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s/Book Cafe 2012.06.18 09:00

             

부끄러운 역사도 기록하고 되새길 때 비로소 훌륭한 지침이 된다.


문 중에서 무엇이 으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학입시에 편중된 한국의 교육세테를 감안하면 국어, 영어, 수학인걸까요. 하이 테크놀로지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 과학과 수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여겨야 할까요. 글로벌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경제학과 경영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할까요. 아니면 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본질적인 탐구를 위해서 철학을 맨 앞머리에 두어야 할까요.

학문에 서열을 두는 것은 사실 어리석은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으뜸으로 삼았으면 하는 학문이 무엇이냐고 제게 물으신다면 저는 주저없이 역사학을 꼽고 싶습니다. 인류가 걸어온 발자취, 한 나라의 흥망성쇄, 한 조직의 성공신화 혹은 실패담, 한 인간이 걸어온 삶의 발자취, 하나의 학문 또는 예술이 이룩해온 것들 ... 이 모두를 기록하는 역사는 모든 분야에서 만들어질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기록입니다. 이 기록을 통해 인류는 수많은 노하우를 축적하여 지금의 문명을 이룩할 수가 있었습니다.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혹은 역사를 잊어버렸다면 인류의 문명은 분명히 지금보다 수세기는 후퇴되어 있었을 겁니다. 

'한국 슈퍼로봇 열전'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짧은 지식으로 무려 역사학의 의의를 주절거린 것은, 바로 한국 만화영화에는 한국 만화영화사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의미있는 시도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1998년 만화영화 채널 투니버스에서 방영했던 '한국 만화영화 40년사'는 한국 근대사 만큼 많은 굴곡을 짊어져야 했던 한국 만화영화의 역사를 최초로 다룬 방송으로, 한국 만화영화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남긴 다큐멘터리 방송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시도와 결과물이 다른 학문이나 다른 대중예술 장르와 비교하여 수적으로 너무 열세라는 것입니다. 소위 '흑역사'로 치부되어진 한국 만화영화의 이야기를 용기있게 꺼내는 이들은 안타깝게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 포스팅에서 다룰 페니웨이 저, lennono 일러스트의 한국 슈퍼로봇 열전은 그래서 그 가치가 더더욱 빛이 납니다. 남들이 좀처럼 시도하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한국 만화영화사라는 점에서 이 책은 그 발간 자체만으로 큰 의의가 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흑역사로 치부하는 한국 만화영화사는 군사독재와 냉전시대라는 어두운 한국의 근대사와 그 발자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시대와, 열악한 대중문화관을 갖고 있던 시대 속에서 고군분투한 그 시절 애니메이터들의 애환도 같이 그 속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책은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객관적인 시점이 이 책의 두번째 의의이기도 합니다.


저자인 페니웨이님은 이 객관적인 이야기를 위해서 만화영화 책으로서는 보기 드문 치밀한 사전조사와 자료 수집을 선행했습니다. 저널리즘의 기본적인 자세를 지켰다는 점에서 이는 높이 평가할만한 일입니다. 그 결과 이 책은 과거의 한국 만화영화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슈퍼로봇들을 열거하고 이 추억을 아름답게 부풀리기만 하는 자의식 가득한 책과는 태생부터 다릅니다. 한국 로봇만화영화에서 저질러졌던 표절과 도용의 증거, 그리고 이 작품이 보여주었던 독창적인 부분을 저자는 작품마다 최대한 자세하게 짚어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이 작품이 생겨난 시기의 사회적인 상황을 설명해주는 저자의 스토리텔링은 한 분야의 역사 이야기로서는 최고의 구성입니다. 

또한, 부연적인 설명을 위해 각 페이지마다 삽입되는 자세한 주석, 그 시절의 신문광고용 포스터, 대본 이미지, 표절했던 일본 아니메 포스터와 같은 자세한 사진들의 게재는 독자들에게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의 사실성을 뒷받침하는 멋진 장치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어린아이들의 전유물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힌 우리들에게 만화영화에 대한 역사서도 이렇게 쓰면 다른 분야의 역사서 못지 않음을 한국 슈퍼로봇 열전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치밀한 조사와 출처가 분명한 인용, 그리고 사진들은 이 책의 세번째 의의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만화영화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한국 만화영화를 다룰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글을 쓰기 위한 각종 자료들이 턱없이 부족함을 알고 중도에 중단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의 이 치밀한 자료수집과 조사가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네요.)


lennono님의 일러스트는 이 책에 발견할 수 있는 또다른 매력거리입니다. 비록 표절이라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의 슈퍼로봇들이지만, lennono님의 현대적인 재해석으로 그려진 일러스트들은 한국 슈퍼로봇 열전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심볼입니다. 과거의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현재 우리가 나아가는 길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자는 이 책의 취지에 맡게 과거의 디자인 표절 혹은 도용의 흔적을 그대로 재현하되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비록 표절 논란에 휘말린 로봇들이지만 이 일러스트를 보고 있자니 잠시 추억에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랄까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 끝에 그려진 이 한장의 일러스트는 마치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현실에 쓰라린 마음을 달래는 휴게소와도 같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지만,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저는 과거 한국 로봇만화영화를 만들어온 애니메이터들에게 동정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당시의 한국은 요즘과 비교하자면 민주화 항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아프리카 또는 중동의 군사독재 국가들과 별 다를바 없었던 때였습니다. 군인이 대통령이 되고 헌법을 뜯어고쳐가면서 장기집권을 시도했으며, 두번째 군사정권의 대통령은 부정축재와 시민학살이라는 파렴치한 만행을 저질렀던 인물입니다. 게다가 1970~80년대는 지금처럼 세계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인터넷으로 가까워진 시대가 아닙니다. 미국의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되기 위해서는 몇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고, 일본의 대중문화는 완벽하게 수입이 금지된 체 일부 방송사가 한국판으로 둔갑시켜 아무런 언급도 없이 버젓이 공중파 방송에 올려놓던 시절입니다. 당연히 대중문화에 대한 수준은 낮았고, 디자인에 대한 인식은 전혀 없었으며, 이를 위한 전문 인력이 사회전반에 걸쳐 전무했었구요.

정부의 통제와 감시 속에서 체계적인 능력없이 무작정 뛰어든 한국 만화영화계에 있어서 표절과 도용은 어찌보면 필연적인 수순이었을 겁니다. 일본의 경우 비록 2차 대전으로 패망했다고 하지만,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2차 대전 중 이미 세계 열강의 끝자리에 위치하던 나라였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군사독재 정권도 아니었으며, 부흥 후 만화영화를 중요한 프로젝트로 주도하는 등 만화영화에 대한 자세도 틀렸지요. 하지만, 한국은 조선제국의 몰락 이후 일본에 합병되어 사회, 정치, 문화 시스템이 모두 일본에 의해 통제되었고, 해방 후 6.25 전쟁으로 모든 사회 시스템이 파괴되면서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던 나라였습니다. 망했던 선진국의 부흥이 아닌, 아무것도 안가진 후진국의 부흥은 분명 출발점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안타깝게도 선진국의 제품과 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모방과 도용하면서 기술과 노하우를 축적해왔던 것입니다.


만화영화 역시 0에서 시작했습니다. 0에서 시작한 한국의 슈퍼로봇, 게다가 슈퍼로봇 자체가 일본 만화영화가 유일하게 만들어낸(게다가 그 일본조차도 체 10년이 안된) 개념이었고, 때마침 일본의 대중문화는 한국에서 수입이 철저히 금지되었으며, 여기에 인터넷이 아닌 편지와 전보가 일상이던 당시를 감안한다면, 저 표절과 도용은 파렴치한 상술, 도덕적 해이보다는 저작권에 대한 무지, 디자인 능력의 전무, 인력과 시간의 절대적인 부족이 더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비록 책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기형적인 완구 스폰서 시스템이 80년대 한국 로봇 만화영화의 제작 시스템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도를 넘은 표절작과 졸작들의 범람으로 한국 만화영화가 스스로 공멸을 불러왔지만, 현재의 결과적인 관점만으로 당시의 역사를 모조리 평가절하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자세는 아닐 겁니다. 우리의 잘못에 대해 우리는 지나치게 차갑고 냉정한 것은 아닐까요. 이는 마치 죄많은 부모를 냉정하게 외면하는 자식들의 모습처럼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합니다. 70년대에서부터 21세기까지 한국사회가 너무도 가파르게 성장하고 시스템이 바뀌면서 벌어진 엄청난 세대간 인식과 가치관의 차이는 우리 만화영화사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국 슈퍼로봇 열전은 그 의의가 남다릅니다. 부디 이를 기점으로 한국 만화영화사를 제대로 바라보고 평가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과거 이현세 화백 원작의 '아마게돈'이 극장 만화영화로 만들어 졌으나 흥행에 참패했을 때, 제작진들은 그 실패가 후대에도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과정 전반에 걸친 이야기를 하나의 백서로 제작했다고 합니다(<올드보이>가 탄생하기까지, <올드보이 BOOK>, 씨네21). 실패를 되돌아보고 이를 기록하여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을 줄이는 작업, 즉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부디 이 책의 가치가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어졌으면 하는 바람이고,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한국에서도 독창적인 로봇 만화영화, 혹은 SF 만화영화가 만들어져 대중들에게 정당한 인정을 받는 날이 오기를 그려봅니다. 


※ 포스트에 사용된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해당권리는 ⓒ 페니웨이 · 한스미디어에게 있습니다.



한국 슈퍼 로봇 열전 (초판 한정: 대형 브로마이드 + SD캐릭터 스티커 증정) - 10점
페니웨이 지음, lennono 그림/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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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엘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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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댓글입니다

    2012.06.18 10:12 [ ADDR : EDIT/ DEL : REPLY ]
  2. +_+ 페니웨이님이 기뻐하실 듯..ㅠㅠ

    2012.06.18 20:0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3. 볼쇼이

    예전 같았으면 저도 아마 이 책을 샀을 겁니다.

    요즘은 만원 한 장도 경제적인 여유가 너무 없어요. :(

    2012.06.18 21:0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4. 글쎄요

    어린시절에 다 본 작품들이긴 하지만..........솔직히 말해서 부끄러운 흑역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로봇은 물론이거니와 캐릭터들 마저 일본 만화에서 짜집기 식으로 뻬껴댔으니 과연 이런 책을 낼만한 가치가 있는건지는 모르겠네요. 그냥 인터넷에서 B급 문화로 즐기면 몰라도 너무 과한 작업을 하신듯.

    2012.06.20 15:44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글쎄요... 과한 작업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과거 사실을 기록한다는 것은 필요한 일이랍니다. 그것이 부끄러운 실패담일지라도 말이죠.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모두 베낀 작품들 밖에 없어서 부끄럽다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이 더 의미있지 않을까요. 나중에 혹시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 만화영화 표절의 역사라는 식으로 글을 쓴 걸 본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우리의 잘못은 우리 스스로 찾아내고 반성하고 복기하는 것이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

      2012.06.20 17:01 신고 [ ADDR : EDIT/ DEL ]
  5. 세잎클로버

    음... 솔직히 어떻게 저게 한국 슈퍼로봇이 될 수 있죠?? 태권V빼곤(물론 이것도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전부 일본 로봇인데... 이 책의 내용은 본 적이 없어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책 제목은 문제가 많네요...

    2012.06.21 12:1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김형사

      솔직히 책도 안봤다면서 말 함부로 하시네요. 전부 일본로봇 아니구요, 한국 로봇이라고 할만한 것들도 제법 되요. 뭘 비판하려면 공부는 좀 하고 합시다. 알량한 지식가지고 나불대지 마시고요.

      2012.06.24 19:46 신고 [ ADDR : EDIT/ DEL ]
  6. scwzx7

    설사 결과물이 카피에 불과할지라도 뭔든 작품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창의적인 결과물은 갑작스럽게 나오는것이 아니에요.이런저런 실패작이나 카피작들을 통해서 단점을 반성하고 보다나은 창조적인 결과물을 만들수만 있다면 우리나라애니가 더욱 발전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2.06.21 14:4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7. 이렇게라도 나왔으니 우리에게는 다행이겠죠.

    누가 한번 한국 자동차 열전을 저렇게 정리해 준다면야...

    2012.06.26 09:4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자동차열전 만들면 거의 슈퍼로봇 열전에 버금가는 모방과 도용의 역사가 펼쳐지겠죠. ^^;

      2012.06.27 12:10 신고 [ ADDR : EDIT/ DEL ]
  8. 사실 한국 자동차 역사는 198~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기술도입, 녹다운 생산이 주류였다죠. ㅠㅠ

    2012.06.28 00:3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9. 사실 가장 안타까운게 시작은 카피일지언정 나름의 오리지널리티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태권V같은 경우는 한일 양국 통틀어 최초로 파일럿의 움직임이 로봇에 반영되는 모션캡쳐슈퍼로봇이었으니까요. 실제로 이 시스템은 그랑죠가 건담G등 80, 90년대에도 주류로 사용될 정도로 뛰어난 소재였는데;;;

    이러한 나름의 오리지널리티가 꾸준히 어어졌다면 지금 한국 슈퍼로봇의 위상이 이 정도는 아닐텐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잘 팔리는 부분만 너무 울궈먹었다니깐요!

    2012.06.28 14:3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네, 책에도 써있는데 완구스폰서 시스템을 한국에 들여와 로컬라이징하면서 표절 문제가 좀 더 노골적이고 상업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죠. 만화영화에 대한 기반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비즈니스 모델만 적용한게 한국 만화영화에 큰 패착중 하나가 된 것 같아요. ㅠㅠ

      2012.06.29 09:07 신고 [ ADDR : EDIT/ DEL ]
  10. 어찌되었던 표절은 표절인거...

    그래도 책은좋네요 국내메카닉의 정리는보기힘든데

    아쉬운건 목차에 라젠카. 해모수등이 없군요

    2012.06.30 11:5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네, 분량상 라젠카, 해모수 등이 빠졌다고 하시더군요. 혹시나 이 책이 잘 팔려서 2권이 기획된다면, 그때 라젠카나 해모수가 등장할 수 있을 듯 ^^;

      2012.07.01 08:51 신고 [ ADDR : EDIT/ DEL ]