젊은이의 나아갈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불행하게도, 한국과 같은 나라에게 있어서는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본 제국주의의 편린과도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하록 선장은 기실 원작자인 마츠모토가 탄생시킬 당시만 하더라도 대중적인 공감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습니다만(아무래도 당시 마츠모토 선생은 야마토 쪽에 좀더 비중을 두었던 듯 싶군요.), 이를 린 타로 감독이 맡아 연출하게 되면서 원작의 캐릭터를 린 타로 스타일로 재해석하여 기대 이상의 호응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78년 TV 시리즈에 등장한 하록의 친우 토치로의 딸 마야의 경우가 바로 이런 린 타로 식 재해석의 산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투쟁과 방랑에 길들여진 거친 해적의 이미지에 친우의 딸을 보살피고 지켜주는 따뜻한 어른의 모습을 오버랩시켜 하록을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움을 갖춘 멋진 사나이로 묘사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본편의 작화감독을 맡은 코마츠바라 카즈오는 특유의 신들린 듯한 솜씨로 호리호리하지만 강한 정신력을 가진 원작의 하록과 나긋나긋하면서도 가냘픈 마츠모토 특유의 여성 캐릭터들, 땅딸막하고 보잘 것 없지만 각자의 개성과 실력을 겸비한 아르카디아호의 승무원들을 멋지게 재구성하여 시각적 공감대를 가져다 줍니다. (특히, 마츠모토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작고 못생긴 주변 인물들은 얼핏 보기에도 동양인, 아니 일본인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싶으며 이것 역시 마츠모토식 민족주의의 발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 멋진 환상의 콤비가 이후 은하철도 999로 이어지는 마츠모토 원작 만화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 감은 주지의 사실이기도 합니다.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첫번째 TV 시리즈 우주해적 캡틴하록의 오프닝 스틸 컷.


 

풍랑 속에 길을 잃은 해적, 별바다에 잠들고

TV 시리즈의 방영 이후, 극장판(우주해적 캡틴 하록: 아르카디아호의 비밀, 1978년작)으로 제작되며 '은하철도 999'와 함께 당당히 레이지버스의 한축으로 야마토를 이어가기 시작한 하록. 뒤이은 마츠모토의 초 히트작 '은하철도 999' TV 시리즈의 에피소드 '시간성' 편과,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 시리즈 2편에 모두 카메오 또는 비중있는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명실공히 마츠모토의 페르소나로 팬들에게 깊게 각인되기 시작합니다.

마츠모토가 그렸던 성장하는 주인공으로서의 모습이 '캡틴 하록'의 다이바, '은하철도 999'의 테츠로, '천년여왕'의 하지메로 그 모습을 바꾸어 형상화 되었다면, 이 하록은 이미 완성된 캐릭터로서 성장하는 청소년들을 지켜보고 도움을 주는 든든한 후원자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하록은 이처럼 다른 작품에 등장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작품에서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팬들에게 심어주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마치, 크게 히트한 이후 출연을 자제하며, CF나 뮤직 비디오에만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는 스타들처럼 말입니다.)


그로부터 4년 후, 하록은 드디어 카츠마타 토모하루 감독(마징가 Z, 그레이트 마징가, 우주전함 야마토:사랑의전사 연출)이 원톱 감독으로 나선 새로운 극장판에 등장하게 됩니다. 하록의 젊은 시절, 즉 애꾸눈이 되기 이전의 모습부터 토치로, 에메랄다스와 같은 그의 절친한 동료들을 만나게 되는 하록의 최초의 여정을 다룬 극장판 '나의 청춘 아르카디아호(1982)'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막을 연 이 작품은 기대에 못미치는 흥행 결과로 레이지버스 작품들의 흥행가도에 큰 제동을 걸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마츠모토 레이지의 작품이 20여년 가까이 만화영화화 되지 못하는 (극장판의 후일담을 다룬 '무한궤도 SSX' 외에는 20여년 동안 만화영화화 되지 않음) 단초를 제공하는 오명을 갖게 되지요. 82년 당시 흥행수입 6억 5천만엔은 대성공은 아니더라도 대참패라고는 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같은 해 개봉했던 극장판 '1000년 여왕'의 흥행수입이 10억엔 정도로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랭킹 92위에 들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도 이는 나름 타당성이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정가도를 달리고 있던 마츠모토 원작이라는 네임밸류는 이미 그 정도의 수익은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기대치를 갖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82년도 극장판 나의 청춘 아르카디아호의 스틸 컷.

 

추측하기로는 81년부터 82년을 거쳐 전 일본적인 관심을 몰고 온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 3부작'의 열풍이 아동층에 한정되어 있던 로봇 장르를 성인층과 마니아층까지 본격적으로 확장시키면서 낭만적이고 신파적인 마츠모토식 SF에서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와 드라마로 가득찬 토미노식 리얼 SF의 세계로 팬들의 관심이 쏠린 것도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교적 진부해진 레이지버스의 SF 설정도 그렇지만, 이미 그 드라마적인 전개에 있어서도 마츠모토식 로망스, 즉 선굵은 남성들의 꿈을 향한 낭만적이고 비장한 이야기가 불과 몇 년을 기점으로 낡은 구시대식의 사고방식으로 전락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요.


게다가, 이 극장판은 작품 내내 비장미, 사나이의 기개, 정복당한 지구인들의 참상에 대한 우울한 묘사에 치우친 체 하록과 토치로들의 본격적인 활약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지는, TV 시리즈의 프롤로그적 성격이 강한 모습을 보여주어, 극장을 찾았던 많은 관객들에게 긴 시간 동안 우울함과 지루함을 선사해주었을 듯 합니다. 게다가 클라이막스 또한 그다지 상쾌한 결말이 되지 못했구요. 하록의 첫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의의 외에는 너무 무겁고 지리했던 이 작품의 분위기가 바로 가장 큰 실패의 요인이 아닐까 싶군요.  

또한, 일루미다스 군에게 점령당한 지구인들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미군에게 패배한 일본을 비유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한국인으로서는 그런 설정이 마치 일본인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구한말의 모습과도 겹쳐지며, 또 이러한 모습을 일본의 만화영화가 묘사하면서 강한 거부감이 느껴진 것 역시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일본 관객들이 한국인인 제가 느낀 감정을 가졌을 리는 만무하지만, 경제대국인 된 일본에게 있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오래 전의 이야기는 이제 고리타분하거나 관심 밖의 소재는 아니었을까요.


여러가지 악재로 인해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둔 하록은 같은 해, TV 시리즈 '무한궤도 SSX'를 통해 극장판 이후의 본격적인 하록들의 첫 모험을 다룹니다. 그러나, 린 타로 감독이 이전 시리즈에서 시도했던 설정들은 이 작품에 이르러 틀어지기 시작하는데, 토치로와 에메랄다스가 극장판에서 첫 만남을 갖은 이후, 이 시리즈를 통해서 절친한 동료로 발전하고 연인의 감정을 쌓아가는 순간 토치로를 사망시킴으로써, 이전 린 타로의 TV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토치로와 에메랄다스의 딸 마야의 출생(연인이 되기 전 사망한 토치로가 에메랄다스 사이에서 마야를 낳을 시간적 여유가 없음)에 대한 오류가 발생했고, 극장판부터 함수에 거대한 해골문양을 새겨넣었던 아르카디아호는 수십년 뒤 다시 만들어진 하록 시리즈에서도 여전히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최초의 TV 시리즈에 등장했던 해골문양의 함수가 없는 아르카디아호(일설에는 이 최초의 아르카디아호는 데쓰 쉐도우 호이고, 이후의 것이 아르카디아 호로 구분된다고 합니다만)의 존재를 무색하게 하는 등, 이전 시리즈와의 많은 설정상의 마찰을 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이 작품이 만들어 낸 문제라기보다는 레이지버스의 작품들이 여러 감독의 손을 거치면서 각 시리즈의 이야기 전개를 위한 나름의 설정을 만들어 내면서 원작과의 절충을 위한 과정을 거치는 중, 이전 시리즈의 고려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것이 고의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간에) 발생한 문제라고 보는 것이 맞겠지만, 이후 수많은 팬들에게 있어서 설정의 진위 여부로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하면서 작품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레이지버스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팬들에게 의해 재해석되고 재해부되며 여러가지 가십거리를 낳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 Matsumoto Leiji & Toei Animation

두번째 TV 시리즈 '무한궤도 SSX'의 오프닝 스틸 컷.



해적, 과거에서 부활하여 신세기를 항해하다


이후, 수십년동안 레이지버스는 만화영화 팬들의 뇌리에서 거짓말처럼 잊혀져 버렸습니다. 저 90년대 초반의 리메이크 붐 당시에도 레이지버스는 그 어떤 재탄생의 조짐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1세대 아니메의 붐을 일으켰던, 아니메 시대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전설의 작품(물론, 하록은 야마토나 은하철도 999에 비해서 그 의의가 비교적 약했지만)은 철저히 신세대에게 외면받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1998년, 레이지버스의 최초의 태동을 이야기하는 '화성여단 다나사이트 999.9'가 OVA로 등장하면서 레이지버스는 오랜동안의 봉인을 풀고 신세기로의 항해를 위한 엔진 예열에 들어갑니다. 연이어 '은하철도 999 ~ 이터널 판타지'와 '퀸 에메랄다스'가 우주로의 항해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 '퀸 에메랄다스'에서 하록은 오랜만에 카메오로 출연하며 20년만의 스크린 복귀로 팬들에게 짧은 인사를 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하록의 등장씬은 말 그대로 짧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99년, 하록은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북구 전설 '니벨룽겐의 반지'를 토대로 한 유명한 바그너의 오페라 '라인의 황금'을 모티브로 한 OVA '하록 사가, 니벨룽겐의 반지~라인의 황금~(이하 하록 사가)'은, 레이지버스의 유명인사들인 하록의 영원한 벗 토치로, 토치로의 연인이자 하록의 오랜 동료인 여해적 에메랄다스, 그리고 신비의 여인 메텔 등이 모두 등장하는 가슴 뛰는 도입부와 함께 새로운 하록 전설의 시작을 알리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인간으로서는 대적할 수 없는 하록의 압도적인 강함 때문이었는지 신과 대적하는 해적이라는 거창한 판타지적 이야기 전개(물론, 모티브가 된 이야기가 북구전설이었던 것도 원인이겠지만)를 선보이면서 이전의 하록 선장과는 달리 허무맹랑하고 관념적인 이야기를 선보입니다. 거기에 6부작이라는 짧은 OVA의 편수에 비해 그 전개가 너무 늘어지면서 스케일은 굉장히 크게 시작하여 결말 자체는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실망스러운 이야기의 완성도를 보여줬던 것입니다.


결국, 이 작품은 아쉽게도 새로운 작화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하록과 레이지버스의 인물들, 그리고 장중한 오페라와의 접목이라는 의의 외에는 재미 뿐만 아니라 완성도에 있어서도 많은 아쉬움을 준 작품이 되고 맙니다. 이미 오랜 시절 구축되어온 지나치리만치 카리스마 넘치는 그의 이미지는 몇 마디의 대사와 함께 가끔 역동적으로 아르카디아호의 키를 조종하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과묵하게 서있기만 하는 도를 넘치는 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느린 전개와 맞물려 스케일만 큰 지리한 클래식 오페라처럼 인식시키고 맙니다. 하록의 모습은 기존의 이미지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작품의 재미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배우의 자세를 잊어버린 왕년의 톱클래스 탤런트와 같은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맞이하여 레이지버스는 본격적인 시동을 겁니다. '코스모 워리어 제로(2001)'를 통해 새롭게 시동을 건 레이지버스의 스페이스 어드벤쳐에서 하록은 주인공에게 쫓기는 우주 해적이라는 비중있는 조연으로 등장했고, '건 프론티어(2002)'에서는 뜬금없이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혀 선보이지 않았던 썰렁한 개그까지 말이죠.) 20년만에 복귀하여 옛 이미지 그대로 연기했다가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자 연기 변신을 시도한 톱 탤런트의 모습과 같다고 할까요. 전설로 회자되던 한 남자의 복귀는 그렇게 순탄치는 않았던 것입니다.

©1999 Leiji Matsumoto • Shinchousha/Bandai Visual • 81produce

99년작 '하록사가'의 스틸 컷.



벗이여 언젠가 또 별바다로 떠나자, 해적의 깃발 아래서...


신세기에 들어 미소녀에 대한 편향된 작품의 제작 스타일, 그리고 오래가는 작품보다는 패스트푸드처럼 금방 소비가 가능한 소재가 트렌드가 되어가면서 레이지버스의 작품들은 요즘의 기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70년대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가 그 이미지에 너무나 많이 녹아 들어있는, 비장하고 진지한 하록의 모습은 그가 갖고 있는 고전적인 남성미와 더불어 구시대의 대표적인 상징처럼 여겨지는군요.


2003년 린 타로 감독이 다시 연출한 '우주해적 캡틴하록: 끝이 없는 오딧세이'는 하록의 내면을 심도있게 다루어 보려한 린 타로 감독의 의지가 엿보인 작품이었습니다만, 덕분에 작품은 한층 더 무거워졌고, 게다가 '하록사가'에 이어 다시 한 번 초자연적인 존재와 아르카디아호와의 대결을 묘사하면서 지루한 이야기 전개를 피해가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일루미다스나 마존과 같은 실존하는 적과의 스펙타클한 스페이스 액션을 소재로 했다면 좀 더 좋은 반응을 얻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노장의 연출력은 여전히 빛났고, 과거 코마츠바라 카즈오에 버금가는 유키 노부테루의 캐릭터 디자인은 전작의 명성에 버금갈 정도였지만, 아쉽게도 이미 시대는 옛 해적의 이야기에 환호하기에는 너무 많은 다른 것들에 익숙해져 버린 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는 21세기에 리메이크된 여타 하록 시리즈에 비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주인공은 바뀝니다. 전설적인 해적의 귀항은 비록 기대에는 못미쳤지만, 그동안 그가 항해해온 수많은 별바다의 항해기록이 모두 헛되었던 것이 아니듯 이 여정 역시 그의 전설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의 항해는 우리의 추억과 맞닿아있기에 여전히 동경의 대상이고, 저 옛날 별바다를 함께 항해했던 동반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의 여정에는 제국주의의, 일본의 국수주의의 냄새가 나 가끔을 멀미가 나는 부분도 있었지만, 거대한 그의 분신 아르카디아호와 별바다를 향한 그의 항해에는 여전히 우리의 지난 시절과 추억이 흩날리는 해적의 깃발처럼 그의 옆에 영원히 놓여져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그는 별바다를 향한 기나긴 여정에 오를 겁니다, 검은 망토를 휘날리면서.
 

© LEIJI MATSUMOTO/Kobunsha • VAP • NTV ©2002 VAP • NTV

2003년작 '우주해적 캡틴하록: 끝없는 오딧세이'의 스틸 컷.



<참고 포스트>

 

[1] Captain Harlock, Wikipedia

[2] 우주해적 캡틴 하록 by 만보, Habest Days

[3] 우주해적 캡틴 하록 1978 by 캅셀, Capsule☺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4]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1982 by 캅셀, Capsule☺블로그:총천연색 리스트 제작위원회

[5] 캡틴 하록 TV 시리즈 by 슈케르

[6] 내 청춘의 아르카디아 by 슈케르

[7] 무한궤도 SSX by 슈케르

[8] 하록사가: 니벨룽겐의 반지 ~ 라인의 황금 by 슈케르

[9] 우주해적 캡틴 하록 - Endless Odyssey Outside Legend by Kewell, Kewell's Factory about Something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각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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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트는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에 실었던 ' 애니메이션 인물열전: 리튬향기의 여전사 쿠사나기 모토코'를 티스토리 옮긴 글입니다.

<프로필>
 
◈ 이름: 쿠사나기 모토코
출생에 관련된 모든 사항이 비밀에 쌓인 신비로운 여성. 어렸을 적 사고로 인해 온몸을 기계(의체)화 한 후, 나이에 맞게 몸을 바꿔온 것으로 추정. 뇌와 척수 일부분 외에 모든 것이 생체가 아닌 기계로, 인간과 사이보그의 모호한 경계에 서있는 인물. 오시이 마모루의 첫번째 극장판 'Ghost in the Shell(1995)'의 도입부에서 그녀의 사이보그 몸이 만들어지는 단편적인 장면을 엿볼 수 있다.
 
◈ 연령: 불명
만화책의 외모는 20대에 가까운 외모이고, 오시이 마모루의 극장판과 카미야마 켄지의 TV 시리즈 상에서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의 외모로 추정되나, 기계 몸이기에 외모로 실제 연령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즘식으로 바꿔 말하면 전신 성형미인이라는 소리. (베스트 아니메 사이트에서는 30대 후반 이상의 연령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글쓴 이가 신뢰할만한 출처를 찾지 못해 불명으로 표기.)

◈ 별명: 소좌 (한국식으로는 소령, 미국식으로는 Major)
과거 군에 몸 담고 있을 당시의 그녀의 계급인데, 당시 동료였던 이시카와나 바토가 습관적으로 부르는 탓에 다른 공안 9과의 멤버들도 그녀를 소좌라 부른다. 한국판 DVD 등에서는 한국이라는 정서를 감안하여 소좌와 동등한 계급인 소령으로 표기.

◈ 소속: 공안9과 (후에는 조직을 탈퇴하여 독자적으로 행동)
몸을 사이보그화하거나 뇌를 전자두뇌로 바꾸어 직접 뇌를 통해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것이 가능해진 미래의 시대이기에, 타인의 전자두뇌를 해킹하는 사이버 범죄의 발생율이 빈번하다. 이러한 고도의 사이버 범죄와 자국 내의 안보를 위협하는 각종 테러사건 등을 해결하기 위해 조직된 내무성 산하의 비밀경찰이 바로 공안 9과이다. 멤버들은 대부분 군경력을 지닌 전뇌전과 대인전투의 스페셜리스트들로, 형사출신인 토그사를 제외하고는 몸의 상당 부분이 사이보그화 되어 있다.

오시이 감독의 첫번째 극장판에서는 인형사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고 그(혹은 그녀나 그것)와 융합함으로 인해 쿠사나기이면서도 쿠사나기가 아닌 새로운 무엇인가로 환생한다. 그 이후 공안 9과를 탈퇴하여, 두번째 극장판인 '이노센스(2004)'에서는 단독으로 바토를 도와주기도 한다. (이 인형사와의 융합은 시로 마사무네의 만화책에서도 다루어졌던 전개이다.)

패러랠 월드격인 공각기동대 3번째 TV용 단편 'Solid State Society(2006)'에서는 극장판과는 다른 이유(그러나 정확히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음. 단지, 소수정예에서 거대조직으로 변모하는 공안 9과를 떠나 독자적인 수사활동을 추구했던 쿠사나기의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추정)로 인해 공안9과를 탈퇴했다가 클라이막스에 극적으로 공안 9과와 공동전선으로 사건을 해결. 단, 다시 공안 9과에 합류하는지의 여부는 작중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 특기: 전뇌전, 테러진압, 인질구출, 암살
비핵대전 시절의 군경력으로 인해 그녀는 잠입, 침투, 인질구출 및 암살과 같은 소규모 특수작전임무의 스페셜리스트이며, 동시에 전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꼽는 전뇌 해커이기도 하다. 비록 극장판의 인형사나 TV 시리즈의 웃는 남자, 개별 11인의 쿠제, 내무성의 고다, 괴뢰회 같은 대립측 캐릭터의 활약을 강조하기 위해 조금 덜 다루어진 듯한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그녀가 그들과 버금가는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들 이상의 해커라는 사실은 극장판 '이노센스'나 TV 단편 'Solid State Society'에서 그 면면을 엿볼 수 있다.

그 외의 특기(?)라면, 초고가의 특제 의체를 적극 활용한 관능미 넘치는 바디 라인이라고나 할까. 단, 육감적인 스타일의 패션을 보여주었던 만화책에 비해 극장판이나 TV 시리즈에서의 헤어 스타일이나 패션감각은 대체적으로 하드웨어에 못미치는 감각을 보여주지 않나 싶다.(아마도, 그것은 오시이 감독이나 그의 문하생이었던 카미야마 감독의 리얼리티적인 작품관에 기인한 듯.) 그러나, 그 보라빛 단발머리야말로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 포인트이기도.

◈ 그 외 신변잡기
자신의 비밀 아지트를 몇 곳 소유하고 있으며, 원격조종용 의체도 다수 소유하고 있는 등, 상당한 재력가로 추정. 그것이 위험천만한 군과 공안에 근무한 그녀의 직업적 특성에 따른 보수 때문인지, 이제는 알 수 없는 그녀의 먼 과거에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초일류 해커라는 특성을 발휘하여 어디서 못된 짓을 해서 번 것인지는 TV 시리즈나 극장판만으로는 추정 불가능.

TV 시리즈 1기에 등장했던 그녀의 여성친구들에서 추정할 수 있듯이 레즈비언적인 성취향을 지닌 듯 싶다. 단, TV 시리즈 2기에서 소년을 유혹하던 장면이나 코믹스의 여타 장면들로 미루어 보아 양성애자로 추정. (자유자재로 의체를 바꿀 수 있고, 온갖 전뇌를 돌아다녔으니 아마 누구라도 그렇게 된다면 성정체성을 잃어버릴지도. 언젠가 아는 친구가 말했던 '환생하면 여자로 태어나 여성의 오르가즘을 탐구해보고 싶다.'는 절규는 쿠사나기의 모습에서 그 답을 찾을 수도 있을 듯.)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특수공작원... 코믹스
 
쿠사나기 모토코는 89년 시로 마사무네 원작의 만화책 공각기동대를 통하여 세상에 등장합니다. 그녀는 시로 마사무네의 이전작 'Appleseed(1985)'의 여주인공 듀난 너츠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시로 마사무네의 육감적인 데생력에 힘입어 여성스러우면서도 강인한, 마치 한마리의 날렵한 치타와도 같은 유려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여인이기도 합니다.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은 사이버 펑크적이면서도 디테일한 설정 덕에 모국인 일본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더욱 호평을 받고 있는데요, 기실 애플시드나 공각기동대 모두 캐쥬얼하게 접할 수 있는 만화책이라기보다는 치밀한 세계관과 디테일한 메카 묘사, 복잡하고 세밀한 데생 덕에 매니아적 색채가 강한 사이버펑크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이 두 작품은 모두 일정연령 이상의 성인층을 위한 작품이라는 이야기와 상통하기에 성인층에 대한 일종의 팬 서비스 차원(내지 원작자인 시로 마사무네의 성적 취향)에서 듀난이나 쿠사나기 모두 굉장히 육감적이고 섹슈얼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기존의 SF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에 비해 (모습에서나 정신적으로나) 한층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동시대의 만화영화 주인공들 중에는 87년에 OVA로 제작되었던 켄이치 소노다(만화가 겸 캐릭터 디자이너)의 '버블검 크라이시스'에 등장하는 프리스나 실비아와 비슷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프리스는 듀난과, 실비아는 쿠사나기와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을 듯. 물론,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켄이치 소노다가 그렸던 여주인공들은 밀리터리 스페셜리스트라는 측면에서 시로 마사무네의 캐릭터들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이 버블검 크라이시스 이외에도 그의 또다른 작품인 '갈포스(1986)'의 라비, 엘자, 루피, '건 스미스 캣츠(1995)'의 라리 등이 비슷한 성격의 인물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건 스미스 캣츠의 주인공 라리의 경우, 단발의 헤어스타일에서부터 쿠사나기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하죠.
 

© SHIROW MASAMUNE / KODANSHA

그림1. 애플시드 만화책 표지(좌측), 공각기동대 만화책 첫번째 시리즈 미국판(중앙), 두번째 시리즈 Man Machine Interface 미국판(우측). 만화책의 쿠사나기는 극장판이나 TV 시리즈보다 좀 더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단, 데생 스타일의 차이로 인해 시로 마사무네의 육감적인 캐릭터들은 켄이치 소노다의 귀여운(?) 캐릭터들에 비해 성인 취향에 더 근접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켄이치 소노다의 캐릭터들이 성숙하고 이지적인 여인과, 보이쉬한 터프걸, 여성스러운 청순녀, 깜찍하고 귀여운 미소녀 등으로 나뉘어 거의 그녀들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시로 마사무네의 그녀들은 원톱 여주인공으로서 남성미를 자랑하는 파트너(브리아레오스나 바토)와 함께 강한 대비를 보이면서 극을 이끌어 가는 것이 큰 차이라 하겠습니다
 
성인 취향(이면서 동시에 남성 취향)의 극단적인 모습을 갖고 있는 시로 마사무네의 캐릭터들이지만, 듀난과 쿠사나기는 몇몇 부분에서 서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사이보그가 되어버린 남자친구 브리아레오스를 일편단심으로 바라보며, 콤비플레이로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듀난이 젊고 패기 넘치는, 그리고 순수하고 우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쿠사나기는 인간과 사이보그의 경계에 선 모호한 정체성과 남자 친구와 레즈비언 친구를 모두 사귀는 양성애적 성취향, 자신의 적수였던 인형사와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자아로 탄생하는 불확실한 가치관 등 여러 면에서 사이버펑크 성인물의 주인공에 걸맞는 혼돈스럽고 규격화되지 않은 복잡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쿠사나기의 젊었을 적 모습이 듀난이고 듀난이 많은 경험과 세월을 겪어 성숙된 모습이 쿠사나기라고 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군요.

© KENICHI SONODA

 그림2. 갈포스(좌측), 버블검 크라이시스(중앙), 건 스미스 캣츠 (우측). 켄이치 소노다의 작품들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SF, 또는 밀리터리 액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로 마사무네의 작품들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결국, 만화책의 마니아적인 색체 때문이었는지 쿠사나기는 쉽게 영상매체를 통해 모습을 보이지는 못합니다.(듀난은 88년작 OVA 애플 시드로 먼저 아니메계에 데뷔를 합니다만, 그리 큰 반응을 얻지는 못합니다.) 아마 당시가 SF 장르가 몰락하면서 복고와 리메이크 바람이 불던 일본 아니메의 암흑기의 한가운데였다는 사실도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군요. 결국, 90년대 중반까지 그녀를 기억하는 이는 소수의 매니아에 불과했었습니다. 90년대 중반까지는 말입니다.
 
 
관능을 벗고 철학을 입다... 극장판 공각기동대
 
95년, 에반게리온(이하 에바)의 써드 임팩트('은하철도 999'와 '기동전사 건담', '마크로스'로 대표되는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을 세컨드 임팩트로 가정했을 때)와 함께 일본 아니메는 수년간의 침체를 딛고 신세기로의 도약을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아니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단연 에바를 꼽고 있고 저 역시 그 점에 있어서 별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 써드 임팩트를 온전히 에바 혼자서 열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에바가 아니메 마니아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일반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일본 내에서의 국지적 임펙트였다면(물론, 그 이후에 세계적인 반향을 얻었지만),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1995, 이하 공각기동대 극장판)'과 오토모 가츠히로가 총감독을 맡았던 '메모리즈(1996)',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1997)'로 이어지는 극장용 아니메의 삼연속 랑데뷰 홈런은 일본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아니메의 위상을 높여준 글로벌 임팩트이지 않았나 싶은데요. 바로 그 첫번째 홈런인 공각기동대 극장판의 주인공이 바로 그녀, 쿠사나기 모토코인 것입니다. (결국, 에바가 일본 만화영화 내수시장에 활력을 주었다는 점에서는 뒤의 세 작품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고, 뒤의 세 작품은 일본 만화영화의 작품성을 전세계적으로 알렸다는 점에서 에바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국가 기밀을 탈취해서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려는 면책특권을 지닌 외교관을 눈깜짝할 새에 사살한 후, 빌딩의 저 아래로 광학미체(간단히 말해서 투명장치)와 함께 사라지는 도입부, 곧이어 펼쳐지는 신비로운 오프닝 테마를 배경으로 세밀한 의체 제작과정을 묘사한, 당시로서는 극한에 이른 비쥬얼은 충격과 놀라움 그 자체였으며, 아니메 史에 길이 남을 명장면 중의 하나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는 오시이 마모루식 완벽주의의 집합체였던 것입니다.
 

© 1995 SHIROW MASAMUNE / KODANSHA / Bandai Visual

그림3. 쿠사나기의 의체(사이보그 몸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놀라울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했던 극장판의 인트로 씬. 의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마치 만화책의 쿠사나기에서 극장판의 쿠사나기로 변모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듯 하다. 극장판의 캐릭터 디자인과 키 애니메이터는 인랑의 감독 오키우라 히로유키가, 작화감독은 Production I.G의 또다른 명 감독인 붉은광탄 질리온의 니시쿠보 미즈호가 맡아 새로운 쿠사나기를 그려내었다. 

오시이 감독은 시로 마사무네의 멋진 세계관을 극장판으로 옮기면서 쿠사나기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리뉴얼 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를 감싸고 있던 최대의 무기(?)인 관능미를 과감히 벗겨버리고, 정체성에 방황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탈바꿈 시켜버린 것이었습니다. 관능미를 벗어버린 그녀는 오랫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기다렸다는 듯 풀어놓으며, 스탭진이 창조해 낸 놀라우리만치 현실적이고 어두운 도시에서 철학적 향연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Ghost in the Shell'이라는 제목 그대로 쿠사나기의 관능미 속에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뇌가 마치 껍질 속의 고스트처럼 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시이 감독은 자신의 해석대로 묘사했던 쿠사나기와는 반대로 원작의 디테일한 밀리터리적 설정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켜 실사 영상을 방불케 하는 사실적인 연출을 선보입니다. 머신건과 권총을 능숙하게 조립하고 다루는 모습은 특수공작원이라는 그녀의 신분을 생생하게 묘사했고, 우리는 여성을 넘어 강인한 카리스마와 실력을 가진 주인공으로서 그녀를 인정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인간과 사이보그의 경계에서 방황하던 쿠사나기가 인형사와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개체로서 네트워크를 향해 나아가듯, 전형적 히로인의 테두리에 묶여있던 그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성별을 극복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으로 새로운 진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공각기동대 극장판은 사실 일본 개봉 당시에는 흥행에 참패하고 맙니다. 관능미를 벗어버린 어둡고 우울한 여주인공과 오시이 감독의 난해한 연출력이 대중들의 외면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그러나,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이 외국에서 호평을 얻었던 것처럼 극장판은 외국 개봉 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합니다.(해외에서의 성공 이후 다시 일본에서 재개봉되었구요.)

'전뇌를 통해 네트워크에 가상현실로 접속하고, 타인의 뇌를 해킹하여 가상의 기억을 심어놓을 수 있으며, 자신의 기억을 모두 데이터로 백업하여 네트워크에 저장한다.'는 시놉시스는 당시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컴퓨터 네트워크의 최상위 형태의 진화였고 거기에 일반 아동용 만화영화, 아니 실사영화마저도 뛰어넘는 치밀한 스토리와 극사실주의는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많은 영화인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것입니다. 세기말 등장했던 초 화제작 '매트릭스(1999)'의 감독 워쇼스키 형제(이제는 남매)가 이 공각기동대 극장판에 큰 영향을 받았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며, '터미네이터', '타이타닉', '아바타'의 SF 거장 제임스 카메론 역시 공각기동대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기도 합니다.
 

© 1995 SHIROW MASAMUNE / KODANSHA / Bandai Visual

그림4. 광학미체와 함께 빌딩의 아래로 사라지는 쿠사나기의 극장판 오프닝 씬. 광학미체는 공안 9과 요원들의 트레이드 마크인데, 광학미체 속에 몸을 숨기는 쿠사나기의 모습이 의체라는 껍데기 속에 인간임을 증명하는 고스트가 숨어있는 모습과 겹쳐지는 듯하다.

그리하여 여자를 넘어섰던 그녀의 변신은 결국 강렬한 잔상을 남기면서 일본 만화영화사에 길이 기록됩니다. 관능미에 가려져 연기력을 평가받지 못하던 그녀가 작가주의 감독을 통해 새로운 연기파 배우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철학 위에 관능과 카리스마를 입다... TV 시리즈
 
95년 극장판과 함께 글로벌한 센세이션을 몰고 왔던 그녀는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마치, 인형사와 융합해 공안 9과를 떠나 네트워크로 잠적해버린 극장판의 뒷모습처럼 말이죠. 그녀는 아니메와는 별개로 97년도 PS용 게임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극장판의 어두웠던 모습과는 다른, 만화책의 쿠사나기에 충실한 예전의 그녀로 돌아와 만화책의 그녀를 몰랐던 이들에게는 신선함을, 만화책의 팬들이었던 이들에게는 쿠사나기의 역동적인 모습을 직접 컨트롤 할 수 있는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그리고 7년만인 2002년, 드디어 네트워크의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던 그녀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TV 시리즈, 공각기동대 Stand Alone Complex(이하 SAC)로 말입니다.
 
Production I.G의 차세대 주자인 카미야마 켄지가 감독을 맡은 TV 시리즈 SAC에서 쿠사나기는 극장판의 그녀와는 또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시이 감독의 쿠사나기가 인간과 기계 사이의 정체성에서 방황하며, 어두운 고독의 세계를 홀로이 가는 한마리의 외로운 늑대의 모습이었다면, 카미야마 감독의 그녀는 공안 9과의 2인자로서 개성 넘치는 공안대원들을 강인한 카리스마로 이끌어가는 카리스마 넘치는 암사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 SHIROW MASAMUNE ~ PRODUCTION I.G / KODANSHA

그림5. TV 시리즈 1기의 장면들. 만화책의 쿠사나기는 마니악했고, 극장판의 그녀는 난해했다는 점에서 TV 시리즈의 그녀가 상대적으로 대중적이고 접하기 쉬웠으며, 또한 그 카리스마와 매력으로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않았나 싶다. 

어찌보면, 극장판의 시니컬한 그녀가 되기 직전의 좀 더 젊은 쿠사나기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 더불어 흥미진진해진 이야기와 다양한 에피소드,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적인 고뇌를 보여주었던 극장판의 쿠사나기에 비해 오히려 인간적으로 좀 더 시청자에게 가까워진 그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외적인 볼거리에 치우치지 않은 스토리의 정합성은 놀라울 정도로 치밀해서 메인 에피소드 사이사이에 배치된 단편 에피소드도 별도의 이야기로서도 뛰어난 완성도와 함께 주제의식을 임팩트하게 전달했고, 그를 위해 때로는 쿠사나기를 메인 주인공으로, 때로는 조연급 내지는 아예 이야기의 흐름에서 빼버림으로써 공각기동대를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닌, 공안 9과의 인물(과 기계)들을 모두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단독 주인공이 아닌 여러 주인공 중 하나로 작품을 끌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강렬한 카리스마는 오히려 시리즈 내내 그 존재감을 잃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SAC에서 이미 그녀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최고조에 이른 모습으로 표현되었던 탓일 겁니다. 그러면서도 제작진은 그녀를 슈퍼 히로인으로 묘사하지 않고, 적절한 한계와 긴장감을 부여함으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고도의 테크닉을 보여줍니다. 오시이 감독의 극사실주의적 작품처럼 완벽함을 추구하면서도 내용 전개에 있어서는 적절한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성격을 잃지 않은 SAC를 통해 그녀는 비로소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 갖춘 여배우로 태어난 것입니다.

오시이 감독만이 창조해낼 수 있을 것 같던 그녀는 이렇게 신예 카미야마 감독에 의해 난해함을 벗어버리고 강렬한 카리스마와 훨씬 더 강조된 여성성을 바탕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아름다우면서도 냉철한 그녀, TV 시리즈 1기의 엔딩곡 'Litium Flower'야말로 그녀를 정의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싶군요.
 
SAC는 성인용 작품이면서, 게다가 일반 지상파가 아닌 위성 케이블 방송의 PPV(Pay-Per-View: 시청 전에 일정금액을 결제하면 결제한 금액만큼 시청이 가능한 방식으로, 회당 결제방식의 주문형 비디오 VOD와는 차이가 있는 유료시청 방식. 글쓴이 주.) 형태로 방영하는 작품으로서 2기 제작이 어렵지 않나라는 예상을 깨고, 테러리스트를 사살하고 빌딩 아래로 광학미체와 함께 아스라이 사라지는 유명한 쿠사나기의 극장판 오마쥬씬과 함께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2기에서는 그녀를 스크린에 데뷔시킨 오시이 마모루 감독도 스토리 컨셉으로 참여하는데요, 오시이 마모루는 SAC로 그녀를 보내고 비슷한 시기의 극장판에서는 그녀를 빼버린 체, 바토와 토그사만을 등장시켜 모토코가 사라진 이후의 공각기동대를 새롭게 그려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오시이 감독을 위해 그녀는 비록 목소리로나마 극장판에 등장하기도 하죠.

© SHIROW MASAMUNE ~ PRODUCTION I.G / KODANSHA

그림6. 오시이 마모루가 스토리 컨셉으로 참여하면서 묵직해진 스토리와 함께 그녀의 과거를 단편적으로 볼 수 있었던 SAC 2기는 배경이 된 세계관에서 한국이 비핵대전으로 인해 몰락하고 한국민들은 난민이 되어 중국과 일본으로 뿔뿔이 흩어졌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채용함으로써 우리에게는 불편한 느낌을 준 것도 사실이다. 
 
만화책을 거쳐 극장판과 융합하고, 다시 극장판을 거쳐 TV 시리즈와 융합하면서 그녀는 계속해서 새로운 개체로서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쿠사나기 모토코를 의식한 스탠드 얼론 컴플렉스
 
쿠사가기가 보여준 강인한 카리스마와 행동력을 가진 여성상은 앞서도 언급이 되었듯이 '버블검 크라이시스'와 같은 또다른 만화영화나, 각종 액션영화의 여주인공들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널리 익숙해진 모습이기도 합니다. 과연 누가 그런 여성 캐릭터의 시초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TV 시리즈 1기의 최종화에서 웃는 남자와 쿠사나기가 정의했던 스탠드 얼론 컴플렉스(Stand Alone Complex: 한 명의 사람이 전달한 정보를 통해 다수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일한 행동을 보이는데, 이 때 그들에게 계시를 준 최초의 사람은 선두에 나서지 않은 체, 그 정보를 이어 받은 불특정 다수의 개인들이 마치 자신이 오리지널인양 행동하지만 그 방향성은 잃어버린 상태. 글쓴이 주.)와도 같이, 스스로가 오리지널인듯 화면에서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자신만의 개성을 잃어버린 체 모방을 반복하는 캐릭터도 있고, 자기만의 독특한 매력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캐릭터도 있습니다만, 그들 중에서 가장 빛을 발하고 있는 캐릭터는 단연코 쿠사나기를 뽑지 않을 수 없군요. 오리지널을 능가했는지도 모를 그녀의 존재감은 이제 만화영화 뿐만 아니라 영화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공각기동대'가 헐리우드에서 실사영화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들려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이런 여성을 넘어선 강인함과 함께 강조되는 관능미나 성적 묘사는 분명 쿠사나기를 위시한 강인한 여성 캐릭터들을 남성 시청자들에게 어필시킬 수 있는 매력포인트이면서 동시에 그녀들을 성적 판타지의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양날의 검이기도 합니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에 의해 그러한 부분이 많이 거세되었으나, 카미야마 감독의 TV 시리즈는 (원작과는 다른 형태였지만) 성인물의 여주인공으로서 그녀의 성적 매력을 작품 내에서 은근히 자극했었죠.

비록 전체적인 스토리 전개의 진지함 속에 드러난 일종의 팬 서비스적인 형태였지만, 결국 강인한 여주인공으로서 다른 여성 캐릭터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녀 또한 결국은 남성들이 창조해 낸 성적 판타지의 굴레를 완벽하게 떨쳐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설정은 동시에 그녀가 사이보그의 몸으로서 자신이 기계가 아닌 여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설정으로도 사용되고 있기에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극장판에서 네트워크와 융합되어 사라져 버린 그녀는 TV 단편 '공각기동대 SAC Solid State Society(SAC 3기)'를 통해 잠시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만, 여전히 무한한 네트워크의 공간 속에서 기약없는 여행을 떠난 체입니다. 마치 샤아와 아무로가 액시즈의 빛과 함께 우주의 저편으로 생사를 알 수 없는 여행을 떠난 것처럼, 메텔이 은하철도 999에 몸을 싣고 영원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하록 선장이 아르카디아호와 함께 별바다로 정처없는 여행을 떠난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녀의 다시 돌아오는 언젠가, 화면에서는 그녀의 귀환을 알리는 리튬 꽃의 메마른 금속향기가 광학미체의 미세한 시각적 간섭과 함께 우리의 감각을 일깨울지도 모릅니다.

© SHIROW MASAMUNE ~ PRODUCTION I.G / KODANSHA

그림7. SAC 3기는 연재물이 아닌 2시간 분량의 TV 단편으로 제작되어 일종의 팬서비스적인 느낌을 주었는데, 여기서 쿠사나기는 이유를 밝히지 않은체 공안 9과에서 탈퇴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여 마치 극장판에서 인형사와 융합하여 공안 9과를 떠난 다음의 그녀의 행적을 묘사한 듯한 착각을 주기도 했다. 실제 TV 시리즈 SAC와 극장판의 스토리는 연관성이 없는 이야기로, 일종의 패러랠 월드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참고 포스트>
 
1. 쿠사나기 모토코, 위키피디아


공각기동대 3종 패키지 :래핑맨, 인디비주얼 일레븐, S.S.S (6DISC) - 10점
카미야마 켄지 감독/미라지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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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트는 '엘렌 실:라 루:멘 오멘티엘보 at NAVER'에 실었던 '애니메이션 인물열전: 아니메의 영원한 페르소나 샤아 아즈나블'을 티스토리로 옮긴 글입니다.

<프로필>


◈ 본명: 캬스발 램 다이쿤 (U.C 0059년 ~ U.C 0093년)

어린 시절 마스가에 입양되었을 당시에는 '에두아르드 마스(Edouard Mass)'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으며, 이후 마스가를 나와 0074년 지온의 사관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샤아 아즈나블'이라는 이름을 사용. 1년 전쟁 종결 후, 종적이 묘연(액시즈에 몸을 담고 있었다고 함)하다가 다시 지구권으로 돌아와 에우고의 핵심 일원으로 참여하며 '쿠와트로 버지나'로 이름을 바꿈.

가족관계: 1남 1녀 중 장남.
지온공국의 창시자 지온 줌 다이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데긴 소도 자비에 의해 아버지가 암살되고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목숨을 부지한다. 여동생인 아르테시아 줌 다이쿤(세일러 마스)(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남아 있는 유일한 혈육.

별명: 붉은 혜성 
붉은 색의 쟈크를 탄 체 고속 강습 공격으로 연방군의 전함을 차례로 격침하는 모습에서 붙여진 별명. 흔히들 샤아가 조종하는 기체는 통상의 3배 속도로 움직인다고 하여 아군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자 적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퍼스트 건담에서 샤아가 최초로 등장할 때, 통상의 세 배 속도라고 연방군 오퍼레이터가 친절히 설명.)

사망경위
시신을 목격한 사람도 없고, '기동전사 건담:역습의 샤아'에서조차 그 마지막을 확실하게 묘사하지 않아 불분명하지만, 지구로 낙하하던 액시즈와 함께 그의 평생의 라이벌 아무로 레이와 함께 전사한 것으로 추정, 방년 34세. (혹시나 살아 있지 않을까 하는 팬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원작자인 토미노 감독은 한 대담에서 샤아가 확실하게 죽었다고 단정. 개인적으로는 Z 건담에서 행방불명된 체로 끝나는 것이 제일 낳은 결말이라고 생각 중.)


붉은 혜성의 탄생 전


그의 탄생전, 즉 70년대 초중반의 로봇물에서 악역이란 동전의 앞 뒷면처럼 주인공과 정반대인,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였습니다. 로봇물의 붐을 일으킨 '마징가 Z'의 아수라 백작은 남녀의 모습을 반반 가진 추악한 얼굴과 함께 '마징가 Z 타도'라는 목적에 사로잡힌 광기어린 모습을 보여주며, 마징가 Z의 조종사 카부토 코우지(쇠돌이)의 열혈과는 어떤 의미에서는 동질의 뜨거움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와는 정반대의 음흉하고 부정적인 기운을 화면에 온통 뿜어냈습니다. 바꿔 말하면, 아수라 백작의 광기스러움이 극에 달하고 그 음모와 광폭함이 강렬해지면 강렬해질수록 주인공 카부토 코지의 열혈스러운 정의감은 상대적으로 더욱 빛을 발하는 형상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보스인 헬박사보다는 매회 카부토와 대치하는 아수라 백작이 실질적인 대립각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싶군요.)

이렇게 강렬한 악역은 시리즈가 바뀌고 새로운 로봇이 등장하더라도 또다른 형태의 악랄함으로 재무장하고 시청자(어린이들) 앞으로 다가옴으로써 주인공이라는 빛을 더더욱 밝혀주는 어둠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을 향한 어린이들의 감정이입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어린이들은 자신과 주인공을 동일시하며 로봇 아니메의 세계로 흠뻑 빠져 버렸던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만화영화 주인공과의 강렬한 자기 동일시에는 주인공을 돋보이기 위해 온갖 형태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였던 그림자 같은 악역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수라 백작(마징가 Z), 암흑대장군(그레이트 마징가), 베가대왕(그렌다이저), 다리우스 대제(대공마룡 가이킹).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그러나, 반복되는 로봇 아니메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비열하고 사악하며 광기에 찬 악당들의 모습은 세월이 흘러가며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시작은 바로 이제까지 로봇물을 이끌어 오던 토에이 동화가 아닌, 소에이샤라 불리는 작은 제작사(후일 선라이즈로 사명 개명)로부터였습니다. 데즈카 오사무의 제자로서 '철완 아톰(1967)' 등을 통해 이미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고 '바다의 트리톤(1972)'을 통해 TV 시리즈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했던, 젊은 애니메이터 토미노 요시유키가 감독을 맡은 '용자 라이딘(1975)'은 기존의 도에이 동화 로봇물의 아성에 도전하기 위한 몇 가지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전의 악역과는 다른 모습의 악역의 등장이었습니다.

토미노 감독은 악역들이 주인공과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대립각을 이루었던 기존의 형세와는 달리, 주인공과 동일선상에서 경쟁을 하게 되는 라이벌 형태로의 구도로 악역 캐릭터를 설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당시 모험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인공을 빛나게 하기 위한 역할 이상의 무엇인가를 부여받지 못했던 악역 캐릭터들에게도 자신만의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자칫하면 시청자들이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을 방해할 수 있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으니까요. 토미노 감독의 이런 도전적인 설정을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디자인한 캐릭터가 바로 '프린스 샤킨'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왕자를 연상시키는 듯한 복장과 가면을 쓴 샤프하고 늘씬한 미남자(?) 샤킨은 기존의 흉폭하고 흉물스러웠던 로봇물의 악역 캐릭터들과는 그 모습에서 확실히 차이를 달리했고, 이전까지의 단순 이분법적인 선악 캐릭터의 구분을 외모에서부터 서서히 모호한 형태로 바꾸어가기 시작합니다. 비록 최초의 시도였기에 샤킨은 외모 이상의 캐릭터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를 보여주지 못하고 여느 악역과 다를 바 없는 성격으로 묘사되었습니다만, 분명 이것은 기존의 로봇물과는 다른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는 전조였던 것입니다.

지만, 이러한 토미노 감독의 시도는 시청률에 민감한 TV 시리즈의 한계에 부딪혀 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라이딘의 오컬트적인 배경과 묘사는 첨단 과학의 집대성으로 묘사되었던 당시의 슈퍼로봇들과는 색다른 이질감을 주었고, 그것은 제작사 측면에서는 참신함이라기보다는 시청률에 대한 우려감을 심어주었던 듯 싶습니다. 결국 라이딘은 제작을 맡았던 토호쿠 신사가 시청률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삐꺽거리기 시작했고, 26화를 기점으로 감독의 경질이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3] 참조) 그리고 나가하마 타다오 감독 체제(토미노 감독은 감독보조 격하)로 바뀐 이후의 라이딘에서 결국 프린스 샤킨은 거대화된 체 라이딘과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프린스 샤킨(라이딘), 대장군 가루다(컴배틀러V), 프린스 하이넬(볼테스V), 리히텔 제독(투장 다이모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허나 이러한 사정 속에서도 시청률에서 기대 이상의 선전을 보였던 라이딘을 통해 변화의 물결은 조금씩 큰 파도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프린스 샤킨의 조기 강판을 결정했던 나가하마 감독은 오히려 차기작 '초전자로보 컴배틀러 V(1976)'에서 미남 캐릭터인 대장군 가루다를 적 캐릭터로 등장시킴으로써, 토미노 감독이 시도했던 악역 캐릭터의 변화를 계승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샤킨이 외모에서만 변화를 보였던 것과는 달리 가루다는 자신의 신념과 임무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제서야 악역 캐릭터는 조금씩 자신만의 이야기를 시청자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주인공 외에 다양한 캐릭터들의 이야기, 즉 다양한 캐릭터 성이 서서히 작품에서 커다란 부분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가하마 감독은 컴배틀러 V의 대성공 이후 '초전자머신 볼테스 V (1977)'의 프린스 하이넬, '투장 다이모스 (1978)'의 리히텔 제독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미남 악역 캐릭터들을 화면에 속속 등장시키면서 이후 로봇물에 있어서 새로운 인물구도를 제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1979년,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과 야스히코 요시카즈 작화감독은 이전까지 등장했던 로봇물의 미남 악역 캐릭터를 집대성하면서 동시에 앞으로 등장할 모든 미남 악역 캐릭터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게 되는 한 사내를 탄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붉은 혜성의 탄생, 그리고 생애


그가 탄생부터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조상뻘이라고도 볼 수 있는 프린스 샤킨의 첫 글자 '샤아'라는 음절과 샹송가수 샤를르 아즈나브르(Charles Aznavour)에서 이름을 따온 샤아 아즈나블은 자신만큼이나 당시의 작품과는 궤도를 달리했던 로봇물 '기동전사 건담(1979)(이하 퍼스트 건담)'의 TV 시리즈 시청률 부진으로 오히려 작중에서 가르마 쟈비를 죽음에 빠뜨린 후에는 잠시 등장하지 못하는 치욕을 겪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 당시 시청률 부진에 대한 대책으로 그의 조기 퇴장이 제작진 사이에서 제기되기도 했었다는군요. 결국 샤아의 조기 퇴장이라는 위기사태는 샤아의 계속적인 출연을 바랬던 소녀팬들 팬레터를 기점으로 극적인 반전을 이루게 됩니다. [1] 참조) 결국 시청자들의 외면 속에 52화 예정이 43화로 조기종영되면서까지 쓸쓸하게 퇴장했던 건담과 샤아. 이렇듯 그의 등장이 처음부터 모든 이들에게 환영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쓸쓸한 종결에서부터 신화는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재방송에 대한 요청과 건담 프라모델의 판매 호조 등 어린이가 아닌 만화영화 마니아들의 폭발적인 지지에 힘입어 극장판 3부작으로 방영된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1981~82)'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오며, 드디어 일본 만화영화史에 리얼 로봇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예고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후폭풍과 함께 통상의 3배의 속도로 팬들을 사로 잡아버린 이가 바로 '붉은 혜성' 샤아 아즈나블이었습니다.


주인공을 성장시키기 위한 존재로서의 샤아였지만, 라라아와 아무로와의 만남을 통해 뉴타입의 가능성을 인식하면서 그 역시 성장하게 된다. ⓒ SUNRISE/SOTSU AGENCY

'용자 라이딘'의 샤킨과 흡사한 가면을 쓴 이 신비한 미남자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신분을 숨긴 체 지온공국의 주목받는 청년장교로 성장하면서 주인공인 아무로 레이 일행과는 다른 드라마를 그려갑니다. 그의 복수극은 사이드 7에서 연방군이 비밀리에 제작하던 모빌슈트의 정찰 임무를 통해 새로운 기점을 맡게 되는데, 한 지온군 병사의 호승심과 그로 인한 사이드 7의 인명 피해, 이런 참상을 좌시하지 않던 한 어린 소년이 충동적으로 탑승한 연방군의 비밀 병기 건담의 기동으로 인해 비로소 주인공 아무로 레이의 얘기와 그의 얘기는 오버랩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퍼스트 건담에서의 샤아의 모습은 이전까지의 악역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악역이 아닌 라이벌로서, 즉 또다른 인격체로서 작품에 등장한 본격적인 캐릭터의 모습이었다는 점입니다. 로봇의 성능보다는 탑승하는 파일럿의 역량을 중시하게 된 퍼스트 건담의 로봇조종 방식은 샤아라는 인물의 압도적인 모빌슈트 조종술과 아무로의 아직은 초보적인 그것을 오버랩 시킴으로써, 샤아를 아무로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눈 앞의 적으로 묘사합니다. 주인공과 대립을 이루던 이전의 악역들이 총사령관 내지는 총지휘관이라는 직책으로 인해 주인공과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대립을 이루었다면 샤아는 처음부터 주인공 일행과 맞닥뜨리고 갈등을 부여하는 '실질적인 라이벌 관계'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신념 때문에 갈등(컴배틀러 V의 가루다)하고, 출생으로 인해 갈등(볼테스 V의 하이넬)하고, 자신의 여동생과 적과의 사랑으로 인해 갈등(다이모스의 리히텔)하던 나가하마 감독의 낭만로봇 3부작의 악역 캐릭터들의 모습에서 더 나아가, 샤아는 무섭게 성장하는 주인공 아무로와의 파일럿으로서의 경쟁심, 자신이 사랑했던 라라아가 뉴타입으로서 아무로와 교감하는 것에 대한 질투심, 연방군으로서 자신과 맞서 싸우는 여동생 세일러에 대한 연민, 자신의 원 목표였던 자비가에의 복수 등 좀 더 다양한 갈등 속에 노출됨으로써 주인공 이상의 복잡한 갈등 구조와 드라마를 갖고 작품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그야말로 '반대편의 주인공'이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퍼스트 건담으로 일본 만화영화사에서 새로운 조명을 받기 시작한 샤아 아즈나블은 리얼로봇의 전성기이자 아니메 전성기였던 80년대에 이르러 최고의 카리스마로서 만화영화 팬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합니다. 리얼로봇의 본격적인 러쉬가 시작되는 80년대 초중반, '성전사 던바인(1983)'의 번 버닝스, '중전기 엘가임(1984)'의 갸브레 드 갸브레이, '기갑계 가리안(1984)'의 하이샬랏트 등 다양한 악역, 아니 라이벌 캐릭터들이 주인공과 갈등구조를 끌어나가는, 그야말로 샤아 아즈나블의 계승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만약, 샤아가 극장판 건담 3부작을 끝으로 (자비가의 복수를 마친 그가 극중에서 조용히 사라졌던 것처럼) 일본 만화영화에서 종적을 감추었다면 그의 카리스마는 더이상 지속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만, 주변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팬들의 속편에 대한 기대는 갈수록 커져만 갔고, 특히나 건담 프라모델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던 반다이에게 있어서 새로운 건담 시리즈의 제작과 그에 따른 수많은 프라모델의 출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금맥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전작과는 달리 상업적인 기획 의도(물론, 전작 역시 상업적인 기획의도 반영된 것은 사실이나 애초에 시작 자체는 점보트3와 다이탄3을 히트시킨 토미노 감독과 스탭들이 이번에는 자기가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게 해달라는 요구에 의해 시작된 작품이었음)와 주위의 기대를 잔뜩 짊어진 체 샤아는 다시금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리얼로봇물, 아니 일본 로봇 만화영화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또 하나의 전설 '기동전사 Z 건담(1985)(이하 제타 건담)'으로 말입니다.

훨씬 더 세련된 모습으로 돌아온 제타 건다의 샤아. 당시 천재 애니메이터였던 우메즈 야스오미가 그린 오프닝의 샤아(좌측 상단)는 본편을 몇 단계나 상회하는 최강의 퀄리티를 보여주었었다. ⓒ SUNRISE/SOTSU AGENCY

전편에 이어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디자인하고 기타즈메 히로유키 등이 그려낸 제타 건담의 샤아는 퍼스트 건담의 그와는 몇 가지 차이를 보였는데, 먼저 더이상 주인공과의 경쟁구도를 취하는 라이벌 캐릭터가 아닌, 주인공의 성장을 지켜보고 이끌어주는 '조력자와 관찰자의 역할'로 돌아섰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캐릭터의 역할 조정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제타 건담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선라이즈/반다이의 사업적인 기획의도에 의해 등 떠밀리듯이 제타 건담을 제작한([2], [4] 참조) 토미노 감독이, 이전 시리즈의 잔재였던 샤아를 과감히 주인공 까미유와의 라이벌 구도에서 배제함으로써 이 작품을 이전의 건담과는 다른 모습으로 끌고 나가려 했던 의지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샤아의 자리에는 제리드라는, 샤아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캐릭터를 등장시켜 '퍼스트 건담'의 과거, 즉 샤아와 아무로의 대결 구도에 집착하는 열성 팬들의 바람과는 다른 전개를 보여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아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는 사실은, 전 주인공이었던 아무로를 '까미유의 조력자 역할로 설정해도 별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로는 한참 후에야 연방군에 의해 무기력하게 연금되어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고, 샤아 아즈나블은 1화부터, 그것도 주인공보다 먼저 화면에 등장시킴으로써 건담에 있어서 그 어떤 캐릭터보다도 샤아의 영향력이 강력했음을 토미노 감독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었던 것입니다. (감독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말입니다.)

2005년 새롭게 그려진 극장판 '별을 계승하는 자'의 라스트 씬이었던 샤아와 아무로의 재회. 만화영화사에 길이 남을 전설의 두 사내의 만남은 올드팬들에게 있어서는 벅찬 감동 그 자체였다. ⓒ SUNRISE/SOTSU AGENCY

게다가 원래 아무로와 샤아의 대결 구도와 같은 전개를 보여주었어야 할 까미유와 제리드의 그것은 갈수록 관심을 잃어만 가더니, 급기야 까미유가 지구로 향한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제리드는 한동안 이야기에서 배제됨으로써, 마치 퍼스트 건담 방영 초기 가르마의 사후 한 동안 모습을 감추었던 샤아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리드는 결코 샤아처럼 제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지구에서 다시 만난 샤아와 아무로의 재회 장면은 제타 건담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감동을 선사한 씬이 되며, 팬들에게 제타 건담의 진정한 주인공은 역시 까미유가 아닌 아무로와 샤아가 되어야 한다는 이미지만 강렬하게 전하게 됩니다. (여담이지만, 결국 제리드는 까미유와의 라이벌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복수에 불타는 엑스트라 1'으로 전락되어 버린 체, 그 자리를 팹티머스 시로코라는 강렬한 카리스마의 캐릭터가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인공 까미유를 밀쳐 버리고 실질적인 'Z 건담'의 주인공으로서 팬들에게 인정 받으면서도 조력자 이상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던 역할 상의 한계로 인해, 샤아는 극중 내내 어중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로코와 하만 칸에게 실력으로 밀리면서 올드 타입(정확히 말하면 올드타입이라기보다는 뉴타입으로서의 각성이 아직은 덜 된 초보 뉴타입 정도랄까요)으로서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점이나, 지도자와 야전 지휘관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체 어정쩡한 위치에 머물렀던 그의 역량(이것이 감독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최종화에서 하만 칸의 큐베레이에게 맥없이 무너지는 그의 백식을 보며 열성 팬들은 분통을 터뜨렸고, 이어지는 충격의 결말은 한동안 많은 팬들을 패닉 상태로 몰고 갈 정도였으니까요. 굳이 비교하자면, 에반게리온 TV 시리즈의 결말과 같은 허무감이라고나 할까요. 에바의 마지막을 통해 안노 감독이 '오타쿠들이여, 현실로 돌아오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것처럼 토미노 감독 역시 카미유의 정신붕괴와 샤아의 실종을 통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리듯이 만들어야 했던 제타 건담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처참한 심경을 말하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샤아는 더이상 토미노/야스히코 만의 샤아가 아니었던 것이고, Z 건담을 통해 모든 것을 종결지으려 했던 토미노 감독 역시 다시금 반다이에 떠밀려 '기동전사 ZZ 건담(1986)'을 제작해야 하는 현실에 몰려야 했던 것입니다. 
 


붉은 혜성의 사후


'기동전사 ZZ 건담'의 실패, 그리고 반다이의 계속적인 건담 시리즈의 제작요구, 더이상 후속작을 거부해도 피할 수 없는 챗바퀴 속에 있음을 알게 된 토미노 감독은, 결국 모든 팬들의 염원일지도 모르는 숙명의 대결을 통해 완벽한 건담의 종결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아무로와 샤아의 재대결을 그린 '기동전사 건담 - 역습의 샤아(1988)'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토미노 감독이 팬들의 강렬한 염원 속에서도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끝끝내 샤아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건담, 아니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자 했던 기존의 노선에서 물러나, 오히려 전면적으로 샤아와 아무로의 재대결이라는 팬들의 바람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이제 더이상의 건담은 없기를 바라는 일종의 배수의 진을 치고 만든 작품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이제는 성숙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영원한 에이스 아무로와 함께, '퍼스트 건담'의 철가면과, 'Z 건담'의 선글라스를 모두 벗어 버리고 온전한 맨얼굴로 팬들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네오지온의 총수 샤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샤아의 마지막 모습은 기타즈메 히로유키가 새롭게 그려낸 세련되어진 그 외모만큼이나 세련되지는 못했다. ⓒ SUNRISE/SOTSU AGENCY

그러나, 토미노 감독은 결코 팬들의 구미에 맞는 전개를 선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로는 무난했었으나) 어느 한 여성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한 체 나나이와 퀘스, 그리고 죽은 라라아 사이에서 갈등했던 우유부단함, 30대의 나이에 10대의 퀘스의 마음을 농락했던(그것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지라도) 무책임함, 결국 아무로와의 제대로 된 승부도 내지 못한 체 허망하게 탈출포트 째로 아무로의 뉴건담에게 사로잡히는 무력함 등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이전의 샤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네오 지온의 총수라는, 이제까지의 그의 직책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자신이 지구로의 추락을 명했던 인공구조물 액시즈의 벽면에 쳐박힌 체, 액시즈를 막으려는 아무로와 많은 이들의 필사의 노력을 바라보면서, 샤아는 결국 만화영화 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토미노 감독과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창조한 페르소나와 같은 인물, 수많은 열성 팬들을 양산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동시에 지속적인 수익을 바랬던 반다이의 끊임없는 염원에 의해 창조자였던 그들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세기의 캐릭터 샤아는 결국, 팬들의 기대와 토미노 감독의 방황과 갈등 사이에서 그 역시 방황을 거듭하며 영욕의 10년(1979년 퍼스트 건담부터 1988년 역습의 샤아까지)을 끝맺게 됩니다.

아나벨 가토(건담 0083), 젝스 마키스(건담 윙), 라우 르 크루제(시드), 네오 노아로크(시드 데스티니). 좌측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 SUNRISE/SOTSU AGENCY

샤아의 죽음과 함께 리얼로봇물은 새로운 신시대를 향했을까요? 더이상 팬들, 아니 반다이는 건담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건담이 낳은 최고의 영웅, 일본 만화영화사에 길이 남을 한 사내의 죽음조차도 건담의 분열과 재생산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후는 우리도 익히 알고 있듯이 수많은 건담들이 그의 주검 위에서 다시금 새로운 샤아의 탄생을 바라며, 한없이 종영과 방영을 거듭하기 시작합니다. 반다이가 포기하지 않는 한 건담은 앞으로도 계속될지도 모릅겠군요. 그리고 그런 계속된 건담 시리즈의 속에서 여전히 샤아를 꿈꾸는 사내들의 등장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혹자는 샤아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어 철가면을 쓰고 등장하기도 했고, 혹자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보이며 다른 길을 걸어가기도 했지만, 그들은 모두 샤아의 후예, 그리고 복제들인 것입니다. (실제 토미노 요시유키의 소설 '가이아 기어'에는 그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복제인간 아프란시아 샤아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1] 참조)

샤아는 건담 시리즈 뿐만 아니라 많은 로봇물, 아니 일본 만화영화에서 하나의 정형화된 캐릭터 구도를 제시했습니다. '퍼스트 건담'에서 보여주었던, 주인공의 그림자가 아닌 주인공과 경쟁하는 라이벌로서 또 하나의 주인공, 그리고 'Z 건담'에서 보여주었던, 주인공을 이끌어 주는 조력자이자 선배로서의 완성된 인격체. 그리고, 그런 위치와 실력에 필적하는 완벽한 미남자라는 정형화된 외모까지도 말입니다. 비록, 철가면을, 선글라스를, 붉은 옷을 입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현재 일본 만화영화의 수많은 캐릭터들은 샤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덕분에 근래에 들어 그런 캐릭터 만큼 식상한 캐릭터는 없을 정도이지만 말입니다.)

온다 나오유키가 다시 그린 2005년의 샤아와 그의 애기 백식.

비록 로봇장르가 몰락하고 건담이 지루한 재생산을 반복하더라도, 그와 같은 캐릭터가 이젠 너무도 많아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더라도, 통상의 3배의 속도로 팬들에게 다가왔던 그 별명 그대로 그가 붉은 혜성처럼 강렬한 잔상을 우리에게 남겨놓았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겁니다.


그리고...

2005년 샤
아는 토미노 감독이 새롭게 재해석한 '기동전사 Z 건담 극장판 3부작(2005~2006)'을 통해 다시금 예전보다 더 세련된 모습으로 우리곁을 찾아 왔습니다. 온다 나오유키(마계도시, 간츠, 에르고 프록시, 블라스레이터의 캐릭터 디자이너)가 새롭게 그려낸 21세기의 샤아(물론, 무라세 슈코 등이 작화에 참여하면서 많은 캐릭터들이 동글동글한 동안으로 변해버려 기존 팬들이 위화감을 느끼기는 했지만)는 야스히코가 디자인하고 키타즈메가 그려냈던 20세기의 샤아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누적 관객 800만명이라는 히트를 기록할 정도로 건재함을 과시한 것입니다.



<참고 포스트>

[1] 샤아 아즈나블(캬스발 렘 다이쿤) by 니힐리스트, ARE YOU READY FOR GUNDAM
[2] 기동전사 Z 건담 by 니힐리스트, ARE YOU READY FOR GUNDAM
[3] 슈퍼로봇 이야기 1 <용자 라이딘> by Kewell, Kewell's Factory about Something
[4] 거대로봇 연구서설 - Z 건담편 1 by 백금기사, 백금기사의 舊 연구소
[5] 거대로봇 연구서설 - 역습의 샤아편 by 백금기사, 백금기사의 舊 연구소
[6] 베스트 아니메 (스틸샷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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